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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철야 예배

제목
창세기 강해(169)  [창30:37-31:5]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05.04.15
창 30:37-31:5
야곱이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를 취하여 그것들의 껍질을 벗겨
흰 무늬를 내고 그 껍질 벗긴 가지를 양떼가 와서 먹는 개천의 물구유에 세워 양떼에 향하게 하매
그 떼가 물을 먹으러 올 때에 새끼를 배니 가지 앞에서 새끼를 배므로 얼룩얼룩한 것과 점이 있고 아롱진 것을 낳은지라
야곱이 새끼 양을 구분하고 그 얼룩무늬와 검은 빛 있는 것으로 라반의 양과 서로 대하게 하며
자기 양을 따로 두어 라반의 양과 섞이지 않게 하며 실한 양이 새끼 밸 때에는
야곱이 개천에다가 양떼의 눈앞에 그 가지를 두어 양으로 그 가지 곁에서 새끼를 배게 하고
약한 양이면 그 가지를 두지 아니하니 이러므로 약한 자는 라반의 것이 되고
실한 자는 야곱의 것이 된지라
이에 그 사람이 심히 풍부하여 양떼와 노비와 약대와 나귀가 많았더라

야곱이 들은즉 라반의 아들들의 말이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인하여 이같이 거부가 되었다 하는지라
야곱이 라반의 안색을 본즉 자기에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더라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지라 야곱이 보내어 라헬과 레아를 자기 양떼 있는 들로 불러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그대들의 아버지의 안색을 본즉 내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러할찌라도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느니라


서론

지난 시간에는 ‘바라봄의 믿음의 법칙’에 대해 설명을 드렸는데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바라봄의 대상이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야곱은 사랑하여 바라볼 수 있는 대상인 라헬이 있음으로 인해 연단 중에라도 감사하며 승리할 수가 있었지요. 이처럼 여러분에게도 소망의 목표나 대상이 있을 때 능히 연단 중에라도 기쁨과 감사함으로 승리해 나가기가 쉬운 것입니다.
그렇지만 소망의 목표나 대상이 결코 이 세상의 헛된 것이 되어서는 안 되지요. 이 세상의 것을 바라보게 되면 그것은 소망과 기쁨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절망과 고통으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당장에는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것 같지만 어차피 이 세상 육의 것들은 변질되기 때문에 온전한 소망의 목표나 대상이 될 수가 없지요. 오직 바라봄의 대상은 주님이 되셔야 하며 새예루살렘이 여러분의 소망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여러분의 믿음이 성장해 감에 있어서 가까이 바라보고 닮아갈 수 있는 신앙의 본이 될 만한 대상도 필요하지요. 그러한 대상이 있음으로 인해 그 모습을 보고 배움으로 한결 수월하게 믿음의 단계들을 통과해 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비롯하여 믿음의 선진들에 대해 기록해 놓으심으로 후대에 믿는 사람들에게 신앙의 본이 될 수 있게 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주님을 대신하여 양 떼를 갈무리하도록 주의 종들을 목자로 세워 주신 것도 이와 같은 목적에서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종이라면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목자로서 양 떼들에게 신앙의 본이 될 수 있어야 하지요. 단지 말로만 진리를 잘 가르친다고 해서 좋은 목자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먼저 행함의 본이 되며 믿음으로 양 떼들을 인도해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양 떼들이 가장 가까이에서 바라보며 닮아가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신앙의 푯대와 같은 역할을 해 주어야 합니다. 이러한 역할을 잘 감당해 준다면 위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것이고 양 떼들로부터도 당연히 사랑을 받습니다. 모든 주의 일꾼들과 성도님들도 서로서로 본받고 닮아 갈 수 있는 모습이 된다면 서로 간에 자신의 부족한 점을 발견하고 변화되며 상대의 좋은 점을 닮아 갈 수 있으니 얼마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교회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빌 3:17에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말씀합니다.
바라봄의 법칙이란 단지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닮아 간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영으로 바라본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 주는 법칙이지요. 그러므로 바라봄의 법칙은 많은 분야에 적용될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선한 사람을 보고 배우며 항상 선한 것을 듣고 선한 것을 말하려고 노력하면 자신도 더 쉽게 선을 이뤄낼 수 있지요. 반대로 늘 불평, 불만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 보면 자신도 불평하는 말을 배우게 되고 짜증을 잘 내는 사람을 가까이하다 보면 자신도 짜증스러운 말투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어떤 사람을 가까이하며 보고 배우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또한 바라봄의 법칙은 영적인 믿음을 갖기 위해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삼년 반의 가뭄 중에 비를 끌어 내리기 위해 기도할 때도 그는 바다에서 일어나는 사람의 손만한 작은 구름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바라본 대로 큰 비가 내렸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 선지자도 넘실거리는 홍해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았기에 바다가 갈라지고 길이 열리는 놀라운 역사를 체험한 것입니다. 육으로 바라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망망한 바다였지만 모세가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았기에 바다 가운데로 길이 났다는 사실입니다.


본론

1. 욕심 때문에 야곱의 꾀에 넘어간 라반

라반이 “내가 무엇으로 네게 주랴” 하며 야곱이 원하는 대로 품삯을 정하라고 했을 때 야곱은 육으로 볼 때는 참 어리석은 제안을 합니다. 하지만 야곱이 이렇게 제안을 했던 것은 이미 모든 상황을 계산해 넣은 것이었으며 결국 야곱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상황을 이끌어가지요. 결과적으로는 라반이 야곱의 꾀에 넘어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름대로 지혜가 있다고 하는 라반이 왜 야곱의 꾀에 넘어가고 말았을까요? 그것은 약 1:14에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라는 말씀처럼 자신의 욕심에 이끌렸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마음에서 욕심만 버려도 사리 분별을 정확히 할 수 있는 눈이 떠질 수 있는데 라반은 그만 당장 눈앞에 보이는 욕심을 좇았기에 그 후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해 보려는 마음조차 갖지 못했던 것이지요.
이렇게 해서 자신이 원하는 답을 얻은 야곱은 가축들에게 바라봄의 법칙을 적용하여 막대한 부를 쌓아 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때 야곱의 행동을 살펴보면 그가 단지 자신의 정당한 품삯만을 보상받으려는 순수한 마음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지요. 결코 선한 마음이라 할 수 없는 모습이 나옵니다. 야곱이 사용한 방법은 가축들이 물을 먹으러 와서 교미를 할 때 알록달록한 무늬의 나뭇가지를 보게 함으로써 그때 밴 새끼들이 얼룩얼룩하거나 점 있고 아롱진 것으로 나오도록 하는 것이었지요.
40절에 “야곱이 새끼 양을 구분하고 그 얼룩무늬와 검은 빛 있는 것으로 라반의 양과 서로 대하게 하며 자기 양을 따로 두어 라반의 양과 섞이지 않게 하며” 했습니다. 여기서 얼룩무늬와 검은 빛 있는 것으로 라반의 양과 서로 대하게 했다는 것은 흰색만을 띠고 있는 라반의 양들로 하여금 평상시에도 계속해서 얼룩 있고 검은 빛 있는 것을 보도록 만들었다는 뜻이지요. 새끼를 밸 때만 알록달록한 나뭇가지를 보게 한 것이 아니라 라반의 흰 양들로 하여금 평상시에도 계속해서 무늬 있고 검은 것을 보게 함으로써 라반의 양들이 바라봄의 법칙에 따라 더욱 확실하게 입력되어 무늬 있고 알록달록하며 점 있는 새끼들을 더 많이 낳도록 했습니다.
이어지는 41-42절을 보면 야곱이 자기 양과 라반의 양이 섞이지 않게 했던 이유를 알게 됩니다. “실한 양이 새끼 밸 때에는 야곱이 개천에다가 양 떼의 눈앞에 그 가지를 두어 양으로 그 가지 곁에서 새끼를 배게 하고 약한 양이면 그 가지를 두지 아니하니 이러므로 약한 자는 라반의 것이 되고 실한 자는 야곱의 것이 된지라” 말씀한 대로 야곱은 바라봄의 법칙을 교묘하게 적용하여 실한 양은 자신의 것이 되게 하고 부실한 양은 라반의 것이 되게 했던 것입니다. 사실 야곱이 단순히 그동안 품삯을 여러 번 변역하며 자신을 속이고 일만 시킨 라반으로부터 자신의 정당한 대가를 취하려고만 했다면 그의 행동을 어느 정도 이해해 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정당한 품삯을 받으려는 차원을 넘어 라반의 실한 가축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야곱이 교묘한 방법까지 동원한 것입니다. 이처럼 야곱은 하나님을 의지한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동원한 모습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연단하여 철저히 깨어지고 변화되도록 하셨습니다.

2.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면서 자기 생각을 동원한 야곱

하나님을 의지하고 의뢰한다는 것은 전폭적인 의지와 의뢰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야곱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 하면서도 늘 자기 생각과 자기적인 방법을 동원해 갔습니다. 형 에서를 속이고 장자권을 빼앗을 때도,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장자의 축복 기도를 받을 때도 또한 지금 자신이 노동한 대가에 대한 값을 찾을 때도 자기적인 육의 지혜가 동원되었지요. ‘어차피 처음부터 장자의 축복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기로 정한 것이니까…’ ‘어차피 장자에게 주어지는 축복 기도는 내가 받아야 하는 것이었으니까…’ ‘어차피 나는 내가 일한 것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찾아오는 것이니까…’ 야곱은 이렇게 이유를 댈 수도 있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야곱은 더더욱 자기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는 안 되었지요.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어차피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자신에게 돌아올 장자권이었고, 어차피 자신에게 돌아올 장자의 축복이었으며, 어차피 하나님의 지키심과 도우심으로 라반으로부터 정당한 대가를 찾아올 것이었다면 그 방법도 하나님께서 하시도록 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을 동원하지 아니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는 것과 자기 생각을 동원하는 것과는 하나님의 역사가 전혀 다릅니다. 무슨 일이든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한 것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지만 시작과 끝 모든 것을 생각을 동원해 버리면 “네 생각대로 해라” 하나님이 하시고 보시기만 하지요. 그러니까 기적을 볼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어떤 역사를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말로는 ‘하나님의 뜻이니까…’ 하면서도 막상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방법은 자신의 생각과 지혜를 동원하여 사람의 방법을 쓴다면 이는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한 것이 아니지요. 그런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 하면서도 실제로는 사람의 방법을 쓰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실 야곱의 경우도 그가 사용한 바라봄의 법칙 자체는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주신 지혜였지만 그것을 적용해 가는 방법은 온전히 하나님의 방법대로 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야곱의 입장에서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라반으로부터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없을 것 같아서 하는 수 없이 이런 방법을 썼습니다”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처한 상황보다 훨씬 더 힘든 상황에서도 아브라함을 축복해 가셨던 것을 봅니다.
창세기 20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를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빼앗기는 일이 있었지요. 이때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에게 꿈으로 역사하여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순순히 돌려보내도록 하십니다. 이에 아비멜렉은 사라만 돌려보낸 것이 아니라 양과 소와 노비까지 취하여 아브라함에게 주지요. 육적으로 보면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니 오히려 축복으로 돌아오더라는 말입니다.
이삭의 경우도 하나님께서는 이방인 땅에 거하는 그에게 한 해 농사의 수확을 무려 백 배나 더하심으로 거부(巨富)가 되도록 역사하셨지요. 이방인의 땅에서 이방인들의 눈치를 보며 농사를 지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축복 주시기로 정하시니 사람의 생각으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백 배의 축복이 임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어떤 상황에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역사해 주시면 어떤 상황, 어떤 조건에서도 반드시 축복받고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야곱이 축복을 받은 것도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야곱과 함께해 주셨기 때문이지만 그가 사용한 방법이 온전히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인도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43절에 “그 사람이 심히 풍부하여 양 떼와 노비와 약대와 나귀가 많았더라” 말씀한 대로 야곱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자신의 지혜로 축복을 받아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3. 야곱에게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한 라반과 그의 아들들

그러자 라반과 그의 아들들로부터 시기, 질투와 견제가 시작됩니다. 창세기 31:1-2에 “야곱이 들은즉 라반의 아들들의 말이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인하여 이같이 거부가 되었다 하는지라 야곱이 라반의 안색을 본즉 자기에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더라” 했습니다.
야곱은 라반의 집에서 살면서 자신을 낮춰야만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처가살이’라는 특수한 상황이기도 했지만 마치 품꾼과 같은 입장에서 일을 해야 했기에 마음 편히 지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지요. 그러다보니 늘 자신을 낮추면서 눈 밖에 나지 않아야 했던 것입니다. 야곱이 자신을 낮춘다는 것은 영적인 의미에서의 겸비함이나 섬김이 아니라 눈치를 보며 몸을 사리는 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점점 재산이 늘어나고 거부가 되어 갈수록 라반과 그의 가족들의 눈치도 더 살펴야 했습니다. 자신이 부자가 되어 가는 것을 볼 때 욕심이 많은 라반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라 예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늘 라반 쪽의 상황에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여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살펴야 했습니다.
어느 날 라반의 아들들이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인하여 이같이 거부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에 야곱이 라반의 안색을 살펴보니 자신을 대하는 라반의 안색이 예전 같지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육의 사람들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육의 사람들은 상대의 잘되는 것을 함께 기뻐해 주지 못하며 혹여나 자신의 것이 침해당하지는 않을까 하여 서로를 견제한다는 사실입니다. 야곱도 자신의 부가 늘어날수록 라반을 경계하는 모습이었고 라반과 그의 아들들도 야곱의 부가 늘어날수록 야곱을 경계하는 모습이었지요. 그러니 야곱과 라반의 사이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 금이 가며 화평이 깨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는 결국 서로가 자기의 유익만을 구하는 육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하십니까? 진정 상대가 잘되기를 원하며 상대가 잘되는 모습을 보면서 함께 기뻐해 줄 수 있는 모습이신지요? 자신이 생각하기에 ‘이 정도까지는 괜찮겠다.’ 했는데 그 이상을 넘어가게 되니 혹시 그때부터는 견제하고 경계하지는 않았습니까? 마음 안에서 시기, 질투하는 마음을 온전히 벗어내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영적인 사랑이 임했을 때만이 진정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을 좇을 수 있습니다.

둘째로, 육의 사람은 설령 본인은 의도하지 않았다 해도 사람들 사이를 이간하는 말이나 행동이 나오기도 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의 라반의 아들들이 바로 그러했지요. 만약 라반의 아들들 중에 선한 아들이 있어서 아버지 라반에게 야곱에 대해 좋은 말, 선한 말을 했다면 야곱과 라반의 사이가 금이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화평하게 되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실 야곱의 소유가 그처럼 늘어났다면 라반의 소유도 함께 늘어났겠지요. 물론 야곱이 꾀를 써서 자신의 소유를 더 늘려 가기는 했지만 라반의 소유도 늘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라반의 아들들이 야곱의 소유가 늘어나는 것만 말하지 말고 라반의 소유도 함께 늘어난 것에 대해 말한다든지 그동안 야곱으로 인해 자신들이 축복받은 것에 대해 상기시켜 줄 수도 있었겠지요. 라반의 아들들이 좀 더 선했다면 ‘그동안 야곱이 우리 집을 위해 수고한 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갚아 주시는가 보다’ 하며 야곱을 좀더 적극적으로 변호해 주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인정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라반의 아들들은 오히려 야곱이 자기들의 아버지의 소유를 빼앗았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러니까 점점 사이가 나빠질 수밖에 없고 나중에는 야곱이 삼촌에게 말도 하지 않고 도망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잠언 17:9에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했는데, 라반의 아들들은 사랑을 구하는 자가 아니라 야곱과 라반 사이를 더더욱 이간시키고 깨뜨리는 자들이 되었지요. 이제 야곱은 더 이상 라반과 함께 머무를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3절을 보면 이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말씀하시며 이제 고향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음을 알려 주십니다. 그렇다 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야곱에게 나타나 음성을 주신 것은 아니며 다만 야곱이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역사해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본격적으로 고향을 향해 떠날 준비를 합니다.
먼저 라헬과 레아의 마음을 온전히 자기 편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4-5절에 “야곱이 보내어 라헬과 레아를 자기 양 떼 있는 들로 불러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그대들의 아버지의 안색을 본즉 내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러할지라도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느니라” 했습니다. 야곱은 자신의 정당성과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하심으로 자신이 오늘날 이같이 축복을 받게 되었음을 부인들에게 설명합니다. 마침내 야곱은 자식들과 아내들과 모든 소유물을 가지고 아버지 이삭이 있는 가나안 땅을 향해 떠나게 되는데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결론

야곱이 이처럼 크게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온전해서가 아닙니다. 아직은 자기 생각도 남아 있고 자기 지혜 가운데 나와진 방법도 사용했지만 하나님께서 야곱과 함께하시며 그를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로, 야곱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했습니다. 믿고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을 그만큼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이미 살펴본 대로 야곱이 라반에게 한 제안은 육으로 볼 때 너무나 불리한 제안이었지요. 그런데도 야곱이 이러한 제안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라 했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육으로 볼 때는 아무리 자신에게 불리해 보이고 상황이 안 좋아 보인다 해도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시면 반드시 축복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믿은 것이지요. 물론 야곱이 자신의 지혜 가운데 간교한 꾀를 낸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지만 야곱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자신과 함께하시며 축복 주신다는 사실만은 전적으로 믿었습니다.
둘째로, 야곱이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고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의 공의의 법칙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봉사하며 오직 성실과 책임감으로 일했지요. 비록 그 봉사가 아내를 얻기 위한 것이었지만 야곱은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해서는 마치 자신의 일과 같이 온 마음과 정성을 다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성실함으로 마음과 정성을 다해 행한 것을 결코 헛되지 않게 하신 것이지요.
야곱이 만약 라반의 눈만 속이려는 마음으로 게으름을 부리거나 꾀를 써나갔다면 야곱으로 인해 라반이 축복을 받기도 어려웠을 것이고 야곱도 인정받는 사람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일단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대해 하나님께서도 인정해 주실 만큼 성실과 인내와 정성으로 심고 행했기에 결국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고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공의에 따라 축복을 받을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므로 사람 앞에서도 물론이겠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의 성실과 책임감 그리고 정성을 인정받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여러분이 심고 행한 대로 갚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갈라디아서 6:7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말씀한 대로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믿음과 정성으로 심고 행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대로 거두게 하시지요. 그래서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을 만큼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일을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도 믿음과 정성으로 변함없이 심고 행하는 분들은 반드시 축복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셋째로, 야곱이 축복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주관하심을 받았을 때 그대로 순종해 나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축복해서 그로 하여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시려고 때가 되자 그의 마음을 주관해 주셨지요. 이에 야곱은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충분한 부를 쌓을 수가 있었고 정말 때가 되어 “떠나라” 하셨을 때도 즉시로 순종해 떠나는 것을 볼 수가 있지요.
이처럼 여러분도 상황과 조건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업을 하다보면 어떤 결정을 할 때 ‘지금인가? 아닌가? 언제인가?’를 생각해야 하고 ‘이것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늘 생각해야 하는데 이때 사람의 생각이 들어가서 자기 보기에 좋은 대로 좇아가게 되면 결국 자기 능력과 한계 안에서만 이루게 되지요. 그러나 성령께서 주관해 주시는 대로 인도받게 되면 이삭이 한 해에 백 배의 축복을 받았던 것처럼 사람의 능력과 한계 이상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모든 일을 이룸에 있어서 정도를 걷고 육의 지혜가 아닌 위로부터 난 선의 지혜를 받아 나간다면 반드시 축복을 받게 됩니다. 히브리서 11:1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말씀한 대로 믿음으로, 선으로 바라보는 것마다 실상으로 나타난 바 되어 아버지 하나님께 마음껏 영광 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4-18 오전 9:21:08 Posted
2015-09-08 오후 2:02:05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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