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잠 19:21에 보면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 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이룸에 있어서 여러 가지 계획을 가지고 행하며 또 그 결과에 대해 나름대로의 예측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사람의 지혜와 비할 수 없고 하나님은 사람이 능히 측량 못할 방법으로 그 섭리를 이뤄 가십니다. 현실적으로는 사람의 생각과 다른 일들이 벌어지는 것 같아도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서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의 경우도 그러했지요. 야곱이 태어날 때부터 이미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에서보다 큰 자가 될 것이며 야곱의 후손들이 에서의 후손보다 클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예언대로 야곱은 에서의 장자권도 얻었고 아버지 이삭의 축복기도도 받았지요.
그러나 이후로 되어지는 일들은 야곱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전개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 대해 주신 축복의 말씀은 결코 변함이 없었지만 그 말씀은 야곱이 생각하고 계획한 방법대로 성취되어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대로 성취되어갔던 것이지요.
야곱이 축복 기도를 받는 순간부터 그에게 축복이 임하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때부터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기 위한 섭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곧 20년 동안이나 타향살이를 하며 ‘자기’가 부서지고 깨어지는 과정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처럼 여러분이 영으로 들어와 축복을 받고자 할 때도 본성 속에 있는 악의 모양까지 발견하여 온전히 벗어내기 위한 연단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보기에 ‘나는 착하고 믿음이 있고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것처럼 보인다’ 해서 스스로가 ‘온전하다’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늘 자신을 발견하기에 힘써야 할 것이고 영으로 온전히 들어오기 전에는 작은 것 하나라도 진리에 위배되는 것을 용납하거나 받아들여서는 안 되지요.
또한 사람이 연단을 받을 당시에는 아무래도 낮아지고 겸비해지기 마련인데 잠시 겸비해진 당시의 그 모습만을 가지고 스스로 ‘이루었다’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높여주시고 인정해 주실 때도 변함없이 낮아지고 겸비한 모습일 때라야 진정 온전한 모습이라 할 수 있지요.
사람이 어느 정도 영으로 이루었다 해도 자칫 ‘내가 이제 이만큼 이루었다’ 하는 마음으로 인해 영적인 교만이 싹트게 되면 이때부터 오히려 영적인 성장이 정체될 뿐만 아니라 영의 문턱에서 뒤로 후퇴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지금 육이 많이 죽어지고 버려졌다 해도 조금의 육이라도 남아 있는 한은 결국 상황이 되어졌을 때 다시 육이 발동해 나올 수 있음을 알아야 하지요.
야곱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20년간의 연단을 겪으면서도 ‘자기’라는 것을 온전히 버린 것이 아니었기에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더 이상 라반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게 되자 그동안 눌러 놓았던 ‘자기적인 것’들이 다시 드러나고 말았던 것이지요.
그러나 야곱은 어차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선택받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섭리를 이루시기 위해 야곱이 온전히 ‘자기’를 깨뜨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쓰임받을 수 있도록 마침내 결정적인 연단의 시간을 허락하시지요. 야곱은 장차 어떤 상황을 맞게 될지 전혀 알지 못한 채 드디어 아버지 이삭이 있는 고향을 향해 갑니다.
그런데 이때 하나님께서는 장차 커다란 위기의 순간을 맞게 될 야곱에게 잠시 영의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역사를 보여 주십니다. 본문 1-2절에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 했지요.
바로 야곱의 영안을 잠시 열어 하나님의 사자들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야곱은 그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군대’라 표현하고 있지요. 그들은 바로 천사장 중에서 군대장관이라 할 수 있는 미가엘 천사장의 휘하에 있는 천사들로서 마치 군사와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기에 야곱은 그들을 하나님의 군대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처럼 하나님의 군대를 보내시고 야곱의 영안을 열어 그들을 보게 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야곱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그를 지키시며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알려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야곱이 우연히 그곳을 지나가던 하나님의 군대를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계획하심 속에서 하나님의 사자들을 보내셨으며 야곱으로 하여금 그들을 보게 하셨다는 말이지요.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큰 위기를 맞게 될 야곱에게 위로와 힘을 주시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군대를 보내주셨는지’ 그 의미는 깨닫지 못한 채 단지 자신이 하나님의 군대를 보았다는 사실 자체에만 의미를 두며 그 땅의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부릅니다.
성도 여러분, 그러면 하나님의 군대가 야곱의 앞에 나아간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는 과정에서는 항상 영계의 싸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경우도 하나님께서는 섭리 속에서 그에게 위기의 상황을 허락하셨지만 그렇다 해서 완전히 원수 마귀의 손에 내어주신 것이 아니지요.
현실적으로 볼 때는 마치 원수 마귀의 뜻대로 일이 되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 있다 해도 결국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지도록 하나님께서 역사해 가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영적 전쟁이 벌어지게 되는데 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이미 하나님의 군대를 보내신 것이지요.
야곱이 앞으로 만나게 될 위기 상황은 육의 눈으로 보기에는 사람 사이의 일입니다. 곧 야곱의 형인 에서와 야곱의 사이의 오랜 감정의 싸움이지요. 그러나 영의 시각으로 보면 이는 야곱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군대와 육의 사람들을 주관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려는 악한 영들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이룰 때나 기도의 응답을 받을 때도 이런 과정이 있게 되지요. 엡 6:12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하신 말씀대로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어 가는 과정은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의 영들과 싸워 이겨야 하는 영적 전쟁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다니엘도 큰 응답을 위해 기도를 시작했을 때 그 응답을 받기까지 21일 동안 영계의 싸움이 있었던 것이지요. 단 10:12-14 전반절에 “그가 내게 이르되 (곧 응답을 주러 온 천사가 이르되)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케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들으신바 되었으므로 내가 네 말로 인하여 왔느니라 그런데 바사국 군이 이십 일일 동안 나를 막았으므로 내가 거기 바사국 왕들과 함께 머물러 있더니 군장 중 하나 미가엘이 와서 나를 도와주므로 이제 내가 말일에 네 백성의 당할 일을 네게 깨닫게 하러 왔노라” 했지요. 다니엘이 끝까지 믿음으로 기도하였기에 다니엘을 돕는 하나님의 군대가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 왕하 6장에도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아람 왕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려 하는데 그 때마다 선지자 엘리사가 아람 왕의 계획을 미리 알고 이스라엘 왕에게 알려 주므로 번번이 아람 왕의 공격이 수포로 돌아갔지요. 이에 아람 왕은 이스라엘을 정복하려면 먼저 엘리사를 없애야겠다고 생각하고 엘리사가 있는 도단 성으로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어 성을 에워쌌습니다. 이 광경을 본 엘리사의 사환은 심히 두려워하며 엘리사에게 고했지만 엘리사는 전혀 놀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환을 위로하며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 했지요.
그리고 왕하 6:17에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했습니다. 육의 눈으로 보기에는 적의 군대 밖에 없었지만, 영의 눈으로 보면 엘리사를 지키기 위해 이미 많은 불말과 불병거를 포함한 하나님의 군대가 와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니 영감이 밝은 엘리사 선지자로서는 전혀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야곱은 단지 하나님의 군대를 보았을 뿐 어떤 대화를 서로 이룬 것도 아니며 그들이 자신과 어떤 연관이 있음도 알지 못함으로 단순히 스쳐지나간 것처럼 느꼈을 뿐입니다. 그런데 만약 야곱이 더 영적으로 깨어 있었고 그 마음에 아버지의 은혜가 더욱 임해 있었다면 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군대를 보여 주셨는지 그 의미를 깨달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에서를 만나러 갈 때도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군대를 보내 주셨으니 내가 두려울 것이 없다’ 하며 자신감을 가지고 에서를 마주 대할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야곱에게는 본 것에 대한 깨달음이 없었기에 단순히 본 것으로 그치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반면에 항상 하나님 앞에서 깨어 있었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행하셨을 때에 즉시 그에 대한 의미를 깨닫고 자신이 행할 바를 행한 것을 볼 수 있지요. 예를 들어 멜기세덱을 만났을 때나 소돔 성을 감찰하러 내려오신 하나님의 일행을 만났을 때도 아브라함은 그 분들이 누구신지를 즉시 알아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 상황 속에서 자신이 해야 할 바를 주관받아 정확히 행해 나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차이는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닮았고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느냐의 차이에서 옵니다. 하나님께서 똑같은 것을 보여 주셔도 깨달음의 깊이가 다르고 마음에서 느끼는 은혜가 달라지게 되지요. 하지만 아직은 온전히 하나님의 마음을 닮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다 해도 얼마나 영적으로 깨어 있고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있느냐에 따라 영적인 깨달음의 깊이가 달라지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해나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지요.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시거나 영적인 체험을 주셨을 때 어떤 사람은 그냥 듣고 본 것으로 그치지만 어떤 사람은 거기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깨달아 보려고 합니다.
물론 영적인 의미를 깨달았다 말하면서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여 임의로 해석해서는 안 되지요. 불같은 기도와 사심이 없는 상태에서 성령의 역사를 받아 나가야만이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은 자신이 일상 속에서 체험하는 작은 일 하나라도 소홀히 넘겨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려 합니다. “범사에 여호와를 인정하라”는 말씀처럼 왜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말을 듣게 하셨을까? 왜 이런 일을 겪게 하셨을까?”를 깨달아 보려고 하지요.
그리고 이렇게 성령의 역사 속에 깨달을 때는 자신을 발견하고 깨닫는 것이 낙심이나 두려움 또는 힘듦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평안 가운데 기쁨과 감사로 오게 됩니다. 또한 이처럼 성령의 역사를 받아 갈 때는 다른 사람의 간증을 들을 때도 다른 사람이 해주는 권면이나 지적을 들을 때도, 마음에서부터 자신의 말씀으로 받게 되므로 신속히 자신을 발견하고 변화시켜 나가게 되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알려 주고자 하실 때 깨우침을 받는가, 받지 못하는가의 차이점은 바로 그 사람이 영적으로 깨어 있느냐 그렇지 않으냐 하는 데서 생깁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을 때는 성령님의 역사 속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밝히 깨우치며 신속하게 영으로 달려갈 수가 있지요.
반면에 영적으로 잠들어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아무리 어떤 깨우침을 주시고 뜻과 섭리를 알려주시고자 해도 깨우치지 못한 채 육적인 신앙생활만을 해 나가게 됩니다. 늘 자신의 틀 속에서만 맴돌고 있는 것이지요.
또한 사람이 영적으로 깨어있지 못하게 되는 커다란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교만입니다. 특히 영적인 교만은 더 무섭습니다. 자신이 스스로 이루었다 생각하고 나도 알만큼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누구의 말도 들으려 하지 않게 되지요.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자신의 생각이 우선이 되고 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영의 세계를 보았다, 들었다.” 혹은 “나도 이만큼 영적인 것을 안다” 하면서 자신이 옳다고 고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은 항상 불같은 기도 속에 깨어있어서 늘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밝히 깨닫는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단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늘 자신을 점검하며 세미한 것 하나까지라도 발견하고 변화되어 가려는 마음 자세로 신앙 생활해 가신다면 여러분은 늘 깨어 있는 가운데아버지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맞는 신앙생활을 해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곱은 하나님께서 영안을 열어 하나님의 군대를 보여 주셨음에도 그 의미를 자신과 연관시켜 깨닫지 못했다 했습니다. 그러니 현실 앞에서 두려움을 떨쳐 버리지 못했고 계속해서 자신의 지혜와 능력에 의지해 나가려고만 하지요. 그러다 마침내 ‘자기’가 철저히 깨어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사실 이러한 결과를 놓고 볼 때는 하나님의 섭리대로 야곱이 깨어지기 위해서라도 야곱이 하나님의 군대를 본 이유에 대해 깨닫지를 못해야 했습니다. 그래야 끝까지 ‘자기’를 의지하며 나가다가 마침내 깨어지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아직은 ‘자기’가 살아있는 가운데 아버지 이삭을 만나러가던 야곱은 마음에 두려운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형 에서를 만날 일이 걱정되었지요. 사실 야곱이 그 오랜 세월동안 타향살이를 해야 했던 원인이 바로 형 에서와의 사이의 감정 문제였기에 아직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야곱으로서는 형 에서를 만난다는 것이 걱정되고 두려울 수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나름대로의 방법을 강구하지요. 자기보다 앞서 사자(使者)들을 보내므로 형의 마음을 풀어보고자 한 것입니다.
본문 3 -4절에 보면 “야곱이 세일 땅 에돔 들에 있는 형 에서에게로 사자들을 자기보다 앞서 보내며 그들에게 부탁하여 가로되 너희는 이같이 내 주 에서에게 고하라 주의 종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라반에게 붙여서 지금까지 있었사오며” 했지요.
이때 사자들에게 전하라고 하는 야곱의 말을 보면 야곱이 예전과는 많이 달라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에는 형인 에서를 존중하지도 않았고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의 약점을 간교하게 이용해서 장자권을 빼앗았었지요. 또 아버지를 속이고 에서가 받을 축복 기도까지 대신 받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에서에게 미안하게 여긴다거나 ‘내가 정말 형에게 잘못했구나 형의 입장에서는 노여워할 만도하다’ 이런 생각을 한 것도 아니었지요. ‘나는 정당하게 장자권을 산 것이고 아버지의 축복기도를 받은 것도 어머니가 시켜서 따랐을 뿐이지 내 잘못은 아니다 또 어차피 축복은 장자권을 가진 내가 받아야 마땅한 것이 아닌가?’ 이런 식으로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의 정당성만을 주장하려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니 야곱이 만약 예전의 모습 그대로 돌아왔다면 거대한 부자가 되어 돌아오는 야곱은 마치 자신이 개선장군이나 된 것처럼 큰 소리를 쳤을 것입니다. “내가 빈손으로 집을 떠났지만 이제 이렇게 큰 부를 이뤄서 돌아왔다” 하며 부모님께 자랑하려고 하고 형에게도 자신을 과시하려고 했겠지요. 또한 에서의 노여움이 풀리지 않은 것을 알아도 어찌하면 다시 간교한 꾀를 써서 에서의 노여움을 피해 볼까만을 생각했겠고요.
오늘 본문에서처럼 어떻게든 에서의 마음을 풀어서 서로 화평하고자 하는 마음은 생각하지도 못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많은 연단을 거친 야곱은 예전과는 달랐습니다. 자기가 떠나기 전에 있었던 일들을 생각해 보니 에서가 충분히 노여워할 만하다고 여겨졌고 이제는 어찌하든 그 마음을 풀어 화평을 이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물론 에서의 마음을 풀 수 있다는 확신은 없었지만 최대한 자신을 낮추며 방법을 찾고자 한 것입니다. 물론 모든 것을 하나님께 온전히 의뢰하지 못하고 아직도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기는 했지만, 그나마 이렇게 형 에서의 마음을 녹이려고 노력하는 이 정도만 해도 예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지요.
그러니 사자를 에서에게 보낼 때도 “내 주 에서에게 고하라” 했고 자신을 칭할 때는 “주의 종 야곱”이라 하여 에서를 높여 주며 자신을 철저히 낮추어 말합니다. 그러면서 “내가 라반에게 붙여서 지금까지 있었사오며”라고 전하라 했는데 이는 자기가 라반 밑에서 얼마나 고생을 했으며 얼마나 눈치를 보며 살았는지, 그래서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낮아졌는지를 드러내려는 의미에서 했던 말이지요.
일반적으로 사람이 누군가에 대해 감정이 있다 해도 그가 고생하고 힘든 모습을 보게 되면 그나마 동정심이 유발되면서 감정도 어느 정도 누그러지는 것을 봅니다. 이런 것처럼 에서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래도 혈육이요 친동생인 야곱이 긴 세월 동안 외삼촌 밑에서 설움을 겪었다는 말을 들으면 혹여라도 마음이 좀 누그러질 것을 기대했던 것이지요.
그러면서 5절에 “내게 소와 나귀와 양 떼와 노비가 있사오므로 사람을 보내어 내 주께 고하고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 했습니다. 자신에게 지금 많은 소유가 있으므로 그 중의 일부를 형 에서에게 제공할 수도 있으니 은혜를 베풀어 달라는 의미를 담고 있지요.
성도 여러분, 연단이라는 것은 이렇게 사람을 변화되게 합니다. 쌍둥이로 태어날 때부터 자신이 형보다 앞서려고 발꿈치를 잡았던 야곱입니다. 형을 형으로 여기거나 존중하지도 않고 어찌하든 형의 것을 자신이 취하려 하던 야곱이 이제는 그 앞에서 지극히 낮아진 모습으로 형을 “내 주”라 고백하기에 이른 것이지요. 간교한 계략을 써서 형을 속이려 하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는 최대한 선한 방법으로 형의 노여움을 풀어보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하여 야곱이 아직은 온전히 변화되고 깨어진 것이 아니지요. 그 중심에서 자신의 잘못을 철저히 회개하고 에서에게 너무나 미안하고 민망하여서 그를 “주”라 부르며 자신을 낮춘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되니 미안하기도 하고 당장 직면한 상황 속에서 살 길도 찾아야 하겠기에 자신이 살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서 나름대로 선한 방법을 동원하고 있을 뿐이지요. 지금 그가 비록 선으로 행하고 있기는 해도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100% 선(善)으로 행하는 것은 아니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분량에 온전히 이른 것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리를 잘 모르는 초신자 때는 형제를 미워하고 악을 행하면서도 ‘상대가 잘못하니까 그러는 것이다’ 하면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합니다. 그러다가 말씀을 듣고 믿음이 자라면 자신이 형제를 미워하는 것을 발견할 때 중심에서 마음을 찢는 통회자복이 나오게 되지요. ‘내가 정말로 악했구나, 내 죄악으로 인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는데 아버지께서 그토록 나를 사랑해 주셨는데 내가 어찌 이와 같은 악을 가지고 있는가, 어찌 형제를 판단 정죄하며 시기 질투하였는가, 어찌 수군수군하고 형제의 허물을 말하였는가’ 하며 하나님 앞에 너무나 죄송하고 민망하여 견딜 수 없는 마음이 되지요.
지극히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다시는 그러한 악을 행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또 전에는 미워하던 형제를 본다 해도 다시 미움이 나오고 마음이 불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 너무나 민망한 마음이 되며 이제는 사랑으로서 예전의 잘못을 갚고자 하지요.
그런데 이처럼 진리를 알아서 ‘회개한다’고 하면서도 온전히 돌이키지는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즉 자신의 악을 발견했을 때 그로 인해 하나님 앞에 죄송하여 회개도 하고, 눈물을 흘릴 수도 있지요. 그러나 말로는 “내가 잘못했다” 하면서도 막상 상대가 마음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게 되면 여전히 마음이 불편해지고 마는 것입니다. 여전히 ‘자기’가 살아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상대가 마음에 안 들어도 진리를 알기 때문에 참고 넘어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속은 불편하면서 말로만 선하게 대해주라는 것도 아니지요.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 앞에 낮아지므로 상대가 심히 악한 모습으로 나온다 해도 상대의 입장에서 너그럽게 이해해 줄 수 있고 긍휼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을 원하십니다. 더 나아가 오히려 선으로 악을 갚을 수 있는 마음, 그러한 상대를 위해 생명까지 줄 수 있는 최고의 선의 마음을 이루기 원하시지요.
여러분이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되면 삶 속에서 어떠한 일을 만난다 해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어떠한 악을 행하는 상대라 해도 다 품고 포용할 수 있는 마음이니 그 사람이 싫거나 두려울 리가 없지요. 또한 이러한 선한 마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니 하나님께서는 원수라도 화목하게 상대의 마음을 주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벗어날 길을 주시고 현실의 어려움을 결국 복으로 바꿔 주시지요.
야곱이 만약 에서와 화평하고자 할 때도 이러한 100% 온전한 선의 마음으로 에서를 섬기고자 했다면 하나님께서 신속하게 응답해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이 아직은 그렇지 못했기에 하나님께서도 야곱이 온전히 깨어지기까지 기다리시며 야곱이 스스로의 방법대로 해나가는 것을 지켜보고 계셨지요. 그런데 이처럼 야곱은 자기 생각 속에서 최대한 겸비한 말로 에서를 녹이고자 했지만 오히려 들려오는 소식은 야곱을 더욱 두렵게 할 뿐이었습니다.
6절에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가로되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 인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 했던 것이지요. 야곱이 전하라고 하는 말에 대해 어떤 일말의 희망적인 답도 없이 대신 사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이끌고 야곱을 만나러 온다는 사실 자체가 야곱 편에서는 벌써 좋은 의도로 해석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야곱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상황에서 앞으로 나아가 에서와 맞서 싸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뒤로 다시 돌아가자니 라반과의 약속으로 인해 그럴 수도 없는 난처한 상태였지요. 마침내 야곱이 자신의 의를 완전히 포기하고 하나님께만 의지해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과연 이 상황에서 야곱이 어떻게 벗어나게 되는지는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잠 21:31에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일에 있어서는 군대의 수나 말과 병거의 수에 따라 승패가 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삶 가운데서 만나는 많은 일들도 여러분의 지혜와 힘과 능력 또는 주변의 상황과 조건 등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지요. 얼마나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편이 되어주시고 여러분의 손을 들어주시느냐가 관건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려면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더욱 온전히 합당한 모습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고 동시에 얼마나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끝까지 하나님만을 신실하게 의뢰하는지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이지요.
이러한 사실을 잘 깨달으셔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모든 일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도록 부족한 것이 있으면 늘 돌아보고 변화시켜 나가며 오직 믿음으로 기도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 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범사에 믿음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며 영광 돌려 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끝)
2005-05-31 오전 10:07:09 Posted
2015-09-24 오전 9:47:00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