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버지 이삭의 집으로 향하는 야곱에게 있어서 아무래도 마음에 가장 걸리는 것은 바로 형 에서였습니다. 자신이 20년 동안이나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하여 살아야했던 원인이 바로 형 에서와의 사이의 사건 때문이었기에 아직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형 에서를 만난다는 것이 야곱으로서는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지요.
그래서 나름대로는 선(善) 가운데 방법을 동원하여 형의 마음을 풀어보고자 합니다. 자기보다 앞서 형 에서에게 사자(使者)들을 보내어 그들로 하여금 형의 마음을 풀어보려 했던 것이지요.
에서 앞에 자신을 ‘주의 종 야곱’이라 칭하며 한편으로는 자신을 지극히 낮춤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라반에게 붙여서 지금까지 있었다” 말함으로 어떻게든 형의 동정심을 자극해 보고자 합니다. 그러면서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 하며 형 에서에게 자신에 대한 감정을 풀고 은혜를 베풀어 달라 청하고 있지요.
이는 연단받기 이전의 야곱의 모습과 비교해 본다면 그가 연단을 통해 그래도 많이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모습입니다. 예전처럼 ‘자기’가 강하게 살아있는 야곱이었다면 이러한 상황에서도 이처럼 자신을 낮추며 먼저 숙이고 들어간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지요. 어떻게든 다시 한번 간교한 꾀를 써서 이 위기의 상황을 넘겨볼까 하는 생각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 20년의 연단을 통해 ‘자기’라는 것이 그만큼 많이 깨어진 야곱이었기에 이처럼 형 에서 앞에 자신을 낮추며 선한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하고 있지요.
하지만 야곱이 이렇게 자신을 낮춘다고 해서 그것이 완전히 ‘자기’를 깨뜨리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의 분량에 이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름대로는 선하게 행한다 했지만 여전히 ‘자기’가 살아있는 모습이지요. 정말 마음 중심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형 에서 앞에 겸비하게 자신을 낮추어 에서의 마음에 맞추려 하기 보다는 당장은 이렇게 자신을 낮춰서라도 어떻게든 지금의 난처한 상황을 모면해 보고자 하는 마음이 더 컸던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에게 아직은 이러한 마음이 남아 있었기에 형 에서에게 보낸 사자들을 통해서도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가 없었지요.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깊은 마음을 아시기에 아직은 형 에서의 마음을 주관하여 풀어 주실 수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야곱이 만약 온전한 마음에서 행했다면 이를 기쁘게 보신 하나님께서는 잠 16:7에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는 말씀대로 얼마든지 에서의 마음을 주관하여 화목하게 만들어 주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그때가 아니었다는 말이지요. 오히려 돌아온 사자들로부터 들려오는 소식은 형 에서가 사백 인을 거느리고 야곱을 만나기 위해 오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야곱은 ‘필시 형이 나를 해치기 위해 지금 4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데리고 나에게 오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지요. 상황이 이렇게 되자 심히 두렵고 답답해진 야곱은 또다시 자기 생각과 방법을 동원하게 됩니다.
7-8절에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 한 종자와 양과 소와 약대를 두 떼로 나누고 가로되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 했던 것입니다. 자기의 소유를 다 잃을 수는 없으니 이렇게라도 해서 반이라도 지켜보고자 했던 것이지요. 또한 자신의 생명도 구해보고자 했던 것이고요.
성도 여러분, 야곱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긴 것이 아니었기에 이처럼 급박한 상황이 되자 결국에는 자기적인 방법을 동원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사람이 한번 자기적인 방법에 의존하다 보면 다음에 문제가 생겼을 때도 또 다시 자기 생각과 방법을 동원하게 되지요.
세상 방법에 의존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번 세상의 방법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계속해서 세상 방법을 찾기 마련이지요. 그리고 이렇게 세상 방법을 동원하여 해보는 데까지 해보다가 그래도 안 되니까 그때 가서야 하나님 앞에 나와 “믿습니다” 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이것은 믿음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처음부터 믿음으로 하나님께만 의뢰한 것이 아니었기에 지금 와서 마음에 믿어지는 믿음이 쉽게 주어질 리도 없지요.
또한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 의지한다고 했다가 안 되면 또 다시 세상을 의지할 것이기 때문에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역사해주실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처음부터 믿음으로 하나님께만 의뢰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중요하지요.
야곱도 만약 하나님만을 신실하게 의지했다면 지금의 상황에서 당연히 먼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아직도 자기 생각과 자기적인 방법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100% 하나님 앞에 의지하지 못하고 자기 나름대로 방법을 동원해가고 있지요. 지금 이대로 형 에서를 만났다가는 모두가 살아남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어떻게든 자기 소유를 지켜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자기의 모든 소유를 두 떼로 나누었던 것입니다. 형 에서가 한 떼를 치면 다른 한 떼는 그 틈을 타서 피하려는 의도였지요. 야곱은 일단 이렇게 자기 나름대로 조치를 취한 다음에야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9-12절에 “야곱이 또 가로되 나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를 조금 이라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 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하옴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냄이니이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정녕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온전히 맡기는 기도라 할 수 없습니다. 이미 자기 나름대로 살 길을 찾기 위해 육적인 방법을 취해 놓은 다음에야 비로소 하나님을 찾고 있지요. 야곱은 만약 자신이 취해놓은 방법이 자기 보기에 완벽해 보였고 자신의 계획대로 순조롭게 되어질 것 같았다면 이처럼 하나님을 의뢰하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나름대로 조치를 취해 놓은 후에도 여전히 마음에 두려움이 임하게 되니 그제서야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된 것이었지요. 그러면서 예전에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 야곱이 올린 기도도 하나님 앞에 합당한 기도는 아니었지요. 야곱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예전에 나에게 이렇게 축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사오니 지금 그 기도를 보장하사 자신을 형 에서로부터 지켜주시라’는 것인데 이는 결국 자기 입장만을 생각한 기도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에 그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는 것은 옳지만 무조건 ‘예전에 축복하신다 약속하셨으니 지금 그대로 이루어 달라’는 식의 기도는 합당한 기도라 할 수 없지요. 자신이 하나님의 보장을 받기에 합당한 모습으로 변화되기 위해 노력하면서 ‘약속대로 이루어 달라’ 기도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만약 누구든지 일단 한번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의 언약을 받기만 하면 그것으로 다 된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면 과연 어떤 결과가 일어나겠습니까? 아마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 축복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니 지금 그 약속대로 축복주세요’ 이렇게 기도만 하고 있겠지요.
그러나 성경 상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이 놀라운 축복의 언약을 받았다 해서 그 즉시로 축복이 임한 것이 아니었으며 결국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온전히 변화되어 나왔을 때 축복의 언약도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지예정하시는 가운데 축복의 언약을 주신 것이기 때문에 축복을 받기에 합당한 그릇이 되어야 하는 것이며, 그 언약이 이루어지기까지 계속해서 ‘이루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지금의 상황에서 야곱도 무조건 예전에 주신 언약을 떠올리며 이루어 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저에게 주신 언약대로 온전히 이루어질 것을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그 언약대로 이루어지기 위해 지금 저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이고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세요” 이렇게 기도해야 옳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자기 뜻대로 기도했던 것이고 기도를 올리고 나서도 여전히 자기 방법대로 일을 이루어 나가지요. 앞서 사자들을 보내어 에서의 마음을 풀어보려 했던 일이 뜻한 대로 안 되자 이번에는 예물과 함께 종들을 보내면서 다시 한 번 겸비한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잠 21:14에 “은밀한 선물은 노를 쉬게 하고 품의 뇌물은 맹렬한 분을 그치게 하느니라”는 말씀과 같이 육의 사람의 마음을 잘 아는 야곱은 형 에서의 마음을 흡족케 할 만한 예물을 택하여 함께 보내었던 것이지요.
14-15절에 보면 “암염소가 이백이요 수염소가 이십이요 암양이 이백이요 수양이 이십이요 젖 나는 약대 삼십과 그 새끼요 암소가 사십이요 황소가 열이요 암나귀가 이십이요 그 새끼 나귀가 열이라” 했습니다. 나름대로 ‘어느 정도의 예물이면 형 에서의 마음을 풀 수 있을까?’를 생각하여 이 정도의 예물을 택한 것이었지요.
우리는 여기서 야곱의 계산적인 면을 다시 한 번 볼 수가 있습니다. 야곱은 자신의 생명이 걸린 상황에서도 이처럼 끝까지 계산적으로 돌아가고 있었지요. 야곱이 준비한 예물이 일반인들이 볼 때는 결코 적은 예물이 아니었지만 야곱의 전체 소유에 비하면 많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즉 야곱은 이런 위태한 상황에서도 결코 자신의 소유를 다 주면서까지 형 에서에게 굽히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지요.
그러나 마 16:26에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는 말씀처럼 만약 형 에서에게 목숨을 잃는다면 야곱이 가진 그 많은 재산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설령 자신의 소유를 다 준다 해도 그렇게 해서 형 에서의 마음을 풀 수만 있다면 차라리 모든 소유를 다 예물로 주는 것이 낫지요. 하지만 야곱은 철저히 계산적이었기에 이러한 순간에서도 어느 정도 예물을 주면 형 에서의 마음을 녹일 수 있을까를 생각하여 그 선(線)까지만 내어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야곱은 아직 자신을 다 내어줄 수 있을 만큼 낮아지고 겸비해져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이 어려운 처지에 처하게 되면 당장에는 자신을 낮추며 겸비한 태도로 나올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온전히 ‘자기’가 깨어지기 전에는 결국 한계가 있기 마련이지요. 자신이 생각할 때 ‘이 정도면 되겠다’ 싶은 선까지만 자신을 낮추고 양보하는 것이지 만약 그 이상을 내어 주어야 한다고 하면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예를 들어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다른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했을 때 일단은 자신이 잘못한 것이기 때문에 먼저 상대의 감정을 풀고자 노력을 하게 되지요. 그런데 그렇게 한 번, 두 번 계속 풀려고 노력해도 여전히 상대가 감정을 풀지 않으면 자신이 생각하는 선(線)까지만 노력해 보다가 결국 포기하고 마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내가 이만큼 했는데도 상대가 감정을 풀지 않으니 이제부터는 모든 것이 상대의 잘못이다’하며 자신은 할 바를 다했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처음에는 자신이 굽히고 들어가서라도 상대를 풀어 보려는 의도였는데 자신이 생각하는 정도를 넘어서 굽히려다 보니 오히려 자존심도 상하고 감정이 상한 것입니다. 아직도 ‘자기’가 살아있다는 증거이지요.
물론 이때 상대편도 적당한 선에서 사과를 받아주고 감정을 풀었으면 좋았겠지만 서로가 생각하는 입장과 정도의 차이가 있다 보면 결국 서로 간의 감정을 풀지 못한 채 감정의 골은 더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쪽이 먼저 완전히 ‘자기’를 깨뜨리고 무조건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는 마음이 된다면 아무리 깊은 감정의 골이라도 풀리게 되지요. 야곱도 바로 처음부터 이런 마음이 되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라도 형 에서와 화평하고자 했다면 에서의 마음도 움직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아직 그러한 수준이 아니었지요. 하지만 예전과 비교하면 야곱에게 참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전의 야곱이라고 하면 이런 상황에서도 자기 입장만을 생각하며 ‘내가 장자권도 정당한 방법으로 가져온 것이고, 장자로서의 축복기도도 장자권이 있는 내가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내가 형 때문에 20년이나 타향살이까지 했으니 이제는 마음을 풀고 나를 받아들이라.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셔서 이렇게 큰 축복까지 나에게 주셨고 이제 그 중에 일부를 형에게 줄 테니 예전의 일들은 다 잊어버리자” 이와 같이 말할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연단을 거쳐 온 야곱은 이제 자기 입장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형의 입장도 생각하는 마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형 앞에 먼저 자신을 낮추며 이처럼 종들을 통해 예물까지 보내면서 “주의 종 야곱의 것이요 자기 주 에서에게로 보내는 예물이오며 야곱도 우리 뒤에 있나이다 하라” 말하지요. 그것도 한 차례만 이렇게 하도록 시킨 것이 아니라 떼를 세 떼로 나누어 보내면서 각각의 떼를 따라가는 사람들에게도 동일한 말을 하도록 시킵니다.
야곱의 치밀함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모습이지요. 한 번에 안 될 것까지 고려해서 2차, 3차의 대비책까지 강구해 놓은 것입니다. 분명히 선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 같고 하나님께도 의뢰하는 것 같은데,한편으로는 왠지 계속해서 자기적인 생각과 방법이 나오고 있지요.
성도 여러분, 야곱은 지금 자기 생각을 동원하는 방법과 하나님께 의뢰하는 방법 이 두 가지를 병행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본인은 자신이 생각을 동원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지는 못하겠지만 야곱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의뢰한다 하면서도 여전히 자기 생각 가운데 방법을 동원하고 있지요.
물론 야곱이 형 에서에게 보내는 종들과 예물을 세 떼로 나누어 보낸 것은 지혜로운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의 이러한 행동을 자기적인 생각과 방법을 동원했다고 하는 것은 ‘그가 어떠한 마음으로 이렇게 했느냐’를 말씀드리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며 하나님의 선하신 뜻 가운데 지혜를 받은 것이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 가운데서 이러한 방법이 나왔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순종만 하던 아브라함도 이처럼 자기 나름대로의 생각을 동원했다가 그것이 철저히 깨어지는 계기가 있었지요.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 아브라함은 점점 남방으로 옮겨가던 중 기근을 피하여 애굽에까지 내려갑니다. 그런데 애굽의 사람들이 자신의 아내의 아리따움을 보고 혹여 자신을 죽이려 할지 모른다는 걱정에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에게 “누이라 하라” 시키지요. 나름대로는 이렇게 하는 것이 지혜라 생각했겠지만 이로 인해 아브라함은 오히려 아내를 빼앗기는 난감한 상황에 처하고 맙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상황은 해결되었고 아브라함은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자기 생각과 방법을 동원하는 것이 얼마나 헛된가를 철저히 깨달았지요. 그래서 이후로는 모든 것을 오직 하나님께만 의지하며 하나님의 방법대로 맡기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야곱도 바로 이러한 모습이 되기 위해 지금까지 연단을 받았던 것이고, 마침내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오게 되지요. 종들 편에 예물을 앞서 보낸 야곱은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 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강을 건너게 하고 자신은 홀로 남습니다.
그렇다면 야곱은 앞서 보낸 종들로부터 회신도 오기 전에 갑자기 왜 이렇게 한 것일까요? 이는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주관해 주신 것입니다. 야곱이 마침내 철저히 깨어지는 순간을 맞기 위한 준비가 필요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을 주관해 주심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야곱이 이처럼 자신보다 앞서 자기 아내와 자녀들까지도 강을 건넸다는 것은 이제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에서의 손에 맡기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좀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계산속에서 적당한 타협점을 찾으려 했던 야곱이 마침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있는 순간이지요.
이는 육적으로 볼 때 야곱의 상황이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장면입니다. 지금까지 그토록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지 못하던 야곱이 이처럼 절박한 상황이 되자 결국에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말았던 것입니다.
자기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상황까지는 계속해서 자기 생각과 방법이 나왔지만 이제 더 이상 자기 힘이나 능력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 다가오자 이런 모습이 나오더라는 말이지요.
하지만 야곱이 온전히 깨어지기 위해서는 아직 겪어야 하는 과정이 남아 있었습니다. 바로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하는 사건이지요. 그런데 이때 야곱이 씨름한 대상이 ‘하나님’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했다” 말씀하고 있지요.
아직 성결되지도 않은 야곱이 만약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여 씨름을 했다면 당연히 살아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때 야곱이 씨름을 한 것은 누구이며 야곱이 하나님과 직접 씨름을 한 것이 아님에도 왜 ‘하나님과 씨름했다’고 말하기도 하는 것일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형 에서가 자신을 죽이기 위해 강 건너편에 진을 치고 있는 상황에서 야곱이 그날 밤에 편히 잠을 잘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고 형 에서의 손에 맡긴다는 의미로 자신의 모든 가족과 소유를 강 건너편으로 보내고 자신은 홀로 남아 있으면서도 그 마음이 편할 리가 없지요.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하나님 앞에 온전히 깨어져서 하나님께만 의지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야곱은 많은 생각을 하게 되지요. 자신이 집을 떠나 올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상황에서부터 라반의 집에 거하는 동안에 있었던 일들 그리고 지금 형 에서를 눈 앞에 두고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기까지 야곱의 머릿속에는 지난 세월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어디에도 의지할 곳 없이 홀로 남겨진 절박한 상황이 되어서야 야곱은 지난날들을 돌아보며 자신의 모습을 되짚어 볼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면서 자신의 지난 모습들도 깨달아 보게 되고 지금 왜 이런 상황이 올 수밖에 없었는지도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야곱은 자신을 돌아볼 기회도 없이 하나님과 씨름하는 상황을 맞게 되었겠지만 바로 이러한 시간을 통해 자신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기에 야곱은 마침내 철저히 깨어질 수가 있었지요.
이는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시험이나 연단이 왔을 때 그것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를 갖는 경우가 많지요. 그동안 잘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시험이나 문제를 만나게 되니 자신의 신앙을 다시 한 번 점검하고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되더라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담이 되었던 것을 발견하기도 하고 첫사랑의 뜨거움을 잃었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며 미지근해진 자신의 신앙을 깨닫게 되는 귀한 기회를 얻게 되지요.
야곱도 그동안 자기 나름대로는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형통하게 인도받아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특별히 자신을 돌아보고 문제점을 발견하려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제 긴박한 상황이 다가오자 이처럼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마침내 시 37:5에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리라”는 말씀대로 철저히 자신을 깨뜨리고 하나님께만 의지하는 법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야곱은 하나님께만 의지하는 것이 자신의 살 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에 하나님과 씨름을 할 때 환도 뼈가 위골되면서 까지도 생명을 다해 하나님 앞에 끝까지 매달리는 것을 볼 수 있지요. 바로 그동안의 연단이 값진 열매로 나와지는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연단을 통해 ‘나’, ‘자기’라는 것이 얼마나 무익하고 헛되며 가치 없는 것인지를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나’를 철저히 깨뜨리고 하나님께만 의지하는 것이 바로 축복의 길이라는 사실입니다.
요 15:5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는 말씀과 같이 우리는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잘 깨달으셔서 아버지 하나님께만 의뢰하는 법을 터득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내 생각, 내 이론, 내 지식, 내 힘과 능력 등, 내가 하고자 했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방법대로만 인도받아 나가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잠 16:3에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는 말씀대로 여러분의 범사에 아버지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자가 되셔서 여러분의 경영하는 모든 일들이 아름답게 이루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끝)
2005-06-11 오전 3:54:10 Posted
2015-09-24 오전 9:47:00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