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응답서비스

금요 철야 예배

제목
창세기 강해(160)  [창28:16-29:9]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05.02.11
창세기 28:16-29:9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야곱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본 이름은 루스더라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야곱이 발행하여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러 본즉 들에 우물이 있고 그 곁에 양 세 떼가 누웠으니 이는 목자들이 그 우물에서 물을 양 떼에게 먹임이라
큰 돌로 우물 아구를 덮었다가 모든 떼가 모이면 그들이 우물 아구에서 돌을 옮기고
양에게 물을 먹이고는 여전히 우물 아구 그 자리에 돌을 덮더라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형제여 어디로서뇨 그들이 가로되 하란에서로라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홀의 손자 라반을 아느냐 그들이 가로되 아노라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가 평안하냐 가로되 평안하니라 그 딸 라헬이 지금 양을 몰고 오느니라
야곱이 가로되 해가 아직 높은즉 짐승 모일 때가 아니니 양에게 물을 먹이고 가서 뜯기라
그들이 가로되 우리가 그리하지 못하겠노라
떼가 다 모이고 목자들이 우물 아구에서 돌을 옮겨야 우리가 양에게 물을 먹이느리라
야곱이 그들과 말하는 중에 라헬이 그 아비의 양과 함께 오니 그가 그의 양들을 침이었더라

1. 서론

야곱은 자신이 듣고 본 내용을 꿈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꿈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잠이 든 야곱에게 1하늘의 공간과 3하늘의 공간이 연결되어 펼쳐지는 영의 세계에서의 현상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3하늘의 공간에서 느껴지는 신비하고 오묘함 때문에 자신이 지금 꿈을 꾸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고후 12:1-4에도 사도 바울이 십사 년 전에 체험했던 영적인 현상에 대해 말합니다.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이것은 사도 바울의 영이 셋째 하늘로 이끌리어 낙원을 보고 온 것을 설명한 것인데 이처럼 놀라운 현상에 대해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몸 안에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몸 밖으로 빠져나간 것 같기도 했던 당시의 현상을 표현한 것입니다.
야곱 역시 이와 비슷한 상황이지요. 지금 보고 듣는 것이 마치 꿈을 꾸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실제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기도 했기에 이처럼 생소한 현상을 자신이 꿈을 꾼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치 3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것처럼 기록되어 있는데 이때 야곱이 하나님의 형상을 직접 본 것은 아닙니다. 지난 시간에 설명한 스데반 집사 역시 영안이 열려 3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그 우편에 서신 주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이때도 스데반 집사가 하나님을 직접 뵌 것은 아닙니다. 행 7:55에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씀한 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앞으로 천국에 가면 알게 될 일이지만 낙원이나 1천층이나 2천층에 들어간 사람들은 예배를 드려도 직접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는 없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3천층이나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하나님을 직접 뵈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직접 뵙는 것은 아무에게나 허락되는 것이 아니라 성결되어 악은 모양이라도 없으며 하나님 앞에 그만큼 인정받는 존귀한 위치에 오른 사람에게만 허락됩니다. 그래서 창 28:13에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말씀한 대로 야곱은 하나님의 모습을 직접 뵌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무수한 빛들과 하나님을 두르고 있는 영광의 광채를 보면서 “아, 여호와 하나님이시구나!” 하고 깨달았던 것입니다.


2. 본론

1)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단을 쌓은 야곱
16절을 보면 야곱은 잠에서 깨어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고백합니다. 야곱이 자기 생각에는 분명 꿈을 꾼 것 같은데 그 느낌이 너무 생생하고 마치 현실에서 일어난 것과 같았기에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이라는 고백을 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금 이 자리에 친히 계신 것처럼 생생한 감동으로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야곱은 하나님을 만나는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사실 야곱은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 보면서 많은 것을 돌아보며 깨우치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장자의 명분을 차지하게 되면 확실한 위치를 보장받으며 자신의 앞길에는 축복만이 기다릴 것이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상황은 더 악화된 것 같아 보였던 것입니다. 형 에서의 위협을 피해 안정되고 평안한 집을 떠나 멀리 외삼촌의 집으로 도망가야 하고 어디 하나 의지할 곳 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장자로서의 권한을 가지고 형통한 축복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얽히고설킨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있던 야곱에게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축복과 보장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그제서야 야곱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음을 깨닫고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동시에 두려움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17절에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고백합니다. 물론 이때 야곱이 “두렵도다 이곳이여” 한 데에는 이곳이 바로 하나님을 만나고 그 음성을 들은 장소이므로 그것으로 인해 느껴지는 신령한 기운 때문이지요. 이곳은 하나님께서 계신 곳이기에 하나님의 전이며 하나님과 통하는 통로이기에 하늘의 문이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두렵다 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의 섭리와 뜻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육신의 생각을 동원함으로 어그러지지는 않았나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지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맡겨 놓았으면 좋았을 텐데 자신이 육신의 생각을 동원함으로 모든 상황이 더 안 좋게 되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처럼 야곱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깨닫게 되면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며 회개하는 귀한 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이 순간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기념하기 위해 야곱은 어떻게 했습니까? 18절에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 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말씀한 대로 하나님께서 주신 꿈과 비전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깨달은 것을 마음 중심에 명심하여 새기며 자신을 비춰 보는 귀한 자리가 되었음을 기념하여 베개 하였던 돌로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부어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랬고 이삭이 그랬던 것처럼 야곱 역시 하나님 앞에 단을 쌓은 것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과의 언약을 더욱 굳게 하여 하나님 앞에 증거를 삼는 것이지요. 여러분도 축복 받기 위해서는 은혜의 기회들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 앞에 어떤 감사의 조건이 생겼을 때 그냥 입술로만 “감사합니다” 하고 마는 것과 그 감사의 마음을 행함과 정성으로 표현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지요. 하나님 앞에 감사의 마음을 행함과 정성으로 나타냈을 때에 그 감사의 조건을 하나님 앞에 더 온전하게 보장받으며 굳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법칙을 알았기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실 때마다 그곳에 단을 쌓아 번제를 드렸고 이삭 역시 아버지 아브라함을 통해 배운 대로 마음에 명심하여 행했습니다.

19절을 보면 야곱은 이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부릅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란 뜻이지요. 그런데 아주 먼 훗날 즉 야곱이 20년의 연단을 마치고 형 에서와 화해를 한 후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 번 야곱을 이곳 벧엘로 부르십니다. 창 35:1에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시지요.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축복의 언약을 맺은 장소로 그를 다시 불러 정식으로 단을 쌓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곳 벧엘에서 다시 한 번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칭하시며 축복의 말씀을 주십니다.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맺은 언약의 장소를 기억하시며 그곳으로 야곱을 불러 축복하셨습니다.

2) 야곱처럼 육신의 생각을 동원했을 때 중심의 차이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가고 있던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 주신 언약의 말씀은 너무나 큰 힘이 되었습니다. 장차 그에게 다가올 연단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되었지요. 비록 자신이 육신의 생각을 동원함으로 지금의 상황은 얽히고 설킨 것같이 보이지만 자신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기에 야곱은 새 힘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중심의 차이에서 오는 모습입니다.
예를 들어 똑같이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여 그로 인해 하나님 앞에 담이 되었을 때 중심이 어떠하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지요.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은혜의 기회를 주셨을 때에 그것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섬세하고 자상하신 사랑 가운데 인도받아 나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은혜의 기회를 주셔도 그것을 붙잡지 못하고 계속해서 눌려 있고 낙심되어 있는 사람도 있지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중심의 차이에서 오는 현상입니다. 마음 중심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은 그만큼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기회를 잡기가 쉽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해 주시는 것도 더 쉽게 느낄 수가 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도 느끼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은혜의 기회를 주셔도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여전히 죄의 담을 헐지 못한 채 주저앉아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셨을 때 자신의 부족함을 돌아보고 회개하여 즉시로 힘을 얻어 나갔습니다. 이러한 은혜를 주신 하나님 앞에 야곱은 서원 기도를 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습니다.

3) 야곱의 서원 기도와 십일조를 드리게 된 배경

20-22절에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말씀합니다. 야곱이 하란을 향해 가는 길은 떳떳이 가는 것도 아니고 형을 피해 쫓겨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태어나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외삼촌이 냉대한다면 얼마나 큰 일입니까? 야곱은 의식주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기에 하나님께 서원하며 기도하였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자기 얻은 것의 십분의 일을 드린 예가 있었지만 이때 야곱을 통해 비로소 십의 일조에 대한 개념이 정식으로 세워지고 있습니다. ‘십의 일조’란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가운데서 나를 지키시는 분이며 또한 모든 물권의 주인이 되시는 분임을 인정하는 증거입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으로서 하나님께서 나를 지키시고 내 삶의 주관자가 되시며 모든 물질의 주인이 되신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당연히 하나님 앞에 십의 일조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이러 이러하게 해 주시면 십의 일조를 드리겠다’고 기도하는 것이 혹여 하나님 앞에 어떤 조건을 내세우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조건부적인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마음 중심에 명심하고 믿음으로 받아 마음의 결단을 서원 기도로 올린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에 주관을 받아 하나님 앞에 서원한 것은 어떠한 경우에라도 반드시 지켜져야 합니다. 어떤 상황과 조건을 핑계로 지키지 않으면 그것이야말로 조건부적인 신앙이 되고 말지요. 서원 기도와 조건부적인 신앙에서 나오는 조건적인 기도와의 차이점은 바로 믿음입니다.
조건부적인 신앙에서 나오는 조건적인 기도는 믿음에서 나오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며 요행을 바라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지 않으면 절대로 자신이 했던 기도의 내용을 이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축복을 주지 않으셨으니 나도 하나님께 드릴 것이 없다’고 합니다. 즉 하나님 편에서 약속을 이행하지 않으셨으니 나도 이행하지 않는다는 식이지요. 설령 응답을 주셔도 서원을 이행하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이 어찌 조금의 믿음이라도 있는 사람의 모습이겠습니까?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도 아예 기도에 응답해 주실 수가 없습니다.
때로는 서원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 주시면 저도 이렇게 하겠습니다.”라는 식으로 드리는 경우도 있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 주심을 믿고 드리는 기도입니다. ‘만약 응답해 주시면 나도 약속을 지키고 응답해주지 않으시면 나도 약속을 안 지켜야지’ 하는 이러한 조건적이고 간사한 마음이 전혀 없는 오직 믿음에서 나오는 기도라는 말이지요. 그러니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도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서원 기도는 함부로 해서도 안 되지만 믿음으로 서원 기도를 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그 기도가 응답되어진다는 위력이 있습니다. 때로는 사람들이 함부로 서원 기도를 하기도 하고 그렇게 서원 기도를 했으면서도 응답받지 못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그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믿음의 기도냐, 조건적인 기도냐’ 하는 마음 중심의 차이 때문이지요. 자신은 믿음으로 기도한다고 하였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조건적인 기도이고 변개할 수 있는 중심이기에 결국 하나님의 응답이 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시 15:4 후반절에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며”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뢰관계인 것입니다. 설령 해로울지라도 서원한 것을 변치 않고 지킬 중심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의 서원 기도를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에 너무 감사하여 하나님 앞에 자신을 묶어서 드리는 서원 기도도 있는데 예를 들면 “주의 종으로 가겠습니다.” “결혼하지 않고 주님 오실 때까지 가겠습니다.” 이런 내용의 서원 기도를 하는 경우가 있지요. 이러한 서원 기도 역시 그 순간에 충만하다 하여 함부로 해서는 절대 안 되는 것이며 일단 서원을 했다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4) 외삼촌 라반을 만날 수 있도록 순적히 인도받는 야곱

창세기 29장부터는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 도착하여 정착하게 되는 과정이 나오고 있습니다. 당시 유목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우물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지요. 가축들에게 먹일 물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전쟁도 불사할 만큼 물의 공급원이 되는 우물은 생존과 직결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삭도 예전에 우물을 확보하기 위해 몇 번씩 이주까지 했던 것을 볼 수 있지요. 이러한 당시 상황을 이해해야 본문의 내용이 이해됩니다.
야곱이 하란에 도착하여 보니 우물이 있고 그 곁에 양 세 떼가 누워 있는데 우물 아구는 큰 돌로 덮여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모든 떼가 모이면 그제야 우물 아구에서 돌을 옮겨 양에게 물을 먹이고 다시 우물 아구를 돌로 덮어 놓는 것입니다. 우물을 어느 한 개인의 소유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그 주변에서 양 떼를 치는 사람들이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떼가 모여야 그제서야 우물 아구를 열고 양들에게 물을 먹일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양들에게 물을 다 먹인 후에는 다시 아구를 돌로 덮어서 사사로이 어느 양 떼에게만 물을 먹이는 일이 없도록 했습니다. 이처럼 양 떼를 함께 모아 물을 먹이고 공동으로 우물을 관리함으로써 물의 낭비를 막고 물로 인해 생길 수 있는 시비를 없애고자 했던 것입니다.
야곱이 먼 여행 끝에 동방 사람의 땅에 도착했을 때가 마침 양을 치는 목자들이 양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 우물가로 모여들고 있는 상황이었지요. 그래서 야곱은 목자들에게 외삼촌 라반에 대해 물어봄으로써 순적히 라반을 만날 수 있도록 인도받게 됩니다. 6절에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가 평안하냐 가로되 평안하니라 그 딸 즉 라반의 딸 라헬이 지금 양을 몰고 오느니라” 말씀한 대로 야곱은 양치는 목자들로부터 반가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러한 순간에도 야곱의 성격이 잘 나타나고 있는데 7절에 “야곱이 가로되 해가 아직 높은즉 짐승 모일 때가 아니니 양에게 물을 먹이고 가서 뜯기라” 했습니다. 야곱은 그곳에 모인 목자들을 처음 보는 것이며 자기 수하에 있는 사람도 아니고 어떤 친분이 있는 사이도 아니지만 야곱은 스스럼없이 명령하는 듯한 태도의 말을 합니다. 야곱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 라반은 그곳에서 어느 정도 힘과 부와 권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주변에서 그의 이름을 들으면 알 수 있고 또한 무시하지 못할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지요. 그리고 야곱은 외삼촌 라반을 만날 순간이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곧 자신과 라반의 관계가 밝혀지게 되니 야곱의 마음에는 이미 외삼촌 라반이라는 존재가 자신을 든든히 받쳐 주고 있다고 느낀 것입니다. ‘내가 바로 너희들도 잘 아는 라반의 조카다’ 하는 이러한 마음이 있었다는 말이지요.
야곱의 간교한 속성이 바로 이러한 모습에서도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권세자를 등에 업고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는 마음도 결국은 간교한 속성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것이 왜 간교한 속성인지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3.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곱이 비록 간교한 속성이 있기는 했지만 얼마나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감당했는지가 창 31:38-40에 잘 나와 있습니다. “내가 이 이십 년에 외삼촌과 함께하였거니와 외삼촌의 암양들이나 암염소들이 낙태하지 아니하였고 또 외삼촌의 양 떼의 수양을 내가 먹지 아니하였으며 물려 찢긴 것은 내가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지 아니하고 스스로 그것을 보충하였으며 낮에 도적을 맞았든지 밤에 도적을 맞았든지 내가 외삼촌에게 물어내었으며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내었나이다” 고백합니다.
이처럼 야곱은 성심성의껏 주어진 일을 감당하는 차원을 넘어 주인의 것을 자기 것처럼 여기며 최선을 다하는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성품을 지녔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우물가에 있는 목자들이 너무나 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직 해가 높이 있어서 다른 양 떼들이 모일 시간도 안 되었는데 미리 와서 놀고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안타까운 마음에 “해가 아직 높은즉 짐승 모일 때가 아니니 양에게 물을 먹이고 가서 뜯기라”고 말한 것입니다.
물론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권세를 힘입어 담대히 명령 투의 말을 했지만 성실함과 책임감으로 자신의 사명을 감당해 내는 야곱의 성품만은 좋은 것이고 본받아야 합니다. 야곱은 자신이 말한 대로 밤낮없이 외삼촌의 양을 지키며 성심성의껏 최선을 다해서 일했습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장점을 보신 것이고 그의 간교한 속성만 빼내면 훌륭하게 쓰임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택하여 연단하심으로 간교한 속성을 빼내게 하시고 그의 곧고 좋은 중심을 통해 선민 이스라엘이 나오도록 역사하신 것이지요. 아무리 좋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 해도 비진리를 벗어내야 장점들이 온전히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속히 자신을 발견하고 영으로 변화되어 여러분의 장점들이 마음껏 빛을 발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귀히 쓰임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3-24 오전 1:01:01 Posted
2015-09-08 오후 2:00:19 Updated

다음 글 창세기 강해(161) 이전글
이전 글 창세기 강해(159) 다음글
이전 페이지 인쇄하기 글자크게 글자작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