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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철야 예배

제목
창세기 강해(170)  [창31:1-16]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05.04.22
창 31:1-16
야곱이 들은즉 라반의 아들들의 말이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인하여 이같이 거부가 되었다 하는지라
야곱이 라반의 안색을 본즉 자기에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더라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지라

야곱이 보내어 라헬과 레아를 자기 양떼 있는 들로 불러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그대들의 아버지의 안색을 본즉 내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러할찌라도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느니라
그대들도 알거니와 내가 힘을 다하여 그대들의 아버지를 섬겼거늘
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역하였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금하사 나를 해치 못하게 하셨으며
그가 이르기를 점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떼의 낳은 것이 점 있는 것이요
또 얼룩무늬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떼의 낳은 것이 얼룩무늬 있는 것이니
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짐승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
그 양떼가 새끼 밸 때에 내가 꿈에 눈을 들어 보니
양떼를 탄 수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 아롱진 것이었더라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내게 말씀하시기를 야곱아 하기로
내가 대답하기를 여기 있나이다 하매 가라사대 네 눈을 들어 보라
양떼를 탄 수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 아롱진 것이니라
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나는 벧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

라헬과 레아가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우리 아버지 집에서 무슨 분깃이나 유업이나 있으리요
아버지가 우리를 팔고 우리의 돈을 다 먹었으니 아버지가 우리를 외인으로 여기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에게서 취하신 재물은 우리와 우리 자식의 것이니
이제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르신 일을 다 준행하라


서론

야곱이 점차 부를 쌓아 가게 되자 라반과 그의 아들들은 야곱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라반의 아들들의 말과 라반의 얼굴에서도 곧바로 드러나고 있지요. 라반의 아들들은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인하여 이같이 거부가 되었다” 말하였고 라반 역시 안색을 보니 예전에 야곱을 대하던 것과는 달랐습니다. 자기 유익에 맞지 않으니 즉시로 이러한 모습이 나왔던 것이지요.
이처럼 자기 유익에 맞지 않는 일 앞에서 금방 안색이 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지면서 언성이 높아지기도 하지요. 혈기를 내며 폭발해 버리는 경우도 있구요. 여러분 자신의 모습은 어떠한지 스스로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본인은 얼굴색이 변한 것을 모르고 언성을 높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이 볼 때는 감정 섞인 표정과 말에 가시가 돋친 것이 느껴지게 되지요. 이렇게 안색이 변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 안에 감정이 있고 악이 있음을 스스로가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3:9 전반절에도 보면 “그들의 안색이 스스로 증거하며” 말씀했지요. 그렇다하여 상대의 얼굴 표정만 보고 판단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속에 있는 것을 겉으로 내색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무엇보다 사람의 중심은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라반과 같이 속에 있는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겉으로 드러내고 마는 수준에 있는 사람이라면 선의 단계에 비추어 볼 때에 자신의 모습을 정확히 분별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라반의 아들들이 했던 말로 인해 야곱과 라반 사이가 더욱 금이 가게 되었던 것처럼 자신의 입술의 말이 사람들 사이에 화평을 가져다주게 하는 말인지 아니면 화평을 깨는 말인지도 돌아보아야 하지요. 우리가 고의적으로 악을 행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결국 마음에 있는 것이 입술로 나오기 때문에 마음에 있는 악으로부터 자신도 모르게 이간시키는 말, 상대를 상처 주는 말, 지시하고 명령하는 말 등이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같은 말이라도 해야 할 자리와 하지 말아야 할 자리를 분별하고 상대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분별하며 꼭 필요한 말인가 아닌가도 분별하여 말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말의 실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늘 진리의 선한 말만을 낼 수 있습니다.


본론

1. 모든 탓을 라반에게 돌리는 야곱

마침내 하나님께서도 야곱으로 하여금 고향 땅으로 돌아가도록 지시하십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정하신 ‘때’가 된 것이지요.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갈 본격적인 준비를 하면서 먼저 라반의 딸들이자 자신의 아내인 라헬과 레아에게 상황을 설명합니다. 이때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는 정당성에 대해 설명을 하면서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들까지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왔다고 말하면 될 텐데 라반의 부당함을 거듭 강조하였습니다. 라반을 위해 힘을 다해 섬겼음에도 라반이 자신을 부당하게 대했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모든 탓을 라반에게 돌리며 모든 것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해석하고 있습니다.
7-9절에 “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역하였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금하사 나를 해치 못하게 하셨으며 그가 이르기를 점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 떼의 낳은 것이 점 있는 것이요 또 얼룩무늬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 떼의 낳은 것이 얼룩무늬 있는 것이니 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짐승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 말합니다. 라반은 부당하고 자신은 정당하기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키셨고 라반의 짐승을 빼앗아 자신에게 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분명 자신의 지혜 가운데 꾀를 내어 라반의 재산을 가지고 자신의 부를 쌓은 것임에도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요, 섭리라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야곱이 부를 쌓아서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일이지만 야곱이 사용한 방법까지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은 아니지요.
그럼에도 야곱은 자신이 사용한 방법을 마치 하나님께서 친히 보장하시고 역사하신 것처럼 말합니다. 야곱이 좀 더 선한 마음을 가졌다면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굳이 라반의 부당함을 더 크게 부각시켜서 말하지는 않았겠지요. 또한 자기 생각과 지혜 가운데 한 일을 마치 하나님의 뜻 가운데 한 것처럼 포장하여 말하지도 않았을 것이구요.
오늘날도 이런 모습을 흔히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굳이 다른 사람의 부당함까지 들추어내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상대방의 허물이나 잘못을 더 크게 부각시키고 드러내어야 상대적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확실하게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또는 “다른 사람은 이렇게 하는데 나는 그러지 않았다”라든가 “다른 사람도 다 그러는데 왜 나만 잘못되었다고 하느냐”는 등 자신을 지키고 정당화하기 위해 쉽게 다른 사람의 탓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의 행동이 마치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따라 행한 것처럼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잘못된 일은 무조건 남의 탓이고 자기에게 유리한 일은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주장해서 밀고 나간다는 말입니다.
야곱에게서도 두 가지 경우가 다 나타나고 있습니다. 라반의 부당함을 드러냄으로 모든 탓을 라반에게 돌림과 동시에 자신의 행동은 모두가 하나님의 뜻과 섭리 속에서 지킴받고 보장받는 것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2. 꿈을 통해 야곱이 부(富)를 쌓아 갈 수 있도록 허락하신 하나님

10-13절에 “그 양 떼가 새끼 밸 때에 내가 꿈에 눈을 들어 보니 양 떼를 탄 수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 아롱진 것이었더라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내게 말씀하시기를 야곱아 하기로 내가 대답하기를 여기 있나이다 하매 가라사대 네 눈을 들어 보라 양 떼를 탄 수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 아롱진 것이니라 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나는 벧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 했습니다.
이러한 꿈 이야기만 들으면 양 중에 얼룩무늬 있고 점 있으며 아롱진 것이 야곱의 소유가 된 것이 마치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 자신의 지혜에서 나온 자기적인 방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얼룩무늬 있고 점 있으며 아롱진 것이 그의 소유가 될 것을 꿈으로 보여 주시며 야곱이 자신의 지혜 가운데 방법을 동원하여 부를 쌓아가도록 허락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야곱이 그동안 성실과 행함으로 심었던 것에 대해 공의 가운데 합당한 열매를 거둘 수 있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계획하신 섭리 가운데 야곱이 축복을 받도록 그와 함께하시며 그를 지켜 주시기는 했지만 야곱이 행한 방법까지 다 주관하신 것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다만 야곱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인 바라봄의 법칙을 자기 나름대로 활용하여 부를 쌓아 갈 수가 있었다는 말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야곱의 마음을 다시 한 번 알 수가 있습니다. 라반과 함께하면서 그처럼 연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아직도 온전하지 못한 가운데 자기 생각과 자기 방법을 동원해 나가고 있지요. 예를 들어 야곱이 지금 고향을 향해 떠나려는 것은 물론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처신이 옳았던 것은 아닙니다.
야곱이 급하게 떠나려고 하는 것은 라반이나 라반의 아들들과의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갈등을 피하려는 의도가 크지요. 즉 먼저 라반의 마음을 풀어 줄 방법이나 그와 화평함을 좇을 선한 방법을 찾기보다는 어떻게든 자신의 것을 지키면서 동시에 불편한 상황을 피하기 원함으로 당장 떠나려고 했다는 말입니다.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좇는다고 하지만 그 내면에는 자기 생각과 계획이 있었던 것이지요. 아브라함처럼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고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리라”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야곱이 도망하듯 라반에게서 떠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얼마든지 라반과의 관계도 화평함 속에서 아름답게 마무리를 한 후에 떠났겠지요.
물론 야곱이 라반과의 화평을 좇기 위해서는 자신의 소유를 어느 정도 다시금 라반에게 내어주어야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욕심 많고 이미 마음이 상해 버린 라반이 야곱을 순순히 보내 줄 리가 없을 테니까요. 야곱은 그렇게까지 해서 라반과 화평을 좇으려는 마음보다는 자신의 것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컸습니다. 그러다 보니 야곱은 라헬과 레아의 동의를 얻자마자 곧바로 자식들과 아내들과 모든 소유를 챙겨서 라반에게는 한 마디 말도 없이 길을 떠나지요. 이때 라헬과 레아가 남편 야곱의 제안을 순순히 따랐던 데에도 사실 숨은 뜻이 있었습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서 나는 라반의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비진리 또는 야곱의 어떠한 비진리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야곱의 아내들의 비진리를 나도 가지고 있지 않은가? 내 마음도 그렇지 않은가를 살피고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3. 재산으로 인해 야곱의 뜻에 따르겠다고 하는 라헬과 레아

14-16절에 “우리가 우리 아버지 집에서 무슨 분깃이나 유업이나 있으리요 아버지가 우리를 팔고 우리의 돈을 다 먹었으니 아버지가 우리를 외인으로 여기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에게서 취하신 재물은 우리와 우리 자식의 것이니 이제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르신 일을 다 준행하라” 말씀합니다.
라반이 자신들에게 어찌 행했든 그래도 아버지인데 라헬과 레아는 마치 감정 있는 사람처럼 아버지 라반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말의 내용을 잘 살펴보면 그들이 불만을 가지게 된 주된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알 수 있지요. 바로 재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들에게 돌아올 분깃이나 유업이 없는 것에 대한 불만이었지요. 더욱이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에게서 취하신 재물은 우리와 우리 자식의 것이니”라는 말을 보면 재물에 대한 강한 집착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는 결국 라헬과 레아가 남편 야곱의 편을 전적으로 들어 주고 있는 것이 단순히 라반의 부당함이나 야곱의 정당함을 인정했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 주지요. 겉으로는 “이제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르신 일을 다 준행하라” 하며 남편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좇으라는 식으로 말을 하고 있지만 이렇게 말하고 있는 마음 속에는 자기 유익을 구하며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부를 지키려는 마음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남편 야곱과 아버지 라반을 비교해 볼 때 야곱 편에 서는 것이 자신들에게도 훨씬 유리하고 득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지요. 아버지에 대한 자녀의 도리보다도 자기 유익을 먼저 앞세우고 있는 모습입니다.
만약 라헬과 레아가 아버지에 대한 도리를 다하는 사람이었다면 떠날 땐 떠나더라도 이처럼 아버지에 대해 단번에 등을 돌리기보다는 남편과 아버지를 화해시키는 길을 찾았겠지요. 이렇게 떠나고 나면 남편과 아버지의 사이가 완전히 금이 간다는 것을 잘 알 테니 말입니다. 본인들도 다시 아비의 고향에 올 수도 없을 것이구요. 하지만 라헬과 레아는 선이나 도리보다는 자신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이었고 자신의 유익에 맞도록 적극적으로 남편의 편을 들어 주지요.

4.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도용(盜用)하고 망령되이 일컫지 말아야...

겉으로 볼 때는 똑같이 행동을 한다 해도 정작 중요한 것은 사람의 속마음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어떤 일을 이룬다는 것은 당연히 좋은 일이지요. 하지만 이때 단지 순수한 의도에서 정말 하나님의 뜻을 좇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을 하느냐, 그렇지 않고 다른 의도가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지요. 또는 자신의 것을 취하고 자기를 지키고자 하나님의 이름을 파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다” 하며 강압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밀고 나감으로 결국 화평도 깨어지고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게 되기도 하지요. 또 어떤 일에 대한 책임이 돌아오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었기에 내가 이렇게 한 것이다” 하며 역시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여 자신을 정당화 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명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도용하고 망령되이 일컬어서는 결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더욱이 자신의 의견을 하나님의 뜻이라 하면서 강압적으로 밀고 나가는 일은 없어야 하지요. 제가 아무리 하나님의 뜻을 많이 알고 있고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길인가를 잘 알고 있다고 해도 일꾼들이나 성도들에게 강요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는 것을 알려는 주지만 본인 스스로가 자유의지 가운데 선택할 수 있도록 하지요. 이처럼 사심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과 이름을 교묘히 이용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데 급급합니다. 또한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명분을 내세워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도 있지요. 말로는 “이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이름이 드러나고 자신의 명예가 드러나기 원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권세를 자신이 쓰려고 하고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자신이 받고자 하는 것이 얼마나 교만한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아무리 겉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 해도 정말 중요한 것은 그것을 행하는 사람의 마음과 목적인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면 항상 열매가 나타나야 하고 또 하나님의 말씀이면 그 말씀이 보장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 6:1에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말씀한 대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행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 앞에 드려져야 하지요.

5. 깊은 내면에 자기 유익을 구하며 자기 생각과 방법을 좇아 행한 야곱

그래도 믿음이 있어서 일꾼이 된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일로 어떤 선택을 할 때 일부러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게 하려는 경우나, 일부러 자기 유익을 구하려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자신은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것이며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는 쪽을 택한 것이라 하지요. 적어도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되는 쪽으로 일을 추진해 나갑니다. 그런데 막상 결과를 놓고 보았을 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가 나오지 않고, 그 일로 인해 화평이 깨어지며 상대가 힘들어하고 고통을 당한다면 자신을 한번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진리 안에서 스스로 만들어 놓은 틀 안에 있는 사람은 늘 자신이 하는 일은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진리라는 것이 여러분의 한계 속에서 틀로 만들어 놓을 만큼 그렇게 좁고 얕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진리는 너무나 깊고 넓고 무한하기 때문에 자신의 좁은 틀 안에 진리를 짜 맞추려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다는 것을 알아야 하지요. 예를 들어 사각형이 진리라고 하면 어떤 사람은 자신이 아는 정사각형만을 사각형이라 생각하며 진리라 고집합니다. 그러나 사각형에는 정사각형만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러므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한계 안에서의 진리의 틀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늘 더 넓고 깊게 보려는 마음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나는 이것이 진리라고 생각하는데 상대방은 저것을 진리라고 말한다면 적어도 왜 상대가 그것을 진리라 주장하는지 상대방의 입장도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지요. 그런데 여전히 자신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만을 주장하는 사람에게는 진리 안의 자유함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스스로 진리의 틀을 만들면 화평이 되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리의 틀로 인해 자신을 얽어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틀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도 강요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영을 향해 변화되어 가는 사람이라면 요 6:63에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말씀한 대로 많은 사람을 살리고 생명을 주어야 할 텐데 자기적인 진리의 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생명과 평안을 주는 것이 아니라 판단과 정죄로 인한 고통을 주게 되지요.
예를 들어 율법을 가지고 만들어 놓은 자기적인 진리의 틀 안에 매여 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눈에는 간음한 여인은 당장 돌로 쳐서 죽여야 하는 대상이었지요. 그러나 율법을 뛰어넘는 사랑의 눈을 가지신 예수님에게는 그 여인이 정죄받고 죽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회개하고 돌이켜서 죄사함받고 구원받아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이처럼 진리를 적용함에 있어서도 내 마음이 얼마나 주님의 마음을 닮았느냐에 따라 정확하게 주님의 뜻대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진리의 틀이 있다 하여 하나님께서 그것을 악하다 하지는 않으십니다.
물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경우는 마음에 할례는 하지 않은 채 행위적인 율법을 가지고 틀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했기에 그들에게는 사실 진리의 틀이라는 말 자체가 맞지 않지요. 그래서 우리 주님은 화 있을 진저 이 외식하는 자들아 말씀합니다. 이와는 달리 온전히 영으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에 있어서 때로는 아직 온전하지 못한 가운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진리 안에서 스스로 틀을 만들어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악하다 말씀하지는 않으신다는 말이지요.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이 정말 악한 의도에서 그렇게 한 것인지 아니면 아직 온전하지 못한 가운데서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진리의 틀이 있는 것인지를 정확하게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과 같이 마음에는 할례하지 않은 채 행위적인 율법을 가지고 진리라 하면서 틀을 만들어 놓은 경우와 악을 벗고 온전히 영으로 들어가기 위한 과정에서 스스로 진리의 틀을 만들어 놓은 경우와는 분명히 구분을 해야 합니다. 물론 진리의 틀도 하나님 앞에서는 합당한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께서는 온전한 영으로 이끄시고자 연단을 허락하셔서 그 틀을 깨도록 하시지만 사람 편에서 판단, 정죄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여 인도해 가시도록 해야 하지요.
야곱도 스스로는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잘 좇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 가운데 자신이 축복받고 때가 되어 고향을 향해 떠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겠지요. 이것이 바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비진리가 진리와 교묘하게 섞이면서 자신의 행동을 진리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도 속는 경우입니다. 이처럼 야곱은 여전히 그 깊은 내면에 자기 유익을 구하며 자기 생각과 방법을 좇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음에도 자기 스스로는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결국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철저히 깨어지는 역사가 있도록 허락하신 것이지요. 이렇게 야곱이 자기 생각과 방법을 동원하여 고향을 향해 떠났을 때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가 바로 드러납니다. 이 내용은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결론

여러분이 마음의 악을 발견하여 벗고 성결을 향해 달려갈 때 크고 굵직굵직한 것들을 발견하여 버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요. 자기 스스로는 물론이고 누가 보아도 당연히 악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은 쉽게 발견할 수가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신속히 버려 나갈 수가 있지요. 이렇게 하나하나 버려 나가다 보면 이제 어느 정도 악의 모양을 벗고 스스로 볼 때나 다른 사람이 볼 때도 경건한 모양을 갖추게 됩니다.
그런데 이쯤에서 죄와의 싸움을 휴전해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특별히 악의 모양이 드러나지 않고 주변으로부터도 어느 정도 인정받는 위치에 섰다싶으니 더 깊고 세미한 악의 모양을 발견하여 벗어 버리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게 되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안주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길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하신 것은 자기 보기에 이 정도다 싶을 때까지만 악을 버리라는 말씀이 아니지요. 악이란 그 속성상 조금만 뿌리를 남겨두어도 다시 자라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악의 모양을 온전히 뽑아내기까지는 결코 ‘이 정도면 되겠지’ 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아니 됩니다. ‘이 정도면 되겠지’ 생각이 들 때가 오히려 더욱 깨어 기도하며 자신을 발견하여 변화되어 가야 할 때입니다. 그러지 못하면 신앙의 성장이 정체된 채 미지근한 신앙으로 빠질 수도 있고 오히려 다시금 육으로 빠져들 수도 있지요.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온전히 깨어져 변화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딤전 4:5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하셨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 불같은 기도의 능력 가운데 쉬지 않고 기도해 가면 반드시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닮은 거룩한 영의 자녀가 될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열망과 소망을 잃지 말고 더욱 뜨겁고 충만하게 여러분의 목표를 향해 달려 나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4-25 Posted
2015-09-08 오후 2:02:05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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