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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철야 예배

제목
창세기 강해(163)  [창29:30-30:2]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05.03.04
창 29:30-30:2
야곱이 또한 라헬에게로 들어갔고
그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고 다시 칠 년을 라반에게 봉사하였더라
여호와께서 레아에게 총이 없음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무자하였더라
레아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권고하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그가 다시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의 총이 없음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도 주셨도다 하고 그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그가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
그가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인하여 그가 그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생산이 멈추었더라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 형을 투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야곱이 라헬에게 노를 발하여 가로되
그대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서론

사람이 사랑을 하면 예뻐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정말로 얼굴 자체의 모양이 변하면서 예뻐진다기보다는 사람이 사랑을 하고 있을 때의 그 행복감이 얼굴의 표정이나 분위기 등으로 표출되기 때문이지요. 세상 사람이라도 사랑을 하면 얼굴에 미소를 머금게 되고 얼굴에 환한 빛이 돌면서 다른 사람이 볼 때도 뭔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만 아니라 주님과 우리 사이의 사랑의 관계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주님과 사랑을 나누는 사람은 사람 사이에 사랑을 나눌 때보다도 훨씬 더 예뻐지고 아름다워지게 됩니다. 죽었던 영이 살아남으로 이제는 육에서 벗어나 영에 속한 사람이 되었으니 세상의 그 어떤 사랑을 할 때보다도 더 밝은 빛이 나며 영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지요. 더욱이 영으로 들어와서 주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사람은 영적인 빛의 차원도 이전과는 전혀 달라지고 더 이상 노화하지도 않으며 회춘까지 하게 됩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이전보다 더 예뻐져야 하고 얼굴에서는 세상 사람들과 구분되는 빛이 나야 하며 더 밝고 건강하고 활기찬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과 사랑을 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은 매사에 자신감이 있고 긍정적이며 어떠한 난관에 부딪힌다 할지라도 절대 낙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사랑할 대상이 있고 바라볼 소망의 대상이 있다는 것은 우리들의 삶에 있어서 너무나 큰 힘이 되지요.


본론

1. 레아와 라헬을 아내로 맞이한 야곱

야곱 역시 육의 사랑이기는 했지만 사랑하며 바라볼 대상인 라헬이 있었기에 피곤하고 곤비할 수 있었던 품꾼과 같은 삶을 7년 동안이나 기쁨으로 이겨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야곱 편에서는 외삼촌 라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7년 동안 성실과 책임감을 가지고 봉사를 했음에도 라반은 야곱과의 약속을 변개해 버립니다. 결혼에 관한 그 지방의 특색을 핑계로 하여 라헬 대신 레아를 먼저 아내로 준 후에 라헬까지 아내로 주는 조건으로 야곱을 또 다시 7년 동안 붙잡아 놓을 계략을 꾸미지요. 여기서 우리는 라반의 간교함을 알 수 있습니다.
라반은 야곱을 속이고 라헬 대신 레아를 아내로 주었으면서도 이를 따지는 야곱에게 궁색한 변명을 하며 둘러대지요. 야곱을 속인 것도 간교한 것이었지만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또 다시 변명하고 둘러대는 모습은 그의 간교한 속성을 더욱 잘 나타내 줍니다. 차라리 자신이 야곱을 속인 것을 솔직히 인정하고 사과한 후에 원래 정했던 약속대로 이행하고 나서 야곱에게 자신과 좀더 있어 줄 것을 부탁했다면 이를 쉽게 거절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아니면 처음부터 야곱을 속이지 말고 모든 상황을 솔직히 말해 주었다면 둘 사이에 적당한 타협점을 찾을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라반은 자기 유익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간교한 속성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진실한 방법을 택하기보다는 먼저 간교한 꾀를 짜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어떤 일을 이룸에 있어서 먼저 진실한 방법을 택하려 하는가 아니면 자신의 생각과 지혜 속에서 방법을 동원하려 하는가를 스스로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를 들어 어떤 실수나 잘못을 했을 때 그것을 진실되게 인정하고 회개하는 사람과 당장의 책임과 어려움을 모면하기 위해 실수를 덮으려 하거나 다른 핑계를 대서 슬쩍 넘어가려는 사람과는 하나님께서 보실 때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차이가 나지요.
잠언 12:22에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진실히 행하는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 말씀하신 대로 당장에는 손해 보는 것 같고 사람들이 볼 때 지혜롭지 못한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께서는 진실한 사람을 기뻐하시며 늘 그의 편이 되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라반은 진실한 방법을 택하기보다는 간교한 꾀를 동원했던 것이고 야곱은 또 다시 7년 동안의 연단의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총 14년이라는 세월을 봉사해 주는 대가로 레아와 라헬 두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야곱은 당장 볼 때는 원하는 바를 얻었다 생각할 수 있으나 이것이 바로 그에게 있어서 또 다른 연단의 시작이었습니다. 라반은 레아와 라헬을 야곱의 아내로 주면서 각각 레아에게는 실바, 라헬에게는 빌하라는 여종을 시녀로 붙여 줍니다. 장차 야곱은 네 여인 사이에서 심한 마음의 연단을 받게 되는데 본격적인 연단의 시작은 라헬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 데에서부터 비롯됩니다.

2. 네 아들을 낳은 레아와 무자한 라헬

31절에 “여호와께서 레아에게 총이 없음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무자하였더라” 했는데 여기서 ‘레아에게 총이 없다’는 것은 레아에 대한 야곱의 사랑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레아를 긍휼히 여기심으로 레아의 태를 열어 네 아들, 곧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를 낳도록 축복하셨습니다. 반면에 라헬은 한 명의 자녀도 낳지를 못합니다. 이것이 결국 레아와 라헬 사이의 투기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투기’란 시기, 질투의 차원이 도를 넘어서 상대에게 심히 악을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야곱이 14년이나 외삼촌 라반을 위해 봉사를 한 것은 결국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레아와 라헬 모두를 아내로 얻었다 해도 야곱의 사랑이 더 가는 쪽은 당연히 라헬이었기에 30절에 “그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고” 말씀합니다. 라헬은 ‘자신이 야곱으로부터 더 사랑받는다’는 자신감으로 인해 언니 레아를 무시하였습니다. 라헬은 자신이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으며 레아는 마치 덤으로 주어진 존재라는 생각이 있었기에 동생임에도 불구하고 언니인 레아를 무시하며 업신여기는 태도로 대하였던 것입니다.
라헬은 남편 야곱을 언니 레아와 공평하게 공유할 생각 자체가 없었기에 오히려 남편이 레아에게 쏟는 조금의 관심이나 사랑도 용납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남편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하다 보니 언니에게 아량을 베풀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좁고 인색한 마음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레아의 입장에서 볼 때는 너무나 억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레아는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아버지 라반의 말에 순종하여 야곱의 아내가 되었고 이유야 어찌 되었든 레아가 라헬보다는 언니였고 결혼도 먼저 했기에 질서 상으로 볼 때도 당연히 레아가 라헬보다는 더 위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레아 역시 남편 야곱의 사랑이 온통 라헬에게만 가 있는 것을 알았기에 라헬로부터 무시를 당하고 업신여김을 당하면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레아를 긍휼히 여기사 그의 태는 여셨으나 그 마음에 심히 시기와 질투가 많은 라헬은 태의 문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결국 라헬은 자식이 없었고 레아만이 연이어 네 명의 아들들을 낳게 되었지요.
그러면서 상황이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이전까지는 그냥 조용히 눌려 있던 레아도 그 마음속에 있던 것들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라헬은 아들을 한 명도 낳지 못하는데 자신은 네 명의 아들들을 낳았으니 이제는 자신이 야곱의 사랑을 더 받는다 생각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그동안 눌려 있던 시기, 질투의 마음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레아의 마음에도 없었던 것이 아니라 단지 상황이 안 돼서 눌러 놓았던 것이었는데 이제 눌러 놓았던 시기, 질투가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의 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동안 레아는 라헬에게 일방적으로 당해 온 상황이었지요. 언니 대접은 고사하고 첫 번째 부인으로서의 권리나 대접도 받지를 못했습니다. 이런 레아를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시고 그의 태를 열어 아들을 낳게 하셨으니 레아는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그녀가 선한 마음을 가졌다면 자신의 이전의 삶을 생각할 때에 지금 주어진 축복에 감사해야 할 것이고 자신이 받아야 했던 서러움을 생각할 때에 지금은 자신과 반대의 입장이 되어 있을 라헬을 생각해 주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레아는 자신의 예전 입장은 잊어버리고 이제는 자신이 더 위에 있다는 생각에 이번에는 자신이 라헬을 무시하고 업신여기게 되었습니다. 어느 한 쪽이 먼저 선의 마음으로 품은 것이 아니라 결국 똑같이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으로 인해 상대에게 악을 악으로 갚는 모습이었습니다.
마음이 선한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만 태를 열어 이렇게 네 명이나 되는 아들들을 주셨을까’를 생각하면서 자신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것이고 이만큼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며 만족할 것입니다. 그런데 레아는 일단 자신이 더 위에 있다고 생각하게 되니 예전에 라헬이 그랬던 것처럼 이제는 남편 야곱을 완전히 독점하려 했습니다.

32절을 보면 레아가 잉태하여 첫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고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권고하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습니다. 그동안 남편을 라헬에게 내어주어야 했던 서러움이 이 한 마디 말에 담겨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남편이 나를 사랑할 것이며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하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지요.
이러한 마음은 아들을 더 낳으면 낳을수록 더해집니다. 그래서 33절을 보면 레아는 둘째 아들을 얻은 후 “나의 총이 없음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도 주셨도다” 하고 그 이름을 ‘시므온’이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야곱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하고 있음을 돌아보심으로 아들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편이 되어 주셨다는 의미가 되지요.
34절을 보면 레아가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 이름을 레위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자신감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전에는 라헬에게 내어주었던 남편을 이제는 자신의 남편으로 찾아왔다는 의미이지요.
35절에는 마지막으로 넷째 아들을 낳고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면서 그 이름을 ‘유다’라 하였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는 모습이지요. 이처럼 레아는 아들을 하나씩 더 낳아갈 때마다 모든 것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며 스스로 높아져 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하기보다는 점점 더 높아지려고만 했습니다.

3. 아들을 낳지 못함으로 언니 레아를 투기하는 라헬

그렇다면 레아와 라헬 사이에 일어난 일을 여러분 자신의 모습과도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전에는 소외되고 인정받지 못하던 사람이 어느 날 인정받고 높아지게 되었을 때에 과연 오늘 본문의 레아와 같은 모습은 아니겠는지요. 아니면 소외되고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을 보면서 오늘 본문의 라헬과 같은 모습은 아니었습니까? 정녕 마음 중심에서 섬기는 사람은 자신의 위치가 높든 낮든 변함없이 섬깁니다. 먼저 앞서서 높은 위치에 있다면 당연히 소외되고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섬길 것이고, 소외되고 낮은 자리에 있다가 높아졌다면 예전의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며 오히려 더 열심히 소외되고 불쌍한 사람들을 찾아 섬기게 되지요. 섬기는 위치에 있던 사람이 높아졌다고 해서 섬김 받으려 한다거나 섬김 받는 위치에 있다 해서 섬겨 주는 상대의 입장을 생각해 주지 않는 사람이라면 진정한 섬김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라헬과 레아가 바로 이러한 사람이었지요. 자신이 높은 위치에 있을 때는 반대 입장에 있는 사람을 생각해 주지 않았고, 반대 입장에 있던 사람이 이제 상대를 누르고 높아졌을 때는 이전에 가지고 있던 감정까지도 터트렸습니다. 만약 라헬이나 레아 둘 중에 한 사람이라도 상대를 선으로 품고 이해했다면 형제 사이에 투기가 일어날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 투기로 인해 더 큰 연단의 고통 가운데 빠져들지도 않았겠지요.

30장 1절을 보면 마침내 라헬의 투기가 폭발하여 야곱에게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말합니다. 비록 라헬은 아이를 낳지 못하고 레아가 네 명의 아들을 낳았다 해도 라헬에 대한 야곱의 사랑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라헬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아이를 낳지 못함으로 인해 언니 레아로부터 멸시받고 있는 듯한 상황을 견뎌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자격지심으로 인해 레아가 자신을 멸시하고 업신여긴다고 자꾸만 생각하게 되었고 남편의 사랑도 예전같지 않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생각을 동원하게 되면 자꾸 의심이 생기고 더 깊이 자기의 생각대로 빠져들어 가게 되고 원수 마귀 사단이 얼마나 많은 오해들을 낳게 합니다. 그래서 분쟁이 생기고 여러 가지 사건들이 발생하게 되는데 라헬의 입장에서는 아들을 넷이나 낳은 언니 레아에 대해 시기, 질투를 넘어 투기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마침내 남편 야곱에게 ‘자기로 자식을 낳게 하지 않으면 죽겠다’는 말까지 하였으니 투기가 얼마나 깊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 이유가 남편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바로 자신에게 있음을 알면서도 라헬은 악한 말로 남편을 몰아 세웁니다. 그러자 야곱도 마침내 노를 발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4. 투기하는 라헬에게 노를 발하는 야곱

2절을 보면 야곱이 “그대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하면서 노를 발합니다. 그처럼 사랑하는 라헬이니 야곱이 처음부터 혈기를 낸 것은 아니지만 이처럼 노를 발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마음의 고통이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레아가 네 명의 아들을 낳는 동안 라헬은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자신도 아이를 잉태하고자 노력했을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남편 야곱이 레아와 동침하는 것조차도 못마땅하게 여겼을 것이고 자신과만 동침할 것을 계속 요구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레아는 네 아들을 낳아 가는 것을 보면서 라헬은 얼마나 속상했겠습니까. 이러한 라헬을 보면서 야곱도 처음에는 사랑하는 마음과 안쓰러운 마음에 속상해하며 투정하는 라헬을 받아 주었겠지만 세월이 자꾸 흐르면서 마침내 노를 발하게 된 것입니다.
야곱이 온전히 성결되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함없는 온전한 영의 사랑을 일구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겠지만 아직은 그러한 차원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상황이 너무나 어렵고 힘들어지니 결국 혈기를 발하고 말았습니다. 더욱이 야곱의 대답이 비록 맞는 것이기는 하지만 ‘잉태케 하시는 권한은 하나님께 있다’는 말 안에는 ‘나는 책임이 없다. 네 책임이다’라는 식으로 책임을 회피하려는 의도도 담겨 있습니다. 결국 ‘너에게 문제가 있어서 하나님께서 너의 태의 문을 열지 않으시는 것 아니냐’는 책임 전가의 의도가 들어있지요.
이러한 야곱과 비교하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어떠했습니까? 아브라함 역시 아내 사라와 그의 여종 하갈 사이의 시기, 질투로 인해 마음의 연단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어느 한 쪽에 노를 발한다거나 책임을 누구에게 전가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그 해답의 열쇠를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어느 한 편을 들어 줌으로써 둘 사이의 화평을 깨지도 않았고 자기 보기에 좋을 대로 조치를 취하지도 않았지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방법에 맡기고 자신은 온전히 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풀어 가시도록 아브라함이 오직 순종만 하니 하나님의 섭리가 어그러지지 않는 범위 안에서 하갈과 이스마엘에게도 은총을 베푸신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말로는 “그대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했지만 이것은 하나님께 맡기는 의미가 아니라 책임을 회피한 채 자신은 그 상황에서 빠지고자 했습니다. 한 마디로 그 상황에서 받아야 하는 마음의 고통이 싫어서 도망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마음의 연단이지요.
야곱이 온전히 하나님 앞에 의뢰하면서 모두가 화평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했다면 하나님께서 어찌 사람들의 마음을 주관해 주지 않으셨겠습니까? 비록 자신은 마음의 고통을 받아야 할지라도 선의 마음으로 끝까지 라헬과 레아를 품으면서 사랑으로 풀어 나갔다면 하나님께서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셨겠지요. 그러나 야곱은 아직 그러한 그릇이 못되었기에 라헬과 레아를 품지 못했고 라헬과 레아 사이의 투기는 날이 갈수록 더해지게 됩니다. 그 내용은 다음시간에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육의 사랑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잘해 주고 이해하며 포용하는 것 같다가도 결국 자신의 한계 상황에 부딪치면 내재되어 있던 악이 터져 나옵니다. 이전에 눌러 놓았던 감정까지도 함께 폭발하면서 분노와 혈기, 심지어 육체의 일까지 나올 수 있습니다. 야곱은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해 14년 동안이나 변함없는 마음으로 인내하며 지냈는데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만큼 라헬을 사랑했기 때문이며 그 사랑의 마음이 진실했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야곱도 아직 온전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결국 한계 상황에 이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계 상황이 있다는 것이 아직 온전히 성결되지 못했고 온전한 사랑을 이루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물론 “내가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이제는 도저히 안 되겠다” “내가 이러는 것은 내가 못 참아서가 아니라 저 사람이 너무 악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받아주다가는 안 되겠기 때문이다” 이런 말들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의분을 내는 것과 아직 버리지 못한 악의 모양 가운데서 노를 발하고 혈기를 내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마태복음 18:21-22을 보면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하고 묻는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말씀합니다. 490번만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라 항상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에게 죄를 범한 사람이라도 일흔 번씩 일곱 번 즉 무한대로 용서할 수 있다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상대를 깨우쳐 주고 바른 길로 이끌어 주기 위해 진리로 권면하고 책망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자신이 아직 버리지 못한 악의 모양 가운데 혈기를 내거나 노를 발한다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야고보서 1:20에는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했고, 디모데전서 2:8에는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말씀합니다. 더욱이 갈라디아서 5:20에서는 분냄을 현저한 육체의 일이라고까지 말씀하시니 어찌 분과 노와 혈기 등을 가지고 있겠습니까? 짜증이나 감정 역시 근본은 분노나 혈기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육의 사랑의 한계 속에 머물지 말고 무한한 영의 사랑 안으로 신속히 들어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3-24 오전 1:01:01 Posted
2015-09-08 오후 4:10:21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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