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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철야 예배

제목
창세기 강해(172)  [창31:33-40]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05.05.0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라반은 사위 야곱이 자신에게 한 마디 인사도 없이 아내들과 자녀들 즉 라반의 딸들과 손자들을 비롯하여 모든 소유를 챙겨서 떠난 사실을 알게 되자 당장에 형제들을 거느리고 야곱을 쫓아갑니다. 야곱의 행동에 심히도 감정이 상했던 것이지요. 더욱이 라반은 야곱이 자신의 드라빔까지 훔쳐서 도망한 것으로 알았기 때문에 더더욱 화가 났습니다. 그 기세대로라면 야곱을 만났을 때 가만히 넘어갈 라반이 아니었지요.
그런데 이러한 라반에게 하나님께서 꿈으로 역사하십니다.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 간에 말하지 말라” 말씀하신 것이지요. 라반은 비록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하나님에 대해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라반은 하나님이 두려워서라도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할 수가 없었지요. 속마음이야 야곱을 만나면 당장에라도 감정이 폭발할 듯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지만 야곱이 도망하듯 떠난 것에 대해서는 이제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라반은 야곱을 뒤쫓아 가 만났을 때 창 31:29-30 전반절에 “너를 해할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어젯밤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 말하지 말라 하셨느니라 이제 네가 네 아비 집을 사모하여 돌아가려는 것은 가하거니와”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자신에게는 얼마든지 야곱을 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자신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그것을 막으셨기 때문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자신이 원한 것은 아니지만 이제 야곱이 아비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뭐라 말하지 않겠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야곱이 자신의 드라빔을 훔쳐간 것에 대해서는 시시비비를 따지려 듭니다. 자신의 드라빔을 야곱이 훔쳐간 것으로 생각한 라반은 “어찌 내 신을 도적질하였느냐”하며 야곱을 몰아세우지요. 그러나 이 일은 정말로 야곱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었고 아내인 라헬이 야곱도 모르게 행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자신을 추궁하는 라반에게 야곱은 “외삼촌의 신은 뉘게서 찾든지 그는 살지 못할 것이요 우리 형제들 앞에서 무엇이든지 외삼촌의 것이 발견되거든 외삼촌에게로 취하소서” 하며 담대하게 말을 할 수가 있었지요.
설마 라헬이 라반의 드라빔을 훔쳤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채 만약 외삼촌의 드라빔이 자신의 무리 가운데서 나오면 그 사람은 살지 못할 것이라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라반은 야곱과 레아, 라헬 그리고 두 여종의 장막까지도 수색해 나가지요. 그러나 라반은 야곱과 레아와 두 여종의 장막에서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한 채 이제 라헬의 장막에 이르게 됩니다. 위기의 순간이 다가온 것이지요. 그러나 이 순간, 라헬은 한 가지 꾀를 짜냅니다.
34-35절에 “라헬이 그 드라빔을 가져 약대 안장 아래 넣고 그 위에 앉은지라 라반이 그 장막에서 찾다가 얻지 못하매 라헬이 그 아비에게 이르되 마침 경수가 나므로 일어나서 영접할 수 없사오니 내 주는 노하지 마소서 하니라 라반이 그 드라빔을 두루 찾다가 얻지 못한지라” 했지요. 경수가 났다고 아버지 라반을 속여서 위기의 순간을 모면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육적으로 보면 참 지혜 있고 재치 있는 순간이지요.
하지만 라헬이 과연 자신의 지혜와 재치만으로 이 위기의 순간을 넘긴 것일까요? 라헬은 아버지 라반의 간교한 기질을 타고났기에 이 순간 간교함 속에서 나오는 지혜를 발휘했습니다. 그런데 라반 역시 결코 라헬에게 뒤질 사람이 아니지요. 육적인 지혜만 놓고 본다면 라반이 라헬의 꾀에 결코 쉽게 넘어갈 사람이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이 순간 라반이 라헬의 꾀에 넘어간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사실 라반이 작정을 하고 구석구석 샅샅이 뒤져서 드라빔을 찾고자 했다면 라헬의 미심쩍은 행동을 이상히 여기고 결국은 드라빔을 찾아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라반이 드라빔을 찾지 못한 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생각하사 피할 길을 열어주신 것이었지요.
그렇다 하여 여러분이 혹여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비진리의 일을 가리워 주시기도 하는구나’ 하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공의에 비추어 어긋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그의 조카 롯의 가족들에게 심판을 피할 길을 열어 주신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라헬만 놓고 본다면 그의 잘못된 행동을 가리워 주실 수 없었겠지만 야곱을 생각하시므로 지켜주신 것이지요.
물론 이때 만약 야곱이 라헬이 드라빔을 훔친 사실을 알고도 모른 척한 것이었다면 상황은 전혀 달라졌을 것입니다. 이때는 야곱 역시 공의에 어긋나므로 그들을 지켜주실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야곱은 정말로 라헬이 드라빔을 훔친 사실을 몰랐고 따라서 야곱 자체로 봐서는 이 일에 대해 전혀 공의에 어긋남이 없었습니다.
또한 라헬이 드라빔을 훔친 사실이 드러나면 그것은 라헬 개인의 문제로 끝나지 않지요. 분명 라반은 야곱에게까지 책임을 돌리려 했을 것이고, 그러니 야곱에게도 해가 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따라서 훔친 드라빔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야곱까지 그 일로 인해 해를 받아서는 안 되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보시고 훔친 드라빔이 발견되지 않도록 해주신 것이지요. 결국 라헬이 재치 있고 지혜가 있어서 그 위기의 상황을 모면한 것이 아니라 야곱을 생각하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이었다는 말입니다.

저도 이런 경우들을 늘 체험해 왔지요. 어떤 일을 이룸에 있어서 담당한 일꾼들의 믿음이나 행함을 봐서는 하나님께서 도저히 역사해 주실 수가 없는데, 그 일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일일 때는 하나님께서 저를 보시고라도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일꾼들만을 볼 때는 공의에 비추어서 응답해 주시기에 부족하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제가 마음에 품고 대신 기도와 간구를 올린 것을 받으시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서 역사 해주시는 것이지요.
그런데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처음에는 모세의 믿음에만 의지해서 나갔지만 나중에 가나안 땅을 정복해 들어갈 때는 자신들의 믿음으로 요단강을 밟고 여리고성을 돌았기 때문에 가나안 정복이 가능했다는 사실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언제까지나 일꾼들의 부족한 것을 저의 믿음으로 채워나가도록 하실 수는 없기에 때로는 일꾼들의 믿음만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도록 명하실 때가 있지요. 저에게는 관여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럴 때 일꾼들의 믿음이 부족하고 공의에 비추어 부족한 것이 있는 만큼 하나님의 일이 지연되기도 하고 온전히 이루어 드리지 못하는 경우도 생기지요.
그렇다 하여 이때 하나님의 섭리에 차질이 생기거나 하나님의 계획이 어긋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해서 일이 지연되거나 부분적으로 이루어질 것도 다 아시고 미리 그러한 것까지도 계산에 넣으셔서 모든 섭리를 계획하셨기 때문이지요.
저도 이러한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때로는 더딘 것 같아도 인내하고 참아주며 일꾼들이 더 큰 믿음으로 성장하여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는 그릇들로 변화되기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봐주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면서 발생하는 일에 대한 책임은 결국 제가 홀로 다 지고가야 하지만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셔서 결국 라반은 자신이 찾으려던 드라빔을 찾지 못합니다. 그러자 상황이 순간에 역전이 되지요. 지금까지는 야곱이 아무래도 자신이 몰래 도망한 사실로 인해 라반 앞에서 한발 뒤로 물러나 수그리고 있는 상태였는데 이제 야곱은 자신의 무죄함이 밝혀지자 오히려 라반을 몰아세우기 시작합니다. 라반에게 노를 발하며 책망까지 하고 있지요.
36절에 “야곱이 노하여 라반을 책망할세 야곱이 라반에게 대척하여 가로되 나의 허물이 무엇이니이까 무슨 죄가 있기에 외삼촌께서 나를 불같이 급히 쫓나이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대척(對蹠)이란 등지다 정반대가 되다라는 뜻입니다. 죄 없는 자신을 마치 죄인을 잡으려는 듯이 급하게 쫓아오기까지 한 라반에게 그동안 쌓인 감정을 드러내고 있지요.
라반이 겉으로는 딸들과 손자들에게 작별 인사라도 하러 온 것처럼 말했지만 그 속마음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니었기에 이것을 잘 아는 야곱은 라반의 그러한 속마음을 꼬집어 책망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육의 사람의 일반적인 속성이지요.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일 때는 잔뜩 자세를 낮추어 몸을 사리다가도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이 되면 이내 목소리를 높이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는 감정을 눌러놓았다가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함께 폭발하면서 이전의 감정까지도 다 나오고 마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을 섬길 때도 순간순간의 유익에 따라 변하게 됩니다.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사람에게는 잘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소홀히 대하거나 무례히 대하기도 하지요. 그러니 이런 사람은 윗사람을 섬길 때도 단지 질서나 권세 앞에 굴복하는 것이지, 마음 중심에서 진정으로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였지요. 라반이 급하게 자신을 쫓아왔을 때 라반 앞에 정말 마음 중심에서 자신을 낮추고 겸비한 자세로 라반을 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래도 자신의 행동이 정당하지 못했고 상황이 자신에게 불리한 것 같으니까 그 순간의 위기만을 모면하려는 마음에서 라반의 마음을 맞추려 했던 것이지요.
그러다가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자 이내 목소리를 높이며 라반에게 노를 발하고 책망까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지난 20년 동안 외삼촌을 위해 얼마나 애쓰고 힘쓰며 수고했는데 외삼촌이 어찌 나에게 이렇게 대할 수가 있느냐’는 그동안의 서운함과 감정까지도 함께 드러내며 라반을 몰아세우고 있지요.
그러면서 먼저 37절에서는 야곱이 자신의 무죄함을 마음껏 드러내고 있습니다. “외삼촌께서 내 물건을 다 뒤져 보셨으니 외삼촌의 가장집물 중에 무엇을 찾았나이까 여기 나의 형제와 외삼촌의 형제 앞에 그것을 두고 우리 두 사이에 판단하게 하소서” 했던 것이지요. ‘자신의 물건을 뒤져 보았을 때 그 안에서 외삼촌의 소유물 중에 어떤 것이라도 찾았다면 어디 한번 그것을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내놓아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38-40절은 야곱이 자신의 정당함과 의로움을 주장하는 내용이지요. “내가 이 이십년에 외삼촌과 함께 하였거니와 외삼촌의 암양들이나 암염소들이 낙태하지 아니하였고 또 외삼촌의 양 떼의 수양을 내가 먹지 아니하였으며 39물려 찢긴 것은 내가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지 아니하고 스스로 그것을 보충하였으며 낮에 도적을 맞았든지 밤에 도적을 맞았든지 내가 외삼촌에게 물어내었으며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내었나이다”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물론 지금 야곱이 말하고 있는 육의 성실함 분야는 참으로 칭찬할 만하고 본받을 만한 모습입니다. 야곱에게 바로 이러한 성실함이 있었기에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고 행한 대로 갚아주시는 하나님께서도 야곱에게 축복을 주실 수가 있으셨던 것이지요. 외삼촌 라반의 양 떼를 자신의 양 떼처럼 성심, 성의껏 책임을 다하며 돌보고 살폈기에 야곱은 자신이 그동안 행한 것으로 인해 충분히 축복을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야곱의 모습과 비교할 때 여러분 자신의 모습은 어떠한지 한번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직분과 사명을 맡은 자로서 나는 과연 얼마나 성실과 책임을 다해 맡겨진 일들을 이루었는가’ 말입니다.
야곱은 삯을 받는 품꾼과 같은 위치에서도 이처럼 최선을 다해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감당했지요. 일반적으로 삯을 받는 품꾼이라면 맡겨진 일을 자신의 일처럼 여기기가 쉽지 않고 책임감을 갖기도 쉽지 않습니다. 보통은 주인의 눈치를 보면서 대충 대충 시간만 보내고 삯을 받으려는 경향이 많지요.
그런데 여러분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면서 결코 삯을 받는 일꾼과 같아서는 안 됩니다. 엡 6:6-7에 보면 육체의 상전에 대해서도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말씀하셨지요.
하물며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라면 어떤 마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또한 이 땅에서 주어지는 삯만을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하나님 앞에서도 합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받을 상급이 하나도 없으니 아무리 수고했다 해도 결국 아무 소용이 없음을 알아야 하지요.
저와 여러분은 이 땅의 삶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장차 영원한 천국에서 세세토록 주어질 영광과 상급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소망과 확신을 가지고 있다면 아버지 하나님의 일을 맡은 자로서 당연히 나의 일처럼 여기며 주인의식과 책임감을 가지고 성실과 인내로서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게 되지요.

그러면 지금부터 야곱의 모습을 통해 ‘나는 과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할 때 어떤 모습이었는지’ 여러분 자신과 한번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첫째로 야곱은 암양들이나 암염소들이 낙태하지 않도록 돌보았습니다.
이는 곧 영혼들을 실족시키지 않는 것을 뜻하지요.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한데 그러한 한 영혼, 한 영혼을 얻는 것이 얼마나 귀합니까? 그런데 이렇게 한 영혼을 얻기 위해서는 해산하는 수고와 함께 그 영혼이 잘 자라도록 살피고 돌보아야 하지요. 자신의 믿음으로 밥 먹는 신자가 될 때까지는 늘 돌보고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영혼을 생명으로 낳아서 잘 양육해야 하는 사명을 맡은 사람이 오히려 영혼을 실족시켜 버리고 만다면 어찌 되겠는지요? 마 18:6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하신 말씀을 꼭 명심해서 혹여 여러분 자신으로 인해한 영혼이라도 실족케 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둘째로 야곱은 외삼촌의 양 떼 중에 수양을 먹지 않았습니다.
수양과 암양의 가치를 비교하자면 암양의 가치가 더 크지요. 암양은 새끼를 낳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암양은 물론이고, 수양조차도 자신이 먹지 않았다 말하고 있지요. 이는 하나님의 것은 조금이라도 결코 사사롭게 취하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야곱은 삯꾼으로 일하면서도 이처럼 외삼촌의 소유를 사사롭게 취하지 않았지요.
하물며 하나님의 일을 맡은 일꾼으로서 만약 하나님에게 가야할 것을 중간에 자신이 사사로이 취한다면 어찌되겠습니까? 이는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으로서 큰 담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도적질이라고 하면 눈에 드러나게 어떤 것을 훔치는 것만 생각하는데 꼭 그런 것만 도적질이 아니지요. 예를 들어 하나님의 것 즉 교회에 속한 물건을 자신의 임의대로 함부로 쓰는 것도 결국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 됩니다.
이 시간에 그런 예들을 일일이 다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것이 사사로이 쓰여지거나 교회에 드려져야 할 것이 개인에게 사사로이 가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할 것입니다.

세 번째로 야곱은 외삼촌에게 손해가 가지 않도록 했습니다.
물려 찢긴 것이 있으면 스스로 보충했고 도적맞은 것도 자신이 물어내었지요. 이는 곧 맡겨주신 양 떼를 잃어서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손해가 가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물질이 손해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지요. 예를 들어 양 떼를 맡은 주의 종이나 일꾼으로서 처음에 맡겨주신 양 떼보다 나중에 계수(計數)할 때 남은 양 떼가 적다면 이는 실로 하나님 앞에 너무나 부끄럽고 민망한 일입니다. 사실 책망을 들을 일이지요.
특히 주의 종은 맡겨진 양 떼를 치는 목자로서 그의 사명은 기존의 양 떼들이 실하게 잘 자라도록 하며 새롭게 새끼들도 많이 낳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존의 양 떼들도 파리하게 만들어 버리고 그래서 새끼도 못 낳는 상태로 만들기 때문에 처음 맡겨주신 양 떼조차 지키지 못하여 결국 하나님의 나라에 손해가 가는 것이지요. ‘과연 나에게 맡겨주신 양 떼들은 실하게 잘 자라고 있는가? 또 새끼들은 잘 낳아가고 있는가?’ 영혼을 맡은 주의 종과 일꾼으로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손해가 나도록 해서는 안 되는데 예를 들어 100원이면 할 수 있는 일을 200원을 들여서 했다면 이는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손해를 입힌 것이지요. 오히려 100원에 해야 할 일도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재정을 더 아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지요?
이처럼 하나님의 재정이라면 내 것을 쓰는 것보다 더 신중하고 아껴서 써야 할 텐데, 마치 ‘내 것이 아닌데 이쯤은 어때’라는 식으로 하나님의 재정을 헤프게 쓰고 낭비해 버린다면 이는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 못지않게 하나님 앞에서 합당하지 않은 모습이라는 사실입니다.

네 번째로 야곱은 더위와 추위도 상관하지 않고 눈 붙일 겨를조차 없이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 죽도록 충성하는 것을 뜻하지요. 계 2:10 후반 절에 보면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잠시 잠깐인 이 땅의 삶 동안 내 삶의 평안과 안위만을 구한다면 결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충성할 수가 없지요. 내 것을 포기하는 만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충성할 수가 있습니다. 야곱은 자신을 먼저 생각하지 않았지요. 비록 더위와 추위로 고통을 받는다 해도 잠 잘 시간조차 없다 해도 야곱은 주어진 사명이 먼저였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처럼 자신을 비우고 버릴 때만이 하나님의 일이 먼저고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충성된 주의 종이요 일꾼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따라서 죽도록 충성한다는 것은 단지 육적인 충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자기를 버리며 육을 벗고 성결되어 가면서 육적으로도 충성할 때만이 진정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충성이 될 수 있지요.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네 가지 분야로 살펴본 대로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양 떼를 돌보던 모습은 영적으로 많은 깨우침을 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영적으로 잘 접목시켜서 주어진 사명을 감당해 나간다면 누구나 열매내며 칭찬받을 수가 있지요.
이 시간, ‘나는 야곱과 비교해 볼 때 지금까지 어떤 모습이었나’를 돌아보시고 발견되어지는 부족된 면을 변화시키셔서 이후로는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을 받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야곱이 외삼촌 라반에게 ‘자신이 어떻게 외삼촌의 가축을 돌보았는지’를 설명하는 내용을 보면서 그가 왜 하나님 앞에 쓰임받을 수 있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야곱에게는 그처럼 누구도 따라 올 수 없는 육적인 성실함과 책임감이라는 장점이 있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야곱을 택하신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야곱의 말을 통해 그가 왜 연단을 받아야 했는지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야곱이 지금 외삼촌에게 설명하고 있는 내용은 모두가 사실이고 칭찬받을 만한 것이지만 이런 말을 하는 야곱의 마음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지금 야곱이 선한 마음에서 이렇게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지요. 야곱은 ‘자신이 이처럼 모진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외삼촌의 가축을 돌보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에도 이러한 자신을 대하는 외삼촌의 태도는 너무나 잘못된 것이다’라고 따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야곱이 말한 내용은 옳은 것이었지만 그 말을 하는 목적 자체는 결국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려는 의도에서였지요.
이처럼 야곱은 늘 어떤 일을 하거나 말을 해도 결국에는 자신의 입장과 유익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온전히 자신이 깨어지고 낮아져서 나오는 마음 중심에서의 행함이나 말이 아니라 늘 자신 편에 유리한 뭔가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이러한 면 즉 간교한 면을 깨뜨려 쓰시고자 20년간의 연단을 허락하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이지요.
오늘날에도 이런 모습들이 있습니다. 분명 육적으로 볼 때는 성실하고 책임감도 있으며 특별히 흠이 될만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영적으로는 더 뚫고 나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또한 겉으로 볼 때는 행동이나 말이 선한 것 같고 특별히 악한 모습이 발견되지 않는데도 영적인 성장이 더딘 경우를 보게 되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신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그 중심에 여전히 자기 의와 틀, 자기 생각과 자기 유익을 구하는 마음 등이 남아 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발견하여 깨뜨리고 버리도록 하시기 위해 연단을 허락하시는 것이고요.
여러분은 창세기 강해를 통해 듣게 되는 야곱과 그 외의 여러 인물들의 마음을 통해 여러분의 마음 안에도 혹시 그들과 같은 마음이 있지는 않은가 돌아보고 발견하는 축복의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신속히 여러분 안에 ‘자기’는 없고 오직 진리 즉 우리 주님의 마음만이 남게 되는 영의 사람들로, 온 영의 사람들로 나와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끝)


2005-04-30 오후 4:10:16 Posted
2018-05-07 오후 12:00:33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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