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29:21-30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내 기한이 찾으니 내 아내를 내게 주소서 내가 그에게 들어가겠나이다
라반이 그 곳 사람을 다 모아 잔치하고 저녁에 그 딸 레아를 야곱에게로 데려가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가니라 라반이 또 그 여종 실바를 그 딸 레아에게 시녀로 주었더라
야곱이 아침에 보니 레아라
라반에게 이르되 외삼촌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내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께 봉사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찜이니이까
라반이 가로되 형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라
이를 위하여 칠일을 채우라
우리가 그도 네게 주리니 네가 그를 위하여 또 칠년을 내게 봉사할지니라
야곱이 그대로 하여 그 칠일을 채우매 라반이 딸 라헬도 그에게 아내로 주고
라반이 또 그 여종 빌하를 그 딸 라헬에게 주어 시녀가 되게 하매
야곱이 또한 라헬에게로 들어갔고
그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고 다시 칠년을 라반에게 봉사하였더라
서론
구약 성경의 아가서는 솔로몬 왕 자신이 체험했던 남녀 간의 사랑을 통해 하나님과 우리들 사이의 사랑 즉 신랑되신 주님과 주님의 신부인 우리들과의 사랑을 비유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아가서를 문자적으로만 보는 사람들은 성경에 왜 이런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영적으로 깨닫는 사람들은 아가서를 통해 주님과 우리 사이의 사랑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깨우치게 되지요.
그 중에 아가 8:7을 보면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많은 물로도 홍수로도 어찌하지 못하고 온 가산을 다 주고도 바꾸지 못하는 사랑에 대해 비유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사랑이 있다면 그 앞에 어떠한 장애가 있다 하더라도 두렵지 않고 어떤 험한 길이라도 어렵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8:35-39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오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도 우리 주님과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과 바로 이러한 사랑을 나누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여러분과 주님과의 사이의 사랑을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끊을 수가 없는 것이며 여러분은 장차 천국에서 만날 주님을 생각하면서 이 땅에서의 삶 하루하루를 더욱 기쁘고 충만하게 보낼 수가 있는 것이지요. 사랑의 힘은 너무나 크고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이 땅에서의 남녀 간의 사랑이라 할지라도 정욕적이고 변질되는 육의 사랑이 아니라 변함없이 진실한 영에 속한 사랑이라면 그 사랑 안에는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본론
1. 라헬에 대한 사랑으로 7년이라는 세월도 수일같이 여겼던 야곱
야곱 역시 라헬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7년이라는 세월도 수일같이 여길 수가 있었습니다. 물론 이때 야곱의 사랑이 온전한 영의 사랑이라 말할 수는 없지만 사랑이 가지는 힘이 어떠한 것인지를 느낄 수 있지요. 야곱이 비록 라반의 조카이기는 하지만 지금은 라반의 딸 라헬을 얻는 조건으로 7년간을 봉사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조카 대접을 받으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삯을 받는 품꾼과 같은 조건에서 일을 해야 했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그럴 때마다 야곱은 라헬을 생각했지요. ‘지금은 비록 힘들고 어려워도 내가 조금만 더 견디면 사랑하는 라헬을 아내로 맞을 수 있다’는 이 한 가지 사실이 야곱으로 하여금 7년이나 되는 품꾼의 삶도 수일같이 여길 수 있게 하는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사랑의 힘이라 말할 수 있지요. 이처럼 야곱은 연단 중이라 할지라도 위로를 삼을 수 있는 사랑의 대상이 있었기 때문에 연단의 세월을 승리하며 보낼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만큼 천국에 대한 소망이 더해지면서 이 땅에서 겪게 되는 연단도 힘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망이 더해집니다. 주님이 더 뵙고 싶고 천국이 더 소망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빨리 오셨으면 좋겠다 천국에 빨리 가서 주님을 뵙고 싶다’ 하게 되지요. ‘이 땅에서의 삶이 힘드니까 빨리 천국에나 가면 좋겠다’ 하는 식으로 연단이 힘들어서 피하려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연단을 통해 오히려 주님의 마음을 깨닫고 느끼며 마음을 영으로 일구어가니 주님에 대한 사랑과 천국의 소망이 더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5:3-4에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말씀합니다. 환난이 오고 연단이 와도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로 인해 오히려 소망이 더해집니다. 야곱 역시 라헬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지금 당장 겪어야 하는 어려움과 고통을 ‘힘들다’ 하지 않고 인내할 수 있었으며 그러면서 날이 갈수록 ‘라헬을 아내로 맞을 소망’은 더해져만 갔습니다. 하지만 마음 중심이 곧지 못한 사람은 어떤 목표를 세웠을 때 처음에는 뜨겁게 달려가지만 세월이 흐르면 이내 변해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나는 어떠한 마음인가?’ 하면서 자신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에 변질되고 변개하는 육의 속성이 많을수록 처음 가졌던 마음이 쉽게 변합니다. 이런 사람은 누구를 뜨겁게 사랑하는 것 같다가도 세월이 지나면 그 사랑이 점점 식어지거나 자기 보기에 더 좋은 대상이 나타나면 그 사람을 좇게 됩니다. 바로 육의 사랑이지요. 이는 꼭 사람 사이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는 그 누구보다도 더 뜨겁게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사랑이 식어지고 나중에는 세상으로 빠지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영의 사랑은 자기가 원한다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영으로 변화되는 만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다 해도 마음이 영으로 변화되지 않는다면 그 신앙생활은 여전히 육적인 신앙생활인 것이며 주님에 대한 사랑 역시 육적인 사랑의 차원에 머물고 마는 것입니다. 비록 사람에 대한 사랑이었지만 야곱은 한번 품은 사랑의 마음이 변하지 않고 7년을 수일같이 여기며 보낼 수가 있었으며 라헬을 얻기 위해 다시 7년을 봉사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기꺼이 그렇게 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야곱과는 너무나 대조되는 인물도 있습니다. 바로 다윗 왕의 맏아들 암논이지요. 그는 이복누이 동생인 다말을 심히도 연애하였는데 그가 누이 동생이므로 어찌하지는 못하고 그로 인해 병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이러한 암논에게는 요나답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간교한 요나답은 암논으로 하여금 궤계를 써서 다말을 취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그래서 결국 암논은 요나답이 가르쳐준 방법대로 다말을 자기 집으로 불러들인 후 강제로 취하였습니다. 이렇게 행한 것 자체가 너무나 큰 악이었는데 더 큰 문제는 암논의 태도였습니다.
사무엘하 13:15에 보면 “그리하고 암논이 저를 심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미움이 이왕 연애하던 연애보다 더한지라 곧 저에게 이르되 일어나 가라” 했지요. 예전에는 연애하는 마음으로 인해 병이 날 지경이었던 사람이 이제와서 자신이 목적한 바를 취하고 나니 연애하던 마음보다 더한 미움의 마음으로 변질되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전에 병이 날 지경까지 연애하던 마음 역시 결국은 육적인 것이었고 얼마나 정욕적인 것이었는지를 알 수가 있지요. 사람이 그 마음에 악이 있고 변질되는 육의 속성이 남아 있는 이상 순간 보기에는 아무리 뜨겁고 진실한 사랑처럼 보여도 결국에는 변질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2. 한결같은 성실함으로 맡은 사명을 감당하는 야곱
야곱은 한번 목표한 바가 있으면 그것을 이루기까지 변함없는 마음으로 나갈 뿐만 아니라 주어진 일에 대해서는 한결같은 성실함으로 맡은 사명을 감당해 내는 좋은 중심을 가졌습니다. 비록 간교한 속성이 있음에도 야곱이 하나님 앞에 선택받아 쓰임받을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않고 깊은 마음 중심까지 보시기 때문에 각 사람의 장점을 들어 사용하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각 사람의 장점을 들어 사용하시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 해도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은 비진리를 가지고는 온전히 쓰임받을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연단을 통해 비진리들을 뽑아내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 가운데 연단을 통해 변화되어 가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도 위로해 주시고 소망을 주십니다. 계속해서 연단만 받도록 하시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잠시 쉼의 시간도 주시며 바라보고 달려갈 수 있는 소망도 주시지요. 야곱에게 있어서는 바로 라헬이 연단 중에도 바라보고 힘을 얻어 달려갈 수 있는 소망이 된 것입니다. 결국 7년의 세월을 채우고 난 후 야곱은 마침내 라헬을 아내로 맞을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격스러운 날이 왔습니까?
21절을 보면 야곱이 라반에게 “내 기한이 찾으니 내 아내를 내게 주소서 내가 그에게 들어가겠나이다” 말합니다. 이에 라반은 사람들을 다 모아 잔치까지 벌였는데 막상 그날 밤에 야곱에게 준 것은 라헬이 아니라 그의 언니 레아였습니다. 야곱은 이러한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한 채 레아와 동침을 하였지요. 그러나 아침이 되자 야곱은 자신과 동침한 것이 라헬이 아니라 레아였던 것을 발견하고는 자신이 외삼촌 라반에게 속은 것을 알게 됩니다.
야곱은 “외삼촌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내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께 봉사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찜이니이까” 말합니다. 그러자 라반은 “형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라” 하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키며 변명을 합니다. 속이는 것이 아니라면 7년 전에 설명을 했어야 함에도 라반은 그 지방의 특징을 들어서 자신의 정직하지 못했던 행동을 둘러대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궁색한 변명이었고 그의 속마음은 다른 데에 있었습니다.
27절을 보면 라반은 “이를 위하여 칠일을 채우라 우리가 그도 네게 주리니 네가 그를 위하여 또 칠년을 내게 봉사할지니라” 말합니다. 자기 조카인 야곱을 지금 이용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한다해도 야곱이 도망갈 사람이 아니고 또 라헬을 위해서 7년을 봉사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먼저 레아와 칠일을 채우고 나면 그때 라헬을 아내로 줄 터이니 그 후로 7년을 더 봉사하라는 뜻이지요. 라반의 목적이 결국은 야곱을 좀더 자신의 곁에 붙들어 두려는 데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라반은 왜 이렇게 하면서까지 야곱을 붙들어 놓으려 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야곱으로 인해 라반이 그만큼 큰 유익을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7년 동안에 야곱으로 인해서 라반은 거부가 되었습니다. 창세기 30:30에 야곱이 “내가 오기 전에는 외삼촌의 소유가 적더니 번성하여 떼를 이루었나이다 나의 공력을 따라 여호와께서 외삼촌에게 복을 주셨나이다 그러나 나는 어느 때에나 내 집을 세우리이까” 고백한 대로 라반은 야곱이 온 후로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라반의 입장에서는 야곱이 원하는 대로 라헬을 아내로 주면 야곱이 라헬을 데리고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버릴 것으로 생각했기에 나름대로 꾀를 짜낸 것입니다.
4. 라반을 통해 자신이 변화될 수 있는 계기를 삼은 야곱
야곱은 자신이 속은 것을 알았지만 그럼에도 외삼촌과의 약속에 따라 레아와 칠일을 채운 다음 라헬을 아내로 얻고 다시 7년간이나 라반을 위해 봉사합니다. 비록 외삼촌 라반이 정당한 방법을 쓴 것은 아니었으나 야곱은 이처럼 자신이 얻고자 하는 목표를 위해 부당한 약속이라 할지라도 일단 지켜내므로 결국 얻어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라헬을 얻기 위해서 14년간을 외삼촌 집에서 죽도록 충성을 다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야곱에게는 연단의 과정이었지요. 야곱은 자신의 간교한 속성을 좇아 아버지 이삭과 형 에서를 속이고 장자의 명분을 얻어내는데 성공했습니다. 자기도 아비를 속이고 에서를 속였는데 자기도 결국 외삼촌을 통해서 속임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당장에는 이전보다 훨씬 못한 상황에 처하고 말았지요. 자기 나름대로는 지혜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자신이 목표한 바를 마침내는 얻어냈다고 하는 자부심도 가질 수 있었겠지만 그로인해 치러야 하는 대가가 너무 컸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간교한 꾀에 넘어가 14년이라는 세월을 보내게 되지요. 스스로 지혜롭다 자부했을 야곱이었지만 이번에는 자신이 간교한 꾀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심은 대로 거두게 된 것이지요. 물론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해 7년을 봉사하겠다고 먼저 말한 것은 야곱이었지만 라반이 정말 선한 사람이었다면 이러한 조건을 달아서 라헬을 주지는 않았겠지요.
라반은 야곱으로부터 그가 자신에게 온 것이 형 에서를 피하기 위한 목적만이 아니라 아내를 얻기 위한 목적도 있음을 들었으니 선한 마음이었다면 동생 리브가를 생각해서라도 야곱에게 라헬을 아내로 주고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기까지 돌봐주었을 것입니다. 외삼촌으로서 얼마든지 해줄 수 있는 일이지요. 그러나 라반 역시 간교한 속성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어떻게 하면 자신에게 더 유익이 되는 상황으로 만들어갈까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라반을 통해 야곱은 자신의 간교한 속성을 돌아보며 변화될 수 있는 계기를 삼게 되었지요.
만약 야곱이 자신의 꾀에 넘어가는 사람들만 만났다면 야곱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과 비슷하게 간교한 속성을 가진 외삼촌 라반을 통해 연단을 받으면서 오히려 자신을 발견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자기도 형을 속이고 아비를 속였는데 나도 외삼촌으로부터 철저하게 속임을 당했구나 깨닫지 않겠습니까? 이는 여러분이 연단받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을 볼 때 특별히 눈에 더 크게 띄는 비진리의 분야가 있다면 ‘혹시 그러한 비진리의 분야가 내 자신에게는 있지 않은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진리로 분별을 하기 때문에 상대의 비진리가 보일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는 내 안에 그 비진리의 분야가 많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그럴 것이라’고 판단하는 경우가 있지요. 마태복음 7:3에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는 말씀처럼 자신의 눈 안에 들보가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티가 더 잘 보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자신이 늘 거짓말하고 속이는 사람은 으례히 다른 사람들도 그럴 것이라 생각해서 상대가 조금만 이상해도 ‘저 사람이 나를 속이는구나’ 판단하기도 합니다. 또한 자신 안에 간음의 마음이 가득한 사람 역시 다른 사람들에 대해 늘 의심하고 판단하거나 상대의 호의를 육으로 받는 경우도 있지요. 자신이 이성(異性)을 대할 때마다 쉽게 음욕을 품어왔기 때문에 이성(異性)의 사람이 자신에게 조금만 잘해줘도 ‘저 사람이 나를 좋아하나보다’ 하며 자기에 맞추어 정욕적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밖에도 상대가 들레고 높아지려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마음이 불편해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자신의 마음 안에도 들내고 높아지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가 아니라도 다른 사람의 혈기 내는 모습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돌아볼 수도 있고 가족이나 자녀의 모습을 통해 간접적으로 자신을 돌아볼 수도 있습니다. 야곱은 그의 간교한 속성을 어머니 리브가로부터 타고 났는데 라반은 바로 리브가와 한 핏줄을 타고 났으니 그에게도 당연히 간교한 속성이 있었던 것이지요.
이처럼 간교한 속성을 가진 야곱과 라반 두 사람이 만난 것인데 처음에는 라반의 꾀에 야곱이 넘어간 듯했으나 결국에는 야곱의 간교한 꾀에 라반이 당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앞으로 차차 설명이 되겠지만 라반은 야곱을 한번만 속인 것이 아니라 열 번이나 그 품삯을 변역하지요. 이에 야곱이 더 이상은 참지를 못하고자 자신의 지혜 가운데 나름대로 꾀를 써서 부를 축적한 후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던 것입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의뢰하여 선으로 나갔다면 하나님께서 더 좋은 방법으로 역사해 주셨겠지만 이것이 야곱의 한계였고 결국 얍복 강가에서 철저히 깨어지는 역사가 필요했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창세기 강해를 통해 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앙과 그들이 왜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을 수 있었고 또 왜 연단을 받아야 했는지가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수천 년 전에 저 멀리 이스라엘과 그 주변 지역에서 일어났던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오늘을 살고 있는 여러분의 삶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상황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삭의 모습을 보면서 ‘나에게는 정말 편애하는 마음은 없는가’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명심하여 그 뜻대로 순종하려고 하는가’ 야곱의 모습을 보면서는 ‘나에게는 간교한 속성은 없는지’ ‘내 목적한 바를 이루고자 다른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지는 않았는지’ ‘나는 과연 야곱과 같이 하나님께서 한 번 주신 약속을 변함없는 마음으로 중심에 받고 믿었는지’ 자신을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이밖에도 에서의 모습, 리브가의 모습 그리고 라반의 모습을 통해서도 육이라는 것이 얼마나 가치 없는 것인지를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또한 앞으로 계속되는 말씀을 통해 라헬과 레아의 육의 모습을 보면서 육이라는 것이 자신만이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까지도 얼마나 고통스럽게 만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영의 급격한 물결 속에 온 영의 흐름을 타고 어찌하든 신속히 육을 벗고 영으로, 온 영으로 들어오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특별히 오늘 말씀을 통해 야곱이 왜 하나님 앞에 쓰임받을 수 있는 중심이었는지를 다시 한 번 들으셨으니 야곱과 같이 목표한 바를 이루기까지 변개함이 없는 중심으로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물론 주 안에서 하나님의 뜻에 맞는 선한 것이어야 하겠지만 작은 목표 하나부터 변개함 없는 마음으로 이루어 나간다면 큰 목표도 능히 이룰 수가 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16:10에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말씀하셨으니 연초에 세웠던 계획을 얼마나 변개함 없는 마음과 행함으로 이루어가고 있는지를 다시 한 번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올해에 목표한 바를 꼭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3-24 오전 1:01:01 Posted
2015-09-08 오후 2:00:18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