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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철야 예배

제목
창세기 강해(164)  [창30:1-13]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05.03.11
창 30:1-13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 형을 투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야곱이 라헬에게 노를 발하여 가로되
그대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라헬이 가로되 나의 여종 빌하에게로 들어가라 그가 아들을 낳아 내 무릎에 두리니
그러면 나도 그를 인하여 자식을 얻겠노라 하고 그 시녀 빌하를 남편에게 첩으로 주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빌하가 잉태하여 야곱에게 아들을 낳은지라
라헬이 가로되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소리를 들으사 내게 아들을 주셨다 하고
이로 인하여 그 이름을 단이라 하였으며 라헬의 시녀 빌하가 다시 잉태하여 둘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으매 라헬이 가로되 내가 형과 크게 경쟁하여 이기었다 하고 그 이름을 납달리라 하였더라

레아가 자기의 생산이 멈춤을 보고 그 시녀 실바를 취하여 야곱에게 주어 첩을 삼게 하였더니
레아의 시녀 실바가 야곱에게 아들을 낳으매 레아가 가로되 복되도다 하고 그 이름을 갓이라
하였으며 레아의 시녀 실바가 둘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으매 레아가 가로되 기쁘도다
모든 딸들이 나를 기쁜 자라 하리로다 하고 그 이름을 아셀이라 하였더라


서론

사람에게 있는 시기, 질투라는 죄성은 그 뿌리가 매우 깊습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이 일어난 이유도 결국은 자신보다 상대가 하나님으로부터 더 인정받고 사랑받는다고 생각하는 데서 비롯된 시기, 질투 때문입니다. 이처럼 시기, 질투란 누군가 비교의 대상이 있을 때 쉽게 드러나기 때문에 자기와 비슷한 수준이나 위치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잘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서로의 분야가 다를 때에는 상대에 대한 시기, 질투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음악을 하는 사람과 미술을 하는 사람은 서로 간에 경쟁하는 분야가 다르기 때문에 특별히 서로 시기, 질투할 만한 이유가 없습니다. 피아노를 치는 사람이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을 시기하거나 반대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피아노를 잘 치는 사람에 대해 시기, 질투의 마음을 갖는 일은 드물다는 말입니다. 물론 시기, 질투의 마음이 강한 사람은 무조건 남이 잘되는 것을 보면 마음이 상하고 상대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을 갖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자신과 경쟁할 만한 것이 있는 사람에 대해 시기, 질투가 발동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주의 종들은 주의 종들끼리, 일꾼들은 일꾼들끼리, 레위족 역시 비슷한 사명을 감당한 사람들끼리 서로 간에 시기, 질투가 나올 수 있습니다. 이렇게 경쟁 관계에 있다 해도 만약 비교할 대상이 자신보다 월등히 앞서 갈 때는 즉 자신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나는 저 사람과 너무나 비교도 안 된다’고 생각될 때는 오히려 시기, 질투가 직접 드러나지 않습니다. 단지 부러움의 대상으로 바라보지만 그러다가도 자신의 위치가 점점 올라가고 결국 상대와 견줄 만한 위치에까지 오르면 내재되어 있던 시기, 질투가 발동하게 됩니다.
이와 반대의 경우도 있지요. 즉 자신이 월등히 앞선 위치에 있어서 자신과 비교되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할 때는 다른 사람에 대한 시기, 질투가 없는 듯 보입니다. 다른 사람이 좀 인정받고 사랑받는 것쯤은 관대하게 봐주고 넘어갈 수도 있지요. 그런데 어느새 다른 사람이 점점 더 인정받고 사랑받는 것을 보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자신의 위치가 위협받는다고 생각하고 자신과 비교할 만한 위치까지 넘본다고 생각하니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나오는 것이지요.라헬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본론

1. 레아를 질투하여 야곱에게 고통을 주는 라헬

라헬은 남편 야곱으로부터 레아보다 훨씬 더 사랑받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자신만이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원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라헬이 볼 때 언니 레아는 자신과 견줄 만한 대상이 못되었습니다. 그러니 높아진 마음으로 언니를 무시하고 업신여기며 시기, 질투를 하면서도 늘 자신감은 있었는데 레아가 야곱의 아들들을 낳으면서부터는 상황이 바뀌게 됩니다. 자녀를 하나도 낳지 못한 라헬의 입장에서는 그동안 비교의 대상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레아가 야곱의 아들들을 낳아 가는 것을 보면서 점점 불안감을 느끼게 된 것이지요. 혹여 남편 야곱의 사랑이 레아에게 쏠리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습니다. 그러자 단순히 시기, 질투만 하던 라헬이 투기하는 수준까지 이르렀던 것입니다.
1절에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 형을 투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인정받는 것, 사랑받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라헬의 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지요. 더욱이 지금까지는 자신이 훨씬 더 사랑받고 인정받는다고 생각하던 상황에서 이제는 자신과 언니의 위치가 바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그 마음의 불안감은 더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마치 최고 정상의 위치에 있던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 의해 점차 자신의 위치를 위협받고 마침내 추월당했을 때의 마음이라 말할 수 있지요.
이런 상황에서도 영의 사람이라면 당연히 기뻐하고 감사하며 상대가 잘되는 것을 축하해 주겠지만 아직 육이 남아 있는 사람이라면 기뻐하고 감사하기보다는 좌절하고 절망하며 상대를 시기, 질투하게 되는 것입니다. 라헬은 바로 함께 기뻐할 수 있는 마음이 아니었기에 언니를 투기하여 결국에는 자기 시녀를 남편에게 주어 그를 통해 대신 자녀를 낳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해결하는 방법이 아니라 오히려 상황을 더 복잡하고 힘들게 만드는 길이었습니다.
레아 역시 더 이상 자녀를 낳지 못하게 되자 자기 시녀를 남편에게 주어 자녀를 낳게 하면서 라헬과 경쟁을 벌입니다. 이처럼 투기에 눈이 먼 두 사람은 앞으로의 상황이 어떻게 될지는 생각지 못하고 지금 당장만을 생각하여 이런 행동을 하였습니다. 결국 야곱에게도 이전보다 더한 마음의 고통을 겪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데 오늘 본문을 통해 크게 두 가지를 깨달아 볼 수 있습니다.

2. 영적인 사랑이 부족하여 서로 고통을 주는 야곱과 라헬

첫째는 상대의 입장을 생각하고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영의 사랑에 대한 것입니다.
육의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 처음에는 아무리 뜨겁게 사랑하는 것 같다가도 시간이 지나면서 사랑이 식어지고 화평이 깨어지는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자기의 입장만을 고집하기 때문이지요. 서로 양보하고 먼저 상대의 입장을 생각해 준다면 얼마든지 화평할 수 있는 일도 결국 자기 입장만 고집하고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기 때문에 화평이 깨어지는 것입니다.
야곱과 라헬, 레아의 관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야곱은 라헬을 부인으로 얻기까지 14년이라는 세월을 투자해야 했습니다. 그러니 라헬에 대한 야곱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 것이었는지를 알 수 있지요. 어떤 남자가 여자 하나 얻기 위해서 14년간을 투자하겠습니까? 그 역시 한계 상황에 이르게 되자 그처럼 사랑하던 라헬에게 노(怒)를 발하였습니다. 물론 레아를 투기하며 남편에게 고통을 주는 라헬의 모습이 결코 옳은 것은 아니지만 야곱이 좀더 부드럽고 선한 말로 라헬을 달래 주었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자녀를 낳지 못해서 ‘혹시 남편의 사랑이 예전 같지 않으면 어쩌나’ 하며 염려하고 불안해하는 라헬에게 남편이 여전히 사랑한다는 확신을 주었더라면 상황이 더 악화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야곱이 라헬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이런 상황에서도 끝까지 선으로 대했다면 라헬이 시녀까지 끌어들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생각할 때는 자신이 할 만큼 했음에도 자신의 소관도 아닌 하나님의 소관인 일을 가지고 라헬이 악을 발하며 나오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화를 내고 말았던 것입니다. 야곱에게 영적인 사랑이 온전히 맺혀 있었다면 더 오래 참았을 것이고 성내지도 않았겠지요. 영적인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사랑을 하지 못한 것은 라헬도 마찬가지였지요. 사랑은 온유하고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않으며 무례히 행치 않는 것인데 라헬은 레아를 투기하여 남편 앞에서 무례히 행하였습니다. 온유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내가 죽겠노라” 하면서 심한 말을 하니 표독스럽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을 것입니다. 이때 야곱이나 라헬이 서로의 입장을 조금씩만 더 이해해 주었다면 어떤 모습이 나왔을까요? 둘 사이에 좀더 영적인 사랑이 맺혀 있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3. 사무엘의 부모인 엘가나와 한나의 경우

성경에는 야곱과 라헬, 레아와 비슷한 상황에 있던 세 인물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바로 사무엘 선지자의 아버지 엘가나와 그의 어머니 한나 그리고 엘가나의 또 다른 아내 브닌나에 관한 내용입니다. 엘가나에게는 두 아내가 있었는데 한 사람은 한나였고 다른 한 사람은 브닌나였습니다. 한나는 자녀가 없었지만 브닌나는 자녀가 있었는데 여호와 앞에 제사를 드리는 날이 되면 엘가나는 제물의 분깃을 아내 브닌나와 모든 자녀에게 주었으며 한나에게는 갑절로 주었습니다. 이처럼 엘가나가 한나에게 갑절을 준 이유는 바로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한나가 자녀를 낳지는 못했지만 엘가나로부터 이처럼 많은 사랑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한나는 자녀가 없음으로 인해 늘 고통을 받았습니다. 여기에 브닌나까지도 한나를 힘들게 했습니다. 삼상 1:6 후반절에 “그 대적 브닌나가 그를(즉 한나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더라” 말씀합니다. 브닌나가 이렇게 했던 것은 자신은 남편의 자녀까지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한나를 더 사랑하며 한나에게는 매년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제물의 분깃을 자기보다 갑절로 주는 것을 보면서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나왔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마음씀씀이가 편협되어서는 안 됩니다. 엘가나가 한나를 사랑한다고 해서 갑절로 더 주는 것이 오히려 문제가 되었지요. 그래서 브닌나는 한나를 격동시켰던 것이고 한나는 이로 인해 울며 먹지도 않을 정도였습니다. 상황이 이쯤되면 한나와 브닌나 사이가 어떠했는지를 능히 짐작해 볼 수가 있지요. 여기서 우리는 야곱과 라헬과 레아가 처한 상황과 여러 가지로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엘가나와 한나가 야곱과 라헬과는 좀 달랐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먼저 한나는 비록 자녀를 낳지 못한 슬픔과 브닌나에게서 받는 설움 등으로 인해 고통을 받기는 했지만 그것 때문에 남편을 원망하거나 남편에게 악을 발하는 모습은 없었습니다. 이러한 한나를 위로하는 남편 엘가나의 고백도 참으로 감동적이지요. 삼상 1:8에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뇨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 했는데 얼마나 지혜로운 말입니까? 이는 곧 ‘당신이 비록 자녀는 없지만 내가 당신을 이처럼 사랑하니 내 사랑이 당신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않은가’라는 뜻이지요. 한나로 하여금 남편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해 주고 있는지를 확신할 수 있게 해 주는 말이었습니다.
물론 한나와 라헬을 비교해 보면 엘가나의 상황이 야곱보다는 더 나았습니다. 한나는 자신이 자녀를 낳지 못하는 것을 가지고 남편에게 직접 고통을 주지는 않았지요. 그렇기 때문에 엘가나도 이러한 한나를 긍휼히 여기며 더 많이 사랑해 줄 수도 있었겠지만 이후에 이어지는 내용들을 보면 두 사람이 그래도 선한 사람들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한나는 자신이 아무리 슬프고 고통스럽다 해도 그로 인해 남편에게 악을 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라헬처럼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여 자신의 문제를 사람의 방법으로 풀려고 하지도 않았지요.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라헬이 남편 야곱에게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겠노라”고까지 말하며 결국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여 자기 시녀를 남편에게 주었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지요.
더욱이 한나는 너무나 귀하게 얻은 아들이지만 하나님 앞에 서원했던 대로 젖을 떼자마자 사무엘을 여호와 하나님 앞에 드립니다. 엘가나 역시 한나에게 “그대의 소견에 선한 대로 하여 그를 젖떼기까지 기다리라 오직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말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부부가 얼마나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또 변개하지 않는 마음을 가졌지요. 간사한 마음이 없는 것도 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기도할 때 바로 그 서원의 기도가 응답이 되어지는 것이지요.
서로가 자기 입장만을 생각하고 상대를 탓하며 악하게 행동했더라면 자칫 한나는 평생 자녀를 낳지 못한 채 고통받으며 살아가야 했을 것이고 엘가나의 가정은 늘 불화했을 것입니다.그러나 엘가나와 한나는 서로를 이해하고 포용하며 격려해 주는 사랑이 있었기에, 또한 하나님을 의뢰하며 하나님 앞에 서원한 것을 지켰기에 위대한 선지자 사무엘의 부모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부모였기에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택하여 사무엘 선지자가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4.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여 자신의 시녀를 남편에게 준 라헬과 레아

그런데 야곱은 엘가나처럼 아내의 입장을 이해하고 위로해 준 것이 아니라 노를 발하며 자신은 아무 탓이 없음을 말합니다. 바로 이러한 야곱의 태도가 라헬로 하여금 ‘이제는 남편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아들을 낳아 준 레아를 더 사랑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동원하게 만든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레아를 이겨야겠다’는 생각에 라헬은 자신의 시녀 빌하를 남편에게 주어 대신 자녀를 낳으려는 방법까지 쓰게 됩니다.
라헬의 시녀 빌하가 첫 번째 아들을 낳자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소리를 들으사 내게 아들을 주셨다” 하며 그 이름을 ‘단’이라 불렀습니다. 두 번째 아들을 낳았을 때는 “내가 형과 크게 경쟁하여 이기었다” 하며 그 이름을 ‘납달리’라 불렀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여 자녀를 낳았다 해서 라헬의 마음이 만족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요. 오히려 레아와의 경쟁만 더 심해졌고 둘이 받던 사랑이 이제는 네 사람에게 분산되고 말았습니다. 레아 역시 동생 라헬처럼 시녀를 남편에게 주어 갓과 아셀이라는 두 아들을 더 얻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들을 통해 우리가 오늘 깨우칠 수 있는 두 번째 사실은 육신의 생각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를 더 어렵고 힘들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앞서 야곱과 라헬과 비교하여 설명한 엘가나와 한나는 자녀를 낳지 못하는 상황에서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여 사람의 방법을 쓰지 않았습니다. 선한 마음들을 가졌기에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을 봅니다. 그것이 곧 문제 해결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라헬이나 야곱은 전능하신 하나님께 맡기지 못했습니다. 야곱은 그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아버지 이삭을 어떻게 낳았는지 너무나 잘 압니다. 할머니 사라는 이미 경수가 끊어지고 할아버지도 몸이 죽은 것 같았던 상태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아들 이삭을 낳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야곱도 정녕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을 온전히 믿고 의뢰한다면 라헬이 제안한 방법을 따르지 않아야 합니다. 라헬이 어떤 마음으로 자기 시녀를 주면서까지 자녀를 낳으려고 하는지 안다면 더더욱 라헬의 뜻대로 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또한 야곱은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할머니 사라의 말을 좇았다가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 당시 아브라함이 사라의 뜻을 좇은 것은 아브라함이 아무리 거절을 해도 사라가 결국은 자신의 뜻대로 할 것을 알았기에 화평을 좇아 어쩔 수 없이 따라준 것입니다.

야곱 역시 어쩔 수 없이 라헬의 말을 좇을 만큼 라헬이 야곱을 몰아 세웠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둘 다 아내의 뜻에 따랐을 뿐이라고는 해도 아브라함과 야곱과는 마음씀씀이가 크게 달랐지요. 사라는 자기 뜻대로 몸종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주어 아이를 잉태하기에 이르렀지만 이로 인해 사라는 오히려 더 큰 고통을 받게 됩니다. 자신이 잉태한 사실을 깨달은 하갈이 여주인 사라를 멸시했기 때문이지요. 이에 사라는 남편에게 “나의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말합니다. 사라는 자신이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여 고통을 받는 것인데도 그 책임을 남편에게 떠넘기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야곱이라면 어찌했을까요? 본문에 나오는 야곱이 라헬에게 하는 태도를 봐서는 그가 만약 아브라함과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라헬에게 화를 내며 “어찌 당신이 그렇게 하라고 해놓고는 지금에 와서 그 탓을 나에게 돌리는 것인가? 나는 아무 잘못이 없으니 당신이 알아서 하시오” 아마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대의 여종은 그대의 수중에 있으니 그대의 눈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말합니다. 즉 아브라함은 마음이 얼마나 크고 넓은지 아내의 종은 아내의 종으로 인정해 줍니다. 사라의 그러한 태도에 노를 발하거나 그녀를 탓하며 책임을 돌린 것이 아니라 순순히 사라의 뜻대로 하도록 허락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아브라함이 책임을 회피하려 하거나 하갈을 아끼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일을 풀어 가려는 아브라함의 마음과 선의 지혜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하지만 사라가 육신의 생각을 동원한 결과는 훗날까지도 계속해서 사라에게 고통을 줍니다. 사라는 자기 몸으로 아들 이삭을 낳은 후에도 이스마엘로 인해 근심, 걱정을 해야 했고 결국은 또 다시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여 이스마엘과 하갈을 쫓아내는 상황까지 이르게 되지요.

이처럼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게 되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여 이전보다 더한 고통 가운데로 빠져들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라헬이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여 사람의 방법을 좇고자 했을 때 야곱은 어떻게든 막았어야 했지만 결국 육신의 생각을 따르고 맙니다. 뿐만 아니라 레아마저도 자기의 시녀를 남편에게 주어 자녀를 낳고자 했을 때 야곱은 거기에도 응해 주었습니다. 물론 야곱의 입장에서는 그나마 화평을 좇으며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선(善)이라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한 번 빠져들면 이렇게 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하게 됩니다.
설령 선한 마음으로 하려고 한 일이라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육적인 선일뿐이지요. 사람이 온전히 영으로 들어오기 전에는 사람 보기에 의와 하나님의 보시기에 의가 전혀 다를 수 있는 것처럼 사람 보기에 선과 하나님 보시기에 선과도 전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 보기에 아무리 선한 것 같고 좋아 보이는 것도 그것이 육신의 생각 가운데서 나온 것일 때는 하나님과 원수가 될 수 있습니다.
사울 왕이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그들의 왕 아각을 사로잡아 오고 여호와 앞에 제사 드리기 위해 기름지고 좋은 가축들은 살려서 데리고 왔다는 말이 사람이 볼 때는 좋아 보이고 선해 보일 수도 있지요. 하지만 그의 행동은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었습니다. 그러니 사람이 보기에는 아무리 좋아 보여도 그것은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것이기에 결국 사울 왕으로 하여금 멸망으로 가게 하는 사건이 되고 말았지요.
이처럼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게 되면 당장에는 일이 잘 풀리는 것 같고 모두에게 좋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결과는 결코 형통할 수가 없습니다. 야곱은 자기 보기에 좋을 대로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이와 같이 육신의 생각이 깨어지고 자기를 부인해 나가는 과정이 바로 연단입니다.

결론

야곱을 사이에 두고 라헬과 레아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물론 그들 사이의 시기, 질투로 인한 것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러한 상황을 허락하신 것은 결국 야곱을 변화시키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상황, 어떤 환경이 되어야 야곱의 깊은 속 중심까지 드러나면서 야곱이 스스로를 발견하고 마침내 깨어질 수 있는지를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잘 아시기에 세세히 간섭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어떤 상황과 환경에 처해야 깊은 마음속에 있는 본성 속의 악까지도 발견하여 버릴 수 있는지를 아십니다. 그래서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성결되어 하나님의 참 자녀로 나올 수 있도록 합당한 연단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연단을 통해 정금과 같이 나오도록 역사하시지만 저절로 다 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연단을 받는 여러분의 마음이 중요하지요.
똑같은 연단을 받아도 그 마음에 무엇을 가지고 있고,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 또한 얼마나 선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연단은 곧 축복이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찌하든 많은 사람에게 기회를 주시지만 막상 하나님의 손길에 인도받아 나오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세상 말에도 “위기가 곧 기회다”라는 말이 있는데 여러분이 처한 상황과 환경 안에서 최대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변화와 생성의 기회를 놓치지 말고 반드시 영으로, 온 영으로 들어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3-24 오전 1:01:01 Posted
2015-09-08 오후 4:10:21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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