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30:14-24
맥추 때에 르우벤이 나가서 들에서 합환채를 얻어 어미 레아에게 드렸더니
라헬이 레아에게 이르되 형의 아들의 합환채를 청구하노라
레아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내 남편을 빼앗은 것이 작은 일이냐 그런데 네가
내 아들의 합환채도 빼앗고자 하느냐 라헬이 가로되
그러면 형의 아들의 합환채 대신에 오늘 밤에 내 남편이 형과 동침하리라 하니라
저물 때에 야곱이 들에서 돌아오매 레아가 나와서 그를 영접하며 이르되 내게로 들어오라 내가 내 아들의 합환채로 당신을 샀노라 그 밤에 야곱이 그와 동침하였더라
하나님이 레아를 들으셨으므로 그가 잉태하여 다섯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은지라
레아가 가로되 내가 내 시녀를 남편에게 주었으므로 하나님이 내게 그 값을 주셨다 하고 그 이름을 잇사갈이라 하였으며 레아가 다시 잉태하여 여섯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은지라 레아가 가로되 하나님이 내게 후한 선물을 주시도다 내가 남편에게 여섯 아들을 낳았으 니 이제는 그가 나와 함께 거하리라 하고 그 이름을 스불론이라 하였으며
그 후에 그가 딸을 낳고 그 이름을 디나라 하였더라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를 들으시고 그 태를 여신고로 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하나님이 나의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함이었더라
서론
교만은 속성 자체부터가 매우 간사해서 상황에 맞게 드러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직 드러날 때가 아니라고 생각되면 잠잠히 눌러 놓았다가 이제 드러나도 되겠다 싶은 때가 오면 비로소 교만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만의 속성이 잘 드러날 수 있는 조건 중에 하나가 바로 어떤 조직 안에서 그 조직의 가장 머리된 사람으로부터 자신이 사랑받고 인정받는다고 생각할 때입니다.
더욱이 다른 사람들도 인정해 줄 때는 ‘내가 이렇게 사랑받는 자다’ 하는 마음으로 인해 쉽게 교만한 모습이 드러나게 되지요. 이러한 교만은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며 자신만이 더 사랑받고 인정받으려는 모습으로 나타나곤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 안에 숨겨진 교만의 속성을 드러나게 하시기 위해 때로는 칭찬이라는 방법을 쓰시기도 하지요. 잠 27:21에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시련하느니라” 했습니다. 아직 육을 다 벗지 못한 사람은 이생의 자랑이나 드러내고자 하는 속성으로 인해 칭찬을 받으면 거의 대부분 그 속에 내재되어 있던 교만이 드러나게 되지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칭찬이라는 방법을 통해 교만의 속성들이 드러나게 하시고 벗어내도록 연단하십니다. 영으로 들어온 사람들이야 칭찬받는다 해서 교만해질 리는 없지만 아직 영으로 온전히 들어오지 못한 상태에서는 칭찬받았다 해도 늘 깨어 자신을 점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고전 10:12에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했으니 인정받고 칭찬받는 사람이라 해도 하나님께서 온전히 인정하시기까지는 결코 ‘이 정도면 되겠지’ 하는 높아진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정말 칭찬받고 인정받을 만한 사람이라면 주변 사람들로부터 칭찬받을 수 있어야 하며 누구보다도 우리 주님으로부터 칭찬받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잠 27:2에 “타인으로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으로는 말며 외인으로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술로는 말지니라” 했고, 고후 10:18에는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론
1. 야곱으로부터 전폭적인 사랑을 받으며 교만해진 라헬
라헬은 남편 야곱으로부터 전폭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그 마음이 높아지고 교만해진 경우입니다. 이러한 교만의 마음이 시기, 질투와 합쳐지면서 라헬은 남편에게까지 악을 발하며 언니 레아를 투기했습니다. 자녀를 낳지 못한 라헬은 투기하는 마음으로 자기 시녀를 남편에게 주면서까지 아들들을 얻기는 했지만 그로 인해 참 만족을 얻지는 못했지요. 오히려 언니 레아까지도 시녀를 남편에게 주게 되면서 두 사람 사이의 투기는 더 심해졌습니다. 이처럼 정도(程度)를 넘어 계속 악을 쌓아 갔던 라헬은 결국 그 삶도 일찍 마치게 됩니다.
물론 라헬이 죽은 것은 둘째 아들 베냐민을 낳다가 심한 산고로 인한 것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지켜 주셨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라헬은 심한 시기, 질투로 인해 오랜 세월 뼈의 썩음과 같은 고통을 당해야 했고 그 정도가 더 심하여 투기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지킴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결국 세상을 일찍 떠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실제로 마음 안에 시기, 질투가 심하며 온갖 악을 품고 있는 사람들은 그로 인해 여러 가지 병이 찾아오기도 하면서 오래 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도 장수하는 사람을 보면 대부분 마음에 독한 악을 품지 않을 뿐만 아니라 편안한 마음으로 평화롭게 사는 경우들이지요. 선한 사람들은 또 아프지도 않고 건강하게 살아갑니다. 따라서 주 안에서 마음의 악을 벗고 늘 감사와 기쁨, 평안과 행복이 가득한 사람은 영혼이 잘되는 축복 가운데 더욱 강건한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라헬이 비록 자녀를 낳지 못했다 해도 라헬에 대한 야곱의 사랑이 변하지는 않았습니다. 라헬과 레아 사이의 시기 질투의 결과로 인해 두 아내를 더 얻게 된 야곱은 네 명의 아내가 있었지만 야곱의 라헬에 대한 사랑은 여전히 절대적이었지요. 그러다보니 아내로서 남편에 대해 주장할 수 있는 권리도 라헬이 거의 독점하고 있었습니다. 14-15절을 보면 “맥추 때에 르우벤이 나가서 들에서 합환채를 얻어 어미 레아에게 드렸더니 라헬이 레아에게 이르되 형의 아들의 합환채를 청구하노라 레아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내 남편을 빼앗은 것이 작은 일이냐 그런데 네가 내 아들의 합환채도 빼앗고자 하느냐 라헬이 가로되 그러면 형의 아들의 합환채 대신에 오늘 밤에 내 남편이 형과 동침하리라 하니라” 합니다.
합환채라는 것은 정력제 또는 임신을 가능케 하는 것으로 알려진 약초입니다. 라헬은 레아가 낳은 큰 아들 르우벤이 들에서 구해온 합환채를 자신이 취하는 대신 레아에게 남편과의 동침을 허락해 줍니다. 당시 라헬이 남편의 잠자리에 대해서까지도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야곱이 라헬에 대해 얼마나 특별한 사랑을 주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지요.
2. 라헬을 생각하사 두 아들을 주신 하나님
결국 레아는 아들 르우벤이 얻어 온 합환채를 라헬에게 주고 남편과 동침하였는데 다시 태의 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들 두 명과 딸 한 명을 더 낳습니다. 마침내 라헬도 잉태하게 되는데 혹여라도 ‘라헬이 합환채를 먹었기 때문에 잉태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 하고 오해를 해서는 안 됩니다.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22-24절에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를 들으시고 그 태를 여신 고로 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하나님이 나의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함이었더라” 했습니다. 라헬이 잉태하여 요셉을 낳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생각하심으로 그의 태를 여셨기 때문입니다. 훗날 라헬은 베냐민이라는 아들을 하나 더 낳으므로 야곱은 모두 열두 명의 아들을 얻게 됩니다. 이들이 바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형성하게 되지요.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열두 지파에 약간의 변화가 생깁니다. 어떤 지파는 빠지기도 하고, 어떤 지파는 새로 들어가기도 하지요.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열두 지파의 이름을 보면 유다, 르우벤, 갓, 아셀, 납달리, 므낫세, 시므온, 레위, 잇사갈, 스불론, 요셉, 베냐민이라 나옵니다. 원래 열두 지파에 들어있었던 야곱의 아들들 중에서 ‘단’이 빠지고 대신 요셉의 아들 므낫세가 들어간 것이지요. 하나님은 다 아시기 때문에 야곱을 주관해서 므낫세에게 축복기도를 해 주도록 역사하셨고 훗날 므낫세가 열두 지파 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또한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열두 지파의 순서는 야곱이 아들들을 낳은 순서와도 맞지 않습니다. 이 이름들 하나하나에 담긴 의미와 기록된 순서가 우연히 되어진 것이 아니라 여기에는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열둘 즉 ‘12’는 빛의 수로서 이 열두 지파 이름에 담긴 의미를 온전히 이룰 때 빛 곧 온전한 성결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결의 단계를 설명하기 위해 열두 지파의 이름을 단순히 연장자부터 나이 순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 이름에 담긴 영적인 의미에 맞게 기록한 것이지요. 그래서 이름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순서대로 살펴보면 믿음의 분량 즉 믿음의 5단계와도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열두 지파의 이름과 영적인 의미
그렇다면 야곱의 아들들 중에서 왜 ‘단’이 빠지고 대신 요셉의 아들 ‘므낫세’가 들어간 것일까요? ‘단’ 지파는 훗날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때에 적극적으로 우상 숭배에 앞장서게 되는 지파입니다. 왕상 12:28-29을 보면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 하고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했습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때에 이르러 이스라엘은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나누어졌습니다. 이때 북 이스라엘의 왕이 된 여로보암은 백성들의 마음이 남 유다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향하는 것을 막으려는 계획 하에 금송아지 두 개를 만들어 신으로 섬기게 합니다. 하나는 벧엘에 두고 다른 하나는 단에 두고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섬기도록 했는데 이때 금송아지를 둔 장소가 바로 단 지파가 모여 살던 곳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을 정복할 당시 단 지파는 ‘라이스’라는 성읍을 정복한 후에 자신들의 조상인 ‘단’지파의 이름을 따서 새롭게 ‘단’이라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처럼 우상 숭배의 근거지가 되어 버린 곳이 바로 단 지파의 성읍이었기에 하나님께서 단 지파를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서 제하신 것입니다. 그 대신 요셉의 아들 므낫세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또 한 가지 눈여겨 볼 것은 열두 지파 이름의 첫 번째로 유다가 나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유다 지파인 다윗의 뿌리로 오셨기 때문에 열두 지파 중에 가장 앞에 두신 것입니다. 그러면 열두 지파 이름에 담긴 의미가 성결 또는 믿음의 단계와 순서적으로 어떤 영적인 관계성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유다라는 이름은 ‘찬송함’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바로 이 땅에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찬송한다는 의미이지요.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던 날에 허다한 천군이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며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노래했던 것과 같이 구세주의 나심을 찬송한다는 의미입니다.
다음으로 르우벤이란 이름에는 “보라 아들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지요. 바로 찬송 가운데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는 것이 신앙의 첫 단계입니다. 비로소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지요. 믿음의 단계로 말하자면 1단계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고 나면 세 번째 이름인 갓이 의미하는 ‘복됨’이라는 뜻과 같이 복된 사람이 됩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복과도 바꿀 수 없는 구원의 참된 복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복된 소식인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구원에 이르게 되므로 복된 사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복된 사람이 되면 이제부터 마음 안에 기쁨이 넘치는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지요. 바로 네 번째 이름인 아셀은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다섯 번째 이름인 납달리는 “경쟁한다”라는 뜻인데 마 11:12에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는 말씀과 같이 이제는 죄를 열심히 싸워 버리기 시작하면서 천국을 침노해 들어가는 것이지요.
우리가 천국 가는 것이 다 영적인 전쟁입니다. 또한 더 좋은 천국에 대한 사모함이 생기기 때문에 어떻게든 빨리 직분도 받고 사명도 받아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충성 봉사하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신앙 안에서 선의의 경쟁을 하게 되지요. 이렇게 죄를 열심히 싸워버리며 충성하다 보면 이제 믿음의 분량의 중간 정도인 믿음의 3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바로 므낫세라는 이름이 여기에 해당하는데 여섯째 이름인 므낫세란 “잊어버린다”는 의미이지요.
여러분이 믿음의 3단계 중반을 넘어서면 이때부터는 어떤 일로 인해 감정이 난다 해도 그것을 풀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아직 온전히 악을 버린 것이 아니기 때문에 때로는 억울하고 마음 상하는 일이 생기면 그로 인해 감정이 일어날 수는 있지만 그것을 밖으로 분출하거나 감정을 풀려고 하지 않지요. 그냥 잊으려고 하고 어떻게든 선으로 생각하며 감정을 버리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3단계에서 중간 정도를 넘어섰을 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원래 야곱의 아들 중에 단이 빠지고 그 자리에 므낫세가 들어갔다 했는데 단이라는 이름은 ‘억울함을 푼다’이지요. 므낫세는 “잊어버린다” 이니 단이 빠지고 므낫세가 들어간 것과 같이 어떤 일에 대해 감정이나 억울함이 생겼다 해서 그것을 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마음에서 용서하고 이해하며 잊어버리는 차원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믿음의 단계로 보면 아직은 믿음의 3단계인 것이고 선의 단계로 볼 때도 아직은 1단계이지만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아예 선에 속하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한 단계 한 단계를 거치면서 깊은 신앙의 차원으로 들어오면 이제 일곱 번째로 시므온이라는 이름의 의미와 같이 “들으심”의 단계로 들어오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감찰하시고 여러분의 간구와 기도를 들으시는 것이지요. 물론 하나님께서는 늘 하나님의 자녀들을 살피시고 그들의 간구와 기도를 들으시지만 여러분이 영의 차원으로 들어오면 들어올수록 하나님께서는 더욱 신속히 간구와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영으로 들어와서 신앙생활을 할 때는 금식하고 철야하고 작정기도 해서 응답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차원이 달라지니 구하는 대로 주시고 찾으면 찾게 되고 두드리면 열리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여덟 번째 레위는 “연합함”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곧 주님과 연합한다는 의미입니다. 바로 주님과 하나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신앙생활을 한다 하면서도 주님과 연합하여 하나 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세상에 거하며 마귀와 연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녕 주님을 사랑하고 천국을 소망하는 사람은 어찌하든 주님과 더욱 연합하기 위해 힘쓰며 점점 더 주님과 하나가 됩니다. 이렇게 주님과 연합해 나가는 과정에서 어떠한 인도자를 만나 연합해 나가느냐 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합니다. 포도나무이신 주님과 연합하여 온전히 하나를 이룬 사람과 연합해야 여러분도 주님과 연합하여 하나를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아홉 번째 잇사갈은 ‘값’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곧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고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것을 의미하지요. 얼마나 충성하고 봉사했느냐에 따라 그에 따른 상급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는 바로 죽도록 충성하며 온 집에 충성을 향해 달려가는 단계를 의미합니다. 영으로 들어오면 이 땅의 그 어떤 것에도 소망을 두지 않습니다. 오직 천국에 대한 소망뿐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 땅의 것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하늘의 상급만을 바라보며 죽도록 충성해 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계 2:10 후반부에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말씀하신 대로 죽도록 충성해 나가는 사람에게는 생명의 면류관 이상의 값이 주어집니다. 즉 3천층 이상에 들어가 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열 번째 스불론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거함’이지요. 여러분이 이 땅에서도 온전히 주님 안에 거함으로 말씀 안에 거하고 진리와 빛과 선 가운데 거하게 되면 여러분은 장차 새 예루살렘에 거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차원이 되었을 때 바로 요 15:7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는 말씀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적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인 것입니다.
이러한 차원에 들어오게 되면 단지 심은 대로 거두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것에 넘치도록 더해 주십니다. 그래서 열한 번째 요셉이라는 이름에는 ‘더함’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온 영의 차원으로 들어오게 되면 여러분으로 인해 주변까지도 넘치게 축복을 받습니다. 모든 것에 심고 행한 것 이상으로 넘치게 더해 주시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은 장차 천국에서 어느 자리에 있겠습니까?
마 20:21에는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미가 예수님 앞에 나와 절하며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주님의 좌, 우편에 앉는다는 것은 대단한 영광으로서 합당한 수준에 이르러야 하는데 특히 우편에 앉는다면 이는 더욱 대단한 영광입니다.
바로 마지막 열두 번째인 베냐민이라는 이름에는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의미가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것을 뜻하며 그 영광이 얼마나 대단할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얼마든지 이러한 수준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땅에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한 후 그때부터 더 좋은 천국을 침노하기 위해 열심히 죄를 싸워 버리고 충성하며 주님과 연합하여 온전히 하나를 이루게 되면 천국에서도 가장 좋은 곳인 새 예루살렘에 갈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 보좌 가까이에, 주님 보좌 가까이에 거하며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세세토록 영광 가운데 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이름에 담긴 의미가 성결 또는 믿음의 단계와 영적으로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신앙의 여정에서 결코 중도에 낙오되거나 정체하는 일이 없이 신앙의 최종 목표인 믿음의 장성한 분량 즉 믿음의 5단계까지 끊임없이 전진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목표와 소망을 가지고 달려가는 분이라면 당연히 믿음의 5단계에 대해 밝히 알고 있어야 훨씬 쉽고 확실하게 갈 수 있습니다. 그래야 자신의 믿음을 정확히 체크하면서 한 단계 한 단계 믿음의 단계를 밟아 장성한 분량인 믿음의 5단계까지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다음 시간부터는 야곱이 어떻게 해서 거부가 될 수 있었는지 그 방법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앞으로도 계속 증거되는 말씀을 통해 야곱이라는 인물이 왜 연단을 받았고 또 어떻게 연단을 받아 자신을 깨뜨려 변화시켜 나갔는지를 깨달아 여러분 자신을 발견하고 변화 시키는 능력의 시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창 27:35에 “이삭이 가로되 네 아우가 간교하게 와서 네 복을 빼앗았도다” 했습니다. 이처럼 간교했던 야곱이 철저히 깨어지고 변화된 후에는 사 41:14에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니라” 말씀합니다. 간교한 야곱이 지렁이처럼 자기 주장이 없고 오직 아멘과 예만 하는 야곱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하지만 하루 아침에 된 것도 아니고 짧은 시간에 된 것이 아니라 무려 20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자신을 발견하고 변화시키는 것을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해야 했기에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여러분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친히 진리로 가르치시고 모든 진리의 가르침들을 생각나게 하시며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주십니다. 여러분이 순종할 마음만 있으면 성령님께서 변화될 수 있는 힘을 주시니 그리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빌 4:13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말씀과 같이 능히 진리로 변화되어 영으로 온 영으로 들어올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이름을 통해 살펴본 대로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갖추어 세세토록 영광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3-24 오전 1:01:01 Posted
2015-09-08 오후 4:10:21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