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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철야 예배

제목
창세기 강해(173)  [창31:41-55]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05.05.1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 중에도 겉으로 볼 때는 참 온유해 보이고 오래참는 사람이 있습니다. 상대가 아무리 불편하게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해도 인내하며 참고 넘어가는 것이지요. 그래서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도 참고 참다 보면 나중에는 한꺼번에 폭발해 버리는 것을 봅니다. 그동안 단지 마음 안에 감정을 눌러 참은 것이었지 정말 마음 중심에서 이해하고 용서하며 넘어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 앞에서 이런 사람은 선한 것도 아니고 영적으로 오래참음의 열매가 맺힌 것도 아닙니다.
영적으로 오래참음의 열매가 맺힌 사람은 불편하지만 억지로 눌러 참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이해해 버리고 품어 버리기에 불편한 감정도 없고, 참아야 할 것도 없는 사람이지요. 야곱도 오랜 세월 라반의 집에서 봉사하며 모든 상황을 참고 인내하며 견뎌왔지만 그것이 영적으로 오래참음의 열매가 맺혀서 행한 것이 아니었기에 이제 기회를 만나게 되자 그동안 참았던 불평이 마치 봇물이 터진 듯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라반은 자신을 피해 도망한 야곱을 추적하여 마침내 야곱과 만나게 되었지요. 야곱은 라반에게 말도 없이 떠나온 입장이니 라반의 책망을 듣고도 변명하기에 급급했고 라반이 자기의 드라빔을 찾고자 할 때도 순순히 모든 것을 다 수색하도록 허락을 했습니다.
그리고 라반의 드라빔을 훔쳐온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죽을 것이라고까지 맹세하지요. 야곱은 자신이 불리한 상황에서 라반의 기세에 눌려 최대한 그의 마음에 맞춰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라반이 샅샅이 수색을 해도 결국 드라빔을 발견하지 못하자 상황이 어찌되었겠습니까? 애매한 사람을 도적으로 몰았으니 라반은 무안한 입장이 된 것이고, 야곱은 오히려 전세를 역전시킬 절호의 기회를 잡은 것이지요.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야곱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즉시로 라반에게 노를 발하고 책망까지 하며 그동안 쌓였던 감정을 쏟아놓게 되지요.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성실하고 충성되게 라반의 양 떼를 돌보았으며 그로 인해서 라반이 큰 유익을 보았음을 말했습니다.
또한 자신은 그렇게 충성스럽게 섬겼는데도 라반은 간교하게 품값을 변역하며 자신을 홀대했다고 책망하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자신의 말이 정당함을 주장하고자 하나님의 이름까지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곧 자신이 정당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자신과 함께 하셔서 부유하게 하셨고 라반의 꿈에도 나타나 책망하시며 자신을 지켜 주셨다고 말하고 있지요.
물론 야곱이 성실하게 자신의 일을 감당했고 라반이 간교하게 야곱을 속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라반에게 부당한 일을 당하면서도 진작부터 따지지 않고 참았던 것은 선한 마음으로만 참은 것이 아니었음이 이 사건을 통해 분명히 드러나고 있지요. 자신이 얹혀사는 처지에 있고 아쉬운 입장에 있으니 불만이 있다 해도 꾹꾹 참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더 아쉬울 것도 없고 더구나 라반이 불리한 입장인 것처럼 보이자 마음껏 서운함을 표현하고 있지요. 이런 야곱의 모습을 볼 때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다 인정받기에는 아직은 많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의 할아버지인 아브라함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육의 사람과 영의 사람이 얼마나 다른지를 깨달아 볼 수 있지요. 아브라함이 블레셋 족속의 땅에 거주하고 있을 무렵, 아브라함의 세력이 왕성해지자, 그랄 왕 아비멜렉이 화평을 다짐받기 위해 아브라함을 찾아왔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본토를 떠나 이방 민족의 한 가운데 거하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증거가 뚜렷하게 나타나자 이방 민족 중의 왕이라 할지라도 아브라함을 두려워하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아비멜렉 왕도 이러한 아브라함과 화친을 맺기 위해 찾아왔던 것이고 이에 아브라함은 그의 요청을 순순히 들어줍니다.
그런데 사실 아브라함이 육의 사람이었다면 아비멜렉의 요청을 순순히 들어줄 상황이 아니었지요. 왜냐하면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늑탈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런 상황에서 육의 사람 같으면 먼저 아비멜렉 왕에게 우물을 늑탈한 일에 대해 확실한 사과와 보상을 청구한 후에야 화친을 맺어도 맺었겠지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먼저 아비멜렉의 요청에 따라 “내가 맹세하리라” 하고 화친을 허락한 후에야 비로소 우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었지요. 이는 아브라함이 얼마나 화평을 좇기 원하는 사람이며 결코 상대의 약점을 가지고 공격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성도 여러분, 아브라함 당시에 유목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우물을 늑탈한다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문제였고 큰 분쟁을 야기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이런 경우 만약 육의 사람이라면, 상대의 요구대로 화친을 맺기 전에 상대의 잘못을 책망하고 보상을 받으려 하겠지요. 자신이 유리한 입장에 있는 상황을 십분 활용하여 보상을 크게 받으려고 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러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상대의 요구를 들어주어 마음을 편하게 해준 후에 비로소 상대의 잘못에 대해 책망을 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 일에 대해 사실 아비멜렉은 확실하게 사과를 한 것이 아님에도 아브라함은 그 선에서 일을 마무리 짓습니다.
창 21:26에 “아비멜렉이 가로되 누가 그리하였는지 내가 알지 못하노라 너도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고 나도 듣지 못하였더니 오늘이야 들었노라” 했지요. 자신은 몰랐다고 변명을 하는 것이며 오히려 아브라함에게 왜 오늘에야 그 이야기를 하느냐는 듯이 슬쩍 탓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이 문제를 더 이상 확대해서 문제 삼은 것이 아니었고 먼저 양과 소를 취하여 아비멜렉에게 주며 둘 사이의 화친의 언약을 세웠던 것이지요. 이 얼마나 큰 마음이며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을 좇기 원하는 진리의 마음입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해 자신이 우위에 서게 되었다고 해서 결코 교만하거나 거만해지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이용해서 자기 유익을 구하려 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다 유익을 얻기를 원했지요. 또한 중심에서 상대를 섬기며 이해하고 용서하며 화평을 이루려는 마음이었습니다.
이처럼 마음에 진리가 온전히 임하여 상대가 설령 불의할 때라도 인내하며 화평을 구했던 아브라함과 비교해 본다면 왜 야곱이 계속해서 연단을 받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야곱이 아직 온전하지 않음에도 하나님께서 야곱을 축복하셨고 위태한 상황에서도 야곱을 지켜주셨습니다. 이는 야곱의 행함이 성실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아비 이삭의 축복기도를 보장하시기 위한 것이었지요. 하나님께서 보장하시는 이삭을 통해 장자의 축복을 빌어주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보장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보장받는 기도 안에서 축복을 누릴 수 있었던 야곱의 경우와, 온전히 진리로 이룬 가운데 직접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아브라함의 경우와는 축복의 차원이 달랐던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영으로 들어오지 않은 분들도 나름대로 아버지 앞에 믿음으로 행할 때에는 목자의 공간 안에서 또한 보장받는 기도 속에서 분야 분야 축복들을 받아 영광을 돌리시지요.
그러나 여러분 자신이 직접 영으로 들어올 때는 그 축복의 차원이 전혀 달라지고 온 영으로 들어올 때는 또 달라집니다. 영으로 들어오고 온 영으로 들어와서 축복 기도를 받을 때도 그렇지 않았을 때 축복기도 받을 때와는 전혀 차원이 달라지는 것이고요.
그러므로 2005년 온 영의 흐름 속에서 여러분 모두가 영으로, 온 영으로 들어오시므로 더욱 큰 축복을 체험하며 영광 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상황이 라반에게 좀 불리해졌다 싶으니 야곱은 자신의 입장에서 정당성을 주장하며 라반의 잘못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때 라반은 어떻게 할까요? “네 말을 들어보니 내가 정말 잘못했구나” 하고 사과를 했을까요? 아니면 민망하여 잠잠히 듣고만 있을까요? 그럴 리가 없지요. 야곱이 자기 입장에서만 말하는 것처럼 라반 역시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할 말이 있습니다.
본문 창 31:43에 “라반이 야곱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딸들은 내 딸이요 자식들은 내 자식이요 양 떼는 나의 양 떼요 네가 보는 것은 다 내 것이라 내가 오늘날 내 딸들과 그 낳은 자식들에게 어찌할 수 있으랴” 했지요.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지금 네가 가진 것은 다 내 것 즉 라반 자신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곧 “야곱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한다 해도 네가 가진 것은 다 나로부터 얻은 것이고 내가 너그럽게 보내주기 때문에 이렇게 가져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뜻이지요.
다시 말해 “오갈 데 없는 너를 거두어 재워주고 먹여주고 아내와 자녀를 얻게 해주었으며 이렇게 재산도 늘리게 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고마운 줄을 알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라반과 야곱은 서로 간에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자신의 관점, 자신의 입장에서만 보고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이 서로의 유익을 구해 주고 서로의 입장을 고려해 주는 가운데 대화를 할 때는 쉽게 문제 합의점에 도달할 수가 있고 문제 해결의 방법을 찾을 수가 있지요. 그러나 육의 사람들이 대화를 할 때는 끊임없이 자기 편에 유리한 주장만을 하기에 마치 두개의 직선이 나란히 평행선을 그리고 있는 것처럼 결코 합의점이나 양보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 유익만 구하고 자기 입장에 유리한대로만 말하기에 논쟁이 끝없이 계속되고 결국은 서로 간에 감정만 상하기 마련이지요. 그러므로 딤후 2:23에도 보면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서로 입장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라반은 결국 야곱을 보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셨기 때문이지요. 라반은 꿈으로 지시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므로 마지못해 야곱을 보내주기는 합니다.
그러나 진심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거나 그 뜻대로 따르려는 마음은 아니므로 라반의 감정은 여전히 불편한 상태였고 끝까지 자신이 주도권을 쥐고 있으려 하지요. 그곳에 돌무더기를 쌓아 돌기둥을 세우게 하고 야곱에게 앞으로 자신의 딸들 외에 다른 여인을 아내로 취하지도 않겠다고 하나님 앞에서 약속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도 경계를 넘어서 야곱에게 가지 않겠으니 야곱도 그 경계를 넘어와서 자신에게 해를 입히는 일이 없도록 하나님 앞에서 언약하라고 요구하지요.
이러한 라반의 태도를 보면 그 동안 라반이 야곱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확실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라반의 입장에서 볼 때, 야곱은 자기 누이의 아들일 뿐 아니라 자기 두 딸의 남편이자 외손자들의 아버지입니다. 그러나 라반은 야곱을 사랑스러운 조카라거나 자신의 가족이라 여긴 것이 아니었지요. 그저 집에서 부리는 일꾼 정도로만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도 마치 이제 헤어지고 나면 인연을 끊고 남남이라도 되는 것처럼 매정하게 대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경계선을 그어 놓고 앞으로는 서로가 넘어가지도 말자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만 봐도 라반이 얼마나 무정하고 덕과 사랑이 없는 사람인지를 잘 알 수 있지요.

만약 여러분은 비록 전혀 혈연관계가 없는 외인이라 해도 20년간을 한 집에 살면서 여러분을 위해 일해 주었다면 그를 어떻게 대해 주시겠습니까? 그를 전혀 남남으로 여기며 상대가 잘못을 범하거나 불편한 일이라도 생기면 즉시 내쫓아 버리려고 하시겠는지요? 선한 마음이라면 그러지는 못할 것입니다.
옛날 사람들 중에는 자기 집에서 일하던 종이라 해도 오랫동안 일한 후에 자유롭게 내보낼 때는 정당한 품삯 외에 장사 밑천이라도 쥐어주며 내보내었던 것을 볼 수가 있었지요. 또 비록 인사치레로 말한다 해도 “언제라도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나를 찾아오라” 하며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더구나 주 안에서 오랫동안 함께 고락을 나누며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라면 가족보다 더 소중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제 경우에는 그랬습니다. 예를 들어 개척해서부터 기도원 원장은 하나님의 일에 전무해야 했기에 사택의 일을 도와주는 분들이 있어왔지요. 그런데 그 동안 저는 사택에서 일을 도와주는 분들을 남남으로 여긴 적이 없습니다. 마음 중심에서부터 제 딸들과 마찬가지로 대했고 반드시 새 예루살렘까지 함께 가야 할 사택의 식구들로 여겼지요.
또 어떤 분들이 함께 신앙생활 하다가 온전한 믿음을 갖지 못하여 은혜를 저버리고 떠나는 일이 있어도 제 편에서는 상대의 잘못을 말하지 않고 오히려 여비라도 마련해주려 했습니다. 지금은 떠난다 해도 문을 활짝 열어 놓을 테니 언제든지 돌아오라고 진심으로 당부했지요.
요 6:37에 보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하신 대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주신 모든 영혼들을 구원에 이르기까지 품고 섬기셨습니다. 그러하셨던 것처럼 저 또한 아버지 하나님께서 제게 보내주신 영혼들을 귀하게 여겼고 외인으로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을 품을 수 있었고 저 또한 많은 분들의 사랑을 입으며 서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관계가 될 수 있었지요.
이처럼 여러분도 모든 사람을 선하게 대하며 정과 욕심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섬길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덕과 사랑으로 많은 영혼들을 품을 수 있는 큰 그릇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롬 12:21에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말씀을 명심하여 설령 여러분의 은혜를 악으로 갚으려는 사람까지도 온전히 품을 수 있는 깊은 선의 차원으로 신속히 들어오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라반이 야곱과 자신의 사이에 선을 긋고자 할 때 야곱도 이것을 좋게 여기므로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야곱도 라반에 대해 애정이 있는 것이 아니고 라반이 좋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기에 차라리 서로의 영역을 구분하는 것이 자신에게도 편하고 유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라반의 마음도 무정하지만 라반의 요구를 이렇게 얼른 받아들이는 야곱도 하나님 앞에서 결코 선한 마음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직장이든, 혹은 다른 모임이든 어떤 사람이 여러분과 마음이 맞지 않아서 자꾸 여러분을 찌르고 번거롭게 한다고 가정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저것 지적하고 간섭하며 늘 여러분을 어렵게 하므로 불편을 주는 사람이지요. 그런 사람과 화평을 이루려고 하다 보니 늘 희생하며 섬겨주어야 하지만 그렇게 한다 해서 여러분에게 유익이 되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이제 더 이상 어떤 간섭도 안 하고 무정하며 냉랭하게 대해 온다면 여러분은 어떤 마음이 되실까요? 어떤 사람은 이런 상황에서 ‘차라리 잘 됐다’ 하며 가만히 두는 것을 봅니다. 어떻게든 상대와 화평을 이루려고 노력하기보다는 ‘내 편에서 먼저 멀리한 것이 아니므로 내 잘못도 아니고 이렇게 있는 것이 나에게 편하니 그냥 가만 있자’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온전한 선의 마음이라면 상대가 섬김 받기 원하고 까다롭다 해도 상대를 불편하게 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상대에게 맞춰주고 섬겨줄 수가 있지요. 상대가 나를 이유 없이 차갑게 대한다 해도 내 편에서 먼저 상대의 마음을 풀어 주고자 합니다. 상대의 악으로 인한 것이고 나에게는 손해 볼 일이 없다 해도 상대의 마음이 불편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선이고 사랑이지요.
이런 마음이라면 아무리 까다로운 상대라 해도 결국에는 여러분 안에 품어져 들어올 것이고 설령 상대가 너무 악해서 끝까지 악으로 행한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기뻐하시므로 축복으로 갚아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이지요. 야곱은 분명히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라반으로부터 독립해 나와야 했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주관하사 라반으로부터 떠나오도록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박정(薄情)하게 선을 긋고 인연을 끊듯이 분리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요.
이는 롯을 함께 데리고 있던 아브라함이 두 사람의 소유가 심히 많으므로 더 이상 함께 거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했는지와 비교해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어찌하면 내가 조금이라도 더 유익을 볼까’ 한 것이 아니라 조카인 롯에게 먼저 더 좋은 땅을 고르게 해주었지요.
롯이 더 좋은 땅을 택해서 떠나간 후에도 ‘내 편에서는 할 도리를 다했다’ 하면서 롯에 대해 무관심했던 것이 아닙니다. 조카 롯이 잘 지내고 있는지 늘 소식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아브라함이었고 조카 롯이 포로로 잡혀갔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는 앞뒤 생각하지 않고 즉시로 추격하여 롯을 구해주기까지 했지요. 이처럼 늘 롯이 어떻게 지내는지를 살피며 마음을 써주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돔 성이 심판받을 때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과 그의 가족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던 것이지요.
그러니 이러한 아브라함과 롯의 관계를 생각해 볼 때 라반과 야곱도 두 사람이 선한 마음이었다면 굳이 서로간의 관계를 단절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서로가 각자의 터전을 일구며 좋은 관계 속에서 축복을 받아 나갈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오히려 서로가 친밀하게 연합하며 서로의 의지가 되어주고 유익이 되어 주었다면 그들은 주변 족속들도 두려워할만한 큰 세력으로 성장할 수가 있었겠지요.
그러나 라반이나 야곱이나 그런 마음이 되지 못했기에 이처럼 선을 긋고 각각 갈라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야곱도 어차피 라반에게 다시 돌아갈 마음도 없었고 둘의 관계가 끊어진다 해서 손해 볼 일도 없을 것 같으니 라반의 제안대로 따랐던 것이고요. 이처럼 야곱도 아직은 온전하지 못한 마음이기에 그것이 깨어지고 변화되기까지 계속해서 연단을 받아야 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라반과 야곱이 비록 둘 다 합당한 마음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하나님 편에서 보실 때 두 사람의 중심은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는 서로가 언약하는 장면에서 잘 나타나지요. 창 31:53에 보면 언약의 순간에 라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홀의 하나님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은 우리 사이에 판단하옵소서” 했습니다.
반면 야곱은 “그 아비 이삭의 경외하는 이를 가리켜 맹세” 했지요. 라반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조상인 아브라함과 나홀이 믿었던 하나님이요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이었습니다. 물론 라반 자신도 조상들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해 듣고 배우기는 했지만 그저 막연하게 하나님을 알 뿐 자신의 모든 것을 섬세하게 간섭하시고 역사하시는 자신의 하나님으로 경외하지는 못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야곱은 달랐지요. 야곱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일 뿐 아니라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요 동시에 아버지 이삭의 기도를 보장하사 자신을 지금까지 인도하시고 축복하신 “야곱 자신의 하나님”이시기도 했던 것입니다. 야곱의 신앙은 머리로만 아는 지식적인 신앙이 아니라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마음으로 믿고 경외하는 신앙이었던 것이지요.
또한 54절에 보니 “야곱이 또 산에서 제사를 드리고 형제들을 불러 떡을 먹이니 그들이 떡을 먹고 산에서 경야하고” 했습니다. 어떤 언약을 함에 있어서 라반은 말로만 하고 그쳤지만 반면에 야곱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므로 언약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확증을 받고자 했지요.
사람 사이의 언약은 파기하면 그만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인친 언약은 하나님께서 보장하시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야곱은 이처럼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므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려했던 것입니다.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야곱의 모습이 잘 나타나고 있지요.
신실한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해 배운 참된 신앙이 야곱에게는 이처럼 명심이 되어 있었던 것이고 집을 떠난 지 20년이나 지났을지라도 이러한 신앙은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와 같은 중심이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택하여 연단하시고 변화시키시므로 그로부터 하나님의 선민이 나오게 하셨던 것이지요.

성도 여러분, 이렇게 해서 서로의 언약을 다진 후에 라반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갔고 야곱도 그리운 아버지의 집을 향해 걸음을 재촉합니다.
그러나 그 앞길에 기다리는 것은 두 팔을 벌려 환영하는 가족의 사랑이 아니라 생명을 위협받는 큰 시련이었지요. 20년을 연단받고도 아직 ‘자기’가 남아 있는 야곱에게 이제는 정말 철저히 깨어지고 변화되어야만 하는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과연 야곱의 앞에는 어떤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는지 다음 시간에 이어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곱은 20년 동안 많은 연단을 받았습니다. 라반 같은 사람 밑에서 그 마음을 맞추며 섬겨야 했으니 얼마나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 왔겠습니까? 얼마나 낮아지고, 인내하며, 온유해졌겠는지요? 그러니 겉모습만을 볼 때는 마치 연단을 통해 아름답게 변화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그 중심이 온전히 변화된 것이 아니기에 변화되지 못한 육의 속성이 드러날 수 있는 상황이 되자 육적인 모습들이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되지요. 하나님께서는 이것조차도 없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이는 여러분에게도 마찬가지이지요. 성결의 말씀을 듣고 기도해 나가는 분이라면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이 변화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교만하고 들레던 모습이 겸손하고 섬기는 모습으로 변하고 자기 고집과 의를 주장하던 모습이 양보하며 화평을 좇는 마음으로 변하지요. 거짓되고 간사하던 모습이 진실하고 정한 마음으로 변화됩니다.
이렇게 변화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 전과 비교하면서 뿌듯한 마음이 들 수도 있지요. 이때 이처럼 변화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더 온전해지기 위해 힘을 얻어 달려가는 것은 너무나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혹여라도 ‘내가 이렇게 기도하고 금식하여 오늘날 이마만큼 변화되었다’ ‘내가 이마만큼 온전해졌다’ 이렇게 자만함으로 자칫 신앙이 정체되어 있어서는 안 되지요. 겉으로 보기에는 변화되었다 해도 자신이 정말로 육을 다 벗어 버린 것인지 아니면 단지 드러낼 상황이 아니라서 눌러 놓고 있는 것인지 깨달아 보아야 합니다.
사람이 금식을 하면 기운이 없어서라도 잠시 온유해진 것 같아 보이지만 음식을 먹고 힘이 나면 이내 혈기도 다시 나오는 것을 보기도 하지요. 이런 것처럼 연단 가운데서 낮아지고 눌려있어서 잠시 주춤하여 악을 발하지 않고 있는 경우도 있고 혹은 말씀을 들은 지식이나 자신의 교양과 체면 속에서 외면적으로만 눌러 놓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는 육을 많이 벗고 자아가 죽어졌다고는 하지만 아직 온전히 영으로 변화되기 전에는 결정적인 상황을 만났을 때 다시 악이 드러나는 것도 볼 수 있지요. 그러므로 자기 의, 자기 유익을 구하는 마음 등 육에 속한 모습이 1%도 없는 온전한 영의 차원에 이르기 전까지는 부단히 육을 벗기 위한 싸움을 싸워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 보기에 착하고 선하며 믿음 있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고후 10:18에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하신대로 주님 앞에 인정을 받아야 하는 것이지요. 이와 같은 여러분 모두가 되셔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보장 속에 살아가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끝)



2005-05-09 오전 12:35:41 Posted
2015-09-24 오전 9:47:00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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