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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철야 예배

제목
창세기 강해(159)  [창28:6-15]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05.02.04
창세기 28:6-15
에서가 본즉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고 그를 밧단아람으로 보내어 거기서 아내를 취하게 하였고
또 그에게 축복하고 명하기를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라 하였고
또 야곱이 부모의 명을 좇아 밧단아람으로 갔으며
에서가 또 본즉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 그 아비 이삭을 기쁘게 못하는지라
이에 에서가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 본처들 외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을 아내로 취하였더라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1. 서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곱은 그 어머니 리브가가 생각해 낸 방법을 좇아 일단은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야곱이 이처럼 외삼촌의 집으로 간 데에는 바로 이방인이 아닌 자기 민족 가운데서 아내를 취하기 위한 목적도 동시에 있었지요. 그러나 동생 야곱이 외삼촌의 집으로 가는 것이 자신을 피하기 위한 목적이었다는 사실을 에서는 전혀 눈치 채지를 못했습니다. 단지 이방인이 아닌 자기 민족 가운데서 아내를 구하기 위한 것으로만 생각했지요. 만약 에서가 야곱의 숨은 의도를 눈치 챘다면 그냥 순순히 보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에서는 야곱이 아내를 구하기 위해 잠시 다녀 오리라고만 생각했습니다.

2. 본론

1) 장자의 명분을 되찾으려는 마음에서 이스마엘의 딸 중에서 아내를 취한 에서

이처럼 이방인이 아닌 자기 민족 가운데서 아내를 구하기 위해 야곱이 멀리 외삼촌의 집에까지 가는 것을 본 에서는 자신도 자기 민족 가운데서 새롭게 아내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은 예전에 부모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자기 눈에 좋게 보이는 대로 이방 여인 중에서 아내를 택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헷 사람의 딸들을 아내로 취한 일에 대해 어머니 리브가가 너무나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아버지 이삭 역시 에서의 아내를 못마땅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8절에 “에서가 또 본즉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 그 아비 이삭을 기쁘게 못하는지라” 말씀합니다. 예전에는 자신의 이방인 아내들로 인해 부모님이 걱정하고 근심한다는 것에 대해 에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장자의 명분이 동생 야곱에게 넘어간 상황이고 거기다 야곱은 자기 민족 가운데서 아내를 취함으로 정통 계보를 이어야 하는 장자로서의 위치를 더욱 확고히 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호시탐탐 장자의 명분을 되찾아올 기회만을 노리고 있던 에서로서는 마음이 더욱 조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아내가 이방 여인이라는 사실로 인해 장차 장자의 명분을 되찾아 오려고 하는 자신의 계획에 혹여 차질이 생기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습니다.
에서는 자신이 야곱을 죽이게 되면 잃었던 장자의 명분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자신이 그렇게 해서 장자의 명분을 찾아온다 해도 지금 있는 아내들로 인해 문제가 될 수 있음을 뒤늦게 깨달은 것입니다. 장자는 자기 민족의 정통 계보를 이어야 하는데 자신의 아내들은 모두가 이방 여인들이었고 그나마 부모님에게 근심까지 되고 있습니다. 반면에 동생 야곱은 부모님의 명에 순종하여 정통 계보를 이을 뿐만 아니라 부모님의 기쁨이 되는 아내를 구하고자 멀리까지 길을 떠나는 상황이었지요. 에서는 자신과 너무나 비교되는 야곱의 행동을 보면서 위기감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장차 장자의 명분을 되찾아 온전한 장자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도 야곱과 같이 자기 민족 안에서 아내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에서가 생각해 낸 방법은 자신의 할아버지인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받은 이스마엘에게로 가서 그의 딸 중에서 아내를 취하는 것이었지요. 9절을 보면 “이에 에서가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 본처들 외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을 아내로 취하였더라” 말씀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부모의 뜻에 순종하기 위한 좋은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뒤늦게나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것도 아니었지요. 앞으로 장자의 명분을 되찾으려는 마음에서 장자로서의 형식을 갖추기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오직 자신의 유익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지요.
이를 통해 우리는 비록 겉으로는 같은 행동처럼 보여도 그것을 행하는 각 사람의 속마음은 전혀 다를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겉으로는 똑같이 순종하는 것같아 보여도 어떤 사람은 정말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순종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겉으로만 순종하는 척하는 사람도 있다는 말이지요. 또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따라하는 사람도 있구요. 그러니 똑같이 기도를 하고, 봉사를 하며, 사명 감당을 해도 마음을 담아 하는 사람과 겉으로 형식적으로만 하는 사람과는 하나님께서 보실 때 너무나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요일 3:18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말과 혀로만이 아니라 행함으로 나타내어야 하되 거기에는 반드시 진실함이 있어야 합니다. 즉 마음 중심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진실한 행함이어야 하는데 에서가 새롭게 아내를 구한 것은 단지 겉으로 보여지기 위한 것이었고 그것도 장자의 명분을 되찾기 위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에서가 비록 뒤늦게나마 이스마엘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이기는 했지만 이로 인해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되거나 부모의 기쁨이 되지 못했습니다.

2)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순종의 의미

에서는 뒤늦게 자기 민족 가운데서 아내를 구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한 후였고 그렇다 하여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순종도 아니었으며 단지 자기 욕심을 좇아 한 것뿐이었지요. 순종이란 그 시점 또한 맞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명하셨으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때에 맞추어 순종해야 하지요. 그래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온전한 순종이 되는 것입니다. ‘아멘’은 해 놓고 시간을 끌다가 자기 보기에 좋은 때에 순종한다면 이 역시 불순종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신뢰받을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는 바로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을 때 곧바로 순종했기 때문이지요.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라 하셨을 때도 그렇고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 하셨을 때도 아브라함은 생각을 동원하거나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즉시로 순종의 행함이 나왔습니다. 역대상 11장에 나오는 다윗의 세 용사 역시 섬기는 왕이 원하는 것을 알았을 때에 그것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돌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조금의 지체함도 없이 곧바로 행함이 나왔습니다.
다윗 왕이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마시기 원했을 때 다윗의 세 용사는 그곳이 블레셋 군대가 진을 치고 있는 적진임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달려가 우물물을 길어 왔습니다. 물론 다윗이 그렇게 하도록 시킨 것은 아니지만 세 용사의 마음에는 어떻게든 왕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 드리려는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감동이 되는 것은 이러한 부하들의 모습을 본 다윗 왕의 행동이지요. 다윗 왕은 부하들이 생명을 걸고 어렵게 구해온 우물물을 마시기를 기뻐하지 않고 그 물을 하나님 앞에 부어 드립니다. 그러면서 대상 11:19에 “내 하나님이여 내가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갔던 사람들의 피를 어찌 마시리이까” 고백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부하를 아끼고 사랑하는 다윗 왕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장면입니다.
이처럼 원하는 때에 맞추어 순종할 때만이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와 같이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유익을 생각하고 육의 환경과 조건을 먼저 바라보게 되면 결코 참된 순종이 나올 수 없습니다. 결국 할 수 있는 것만 순종하고 할 수 없는 것은 여전히 순종하지 못하게 됩니다. 또한 원하는 때가 지나고 나면 아무리 순종한다고 해도 이미 늦은 것이니 순종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바로 에서의 경우가 그러했다는 말입니다.

3) 야곱에 대한 감정을 눌러 참으며 고통을 받은 에서

이처럼 새롭게 아내를 구하면서까지 장자의 명분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였던 에서였기에 그로부터 20년이 지나 동생 야곱과 화해하기까지 그가 받아야 했던 마음의 고통도 그만큼 컸습니다. 장자의 명분을 되찾기 위해 동생 야곱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동안 그는 마음에 쌓은 감정을 풀지 못한 채 계속해서 고통받아야 했습니다. 물론 야곱도 형 에서와 화해하기까지는 마음이 늘 편치 못했겠지만 미운 감정을 눌러 참으며 품고 있었던 에서는 그보다 더한 고통을 받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누군가에 대해 감정을 품는다는 것이 얼마나 자기 스스로도 고통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미움, 시기, 질투 등의 감정을 오랫동안 품다 보면 이는 마음의 고통만이 아니라 육적인 질병의 고통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날 많은 질병들이 바로 마음에 온갖 감정과 악을 품고 있기 때문에 시작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도 질병 없이 오래 사는 비결에 거의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것이 바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마음을 편하게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영으로 들어오면 결코 아플 이유가 없습니다.
다만 영으로 들어왔다 해도 하나님의 나라와 영혼들을 위해 염려하며 애통하는 일은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것은 육적인 염려나 애통과는 달라서 몸을 상하게 하거나 질병으로까지 발전하지는 않지요. 물론 너무 애통함이 심하다 보면 간혹 몸을 상하게 되는 수도 있기는 하지만 영으로 들어온 사람은 절제의 능력이 있기 때문에 이내 절제하고 회복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영으로 들어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를 여러분이 아셔야 합니다.
에서도 모든 것을 이해하고 용서하며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는 영의 마음이었다면 그처럼 오랜 세월 고통받으며 살 필요가 없었습니다. 야곱 역시 사람의 생각 가운데 방법을 동원하기보다는 하나님께 맡기고 의뢰하여 인도하심을 받아 나갔다면 연단과 고통의 세월이 더 짧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결국 사람의 방법을 좇아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고향이며 외삼촌 라반이 살고 있는 본토 친척의 땅 하란을 향하여 길을 떠났습니다.

4) 야곱에게 꿈과 비전을 주시며 승리할 수 있도록 역사하신 하나님

이렇게 하란을 향해 가는 도중에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장차 그를 통해 이루실 놀라운 축복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앞으로 펼쳐질 상황들이 야곱 개인적으로는 자신을 깨뜨리고 변화시키기 위한 연단의 과정이었지만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볼 때는 장차 선민 이스라엘을 이루시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미리 이에 대한 꿈과 비전의 말씀들을 주심으로 그가 이 언약의 말씀을 붙잡고 승리해 나갈 수 있도록 역사하신 것이지요. 그 말씀은 바로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주셨고 그 후에 아브라함의 뒤를 이은 이삭에게 주셨으며 이제 정통 계보를 따라 이삭의 뒤를 이어 장차 이스라엘의 시조가 될 야곱에게 주시는 축복의 약속이었습니다.
13-15절에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말씀합니다.
멀리 낯선 땅을 향해 길을 떠나는 야곱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이 언약의 말씀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이 말씀을 믿음으로 받았기에 20년의 연단의 세월을 마친 후에 결국 고향 땅을 향해 돌아오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이 바로 이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설명을 들으면 아시겠지만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 살면서 그곳에 삶의 터전을 일구게 됩니다. 그러니 20년이 지난 후에는 이미 그곳에 아내들과 자녀들도 있고 많은 가축들을 비롯한 재산도 있으며 삶의 뿌리를 깊게 내리고 있는 상황이었지요. 이러한 야곱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나는 벧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 말씀하시자 야곱은 곧바로 순종하여 떠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20년 전에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았기에 이제 때가 되어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그때의 언약을 상기시켜 주자 그대로 순종한 것입니다. 이처럼 20년 후에 이루어질 일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미리 야곱에게 그 언약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5) 하늘에 닿은 사닥다리와 하나님의 사자를 본 야곱

하란을 향해 길을 떠난 야곱은 지금 모든 것이 낯설고 생소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디 하나 의지할 곳 없는 상황에서 편히 누울 자리 하나 없이 돌을 베개로 삼고 누운 자신의 처지를 생각할 때 비로소 혼자라는 느낌이 밀려오게 되지요. 그러면서 지나간 시간들이 떠오르며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처량함도 생각하게 되고 ‘내가 욕심을 부려서 이렇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 부모님의 품 안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이었던가 하는 생각 등… 자신에 대한 것과 지난 날에 있었던 일들 그리고 ‘앞으로는 또 어떤 일들이 다가올까?’를 생각하며 야곱은 잠을 청하고 있었지요.
이때 놀라운 장면을 보게 됩니다.
12절에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말씀합니다. 이 상황은 하나님께서 1하늘의 공간 안에 3하늘로 통하는 공간의 문을 열어 주심으로 1하늘과 3하늘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상태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강해를 통해 앞서 설명했듯이 우리가 사는 1하늘의 공간 곳곳에는 영의 세계 즉 2하늘과 3하늘로 통하는 문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 문이 열리게 되면 1하늘의 공간에서 2하늘도, 3하늘도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은 지금 열려진 영계의 문을 통해 3하늘의 공간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이와 똑같은 상황이 나오는데 행 7:55-56에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했습니다. 물론 성령이 충만하다 해서 다 본다는 것은 아닙니다. 스데반 집사는 악이 모양도 없는 성결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돌로 쳐죽이는 그들을 향해서도 “주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기도하였습니다. 이렇게 악은 모양도 없는 성결된 사람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니 당연히 영안이 열려 볼 수 있었습니다. 하늘 문이 열려 하나님의 보좌와 아버지를 볼 때에 얼마나 그 감동스런 빛으로 둘러 있겠습니까?
스데반 집사의 영안이 열리니 셋째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우편에 서신 주님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 주님이 서 계실까요? 스데반 집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했고 이 악한 죄인들을 지적했는데 오히려 그들이 돌로 쳐 죽이려고 하지요. 그러니 우리 주님이 앉아 계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서서 얼마나 긴장 속에 지켜보고 계시겠습니까? 얼마나 안타까움 속에 지켜보고 계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서 계신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동일합니다. 성경은 절대로 참이기 때문에 말씀대로 계명을 그대로 지켜 행하면 여러분도 동일하게 영안도 열리고 축복도 받고 음성도 듣고 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도 마음이 선한 고로 영안이 열려 볼 수가 있는 것이고 큰 권능을 행했던 것입니다. 물론 아버지 하나님께서 계신 곳은 넷째 하늘이지만 이때 보여 주신 것은 셋째 하늘에 계신 모습이었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야곱 역시 셋째 하늘의 공간을 보고 있었습니다. 이때 하늘에 닿은 사닥다리를 보여 주신 것은 지금 하늘 문이 열려 하나님께서 계신 곳과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이 오고 있음을 느끼게 해 주기 위한 것이지요. 하나님의 사자는 오르락내리락 하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을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실제로 사닥다리 같은 것이 있어야 1하늘과 3하늘을 연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닥다리로 연결된 것을 보여 주실 때, 더 확실히 느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이 상황을 꿈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로 모든 상황이 현실에서도 똑같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꿈에 저를 만나고 나서 응답을 받았다고 간증하는 분들이 많은데 비록 꿈에 본 것이지만 영적으로는 그것이 실제 상황과 같습니다. 그렇다하여 모든 꿈이 영적으로 실제 상황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생각 가운데 혼의 작용을 통해 꾸는 꿈도 많지만 영적인 꿈은 그것이 영의 세계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꿈에 뱀이나 용을 본 후에 실제 현실에서 시험이 찾아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어떤 뱀을 보았느냐에 따라 다르고 용 같은 경우는 큰 시험이 찾아오는 꿈입니다. 만일 뱀이 여러분을 물었다면 시험에 드는 꿈이고 뱀이 와서 물려고 하는데 발로 짓밟아서 머리를 부수어 버렸다면 시험이 왔으되 승리할 꿈입니다. 뱀이 와서 물려고 하다가 여러분이 쫓아버려서 물지 않고 도망갔다면 시험이 왔다 물러갔으나 다시 시험이 올 꿈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1단계나 2단계에서 뱀 꿈을 꾸고 용 꿈을 꾸는 것이지 믿음의 3단계에만 들어와도 이런 꿈은 별로 꾸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으로 4단계 영으로 들어오면 이런 훼방받는 꿈은 절대 꾸지 않습니다. 영으로 들어오면 하나님이 허락하신 시험이 옵니다. 그 시험을 통해서 더 영적 성장을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꿈에 하나님의 사람으로부터 축복을 받았는데 현실에서 그대로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바로 영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꿈으로 역사하여 보여 주고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물론 영안이 밝히 열리거나 영감이 아주 밝은 사람은 굳이 꿈으로가 아니라 영안을 열어 보여 주신다거나 환상으로 보여 주실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꿈을 통해 역사해 주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꿈으로 역사해 주시는 경우는 꿈이 맞았는지 안 맞았는지를 확인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꿈이었는지, 아니었는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더욱이 다른 사람에 대한 꿈을 꾸었을 때 경솔히 그것을 상대에게 말한다거나 마치 자신의 꿈이 100% 맞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삼가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꿈을 통해 역사해 주시는 경우는 그 내용을 거듭거듭 확인해서 거의 100% 맞는다는 것을 확신해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나에게 꿈으로 역사하시는구나”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의 확실하게 꿈으로 역사해 주신다 해도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분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꿈이 선하게 쓰여지도록 해야 합니다.

6) 축복의 언약을 받고 단을 쌓아 하나님과의 언약을 굳게 하는 야곱

야곱은 하나님으로부터 장차 자신이 지금 있는 땅으로 돌아올 것과 자신의 자손이 크게 번성하게 될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하시며 늘 지키실 것이라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깨우치게 되지요.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이 그의 아들 이삭을 통해 이어지게 하셨고 이제 마침내 정통 계보를 잇는 이삭의 아들 야곱을 통해 그 약속의 말씀을 성취하시려는 것입니다. 사 55:11에 보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말씀하셨지요.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한 번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도록 세세히 관여하시고 간섭하시며 성취해 가십니다.
놀라운 축복의 언약을 받은 야곱은 잠이 깨자 곧바로 그곳에 단을 쌓고 하나님과의 사이의 언약을 굳게 합니다. 당장에 번제로 올려 드릴 것은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말씀을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는 증표로써 하나님 앞에 서원을 하지요. 결코 입술로만 “아멘” 하고 만 것이 아니라 자신 편에서도 하나님 앞에 증표를 삼았던 것입니다. 이는 바로 그의 조부 아브라함이 했던 것이었고 그의 아비 이삭의 행함을 통해 보고 배운 것을 그대로 순종하여 행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3.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곱은 지금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형의 위협을 피해 도망가는 신세였고 외삼촌의 집이 있는 곳까지 순적하게 간다는 것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요. 처음으로 부모의 품을 떠나 홀로 길을 가면서 지난날의 안락했던 삶과는 전혀 다른 외롭고 낯설며 어디 하나 의지할 곳 없는 막막한 상황에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야곱에게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놀라운 언약의 말씀을 주시지요. 그렇다 하여 이 말씀을 주시면서 당장 눈에 보이는 어떤 축복이나 징표를 주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이 말씀을 믿음으로 받았지요. 그래서 20년 후에는 이 말씀에 의지하여 고향 땅으로 돌아와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어 가게 됩니다. 야곱은 20년의 연단의 세월 중에도 하나님께서 한 번 주신 언약의 말씀을 잊지 않았고 때가 되자 그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이러한 중심을 가진 야곱이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택하여 쓰신 것입니다.
본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무(無)의 상태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약속의 말씀을 주셨지요. 그리고 지금까지 한 번도 변함없이 그 말씀을 믿음으로 붙잡고 기도해 왔습니다. 당장 눈에 보이지 않아도 손에 만져지지 않아도 반드시 이루어 주신다는 믿음으로 달려왔지요. 그리고 때가 이르자 하나님께서는 그때 주신 말씀들이 한 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그대로 보장하시며 이루어 가고 계십니다. 말씀 주신 대로 이루어 주시기 위해서 아버지가 친히 연단하시며 정금같이 나와 세계를 이룰 수 있도록 역사하셨고 지금은 더 정금같이 다듬어서 대성전을 이루기 위해 역사해 가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잘 순종하여 따라 주신 여러분 모두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많은 것을 이루어 왔지만 우리에게는 앞으로 이루어야 할 더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또한 앞으로 이루어야 할 많은 일들이 육적으로 봐서는 불가능한 일들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다 가능한 일들입니다. 그 일들을 이루기 위해 앞으로 나가야 할 길들이 육으로 보면 지금까지보다 훨씬 더 어렵지만 영으로 보면 훨씬 더 쉽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무(無)에서 이만큼 이루었는데 이제 이렇게 많은 것을 가진 상태에서 앞으로 무엇을 더 크게 이루지 못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한 분 한 분에게 바로 야곱에게 주신 것과 같은 축복의 언약을 주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 영으로, 온 영으로 변화되어 나온다면 마지막 때를 준비하는 귀한 도구로 쓰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장차 새 예루살렘의 기둥으로서 여러분의 이름이 아름답게 새겨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3-24 오전 1:01:01 Posted
2018-05-07 오후 12:00:33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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