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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철야 예배

제목
창세기 강해(168)  [창30:25-43]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05.04.08
창 30:25-43
내가 외삼촌에게서 일하고 얻은 처자를 내게 주어 나로 가게 하소서
내가 외삼촌께 한 일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라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로 인하여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니
네가 나를 사랑스럽게 여기거든 유하라 또 가로되 네 품삯을 정하라 내가 그것을 주리라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가 어떻게 외삼촌을 섬겼는지, 어떻게 외삼촌의 짐승을 쳤는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내가 오기 전에는 외삼촌의 소유가 적더니 번성하여 떼를 이루었나이다
나의 공력을 따라 여호와께서 외삼촌에게 복을 주셨나이다
그러나 나는 어느 때에나 내 집을 세우리이까

라반이 가로되 내가 무엇으로 네게 주랴 야곱이 가로되
외삼촌께서 아무 것도 내게 주실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하여 이 일을 행하시면 내가 다시 외삼촌의 양떼를 먹이고 지키리이다 오늘 내가 외삼촌의 양떼로 두루 다니며 그 양 중에 아롱진 자와
점 있는 자와 검은 자를 가리어내며 염소 중에 점 있는 자와 아롱진 자를 가리어 내리니
이같은 것이 나면 나의 삯이 되리이다 후일에 외삼촌께서 오셔서 내 품삯을 조사하실 때에
나의 의가 나의 표징이 되리이다 내게 혹시 염소 중 아롱지지 아니한 자나 점이 없는 자나
양중 검지 아니한 자가 있거든 다 도적질한 것으로 인정하소서 라반이 가로되 내가 네 말대로
하리라 하고 그 날에 그가 수염소 중 얼룩무늬 있는 자와 점 있는 자를 가리고 암염소 중
흰 바탕에 아롱진 자와 점 있는 자를 가리고 양 중의 검은 자들을 가려 자기 아들들의 손에
붙이고 자기와 야곱의 사이를 사흘길이 뜨게 하였고 야곱은 라반의 남은 양떼를 치니라

야곱이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를 취하여 그것들의 껍질을 벗겨
흰 무늬를 내고 그 껍질 벗긴 가지를 양떼가 와서 먹는 개천의 물구유에 세워 양떼에 향하게 하매 그 떼가 물을 먹으러 올 때에 새끼를 배니 가지 앞에서 새끼를 배므로 얼룩얼룩한 것과 점이 있고 아롱진 것을 낳은지라 야곱이 새끼 양을 구분하고 그 얼룩무늬와 검은 빛 있는 것으로
라반의 양과 서로 대하게 하며 자기 양을 따로 두어 라반의 양과 섞이지 않게 하며
실한 양이 새끼 밸 때에는 야곱이 개천에다가 양떼의 눈앞에 그가지를 두어
양으로 그 가지 곁에서 새끼를 배게 하고 약한 양이면 그 가지를 두지 아니하니
이러므로 약한 자는 라반의 것이 되고 실한 자는 야곱의 것이 된지라
이에 그 사람이 심히 풍부하여 양떼와 노비와 약대와 나귀가 많았더라


서론

마음에 명심을 잘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과는 많은 면에 있어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에 명심을 잘하는 사람은 자신이 실수한 것에 대해서도 ‘왜 그런 실수가 났는지, 무엇이 문제였는지’ 등을 마음에 잘 명심해 두었다가 다음에 다시는 그런 실수가 나지 않도록 노력합니다. 반면에 명심하지 못하는 사람은 실수를 해 놓고도 왜 실수가 나왔는지 돌아보지 않으며 실수된 원인을 안다고 해도 그냥 흘려버리므로 다음에 똑같은 실수가 나오는 것입니다.
마음에 명심을 잘하는 사람은 한 번 들은 말씀이나 지시 사항을 머리로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도 품고 있기 때문에 설령 머리로는 잊어버렸다 해도 때가 되면 마음에서부터 주관을 받아 정확하게 일을 이루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명심하지 못하는 사람은 머리에 기억했던 것을 잊어버리고 그것으로 끝나고 맙니다. 그러니 계속해서 실수나 잘못이 나오는 것입니다.
죄를 버리고 성결되어 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명심하여 하나하나 자신을 변화시켜 나가는 사람과 대충대충 살아가는 사람과는 육을 벗고 영으로 변화되는 데 있어서도 많은 차이가 납니다. 또한 축복을 받는 경우도 ‘어떻게 해야 축복을 받는지’ 들었던 말씀을 마음에 잘 명심하여 그대로 지켜 행하는 사람은 반드시 축복을 받습니다. 예를 들어 ‘정도를 걸어야 한다’는 말씀 하나만 마음에 명심해도 불의와 타협하거나 욕심을 좇아 정도에서 벗어나서 생기는 손해를 막을 수가 있습니다.


본론

1. 야곱의 공로를 인정해 주면서 스스로 품삯을 정하라고 말한 라반

야곱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명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명심해 놓았기에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자 그의 마음을 주관해 주시지요. 이제 고향으로 돌아갈 때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외삼촌이자 장인인 라반에게 “나를 보내어 내 고향 내 본토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야곱의 입장에서 그동안 외삼촌의 집을 위해 봉사한 것에 대해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빈손으로 고향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그동안 외삼촌의 집을 위해 이처럼 수고하고 봉사했으니 그것에 상응하는 대가를 주어서 나로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해서는 라반이 순순히 대가를 주지 않을 것을 알았지요. 그래서 야곱은 라반 스스로가 먼저 품삯에 대해 말을 꺼내도록 유도합니다.
야곱은 “내가 외삼촌에게서 일하고 얻은 처자를 내게 주어 나로 가게 하소서 내가 외삼촌께 한 일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하며 외삼촌 스스로가 야곱의 수고를 시인하도록 유도한 것입니다. 이에 라반도 “여호와께서 너로 인하여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니 네가 나를 사랑스럽게 여기거든 유하라” 하며 자신이 야곱으로 인해 복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순수한 마음에서 나온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고향으로 떠나겠다는 마음을 굳혔다는 사실을 깨달은 라반은 야곱을 어떻게든 좀더 자신 곁에 붙잡아 놓기 위해 어느 정도 야곱의 공로를 인정해 주면서 그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는 새로운 조건을 내겁니다.
28절에 “또 가로되 네 품삯을 정하라 내가 그것을 주리라” 합니다. 그런데 사실 창 31:7 전반절에서 야곱이 자기의 아내들에게 “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역하였느니라” 말했던 것을 볼 때 라반은 그 전에도 이미 여러 번 야곱의 품삯을 변역했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라반은 또다시 야곱에게 이제는 품삯을 줄 테니 좀더 자신과 함께 있자고 합니다. 그것도 야곱 편에서 품삯을 정하라고 했는데 라반이 이렇게까지 나오게 된 것은 스스로 고백했듯이 라반이 지금 누리게 된 부(富)가 바로 야곱으로 인해 얻어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라반 편에서는 야곱이 그냥 순순히 놔줄 수 없는 ‘복덩이’였던 것이지요.
이러한 사실은 이어지는 29-30절에 야곱이 라반에게 하는 말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가 어떻게 외삼촌을 섬겼는지 어떻게 외삼촌의 짐승을 쳤는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내가 오기 전에는 외삼촌의 소유가 적더니 번성하여 떼를 이루었나이다 나의 공력을 따라 여호와께서 외삼촌에게 복을 주셨나이다 그러나 나는 어느 때에나 내 집을 세우리이까” 했습니다. 이처럼 야곱이 성실과 중심을 다한 행함으로 라반의 집을 위해 섬겼기에 하나님께서 야곱의 공력을 따라 라반의 집에 복을 주셨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복이 임합니다. 라반도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막상 야곱이 자신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하니 ‘이제 이 일을 어떻게 하나?’ 하는 마음에서 어떻게든 야곱을 붙잡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품삯도 야곱에게 정하라 했던 것이며 야곱에게 “내가 무엇으로 네게 주랴?” 하면서까지 어떻게든 야곱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2. 라반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제안을 하는 야곱

이러한 상황이니 야곱의 입장에서는 라반으로부터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았다고 할 수 있고 품삯을 정하는 협상에 있어서도 이미 유리한 고지를 차지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보통 사람 같았으면 자신의 마음에 있는 대로 라반에게 품삯을 청구하려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야곱은 그러지를 않고 오히려 육적으로 보면 너무나 어리석은 것 같은 제안을 했습니다.
31-33절에 “야곱이 가로되 외삼촌께서 아무것도 내게 주실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하여 이 일을 행하시면 내가 다시 외삼촌의 양 떼를 먹이고 지키리이다 오늘 내가 외삼촌의 양 떼로 두루 다니며 그 양 중에 아롱진 자와 점 있는 자와 검은 자를 가리어 내며 염소 중에 점 있는 자와 아롱진 자를 가리어 내리니 이같은 것이 나면 나의 삯이 되리이다 후일에 외삼촌께서 오셔서 내 품삯을 조사하실 때에 나의 의가 나의 표징이 되리이다 내게 혹시 염소 중 아롱지지 아니한 자나 점이 없는 자나 양 중 검지 아니한 자가 있거든 다 도적질한 것으로 인정하소서” 했던 것이지요.
즉 품삯을 따로 청구한 것이 아니라 지금 있는 양과 염소들 중에서 양은 흰 것만 남기고 염소는 흰 것과 검은 것만 남겨서 앞으로 그 중에서 양은 검은 것이나 아롱지고 점 있는 것 염소는 아롱지고 점 있는 것이 태어나면 그것만을 자신의 품삯으로 가지겠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양은 흰색이 대부분이므로 검은 것이나 아롱지고 점 있는 것이 나오기란 쉽지 않습니다. 또한 염소도 대부분이 흰색이거나 검은색이므로 아롱지거나 점 있는 것은 나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목축의 경험이 있는 사람이 본다면 라반에게 100% 유리한 제안이며 야곱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어리석어 보이는 제안입니다. 욕심 많고 자기의 유익만을 구하는 라반이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너무나도 자신에게 유리한 제안이다 보니 라반은 이를 거부할 수가 없었지요.
야곱은 바로 이 점을 이용한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야곱은 자신이 라반에게 순순히 자기 몫을 달라고 해서는 결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자신의 지혜 가운데 라반이 넘어올 수밖에 없는 꾀를 짜냈던 것입니다. 라반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해 보이는 제안을 함으로써 라반이 반드시 그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상황을 만들어 갔습니다. 이 정도 제안이 되어야 욕심 많은 라반이 받아들일 것이라는 사실을 야곱은 이미 간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3. 확실한 믿음으로 바라봄의 법칙을 적용한 야곱

그렇다면 야곱은 왜 이처럼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해 보이는 제안을 하면서까지 라반으로 하여금 자신의 제안을 수용하도록 했던 것일까요? 이렇게 한다 해도 야곱에게는 결국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과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약속하셨습니다. 야곱은 이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자신이 이렇게 하더라도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키시고 반드시 축복해 주실 것을 믿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야곱이 이러한 제안을 할 수 있었던 데에는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지혜를 믿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가축을 치면서 나름대로 터득한 ‘바라봄의 법칙’을 적용하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또한 야곱은 이미 라반의 속성을 꿰뚫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라반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끌어 갈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자신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이처럼 모든 상황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끌어 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라반의 간교하면서도 욕심이 많으며 자신의 유익만을 구하려는 속성을 역으로 이용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지요. 세상에서도 사기를 당하는 사람들을 보면 일반 사람들이 생각할 때는 말도 안 되는 속임수에 넘어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교묘하고 그럴듯한 속임수로 사람을 속여서 손해를 입히는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너무나 엉뚱하고 황당해서 어린아이라도 ‘이상하다’ 생각할 수 있을 만한 속임수에 넘어가 버리는 사람도 있는 것이지요. 조금만 냉정하게 이성적으로 생각해 봐도 ‘이것은 뭔가 이상하다’ 하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속임수임에도 불구하고 넘어가 버리고 말더라는 말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속임수를 써서 사람을 속이는 사람들은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욕심을 최대한 자극하는 궤계를 쓰기 때문입니다. 이때 마음에 욕심이 많은 사람은 이성적인 판단의 능력이 흐려지면서 욕심에만 마음을 다 빼앗기므로 결국 말도 안 되는 사기에 넘어가게 되지요.
예를 들어, 어디에 투자하면 아주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 욕심이 과한 사람은 우선 욕심이 발동되기 때문에 확실히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고 무작정 돈을 투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속이는 사람들도 이러한 이치를 잘 알기 때문에 그러한 속임수에 넘어갈 만한 사람들만 골라서 접근하는 것을 보게 되지요. 이는 사람들의 마음 안에 있는 사치와 허세를 부리려는 마음을 이용해서 물건을 파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똑같은 물건을 놓고도 오히려 값을 비싸게 불러야 사는 경우가 있다고 하지요. 값을 싸게 부르면 왠지 ‘싸구려’라고 하면서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물건이라도 비싼 값에 부르면 ‘이 정도는 돼야 나한테 어울리지’ 하면서 산다는 것이지요. 이것도 바로 사람들의 마음 안에 있는 사치와 허세, 허영 등의 비진리의 마음을 이용하여 유익을 보게 되는 경우라 할 수가 있습니다. 바로 야곱이 라반에게 했던 제안도 이와 같은 경우이지요. 라반과 같이 욕심 많고 자기 유익만을 구하는 사람이 이처럼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제안을 거절할 리는 없기 때문입니다.

4. 야곱의 제안에 자기 욕심만을 채우려는 라반

이런 상황에서 라반이 그래도 조금이나마 선한 마음이 있었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옳았겠습니까? 누가 보아도 야곱에게 불리해 보이는 이러한 제안을 선뜻 받아들이기보다는 “야곱아, 내가 너의 말을 들어 보니 그 제안은 너에게 너무 불리하구나 그러지 말고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자” 이렇게 말을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는 정말 야곱에게 품삯을 줄 마음이 있었다면 “아니다, 네가 나를 위해 그동안 얼마나 수고를 해 주었는데 그럴 수는 없지, 이제부터 나오는 새끼 중에 무조건 반은 내가 가지고, 반은 네가 가지거라” 말할 수도 있었겠지요. 야곱에게 맡겨서 거기에서 불어나는 것 중에 반은 외삼촌, 반은 조카 너 하면 얼마나 좋아요. 그러면 조카도 살고 삼촌도 야곱 때문에 버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라반은 이 제안이 야곱에게 너무나 불리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대로 받아들이고 맙니다. 더욱이 이후에 하는 라반의 행동을 보면 그가 얼마나 자기 욕심만을 생각하는지를 잘 알 수 있지요. 35-36절에 “그날에 그가(즉 라반이) 수염소 중 얼룩무늬 있는 자와 점 있는 자를 가리고 암염소 중 흰 바탕에 아롱진 자와 점 있는 자를 가리고 양 중의 검은자들을 가려 자기 아들들의 손에 붙이고 자기와 야곱의 사이를 사흘 길이 뜨게 하였고 야곱은 라반의 남은 양 떼를 치니라” 했습니다.
그날로 즉시 흰 양과 흰 염소, 검은 염소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가려서 자기 아들들에게 맡기고 자기 아들들이 치는 가축과 야곱이 치는 가축 사이를 사흘 길이 떨어지게 합니다. 이는 ‘혹시라도 자신의 양이나 염소가 야곱이 치는 것들과 섞여서 그 중에 점 있고 아롱진 것이 나오지나 않을까’ 하여 멀찌감치 떨어뜨려 놓으려는 의도에서였지요. 그러니 이 얼마나 인색한 모습입니까? 어떻게 해서든 단 한 마리라도 점 있고 아롱진 것은 나오지 않아 모든 것을 자신의 소유로 삼으려는 라반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5. 행함으로 바라봄의 법칙을 응답받은 야곱

이처럼 라반이 아무리 철저히 한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편이셨습니다. 더욱이 야곱의 지혜까지 동원이 되면서 야곱은 큰 부자가 될 수 있었지요. 여기서 말하는 야곱의 지혜란 바로 ‘바라봄의 법칙’ 또는 ‘바라봄의 믿음의 법칙’을 말합니다. 37-39절에 보면 야곱이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지가 잘 나오지요. “야곱이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를 취하여 그것들의 껍질을 벗겨 흰 무늬를 내고 그 껍질 벗긴 가지를 양 떼가 와서 먹는 개천의 물구유에 세워 양 떼에 향하게 하매 그 떼가 물을 먹으러 올 때에 새끼를 배니 가지 앞에서 새끼를 배므로 얼룩얼룩한 것과 점이 있고 아롱진 것을 낳은지라” 했습니다.
버드나무와 살구나무, 신풍나무들은 그 겉껍질이 거무스름하거나 짙은 갈색을 띠고 있는 반면 속껍질은 매우 희고 윤기가 반짝이기 때문에 겉껍질을 드문드문 벗겨내면 알록달록한 형태의 무늬가 나오게 되지요. 야곱은 바로 이렇게 알록달록한 무늬의 나무 가지들을 가축들이 와서 물을 먹으며 교미하던 장소에 놓아둠으로써 가축들이 새끼를 배는 순간에 그 모양을 보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했을 때에 낳은 새끼들을 보니 정말로 얼룩하고 점이 있거나 아롱진 것이 나왔지요. 여러분 중에 혹 ‘어떻게 이러한 일이 가능할까?’ 생각하는 분도 있을 수 있는데 사람에게서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잉태한 여인이 임신하고 있는 동안 ‘누구를 생각하고 누구를 바라보냐’에 따라 태어나는 아이의 생김새에도 큰 영향을 주지요.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동안 남편을 너무 사랑해서 바라보고 생각한 아내에게서는 남편을 더 많이 닮은 아이가 태어나게 됩니다. 또는 아이를 임신하고 있는 동안 거울을 보며 자기 얼굴만 보고 생각한 아내였다면 자기를 더 많이 닮은 아이가 태어나겠지요. 이처럼 누구를 바라보고 생각하며 마음에 품고 있었느냐 하는 것이 태어나는 아이의 생김새에도 영향을 주게 되더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현상이 꼭 사랑하는 사람만을 대상으로 해서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요. 만약 아이를 가졌을 때 누군가를 너무 미워해도 아이가 그 사람을 닮아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꼭 알아야 할 점은 단지 눈으로 바라본다고 해서만 닮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마음에도 품었기 때문에 닮을 수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좋아서든, 싫어서든 눈으로 봄과 동시에 상대를 마음에도 늘 품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아이의 생김새에까지 영향을 준 것이지요.
이처럼 ‘바라봄의 믿음의 법칙’이란 눈으로 바라보는 차원을 넘어 마음에 품는 것까지를 의미합니다. 이 법칙은 아주 많은 분야에 적용할 수가 있지요. 예를 들어, 어릴 때 어떤 인물을 존경하며 마음에 품고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아이의 장래가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더욱이 신앙 안에서는 누구를 바라보며 마음에 품고 닮아가기 위해 노력하느냐에 따라 신앙의 모습이 크게 달라질 수가 있습니다. 특히 어린아이들의 신앙은 가장 가까이서 바라보게 되는 부모에 의해 가장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는 장성한 어른들도 마찬가지이지요. 따라서 여러분이 신앙 안에서 누구를 바라보고 마음에 품어 나가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히 12:2에 보면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말씀하지요. 이 말씀과 같이 여러분이 바라보고 나가야 할 온전한 신앙의 대상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마음은 어떤 것이며 주님을 닮는 것은 어떤 것인지를 알아서 열심히 바라보고 달려가야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구약이나 신약 안에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인정하시는 선지자들 또한 신약의 주의 제자들 또 사도 바울, 동정녀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든 또 마리아든 스데반 집사든 빌립 집사든 하나님의 사람들의 장점을 양식삼아서 그대로 행해 나가면 얼마나 좋습니까?
고전 11:1에서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온전히 닮아 나온 자로서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있어서 신앙의 푯대와 같은 역할을 해 주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온전히 믿고 바라보며 닮을 수 있는 바라봄의 대상이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지요. 바로 그러한 대상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나갈 때 자신도 점점 닮아 나갈 수가 있는 것이구요. 비록 가축들이기는 하지만 야곱은 바로 이러한 바라봄의 법칙을 적용하여 막대한 부를 쌓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이 방법을 사용한 것까지는 좋았다 해도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야곱이 선한 마음으로 이 방법을 사용한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다음시간에 계속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히 11:1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했습니다. 여러분이 정녕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았다면 그것은 반드시 실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성결되고 영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도 무엇을 바라보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늘 진리만 보고 진리만 들으며 진리만 말할 것을 당부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말씀에만 순종한다 해도 훨씬 신속히 영으로 들어올 수가 있지요.
여러분이 바라보고 듣는 것들이 결국은 여러분의 마음 안에도 입력이 되기 때문에 아무리 입술로는 선을 사모하고 영을 사모한다 고백해도 여전히 비진리를 보고 듣게 되면 그만큼 여러분의 마음 안에는 비진리가 또다시 새롭게 자리 잡아 간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무엇을 보고 듣느냐에 따라 더 신속히 선으로, 영으로 나와질 수도 있고 반대로 더 악으로, 육으로 빠질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어떤 분들은 ‘나는 환경이 안 좋아서요, 나는 부모로부터 안 좋은 기를 타고 태어나서요’ 이유를 대시는 경우가 있는데 막달라 마리아의 경우를 보면 이유나 핑계를 댈 수가 없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환경은 우상숭배가 극심한 환경에서 태어나 가족들로부터도 외면당해야 했으며 남편을 비롯하여 늘 악한 것들을 보고 듣고 대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막달라 마리아의 마음은 어떠했습니까? 좋지 않은 환경과 악한 것들을 마음에서 받아들여 심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을 마음에서 선으로 바꾸어 나갔지요. 부모 탓, 남편 탓, 환경 탓을 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들의 입장에 서서 이해해 주려 했고 모든 것을 자기 탓으로 돌리며 누구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런 경우가 쉬운 것은 아니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악한 것이라도 선한 것으로 바꾸어 마음에 담아 갔기에 예수님을 만나 모든 문제를 해결받은 후에는 그 선의 향기를 마음껏 발할 수가 있었지요. 이처럼 ‘바라봄의 믿음의 법칙’이란 바라봄과 동시에 마음에 어떻게 담느냐가 너무나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본제단에서 늘 새로운 영의 세계에 대해 설명하며 지금까지 수많은 영의 현상들을 나타내 보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여러분이 영의 세계를 사모하고 영의 것만을 바라보며 오직 천국 소망 가운데 달려가도록 하기 위함이지요. 사도 바울은 셋째 하늘의 낙원을 보았던 한 번의 체험으로 인해 어떤 상황, 어떤 환경에서도 낙망하지 않고 천국 소망 가운데 달려갈 수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여러분도 늘 영의 세계를 접하며 영의 것을 마음에 품고 있을 때만이 이 세상을 이기고 승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 늘 천국을 소망하며 새 예루살렘을 품고 달려가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는 신앙에 있어서 큰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입술로만 새 예루살렘을 외친다고 해서 새 예루살렘에 가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에 새 예루살렘을 소망하며 품고 바라보는 사람은 행함 또한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만한 모습으로 변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보고 계십니까? 무엇을 여러분의 마음 안에 품고 계시는지요? 그리고 그 품은 바를 이루기 위해 지금 어떻게 행해 나가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믿음의 눈으로 바라봄과 동시에 그것을 늘 마음에 품고 행함으로 나타내어 여러분이 주 안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름답게 응답으로 열매 맺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4-02 오후 5:43:36 Posted
2015-09-08 오후 2:02:05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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