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30:22-33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를 들으시고 그 태를 여신고로 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하나님이 나의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함이었더라
라헬이 요셉을 낳은 때에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나를 보내어 내 고향 내 본토로 가게 하시되 내가 외삼촌에게서 일하고 얻은 처자를
내게 주어 나로 가게 하소서 내가 외삼촌께 한 일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라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로 인하여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니
네가 나를 사랑스럽게 여기거든 유하라 또 가로되 네 품삯을 정하라 내가 그것을 주리라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가 어떻게 외삼촌을 섬겼는지, 어떻게 외삼촌의 짐승을 쳤는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내가 오기 전에는 외삼촌의 소유가 적더니 번성하여 떼를 이루었나이다
나의 공력을 따라 여호와께서 외삼촌에게 복을 주셨나이다
그러나 나는 어느 때에나 내 집을 세우리이까 라반이 가로되 내가 무엇으로 네게 주랴
야곱이 가로되 외삼촌께서 아무 것도 내게 주실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하여 이 일을 행하시면
내가 다시 외삼촌의 양떼를 먹이고 지키리이다 오늘 내가 외삼촌의 양떼로 두루 다니며
그 양 중에 아롱진 자와 점 있는 자와 검은 자를 가리어내며 염소 중에 점 있는 자와 아롱진 자를 가리어 내리니 이같은 것이 나면 나의 삯이 되리이다 후일에 외삼촌께서 오셔서
내 품삯을 조사하실 때에 나의 의가 나의 표징이 되리이다 내게 혹시 염소 중 아롱지지 아니한
자나 점이 없는 자나 양중 검지 아니한 자가 있거든 다 도적질한 것으로 인정하소서
서론
잠 17:1에 보면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집 안에 아무리 재물이 많고 풍성하다고 해도 정작 가족간에 화목하지 못하여 늘 불화하며 다툰다면 이보다 더한 고통은 없지요. 이는 꼭 가정만이 아니라 어떤 조직에서나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역시 예외일 수는 없지요.
재정이 풍족하고 뛰어난 일꾼들이 많다고만 해서 교회가 부흥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크게 확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꾼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주님의 마음이 되어서 서로가 화평함 가운데 일을 이루어 나가느냐가 중요하지요. 하나님의 일을 이룸에 있어서 가장 기본은 무엇보다도 화평을 이루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원수 마귀 사단도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려고 할 때는 사람들의 마음 안에 있는 비진리를 주관해서 어떻게든 서로 간에 화평이 깨어지도록 역사해 가지요.
남을 나보다 못하게 여기는 마음,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유익을 먼저 구하는 마음, 남보다 더 높아지려 하고 더 사랑받으려 하는 마음, 자기 위치와 자리를 어떻게든 지키려 하는 마음, 이런 마음들이 발동이 되면서 사람 사이에 갈등과 부딪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또한 ‘나도 이만큼 하는데 나는 왜 인정받지 못하는가? 나는 왜 축복받지 못 하는가? 나도 이렇게 충성하는데 왜 알아주지 않는 것인가? … ’ 바로 이러한 마음들로 인해 서로 간에 섬기지 못하며 서로 하나 되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동등한 입장이나 아래 있는 사람에게는 물론이고 질서에 따라 당연히 순종해 줘야 할 사람에게까지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서로 섬기는 마음이 되면 얼마든지 화평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상대 입장을 먼저 생각하고, 상대의 유익을 먼저 구해 주는 마음, 아랫사람이라 해도 상대를 나보다 낫게 여기고 상대를 위해 주는 섬김의 마음이 되면 원수 마귀 사단이 역사할 수가 없지요.
본론
1. 야곱을 생각하사 라헬의 태를 열어주신 하나님
야곱의 가정의 경우도 만약 라헬과 레아가 서로 섬겨 주며 자매간에 우애있게 지내면 야곱은 물론이고 라헬과 레아 역시 얼마나 평안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겠습니까? 훗날 자녀들 사이의 비극적인 사건도 없었을 것이구요. 그러나 라헬과 레아는 자기 악 속에서 계속되는 육신의 생각으로 인해 끊임없는 경쟁과 다툼으로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그런 경쟁 가운데 야곱에게는 열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이 태어났는데 그럼에도 야곱이 가장 사랑했던 라헬을 통해서는 한 명의 자녀도 낳지 못했지요. 마침내 라헬도 잉태를 하여 아들을 낳게 되는데 바로 요셉이었습니다.
22-24절에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를 들으시고 그 태를 여신 고로 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하나님이 나의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함이었더라” 했지요. 여기서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셔서 그를 들으시고 태를 여셨다”는 것은 라헬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여 역사해 주셨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라헬이 잉태하여 아이를 낳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생각하셨기 때문이지요.
야곱을 통해 이스라엘의 정통계보를 잇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라헬을 통해 자녀를 얻기 원하는 야곱의 마음을 생각하심으로 라헬의 태를 열어 주신 것입니다. 야곱이 라헬을 심히 사랑하여 14년간 성실하게 심었던 행함을 생각하심으로 라헬에게서 낳은 아들을 통해 정통계보를 이어갈 수 있도록 역사하신 것이지요. 라헬은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며 그 아들의 이름을 “더함”이라는 뜻을 가진 “요셉”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름이 가지는 의미만 보아도 그 안에 담긴 라헬의 마음을 느낄 수 있지요.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자족하는 마음이 아니라 오히려 끊이지 않는 욕심 가운데 자꾸만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라헬이 더 많은 자녀를 원하는 것 자체가 무조건 잘못된 것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사모하고 바라보며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라헬의 마음을 욕심이라 하는 것은 아들의 이름을 “요셉”이라 한 데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라헬이 정녕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면 오랫동안 고대하던 첫 아들의 이름을 그렇게 짓지는 않았겠지요. ‘감사’나 ‘영광’, ‘은혜’, ‘찬양’ 등 얼마든지 먼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뜻의 이름으로 지을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라헬은 감사의 마음보다는 ‘내가 어떻게든 더 많은 자녀를 낳아서 레아를 앞서야겠다’는 욕심이 앞섰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에 악이 있고 욕심이 있으면 간절히 원하던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얻게 되었을 때 감사할 틈도 없이 더 많은 것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마치 욕심 많은 어린아이가 양 손에 먹을 것을 쥐고도 다른 아이의 손에 있는 것까지 탐내며 바라보는 모습과 같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떠한 모습이신지요? 빌립보서 4:11-12에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말씀하신 대로 환경과 조건에 상관없이 늘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다면 그 마음이 얼마나 평안하고 행복하겠습니까? 이러한 마음이 되기 위해서는 바로 사심이나 욕심이 없어야 합니다.
라헬이나 레아가 자녀들의 이름을 짓는 것을 보면 두 사람 다 모든 상황을 자기 보기에 좋을 대로 해석하며 자신에게 유리한 대로 생각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범사에 하나님의 은혜에 먼저 감사하고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기보다는 자신의 욕심을 구하기에 급급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런 일들은 많이 있는데 예를 들어 교회 안에서도 그렇습니다.
제가 일꾼에게 일단 어떤 일을 맡겼다면 그 일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고 기다려 줍니다. 혹여 부족함이 있다 해도 아버지께서 깨우쳐 주시기를 기도하며 일꾼 편에서 먼저 진심으로 제 의견을 물어올 때라야 제가 원하는 것을 말하지요. 그럴 때도 저는 상대가 불편하지 않기 원하므로 직접적으로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지는 못합니다. 상대의 믿음과 마음을 고려하여 우회적으로나 비유적으로 설명하기도 하고 슬쩍 짚고 넘어가는 정도로 그치게 되지요.
이럴 때 보면 각 사람의 반응이 다양합니다. 제가 지나가듯이 한 마디 말을 해도 정녕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알기 원하고, 목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기도하며 궁구해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면에 한 귀로 듣고 흘려버리거나 자신의 생각에 맞춰서 해석하는 사람도 있지요.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맞춰 순종할 마음일 때는 설령 돌려서 말해도 그 의중을 파악하지만 자기 식의 틀을 갖고 있거나 사심이 앞설 때는 구체적으로 말해 주어도 알아듣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제 말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다른 어떤 사람의 말을 들을 때도 번번이 자기 유익에 맞춰 해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영안이 열려 영의 세계를 본 것을 말하거나 꿈을 해석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유익에 맞추어 해석하거나 자기 생각에 맞추어 엉뚱하게 해석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에게까지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며 자기주장을 관철시키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처럼 자기 생각이나 유익에 맞추어 자기 편에 좋을 대로 해석하면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범사에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자 할 때에 주님의 마음이 보이고, 목자의 마음이 보이므로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가장 합당하게 인도받아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요셉을 낳은 후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준비하는 야곱
25절부터는 야곱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이 나옵니다. 마침내 라헬이 요셉을 낳은 후, 야곱은 외삼촌 라반에게 “나를 보내어 내 고향 내 본토로 가게 하시되 내가 외삼촌에게서 일하고 얻은 처자를 내게 주어 나로 가게 하소서” 하고 말합니다.
창세기 28:15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향하고 있던 야곱에게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약속해 주셨습니다. 야곱은 바로 이 말씀을 잊지 않고 마음에 명심하여 새기고 있었기 때문에 때가 되자 마음에 주관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야곱이 만약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소홀히 하여 마음에 두고 있지 않았다면 마음에 주관을 받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 말씀을 이룰 수도 없는 것이구요.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미리 야곱에게도 알려 주시고 많은 세월 동안 외삼촌 집에 있으면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마음에 품고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저도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주셨을 때 결코 그 말씀을 잊거나 소홀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혹여 그 말씀이 너무나 현실과 차이가 있고 육적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라 해도 결코 의심하거나 흘려버린 적이 없지요. 항상 그 말씀을 마음에 두고 기도합니다.
나중에 시간이 흘러 때가 되면 그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을 항상 보아 왔습니다. 혹여 그 당시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회적으로 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어서 거기까지 인도하기 위해서 주셨던 말씀이고 또 그 섭리와 뜻이 있어서 주셨던 것입니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렀다 해도 그 말씀을 이루어야 할 때가 되면 예전에 주신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제 마음을 주관해 주심으로 가장 적당한 때를 맞추어 역사해 주십니다.
그런데 마음에 명심하고 새겨 놓았다가 때가 되면 그 말씀을 기억하여 행하는 사람도 있지만 반면에 언제 그런 말씀을 주셨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택하여 쓰시겠습니까? 제 편에서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을 찾는다면 당연히 말씀을 명심하고 마음에 새기는 사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명심했다 해도 그것을 이루도록 주관받는 시점이 매우 중요하지요.
예를 들어 어떤 일은 주관해 주시는 즉시로 일을 이루어야 할 때가 있고 어떤 일은 한참을 기다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또는 그 일을 이루기 위한 준비가 필요할 때는 미리 주관해 주셔서 준비토록 하시는 경우도 있지요. 야곱의 경우는 미리 주관을 받아 준비할 수 있도록 역사하셨습니다. 야곱은 지금 당장에라도 외삼촌의 집을 떠나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갈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 당장 떠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때부터 어느 정도의 세월을 지나면서 재산을 쌓아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이 주관받아 떠나겠다고 말을 한 시점과 실제로 그가 떠난 시점과는 차이가 나는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될 것까지 다 아시고 야곱의 마음을 주관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3. 미리 말씀을 주시고 이루도록 준비하시는 경우
여러분이 이해하기 쉽게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셨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애굽에서 나오면 금방에라도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줄 알았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장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40년이라는 광야의 연단을 마친 후에야 비로소 가나안 땅에 들어갈 것을 아셨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40년 후에야 가나안 땅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지요. 모세에게도 “내가 너희를 애굽의 고난 중에서 인도하여 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땅으로 올라가게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당장에 가나안 땅으로 들이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아니었지만 이 말씀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하여 곧바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것처럼 생각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여 40년이 지난 후에야 가나안 땅에 들어갈 것을 아시기 때문에 그들을 출애굽 시키는 시점을 40년만큼 앞당겨서 정하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시점은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시점보다도 40년을 앞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셨다는 말이지요.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 하게 될 기간에 대해서도 미리 예언해 놓으셨으므로 이 말씀도 응하게 하시기 위해 정확한 시점을 택하여 역사해 가셨던 것이구요. 그러나 이러한 것은 모세에게도 알려 주지 않으셨습니다.
본 교회가 이루어야 하는 가나안 성전과 관련해서도 하나님께서는 지난 2001년도에 “가나안 성전을 이루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순종이 되어지지 않음으로 가나안 성전을 이루지 못했지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시에 가나안 성전을 이루지 못할 것을 아시면서도 왜 가나안 성전을 이루라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그때 그 말씀을 주셨어야만이 앞으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점이 되었을 때에 정말로 가나안 성전을 이룰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2001년도에 가나안 성전을 이루지 못할 것을 아시면서도 그처럼 가나안 성전을 이루라 말씀하심으로써 일꾼들과 성도들로 하여금 믿음의 연단을 받도록 하신 것이었지요. 믿음의 연단이라는 훈련 과정을 통해 앞으로 하나님께서 다시 “가나안 성전을 이루라” 하실 때는 능히 믿음으로 순종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연단의 훈련 과정 없이 성전을 이루어야 할 시점이 다 되어서 “가나안 성전을 이루라” 하신다면 일꾼들 편에서 온전한 순종이 나오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므로 미리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야곱 역시 예지 예정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는 시점은 정해져 있었기에 하나님께서는 가장 적당한 시점을 택하여 야곱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마음을 가지도록 주관하시고 그것을 라반에게 말하도록 역사하셨다는 사실입니다
4. 라반의 속성을 알기에 미리 말한 야곱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곱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을 때 야곱을 순순히 보낼 라반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다 아시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정확한 때에 맞추어 고향으로 떠나게 하기 위해서 라반에게 미리 말하도록 주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도 자신이 이렇게 떠나겠다고 말을 한다고 해서 바로 떠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지요. 야곱은 지혜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라반과 오랜 세월을 지내는 동안 라반의 속성을 꿰뚫어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자신이 떠난다고 말을 하면 라반이 어떻게 나올 것까지도 이미 예상했지요. 예전에 라헬을 조건으로 내걸어 자신이 14년 동안이나 봉사하도록 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어떤 조건을 내걸어서 자신을 붙잡아 놓으려 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야곱은 바로 이것을 오히려 역으로 이용하기 위해 모든 것을 계획하고 있었지요. 만약 야곱이 떠나겠다고 했을 때 라반이 순순히 가라고 보내 주었다면 야곱은 지금 그동안 고생하며 봉사했던 것에 대해 아무런 대가도 받지 못하고 떠나야할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라반의 속성상 결코 순순히 보내 주지 않을 것을 알았기에 야곱은 라반의 입에 맞는 미끼를 던진 것이지요.
그 방법이 바로 32-33절의 내용입니다. “오늘 내가 외삼촌의 양 떼로 두루 다니며 그 양 중에 아롱진 자와 점 있는 자와 검은 자를 가리어 내며 염소 중에 점 있는 자와 아롱진 자를 가리어 내리니 이같은 것이 나면 나의 삯이 되리이다 후일에 외삼촌께서 오셔서 내 품삯을 조사하실 때에 나의 의가 나의 표징이 되리이다 내게 혹시 염소 중 아롱지지 아니한 자나 점이 없는 자나 양 중 검지 아니한 자가 있거든 다 도적질한 것으로 인정하소서” 하고 제안을 했지요. 이는 사람의 생각으로 볼 때 너무나 어리석은 제안입니다. 누가 보아도 라반에게만 너무나 유리한 제안이지요. 일반적으로 흰 양이나 염소들 가운데서 아롱진 새끼가 태어나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목축을 해온 라반이나 야곱도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지요.
야곱은 바로 이런 점을 노렸습니다. 라반이 당연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만큼 유리하고 그 마음에 흡족한 제안을 함으로써 야곱은 라반의 간교한 속성을 역으로 이용한 것이지요. 다음 시간에 설명이 되겠지만 야곱은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 “바라봄의 법칙”을 이용한 그의 지혜였지요. 누가 보아도 너무나 불리한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오히려 이를 통해 충분한 부를 모은 후에 고향으로 떠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어느 때쯤 라반에게 떠나겠다고 말을 하면 그때부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 야곱이 부를 모아서 정말로 떠날 수 있을지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아시므로 야곱이 정확한 시점에 주관을 받아 고향으로 떠나겠다고 라반에게 말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바라봄의 법칙은 무엇이며 야곱은 어떻게 해서 부를 쌓을 수 있었는지 구체적인 과정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결론
야곱이나 라반은 모두 간교한 속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의 지혜가 선의 지혜라고는 말할 수 없지요. 상대방의 간교한 속성을 역으로 이용하여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 있는 모습입니다. 처음에는 야곱이 라반의 간교한 꾀에 넘어갔지만 야곱이 라반의 속성을 간파한 후에는 오히려 라반이 넘어갈 수밖에 없는 더 고차원적인 꾀를 쓴 것이지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야곱이 라반의 마음속에 있는 간교하고 자기 유익만을 구하는 비진리의 속성을 알았기 때문에 그것을 이용하여 라반을 넘어오도록 했다는 점입니다.
이는 원수 마귀 사단도 마찬가지이지요. 원수 마귀 사단은 여러분 안에 있는 비진리의 속성들을 잘 압니다. 그래서 ‘이 사람에게는 어떤 미끼를 던져야 걸려들게 되는지’도 잘 알지요.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에게는 물질의 유혹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이성의 유혹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이생의 자랑의 유혹 등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때 자기 자신에 대해 말씀으로 깨우쳐 분별하며 늘 깨어 기도하는 사람은 이러한 유혹을 물리칠 수가 있지요. 반면에 자신의 취약점을 알지 못하는 사람 또는 알면서도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원수 마귀 사단의 밥이 되고 맙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있어서 가장 취약점이라 할 수 있는 악의 모양은 어떤 것인지요? 물론 악은 모양이라도 다 버려야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버리기 힘든 것이 있다면 먼저 그것을 목표삼아 버려 나가시기 바랍니다. 어떤 유혹이 와도 내 마음에 조금의 미동함도 없다는 자신감이 올 때까지 악의 뿌리를 뽑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하나 뽑아 나갈 때 비로소 악은 모양이라도 없는 영의 차원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죄와의 싸움에서 신속히 승리하여 진리 안에서의 자유함을 마음껏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4-02 오후 12:17:06 Posted
2015-09-08 오후 2:02:06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