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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철야 예배

제목
창세기 강해(166)  [창30:17-24]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05.03.25
창 30:17-24
하나님이 레아를 들으셨으므로 그가 잉태하여 다섯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은지라
레아가 가로되 내가 내 시녀를 남편에게 주었으므로 하나님이 내게 그 값을 주셨다 하고
그 이름을 잇사갈이라 하였으며 레아가 다시 잉태하여 여섯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은지라
레아가 가로되 하나님이 내게 후한 선물을 주시도다 내가 남편에게 여섯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는 그가 나와 함께 거하리라 하고 그 이름을 스불론이라 하였으며
그 후에 그가 딸을 낳고 그 이름을 디나라 하였더라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를 들으시고 그 태를 여신고로
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하나님이 나의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함이었더라


서론

성경을 보면 훌륭한 신앙을 가진 사람의 자녀라 해도 아비의 신앙에 비추어 볼 때 ‘너무 부족하다’ 싶은 경우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었지요. 결국은 아버지 다윗 왕을 대적하는 악까지 행하고 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던 다윗 왕에게서 그러한 아들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일까요?
다윗 왕이 아무리 하나님 앞에 합한 사람이었다 해도 어차피 다윗 역시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기 속의 악을 가지고 태어났고 그 악은 또 다시 아들 압살롬에게도 전해지게 됩니다. 다윗 왕이 완전히 성결된 상태에서 압살롬을 낳은 것도 아니었고 조상으로부터 기를 통해 전해지는 악을 갖고 태어나며 태어나 자라면서 심겨진 악들도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아버지뿐만 아니라 어머니를 통한 영향도 당연히 받게 됩니다.
아버지가 아무리 훌륭한 신앙을 가졌다 해도 어머니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서 큰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가정의 경우에 자녀의 교육과 성장에 더 크게 영향을 주는 것은 아무래도 아버지 쪽보다는 어머니 쪽이 될 가능성이 더 크지요. 물론 아버지를 통해서도 많은 영향을 받지만 세세한 부분에까지 영향을 주는 쪽은 주로 어머니 쪽이 되기가 쉽습니다. 그렇다하여 자녀의 가정교육이 전적으로 어머니의 책임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아버지 쪽에서도 당연히 자녀에게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책임을 함께 해야지요.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많은 가정들의 경우 그래도 자녀들이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는 것이 현실입니다. 특히 다윗 왕의 경우는 늘 전쟁과 국사에 분주하여 자녀들에게 투자할 시간이 없었기에 더더욱 그의 자녀들은 어머니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요.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압살롬 역시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됩니다. 그의 어머니 마아가는 이방 민족인 그술 왕 달매의 딸이었기에 압살롬을 신실한 신앙 안에서 양육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자라난 압살롬은 다윗 왕의 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진리와는 먼 모습으로 성장하고 말았습니다.

본론

1. 시기와 질투와 투기로 인해 지어진 야곱의 아들들의 이름

이런 이유들을 생각해 보면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이삭, 야곱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로 이어지면서 나타나는 사람들의 악의 모습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믿음의 온전한 샘플이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던 아브라함이었지만 그의 아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만한 신앙을 가지지는 못했고 야곱 역시 아브라함의 신앙에는 크게 뒤떨어지는 모습이지요. 에서의 경우는 더더욱 그러했구요.
더욱이 야곱의 아들들의 대(代)에 이르러서는 형제 간에 심히도 악한 모습들이 나오는 것까지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 모습들이 나오게 된 것에 대해 굳이 여자 쪽에 책임을 전가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어머니를 살펴보면 자녀들에게서 왜 그런 모습들이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를 알 수가 있지요. 사라의 모습, 리브가의 모습, 라헬과 레아의 모습 등을 생각해 보면 어머니로부터 기를 통해 전해진 악의 모양들이 자녀들에게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지요.
결국 부모의 기를 통해 전해졌을 뿐만 아니라 태어나 자라면서 입력된 악의 모양들은 어차피 자신이 스스로 연단을 통해 발견하고 버려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에서보다는 야곱의 중심이 나았기에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택하여 그를 연단하시고 변화된 그릇으로 만들어 사용하신 것이지요. 또한 야곱의 열두 아들들 중에 요셉을 택하여 그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도구로 쓰신 것이구요.
잠 16:4에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말씀하신 대로 이스라엘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 위해서는 야곱의 다른 아들들도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연단하심과 동시에 그를 통해 훗날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형성하게 될 열두 명의 아들들이 태어나도록 역사하신 것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의 이름에 담긴 영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에 설명을 드렸는데 육적으로 볼 때는 그들의 이름 하나하나가 결코 좋은 의미에서 지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라헬과 레아 사이의 시기와 질투와 투기가 그 아들들의 이름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는데 서로가 상대를 누르고 자신이 더 사랑받으려는 마음에서 아들들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여 서로가 하나님께서 자기 편이 되어 주셨다는 의미에서 자기 편에 좋은 대로 지은 이름들이었지요.
18절에 나오는 레아의 아들 잇사갈이라는 이름도 ‘내가 내 시녀를 남편에게 주었으므로 하나님이 내게 그 값을 주셨다’는 의미에서 ‘값’이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자신이 자기 시녀를 남편에게 준 것을 합당하게 받으시고 그 값으로 아들을 주신 것처럼 해석하고 있지요. 또한 20절에 나오는 스불론이라는 이름 역시 ‘이제는 그가 즉 남편 야곱이 나와 함께 거하리라’는 의미에서 ‘거함’이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입니다. 이 역시 어떻게든 남편의 사랑을 라헬로부터 빼앗아 자기에게로 돌려 보려는 레아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이름이지요.
자녀를 하나도 낳지 못한 라헬뿐만 아니라 이미 많은 자녀를 낳은 레아라 할지라도 여전히 서로 간에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얼마나 심한가를 그대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시기나 질투는 내가 상대보다 더 많이 가졌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더 가지면 가질수록 더 많이 갖기를 원하고 그래서 마침내 상대를 완전히 제압했다 해도 또 다른 대상을 만나게 되면 그를 통해 시기, 질투가 또 다시 나오게 되어 있지요.
시기, 질투만이 아닙니다. 서로 간에 악을 악으로 갚게 되면 악순환은 결코 멈출 수가 없지요. 비록 상대를 악으로 완전히 눌렀다 해도 악에 대한 보응은 반드시 받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물론이고 어느 나라 역사를 보아도 악으로 상대를 누르고 짓밟아서 올라 선 사람이 좋은 결과를 맺는 것은 볼 수 없지요. 설령 이 땅에서는 악에 대한 보응을 받지 않았다 해도 내세에서 받게 될 악에 대한 심판과 보응은 결코 피해 갈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2. 레아와 라헬의 심한 투기를 부추기는 원인을 제공한 야곱

이처럼 아내들 사이의 심한 시기, 질투 더 나아가 투기의 모습을 본 야곱이었지만 그 또한 아내들 사이의 투기를 부추기는 원인을 스스로가 제공했습니다. 라헬과 레아 사이의 그 심한 투기 속에서도 야곱은 여전히 라헬에게만 특별한 사랑을 주었습니다. 물론 라헬에게 사랑이 더 가는 마음이야 어쩔 수 없었다 해도 레아를 통해 낳은 자식들까지 또다시 아버지 야곱의 편애를 느끼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훗날 라헬을 통해 낳은 아들인 요셉에 대해서 특별히 편애를 하였습니다. 이는 결국 다른 자녀들이 무리를 지어 요셉을 시기하고 질투하게 만든 것이니 아비의 잘못이 큰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는 이삭 이외에 낳은 다른 서자들에게까지 각각 재물을 나누어 줌으로 정통 계보를 이을 이삭과의 사이에서는 물론이고 나머지 자녀들끼리도 서로 간에 기울어짐이 없도록 공평하게 처신했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정통 계보는 이삭을 통해 이어진다 해도 나머지 자녀들을 소홀히 한 것이 아니라 최대한 공평하게 사랑으로 대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의 경우를 볼 때 하나님께서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요셉을 통해 이스라엘을 향한 섭리를 이루어 가시지만 야곱은 지나치게 요셉에 대해서만 특별한 사랑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결국은 가족들 사이의 불화를 야기시키고 마침내는 요셉이 형들의 손에 의해 종으로 팔려가는 비극적인 사건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런 것을 볼 때 특히 머리된 사람은 각 사람의 마음을 잘 살펴서 혹여 자신에게 속한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 간에 시기, 질투가 발생할 수 있는 소지를 제공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본인은 물론이고 자신에게 속한 모든 사람이 성결되고 영으로 들어왔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는 머리된 사람이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따라 그에 속한 사람들 사이에 화평을 이루기도 하고 반대로 불화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들 앞에서 두드러지게 한 사람만을 칭찬하고 높여 준다거나 역으로 한 사람만을 지적하고 책망한다면 이는 결국 서로 간에 불화의 소지를 제공하게 됩니다. 그러니 사람을 칭찬하는 것은 물론, 지적하고 책망하는 것도 때와 장소와 상황을 잘 살펴서 서로 간에 시기, 질투하지 않도록 하는 것도 윗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지혜이지요.

이와 관련된 유명한 예화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황희 정승이 젊은 시절에 겪은 일입니다. 그가 일을 보고 잠시 쉬기 위해 도성을 빠져 나와 논길을 걷는데 한 농부가 검은 소와 누런 소 두 마리를 부리며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그런 농부를 황희는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농부가 잠시 쉬기 위해 소를 저쪽에 두고 나무 밑으로 오자 농부에게 물었지요. “두 마리 소 중에 어떤 소가 일을 잘합니까?”
그러자 농부는 갑자기 황희를 붙잡고 멀리 가더니 거기에서 황희의 귀에 대고 조그맣게 속삭이는 것입니다. “검은 소는 꾀를 부리지만 누런 소는 일을 잘하지요” 그런 농부를 보고 황희는 크게 웃으며 말합니다. “아니, 하찮은 소를 보고 물어보는데 굳이 여기까지 와서 귀에 대고 속삭일 필요가 무엇이 있습니까?” 그랬더니 농부는 약간은 노기를 띠며 “글을 배운 선비라는 사람이 무슨 그런 말을 하시오. 아무리 소같이 하찮은 동물이라도 자신에게 나쁜 말을 하면 싫어하는 법이오” 하는 것입니다. 이에 황희는 자신의 경솔함을 깨닫고 너무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미물이라도 배려해 주는 마음과 주인된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마음 자세 그리고 어떠한 편견을 갖지 말아야 하고 경솔해서는 안 된다는 것 등 여러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또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은 어느 한편을 편애하는 말과 행동을 얼마나 조심해야 하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만약 이 이야기에 나오는 두 소가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면, 그래서 농부가 아무 생각 없이 황희 정승에게 “누런 소가 일을 더 잘한다”고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면 아마도 누런 소는 교만해져서 높아졌을 것이고 검은 소는 누런 소를 시기하여 심통을 부리거나 낙망하여 오히려 이전보다 일을 더 못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사람 사이에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면 아직 시기와 질투와 교만 등을 버리지 못한 육의 사람들 사이에서는 얼마든지 이런 모습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니 누구를 더 사랑하고 인정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조차도 때로는 사람의 마음을 살펴서 지혜롭게 해야 할 것입니다.

3. 편애(偏愛)없이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해야

제가 중학교 다닐 때의 일입니다. 당시 서울에 사시던 큰 누님이 시골집에 오시면 가족들을 위해 작은 선물이라도 하나씩 사오십니다. 그래서 누님이 오신다고 하면 며칠 전부터 기대에 부풀어 기다리면서 친구들에게도 미리 자랑을 합니다. 마침내 누님이 오셨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제게 돌아올 선물은 없었습니다. 저는 어린 마음에 많은 상처를 입고 울면서 속으로 다짐을 했습니다. ‘나는 앞으로 커서 절대로 편애하지 않으리라’ ‘나는 커서 절대로 공평하게 하리라’ 이런 생각을 하면서 눈물을 지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님을 영접하기 전에도 누구를 편애한다거나 차별하지 않았고 주님을 영접하고 진리 안에 들어와서는 더더욱 그러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차별이나 편애로 인해 직접 고통을 당해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남을 차별하고 편애합니다. 자신이 피해를 보았으면 그리 하지 말아야 할 텐데, 오히려 자신은 더한 경우가 있습니다. 혹여 예전에 차별이나 편애로 인해 고통받았다 해도, 지금 그러한 처지에 있다 해도 주님의 사랑으로 이해하고 용서하며 상대를 품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공평한 홀과 같은 마음으로 모든 사람을 대해야 하며 특히 머리된 사람이 이러한 마음을 가져야 아랫사람들 사이에 혹여라도 자신으로 인한 시기, 질투가 생기지 않습니다. 라헬과 레아가 자신들의 시녀를 남편에게 주면서까지 다툼과 경쟁을 일으켰던 것은 결국 남편의 사랑을 더 얻으려 함이었으며, 자신의 입지를 굳히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힘과 능력만으로 안 되니 육신의 생각 가운데 시녀까지 동원한 것이고 합환채에 의지해 보려고까지 했지요.
이처럼 자신의 입지를 어떻게든 지키려 하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려는 모습은 오늘날 곳곳에서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지위와 권세와 부를 지키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내 위치와 내 자리, 내가 가진 것들을 빼앗기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잘못과 비리를 숨기려 하고 다른 사람을 대신 모함하여 누명을 씌우기도 하면서 거짓과 속임과 술수와 궤계 등을 동원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자기의 자리와 자기 위치를 지키기 위해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여 진리에 역행되는 일들이 나오기도 합니다. 마치 라헬과 레아가 서로 경쟁하듯이 서로가 자신의 업적을 더 드러내기 위해 과장을 하거나 이런저런 방법을 통해 자신이 한 것 이상으로 보여지게 합니다. 그러다보면 자기에게 유리한 것은 보고하고 불리한 것은 보고하지 않기도 하며, 오히려 상대의 부족된 것만을 부각시키기도 합니다.

이처럼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다 보면 점점 더 헤어 나오기 힘든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당장은 인정받고 열매를 더 크게 내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영으로 하지 않고 육으로 한 것이기에 결국 온전한 열매를 맺히지 못합니다. 만약 일꾼이나 주의 종들이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여 자신의 것을 지키려고 한다면 성도들은 ‘이래도 되나 보다’ 하며 잘못 입력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더 크게 이루기 위해 때로 선의(善意)의 경쟁은 필요하지만 딤후 2:5에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말씀하신 대로 반드시 진리 안에서 해야 합니다.
주 안에서도 자칫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여 육의 경쟁으로 빠지게 되면 하나님 앞에서 상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주 안에서 선의의 경쟁은 상대가 잘되기를 기도해 주고 상대가 잘되면 함께 기뻐해 주며 상대가 도움이 필요하면 힘껏 도와주면서 나도 잘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라헬과 레아는 ‘어떻게든 상대를 밟고 내가 더 위에 설까?’ 하는 마음이었고 ‘어찌하면 내 입지를 더 굳게 할까?’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경쟁과 다툼이었습니다.

4. 자신들의 유익만을 구함으로 남편 야곱의 마음을 아프게 한 라헬과 레아

사람이 서로 사랑하게 되면 상대에게 상처를 주거나 고통을 주는 일은 결코 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입술로는 “사랑한다” 고백하면서 정작 상대에게 상처를 주거나 고통을 주는 말과 행동을 한다면 이는 참된 사랑이라 할 수 없지요.
예를 들어 자녀들이 부모님을 사랑한다면 자녀들끼리 다툼이 있었을 때 어떻게 하겠습니까? 부모의 마음을 아프지 않게 하려는 선한 마음을 가진 자녀라면 ‘우리들이 다툰 것을 아시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실까?’ 하면서 자기들끼리는 서로 간에 불편하다 하더라도 부모님 앞에서는 웃는 낯으로 대할 것입니다. 이렇게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자녀들이라면 서로 다투는 일도 없겠지만 혹여 서로 간에 불편한 일이 생긴다 할지라도 부모님에게는 근심, 걱정을 끼쳐 드리지 않으려고 한다는 말이지요.
이처럼 라헬과 레아도 정말 남편 야곱을 영으로 사랑했다면 둘이 서로 어떤 모습이 되어야 했겠습니까? 남편 앞에서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며 투기하는 모습으로 악을 발하겠습니까? 한 사람이라도 남편을 정말 영으로 사랑했다면 적어도 상대가 악하고 부당하게 나온다 해도 자신은 그냥 잠잠히 눌러 참기라도 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서로 다투고 투기하는 모습을 보면 남편이 얼마나 마음 아플까를 생각해서라도 자신이 그냥 고통을 감수하고 마는 것이지요. 그러나 라헬과 레아는 남편의 마음은 안중에도 없이 자기 유익을 구하기에만 급급하니 야곱은 아내들 사이에서 심히도 마음의 연단을 받아야 했습니다.
만약 일꾼들 사이에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며 하나 되지 못하여 불화한 것을 보게 될 때 저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물론 이런 경우들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어쩌다가 한 번이라도 이런 일을 보게 되면 그로 인해 저는 크나큰 마음의 고통을 받게 되지요.
저는 양 떼들을 진리로 가르치며 한 사람 한 사람 영으로 낳아 가야 하는 입장이기에 사실 육의 부모보다 더한 마음의 고통을 받습니다. 육의 부모는 ‘아이들이 크다 보면 서로 다투고 싸울 때도 있지’ 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오직 진리만을 가르쳐 온 제 입장에서는 ‘내 잘못이다’ 하는 자책과 함께 마음에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하물며 그 귀한 보배피를 흘리심으로 우리를 핏값으로 사신 주님께서 만약 믿음의 형제, 자매들 사이에 시기하고 질투하며 서로 불목한 모습을 보신다면 그 마음이 어떠하시겠는지요? 주님을 사랑한다면, 목자를 사랑한다면 여러분 안에 그러한 모습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은 물론이고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라는 계명에도 위배되는 것이지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사람이 어찌 믿음의 형제, 자매들끼리 서로의 유익을 위해 시시비비하며 시기, 질투하고 상대에게 고통을 주겠습니까?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는 사람이 어찌 하나님께서 마음 아파하실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다음 시간에는 사람이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면 얼마나 악한 모습으로 나오게 되는지에 대해 계속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직 마음 안에 시기, 질투가 남아 있다면 오늘을 기점으로 해서 온전히 뽑아내시기를 바랍니다. 상대를 누르고 내가 올라서려는 마음, 내 위치, 내 자리를 지키기 위해 육신의 생각을 동원해 가는 모습, 내가 더 인정받으려 하고 상대를 무시하며 업신여기는 마음 등, 이러한 모든 악의 모양들을 뿌리째 뽑아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서로 간에 늘 화평하고 서로 간에 힘과 위로가 되어주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더욱 힘차게 이루어 나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4-02 오전 11:47:25 Posted
2015-09-08 오후 4:10:21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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