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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철야 예배

제목
창세기 강해(171)  [창31:17-32]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05.04.29
창 31:17-32
야곱이 일어나 자식들과 아내들을 약대들에게 태우고 그 얻은바 모든 짐승과 모든 소유물
곧 그가 밧단아람에서 얻은 짐승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있는 그 아비 이삭에게로 가려할쌔
때에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갔으므로 라헬은 그 아비의 드라빔을 도적질하고
야곱은 그 거취를 아람 사람 라반에게 고하지 않고 가만히 떠났더라
그가 그 모든 소유를 이끌고 강을 건너 길르앗산을 향하여 도망한지 삼일만에
야곱의 도망한 것이 라반에게 들린지라

라반이 그 형제를 거느리고 칠일 길을 쫓아가 길르앗산에서 그에게 미쳤더니
밤에 하나님이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가라사대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 말하지 말라 하셨더라
라반이 야곱을 쫓아 미치니 야곱이 산에 장막을 쳤는지라
라반이 그 형제로 더불어 길르앗산에 장막을 치고 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내게 알리지 아니하고 가만히 내 딸들을 칼로 잡은 자 같이 끌고 갔으니
어찌 이같이 하였느냐 내가 즐거움과 노래와 북과 수금으로 너를 보내겠거늘
어찌하여 네가 나를 속이고 가만히 도망하고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으며
나로 내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맞추지 못하게 하였느냐 네 소위가 실로 어리석도다
너를 해할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어제밤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 말하지 말라 하셨느니라
이제 네가 네 아비 집을 사모하여 돌아가려는 것은 가하거니와 어찌 내 신을 도적질하였느냐
야곱이 라반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말하기를 외삼촌이 외삼촌의 딸들을 내게서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여 두려워하였음이니이다 외삼촌의 신은 뉘게서 찾든지 그는 살지 못할 것이요 우리 형제들 앞에서 무엇이든지 외삼촌의 것이 발견되거든 외삼촌에게로 취하소서 하니
야곱은 라헬이 그것을 도적질한 줄을 알지 못함이었더라


서론

신문이나 텔레비전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소식 중에는 인륜을 저버린 끔찍한 사건들이 점점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 형제, 부부 사이 등 가장 가까운 가족 관계 속에서도 살인이라고 하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한 범죄들이 늘어가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가장 주된 이유가 바로 돈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재산 문제로 다툼이 생겨서 결국 가족간에 살인을 하기도 하고, 보험금을 노리고 가족을 청부 살인하는 경우도 있지요. 그러니 드러나지 않은 일들도 고려한다면 이러한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겠고 또한 살인이라고 하는 끔찍한 결말까지는 아니라도 돈이나 재산으로 인해 가족간에 갈등과 다툼이 일어나고 불목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이처럼 물질 앞에서는 자기 유익을 위해 부모 자녀도, 형제도, 부부도 상관이 없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지요.
그래서 딤후 3:1-5에는 마지막 때에 대해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말씀합니다. 특히 딤전 6:10 전반절에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하신 말씀을 꼭 명심하여 여러분 중에는 가족 간에는 물론이고 믿음의 형제, 자매간에도 혹여 돈으로 인해 죄를 범하거나 서로 간에 실족시키는 일이 결코 없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고 있는 상황도 근본적으로는 재산 즉 물질에 관련된 것이고 서로 간에 자기 유익을 구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본론

1. 라반과 함께 거할 수 없게 된 야곱

라반과 그의 아들들은 야곱이 자신들의 소유인 양과 염소를 치면서 날로 부유해져 가는 것을 보자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이 그동안 야곱으로 인해 유익을 보며 재산이 크게 불어난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은 채 마치 야곱이 자신들의 재산을 도적질해 간 것처럼 생각했지요.야곱 역시 자신의 몫을 찾겠다는 마음에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꾀를 써 나갔고 그러면서도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늘 라반과 라반의 아들들의 눈치를 살펴야 했습니다.
야곱의 아내 라헬과 레아 또한 자신들의 유익 앞에서는 아버지에 대한 도리마저 저버리는 것을 볼 수 있지요. 라헬과 레아는 자기들이 보기에 남편 야곱을 좇는 것이 어느 모로 보나 자신들에게 유리하다고 생각되자 아버지 라반에게는 한 마디 작별 인사도 없이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버지 라반으로부터는 자신들에게 돌아올 분깃이나 유업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전적으로 남편 야곱의 편을 들어 주면서 결국은 자신들과 자기 자녀들에게 돌아올 몫을 챙기려 했던 것이지요. 자신들의 몫을 챙겨 주지는 않고 오히려 야곱에게 아내로 주는 조건으로 막대한 부를 모은 아버지 라반에 대한 서운함과 감정이 이러한 모습으로 나온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간에 물질에 대한 욕심과 자기 유익만을 구하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서운함과 감정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야곱은 더 이상 라반과 함께 거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자식들과 아내들을 약대에 태우고 그동안 모은 모든 짐승과 모든 소유물 곧 그가 밧단 아람에서 얻은 짐승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있는 그의 아비 이삭에게로 떠나려 합니다.

2. 7년 만에 거부가 되어 라반을 떠나는 야곱

20절에 “야곱은 그 거취를 아람 사람 라반에게 고하지 않고 가만히 떠났더라” 했습니다. 야곱은 자신이 만약 고향으로 떠난다는 사실을 라반에게 고하게 되면 결코 순탄하게 떠나지 못할 것을 알았지요. 그래서 라반은 물론이고 그 주변의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가만히 떠났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을 깨달을 수가 있지요. 그것은 야곱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러한 날이 올 줄을 예상하고 미리 준비를 해 왔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야곱은 양 떼와 노비와 약대와 나귀가 많았고 그 재산이 심히 풍부할 만큼 거부가 되어 있었지요. 이러한 야곱이 모든 짐승과 모든 소유물을 챙겨서 떠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거부가 되기까지는 몇 년이 걸렸습니까? 7년이 걸렸지요. 14년간은 삼촌을 위해서 무료봉사를 했고, 그리고 남은 7년 만에 거부가 된 거예요. 그런데도 야곱은 주변에서 눈치 채지 못하도록 일사불란하게 짐을 챙겨서 떠났던 것이지요. 그리고 떠나는 시점 역시 라반이 양 털을 깎으러 가는 때를 골라서 떠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또한 야곱이 얼마나 주도면밀하게 자기에게 유리한 시점을 택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해 주는 모습이지요.
이처럼 야곱은 라반의 눈을 피하여 자신의 모든 소유물을 안전하게 빼돌리기 위해 오래 전부터 계획하고 준비했던 것이며 라반의 상황까지도 예의주시하여 가장 적당한 때를 택해 떠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이렇게 떠남에 있어서 예상치 못했던 일이 하나 생기지요. 바로 라헬이 그 아비가 양털 깎으러 간 틈을 타서 라반의 드라빔을 도적질한 것이었습니다.

3. 라반의 드라빔을 도적질한 라헬

드라빔이란 구복(求福)과 점술(占術), 신탁(神託) 행위와 관련하여 당시 사람들 사이에 퍼져 있던 우상을 말합니다. 라반이 비록 아브라함의 형제인 나홀의 아들로서 야곱과는 피를 나눈 같은 민족이었지만 성경에 라반을 아람 사람이라 표현하고 있듯이 이방인들 사이에 살면서 라반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복을 구하고 점을 치며 신의 뜻을 알기 위한 행위와 관련하여 소지하고 있던 드라빔을 라반 역시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드라빔이 훗날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도 성행했습니다. 이에 왕하 23:24에 보면 “요시야가 또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 보이는 신접한 자와 박수와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다 제하였으니 이는 대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전에서 발견한 책에 기록된 율법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슥 10:2에도 보면 “대저 드라빔들은 허탄한 것을 말하며 복술자는 진실치 않은 것을 보고 거짓 꿈을 말한즉 그 위로함이 헛되므로 백성이 양같이 유리하며 목자가 없으므로 곤고를 당하나니” 하여 드라빔과 복술자에 대하여 경계하고 있구요. 우상을 섬기는 이방 민족들 사이에 둘러 싸여있던 이스라엘 민족은 늘 우상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었으며 그들의 신앙이 바로 서지 못했을 때는 곧바로 우상 숭배가 침투하여 퍼져 나감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드라빔이 비록 넓은 의미에서는 우상에 포함되지만 성경에 우상과 드라빔을 구분하여 놓은 것을 보면 드라빔은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숭배하는 대상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부적이나 관습적인 소지품과 같이 사용되던 것으로 추정되어진다고 합니다. 이는 다시 말해 사람들이 드라빔의 소지를 우상 숭배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물건으로 여기며 일상생활의 깊숙이까지 허용하고 있었다는 말이지요.
이와 비슷한 상황들이 오늘날에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우상을 멀리하고 그것들을 숭배하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하지요.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우상 숭배라고 하면 눈에 보이는 실질적인 우상만을 떠올립니다. 그러한 우상에게만 절하지 않으면 자신은 우상 숭배를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지요. 그런데 정작 자신의 삶 속에서는 여러 가지 우상들을 만들어 놓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때로는 남편이나 아내나 자녀가 혹은 물질이나 집이나 고급 자동차가 또는 지식이나 명예나 권세 등이 우상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지요. 물론 진리를 잘 모르는 초신자들은 눈에 보이는 우상을 섬기지만 않으면 그것으로 우상 숭배를 하지 않는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진리를 알고 믿음이 있다 하면서도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세상에 있는 것을 더 사랑하게 되면 그러한 것들이 곧 우상이 되어 버리므로 하나님 앞에서 영적으로 간음이 되고 말지요.

여기서 여러분이 한 가지 구분해야 할 것은 바로 영적인 우상 숭배와 영적 간음의 차이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여전히 육적으로도 우상에게 절하거나 숭배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영적인 우상 숭배는 여전히 남아 있는 경우가 있지요. 또한 육적인 간음 이외에 영적인 간음도 있는데 영적인 간음 역시 하나님 앞에 큰 죄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영적인 우상 숭배나 영적 간음은 두 가지 모두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한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그럼에도 이 두 가지는 분명히 다르지요.
예를 들어 진리를 잘 모르는 초신자나 새신자가 아직은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여전히 세상을 버리지 못해서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가지고 있을 때 이것은 우상 숭배가 됩니다. 육적인 우상 숭배는 버렸지만 아직 세상 어둠 가운데 살았을 때 가지고 있던 마음 안의 우상을 버리지 못한 것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사람이 신앙이 점차 성장하면서 하나님의 사랑도 깨닫게 되고 은혜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점차 세상에서 사랑하던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지요. 이렇게 진리를 알게 되어 신앙이 성장하고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세상을 버리지 못하여 다시금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때는 영적 간음이 되는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사랑도 알았고 체험했으며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해야 할 신앙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육적으로 비유할 때 마치 결혼한 부부가 서로 간의 신의를 저버리고 다른 사람과 간음하는 것과 같지요. 그러므로 이때는 영적 간음이라 말합니다. 초신자나 새신자는 진리를 몰라서 그랬다 하더라도 이미 믿음이 있고 진리를 알면서도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고 세상의 것을 취해 나가는 것은 육적 간음보다도 하나님께서 더 싫어하시는 영적 간음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육적인 간음도 절대 행해서는 안 되는 육체의 일로서 사망에 이르는 죄이지만 육적인 간음은 철저히 회개하고 돌이키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간음은 자칫 히 6:4-6에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는 말씀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영적 간음이 결국은 세상을 사랑하는 육체의 행함으로 나오게 되고 그러다보면 점점 더 깊은 세상 어둠 가운데 빠져서 자칫 돌이켜 회개할 기회조차도 얻지 못하고 사망의 길로 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라헬이 자기 아비 라반의 드라빔을 훔친 것은 그것이 값나가는 물건이라서도 아니고 물질에 욕심이 있어서도 아니었습니다. 그동안 아비에게 쌓인 감정의 표현이었으며 자신과 남편이 당한 것에 대한 앙갚음이었지요. 드라빔의 가치가 얼마나 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라반이 소중히 여기며 정신적인 의지의 대상으로 삼았던 드라빔을 훔침으로써 라반에게는 큰 타격을 주는 행동이었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자신이 받은 만큼 갚아 준다는 악한 마음에서 상대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분야나 또는 가장 약한 분야를 드러내서 상대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해를 입히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상대가 어떤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마음이 상하며 자존심이 상하고 아파하는지 그 약점을 알아서 그곳을 찌르고 아프게 하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이러한 모습은 악하다 할 텐데 하물며 주 안에서 상대가 어떤 잘못을 했을 때 거기에 대해 찌르는 말이나 행동으로 갚아 준다면 이는 그 마음이 얼마나 악한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4. 도망하는 야곱을 급히 쫓아가는 라반

야곱은 이러한 사실을 모른 채 모든 소유를 끌고 강을 건너 길르앗 산으로 향하지요. 그런데 야곱이 도망한 지 삼 일 만에 라반은 야곱이 도망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칠 일 길을 쫓아가 길르앗 산에서 야곱의 일행을 따라잡게 되지요. 그렇다면 라반은 왜 이처럼 급하게 야곱의 일행을 쫓아갔던 것일까요? 당연히 좋은 의도에서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라반은 야곱이 도망한 사실을 알게 되자 분노가 가득하게 되었지요. 라반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갈 곳 없는 야곱을 거두어 주고 먹여 주고 재워 주었으며 두 딸들까지 아내로 주어 가정을 꾸미게 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아무 말 없이 떠났다는 것이 너무나 마음 상하고 분했던 것입니다. 야곱이 오늘날 이처럼 부자가 된 것도 결국은 자신이 다 거두어 주고 보살펴 주었기 때문인데 지금에 와서는 떠난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몰래 떠났다는 것이 너무나 괘씸했던 것이지요.
물론 라반이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면 야곱은 은혜도 모르는 사람이고 자신을 배신한 것이라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보면 야곱도 나름대로 자신의 행동에 대해 얼마든지 이유를 댈 수 있지요. ‘만약 라반에게 말하고 떠나려 했으면 라반이 순순히 보내어 주지 않았을 것이다.’ ‘내 재산과 내 소유를 가지고 떠나는 것이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 아니냐’ ‘나는 그동안 외삼촌 라반에게 충분히 은혜를 갚았다고 할 만큼 봉사해 주었다’ 이런저런 이유가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항상 자기 입장만을 먼저 생각합니다. ‘이래서 이럴 수밖에 없었고, 저래서 저럴 수밖에 없었다’고 말합니다. 라반도 그러했지요. 그동안 야곱이 자신을 위해 봉사하고 충성해 준 것은 생각지도 않은 채 야곱이 은혜를 모른다고만 생각하여 불쾌해 했습니다. 야곱이 그처럼 몰래 떠나야 할 만큼 자신이 그동안 야곱에게 눈치를 주고 정당한 값도 주지 않으며 홀대했던 것은 생각지도 않은 채 야곱이 몰래 떠났다는 사실 자체만 가지고 마음이 불편하며 분이 났던 것이지요.
물론 야곱의 행동이 정당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때 라반이 선한 마음을 가졌다면 ‘야곱이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까?’하며 야곱의 입장을 조금이라도 헤아려 보고 이해해 보려고 했을 텐데 라반은 그러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설령 상대가 나 보기에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 말이나 행동을 한다고 해도 선한 마음이라면 상대의 입장이나 형편 그리고 상대의 믿음 수준까지도 고려하게 됩니다. 상대가 잘못한 것은 기억지도 않으며 상대가 잘한 것, 상대의 좋은 점만을 기억하려 하지요. 또한 영적인 사랑은 내 편에서 상대에게 한 번 준 것에 대해 상대가 은혜를 갚지 않는다 하여서 서운해 하거나 감정을 갖지 않습니다. 주는 것만으로 기쁘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선한 마음에 영적인 사랑이 임해 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서운한 감정이나 분노가 나올 리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유익만을 구하는 라반에게는 야곱의 행동이 너무 괘씸했던 것이고 더구나 드라빔까지 없어졌으니 라반은 당장에 자기 형제들을 거느리고 야곱 일행을 추격해 갔던 것이지요. 그리고 이처럼 잔뜩 화가 나 있는 라반이었기에 그 상태로 야곱 일행을 만난다면 그냥 조용히 넘어가지는 않을 기세였습니다.

5. 꿈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야곱을 해하지 않는 라반

이러한 라반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셨습니까? 24절에 “밤에 하나님이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가라사대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 간 말하지 말라 하셨더라” 했습니다. 당시 라반이 비록 하나님만을 섬기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지요. 그러했기에 창 30:27에도 보면 라반이 야곱에게 “여호와께서 너로 인하여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니” 말합니다. 또한 오늘 본문 29절에서도 라반이 야곱에게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어젯밤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하며 야곱의 아버지인 이삭의 하나님이라 말하고 있는데 이는 이미 라반도 아브라함과 함께하셨고 이삭과 함께하신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라반은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었고 더욱이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꿈에 말씀하신 대로 순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음에는 야곱에 대한 분노가 가득했지만 하나님의 위엄과 권세와 능력 앞에서는 두려워서라도 감히 그 말씀을 거역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라반은 야곱을 만났을 때 속에서는 분이 끓어오르고 있음에도 겉으로는 전혀 아닌 척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6-28절에 라반이 야곱에게 이르기를 “네가 내게 알리지 아니하고 가만히 내 딸들을 칼로 잡은 자같이 끌고 갔으니 어찌 이같이 하였느냐 내가 즐거움과 노래와 북과 수금으로 너를 보내겠거늘 어찌하여 네가 나를 속이고 가만히 도망하고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으며 나로 내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 맞추지 못하게 하였느냐 네 소위가 실로 어리석도다” 했습니다. 자신으로 하여금 어찌 딸들과 손자들에게 작별인사도 못하게 했느냐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라반이 정말 이러한 마음뿐이었다면 굳이 당장에 사람들을 이끌고 마치 도적을 뒤쫓듯이 이렇게 야곱의 뒤를 쫓아올 필요까지 있었겠습니까? 또한 라반의 마음이 순수했다면 하나님께서 굳이 꿈에 역사하셔서 그가 야곱에게 하려는 것을 막으시지 않아도 되었겠지요. 하지만 라반이 겉으로 하는 말과는 달리 그의 마음은 야곱을 해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이를 아시기 때문에 미리 라반에게 꿈으로 역사하여 야곱을 지키신 것입니다. 따라서 라반이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속마음을 숨긴 채 자신이 급하게 추격해 온 행동을 최대한 정당화시키려는 의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29절에는 라반의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너를 해할 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어젯밤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 간 말하지 말라 하셨느니라” 했지요. 원래는 야곱을 해칠 마음이 있었고 지금도 속마음은 그러하며 그럴 수 있는 능력도 있지만 자신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꿈에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말씀하셨기 때문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6. 자신의 드라빔을 훔쳐간 것이 야곱이라고 생각한 라반

라반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야곱을 어찌하지 못하고 있지만 여전히 그에게는 야곱을 해할 마음이 있기에 결국은 드라빔을 빌미로 시비를 걸게 되지요.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것에 대해서는 더이상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고 있지만 자신의 드라빔을 훔쳐간 것에 대해서는 분명히 시시비비를 가리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30절에 “이제 네가 네 아비 집을 사모하여 돌아가려는 것은 가하거니와 어찌 내 신을 도적질하였느냐” 말합니다.
하지만 야곱은 드라빔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야곱은 31-32절에 “내가 말하기를 외삼촌이 외삼촌의 딸들을 내게서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여 두려워하였음이니이다 외삼촌의 신은 뉘게서 찾든지 그는 살지 못할 것이요 우리 형제들 앞에서 무엇이든지 외삼촌의 것이 발견되거든 외삼촌에게로 취하소서”라고 대답합니다. 야곱 역시 자신이 몰래 도망한 이유에 대해서는 진실하지 못한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자신의 재산을 온전히 지키려는 마음에서 라반에게 알리지 않고 떠난 것이었는데 마치 외삼촌 라반이 자신의 아내들을 보내 주지 않고 억지로 빼앗을까봐 두려워서 그랬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인간적인 도리를 하지 못한 것은 분명히 자신의 잘못이었음에도 야곱은 진실하지 못한 대답으로서 불리한 상황을 모면해 보려 하고 있지요. 또한 야곱은 아내 라헬이 라반의 드라빔을 훔친 것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외삼촌의 신은 뉘게서 찾든지 그는 살지 못할 것이라” 담대히 말하였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지켜 주시는데 그 내용은 다음 시간에 계속 살펴보겠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라반은 물론이고 아직 온전히 자기가 깨어지지 않았던 야곱 역시 여전히 진실하지 못한 모습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자신의 속마음과 의도는 숨긴 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말을 만들어 가고 있지요.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에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바로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지요. 자신에게 상황이 불리할 때는 속마음은 숨긴 채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있다가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이 되면 예전에 쌓여 있던 감정까지도 드러내는 것입니다. 속과 겉이 다르다고 하는 것은 완전히 영과는 너무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중심까지도 보고 계십니다. 어떤 보고를 할 때도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말하고 불리한 것은 감추거나 유리하게 말을 바꾸는 사람이있습니다. 또는 자기가 한 말을 다른 사람이 했다고 하거나, 다른 사람이 하지도 않은 말을 마치 그 사람이 한 것처럼 말하기도 하구요. 그러면서도 자신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진실치 못한 말과 행동은 결국 진실치 못한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인데 이런 사람은 진실치 못한 마음으로 인해 자기 자신을 바르게 보는 눈도 가리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진실치 못한 사람은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 앞에서는 간교한 방법을 써서라도 당장의 상황을 모면하는 것을 오히려 지혜롭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에게 축복을 주실 수 없기 때문에 야곱도 이러한 모습을 철저히 깨뜨리기 위해 20년간이나 연단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때로는 진실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당장에는 자신에게 손해가 가고 불리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잠 12:22에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진실히 행하는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시 51:6 전반절에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신다는 말씀대로 신속히 중심에 진실함을 이루어 항상 진리 안에서 겉과 속이 동일한 참 마음을 소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5-02 오전 11:33:48 Posted
2015-09-08 오후 2:02:05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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