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7:46-28:5
리브가가 이삭에게 이르되 내가 헷 사람의 딸들을 인하여 나의 생명을 싫어하거늘
야곱이 만일 이 땅의 딸들 곧 그들과 같은 헷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면
나의 생명이 내게 무슨 재미가 있으리이까
이삭이 야곱을 불러 그에게 축복하고 또 부탁하여 가로되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고 일어나 밧단아람으로 가서
너의 외조부 브두엘 집에 이르러 거기서 너의 외삼촌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취하라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어 너로 생육하고 번성케 하사
너로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 주사 너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너의 우거하는 땅을 유업으로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에 이삭이 야곱을 보내었더니 밧단아람으로 가서 라반에게 이르렀으니
라반은 아람 사람 브두엘의 아들이요 야곱과 에서의 어미 리브가의 오라비더라
1. 서론 / 선한 지혜의 귀중성
만약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물으신다면 과연 무엇을 구하시겠습니까? 사람마다 각자 구하는 것이 다르겠지만 솔로몬 왕은 다른 것이 아닌 “지혜”를 구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목적으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 주신 백성들을 잘 다스리기 위한 목적으로 구한 것입니다. 왕상 3:9에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너무나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합당한 대답이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왕상 3:11-13에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수(壽)도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원수의 생명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너의 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너의 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내가 또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처럼 “지혜”의 소중함과 귀함을 알았던 솔로몬 왕은 잠언서 곳곳에도 지혜의 가치에 대해 기록하였습니다. 잠 2:20에 “지혜가 너로 선한 자의 길로 행하게 하며 또 의인의 길을 지키게 하리니” 했고, 잠 3:14-15에는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했습니다. 이어지는 18절에는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 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 지혜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는 자신에게 큰 득(得)이 될 수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큰 해(害)가 될 수도 있습니다. 마치 똑같은 칼이라도 강도가 사용하느냐 의사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전혀 달라지듯이 지혜 역시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생명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진리 안에서는 당연히 선한 지혜만을 참 지혜라 말하지만 세상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의 지혜를 악한 데 사용하는 사람도 많고 오히려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도 그런 사람을 “지혜롭다”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롬 16:19 후반 절에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말씀합니다. 지혜를 악한데 쓰는 것보다 차라리 악한 데 미련한 것이 낫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다윗의 두 아들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의 아들 중에 솔로몬 왕은 그 선한 지혜로 후대에 이름이 알려진 경우입니다. 반면에 다른 아들 압살롬의 경우는 자신의 지혜를 악한 데로 사용했다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지요. 악한 궤계를 써서 아버지 다윗 왕에게 가야 할 백성들의 마음을 현혹하고 자신의 세력을 키워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으나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지 않으시니 비참한 죽음으로써 최후를 맞아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지혜란 선한 마음에서 나와야 하며 선한 데에만 사용되어야 합니다. 잠 3:7에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말씀하셨으니 여러분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기 이전에 먼저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을 경외하여 악에서 떠난 사람인지를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악에서 떠나 선으로 들어왔을 때만이 정녕 하나님 편에서 보실 때도 지혜로운 사람이라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2. 본론
1) 간교한 리브가의 지혜
본문에 나오는 리브가는 그 지혜가 선하고 좋은 쪽으로 사용되기보다는 자신의 유익을 좇는 쪽으로 사용되었지요. 큰아들 에서가 작은아들 야곱을 죽이려고 마음에 벼르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작은아들을 살려야겠다는 생각에 리브가는 야곱을 피신시킬 방법을 생각해 내지요. 남편 이삭에게도, 큰아들 에서에게도, 자신이 야곱을 피신시키려 한다는 의도를 눈치 채지 못하도록 한 채 야곱을 피신시키기 위해 리브가는 교묘한 꾀를 생각해 내었습니다.
그래서 46절을 보면 리브가가 이삭에게 “내가 헷 사람의 딸들을 인하여 나의 생명을 싫어하거늘 야곱이 만일 이 땅의 딸들 곧 그들과 같은 헷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면 나의 생명이 내게 무슨 재미가 있으리이까”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에서가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였기에 그로 인해 살맛까지 나지 않게 되었는데 거기다가 야곱까지 만약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이게 된다면 무슨 재미로 살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는 야곱으로 하여금 이방 여인이 아닌 자기 민족 가운데서 아내를 맞을 수 있도록 하려면 야곱을 자기 민족이 있는 곳으로 보내어 아내를 구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리브가는 바로 이것을 빌미로 하여 야곱을 자신의 오라비 라반에게로 피신시키려 했습니다.
이러한 방법이 육의 사람들이 볼 때는 지혜로운 것처럼 보일 수 있어도 이 말 안에 담긴 리브가의 속마음을 살펴보면 결코 선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는 다시 한 번 남편 이삭을 속이는 것이었고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에서의 아내들까지도 끌어들이는 것이었지요. 물론 에서가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은 것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합당하지 않은 것이지만 리브가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말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신의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한 빌미로서 에서의 아내들을 끌어들인 것입니다. 그러니 그녀가 생각해 낸 방법이 야곱을 피신시킬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은 될지 몰라도 결코 선의 지혜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해 괜히 다른 사람까지 끌어들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것을 자기 입으로는 못하니까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하더라” 합니다. 내 마음이 불편하고 불만이 있는 것인데 그것을 마치 다른 사람이 “이렇게 불평 불만하더라”는 식으로 말을 하는 것입니다. 또는 자신이 말하면 상대가 듣지 않을 것 같으니까 힘 있고 권세 있는 사람의 이름을 팔아서 “그분이 이렇게 말하시더라” 합니다. 또 리브가처럼 자신의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해 다른 사람의 허물까지 들춰내서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얼마나 악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진실하지도 못한 마음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목적을 위해, 내 유익을 위해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 이기적인 마음이지요. 이런 사람은 아무리 지혜롭게 보여도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결코 지혜롭다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고전 3:18-20에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기록된 바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말씀합니다. 스스로 지혜롭다 생각하며 자기 유익을 도모하는 사람들은 결국 그로 인해 스스로가 궤휼에 빠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리브가 역시 자신의 생각 가운데 야곱을 피신시킨 후에 세월이 조금만 지나고 나면 모든 것이 다시 예전처럼 회복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야곱은 타지에서 20년이라는 긴 연단의 세월을 보내야 했고, 리브가 역시 아들 야곱의 생사를 염려하며 하루도 편히 지낼 수가 없었지요. 또 사랑하는 아들과 헤어져 20년의 세월을 보냈을 때에 얼마나 괴롭고 슬픈 나날이었겠습니까? 또 후회도 많이 했을 것입니다. 결국 자기 궤휼에 빠지고 만 것입니다.
2) 야곱에게 연단을 허락하시며 자기 민족 가운데서 아내를 얻도록 역사하신 하나님
이렇게 해서 일단 야곱은 형 에서로부터 피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아버지 이삭이 야곱을 불러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가서 그의 딸 중에 아내를 취하라” 지시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야곱을 보내면서 다시 한 번 그에게 장자의 축복을 되짚어 줍니다.
창 28:1-4에 “이삭이 야곱을 불러 그에게 축복하고 또 부탁하여 가로되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고 일어나 밧단아람으로 가서 너의 외조부 브두엘 집에 이르러 거기서 너의 외삼촌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취하라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어 너로 생육하고 번성케 하사 너로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 주사 너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너의 우거하는 땅을 유업으로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했지요. 이삭도 영계의 법칙을 잘 알고 있었기에 자신이 한번 빌어 준 장자의 축복이 결국 야곱에게 간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또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 축복을 준 것이기 때문에 변개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이제 돌이킬 수도 없고 야곱을 멀리 떠나보내야 하는 상황에서 장자의 축복을 되새겨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로부터 간교한 속성을 타고 났기 때문에 어차피 그것이 깨어져야만 하나님 앞에 쓰임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20년이라는 연단의 세월을 허락하신 것인데 그 시작이 바로 외삼촌 라반의 집을 향해 떠나면서였지요. 잠시 동안만 그곳에 가 있으면서 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해 오면 될 것이라 생각했으나 그 시간이 무려 20년이나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이 야곱에게는 연단의 시작이 된 동시에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볼 때도 꼭 필요한 과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통해 장차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이루는 자녀들을 낳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을 이루는 기초가 되는 것이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출발점이 되는 야곱이 이방 여인 중에서 아내를 취하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에게 연단을 허락하심과 동시에 이를 통해 야곱으로 하여금 자기 민족 가운데서 아내를 얻을 수 있도록 역사하신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 에서보다 야곱을 선택하여 연단하신 이유
이처럼 자기의 유익을 좇아서 자기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사람의 지혜를 동원해 갔던 리브가를 볼 때 결코 지혜롭다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실 때는 간교한 것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속성을 야곱도 가지고 태어난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야곱을 택하여 그를 연단하셔서 사용하셨습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바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에서보다 나은 야곱의 중심을 보신 것이지요.
그렇다면 야곱은 에서에 비해 어떤 면에서 더 나은 중심을 가졌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하나님 편에서 중심이 좋은가 아니면 좋지 않은가를 보시는 기준을 크게 두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중심이 곧은가, 곧지 않은가? 둘째는 중심이 선한가, 선하지 않은가? 바로 이 두 가지입니다. 성경을 보면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연단받을 때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해 얼마나 변개함 없이 밀고 나갔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아내를 얻을 때도 자기가 사랑했던 여인을 얻기 위해서 끝까지 밀고 나갔습니다. 바로 자신이 원하는 아내를 얻겠다는 일념으로 무려 14년 동안이나 정열을 쏟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선한 의도였든 아니었든 일단은 그 중심이 변개함 없이 곧아서 한 번 정한 바를 이루어 나가는 사람임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모습입니다. 또한 외삼촌과의 약속도 지키는 것을 봅니다. 외삼촌이 자기를 속이든 어찌하든 야곱 편에서는 외삼촌과의 약속을 잘 지켜내고 있습니다. 외삼촌은 여러 번 야곱을 속였습니다, 그런데도 야곱은 외삼촌과의 약속을 분명히 지켜 드리더라 이 말입니다.
하지만 중심이 곧은 것도 자기 보기에 좋은 것을 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맞출 때라야 정말 좋은 중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연단을 통해 자기 생각과 지혜와 의(義) 등을 다 깨뜨려서 곧은 중심을 가지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나가도록 역사하신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한 번 정한 바를 변개함 없이 이루며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심지어 악한 사람들 중에도 정말 믿고 신뢰할 만큼 곧은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에게 “중심이 좋다”는 말이 어울리겠습니까? 물론 이런 사람도 진리 안에 들어와 철저히 깨어지고 변화되고 나면 좋은 중심으로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은 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중심이란 곧은 중심과 함께 선(善)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선이 없는 곧은 중심은 하나님 편에서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여기서 말씀드리는 선(善)이란 타고난 중심의 선(善)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중심이 곧으냐 그렇지 않으냐’도 결국 타고나는 부분이 큰 것처럼 중심의 선(善) 역시 타고나는 부분이 큽니다. 어떤 사람은 중심이 선하게 태어났음에도 환경에 의해 그 선이 가리어지고 악에 물들어 버린 경우가 있는데 이런 사람이 주님을 만나 진리로 변화되면 그 속에 가지고 있던 선한 중심이 드러남으로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또한 사랑받는 중심이 됩니다. 선한 중심이라 해도 태어나서 성장하면서 잘못 입력되기 때문에, 잘못 보고 듣고 가르침 받고 해서 잘못 입력되어져서 선한 중심이 가리어지고 악한 마음으로 변화되어 버립니다.
사도 바울이 바로 그러한 예이지요. 하나님은 그 중심에 선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나 자기의 생각과 틀과 의가 깨어지고 나니 그가 원래 가지고 있던 좋은 중심이 드러나면서 하나님 앞에 크게 쓰임받았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중심이란 마치 그릇의 재질이나 땅의 토질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재질로 그릇을 만들었느냐에 따라 그릇의 강도가 다르고 그릇에서 나오는 빛이 다른 것처럼 또한 어떤 토질이냐에 따라 그 땅에서 수확하는 열매의 질이 전혀 다른 것처럼 중심이란 타고나는 근본 바탕과 같은 것이지요. 금으로 만든 그릇과 은으로 만든 그릇이 있을 때에 은으로 만든 그릇을 아무리 열심히 닦는다 해서 그것이 금으로 만든 그릇에서 나오는 빛과 같아질 수는 없는 것처럼 중심의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 하여 이처럼 일단 중심을 타고나면 그것으로 이미 모든 것이 정해졌다는 의미는 아니지요. 아무리 금그릇으로 타고 났어도 그 그릇을 닦지 않고 내버려 두면 그것은 금그릇으로의 가치가 없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시는 중심은 우리 사람과 내가 생각하는 중심과는 다릅니다.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다는 중심이어야 합니다. 사람마다 판단, 가치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은 곧은 중심을 원하십니다. 선하고 곧은 변개하지 않는 중심, 이것이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입니다. 반면에 진흙으로 구워진 그릇이라도 열심히 그릇을 닦아 깨끗하게 하면 얼마든지 귀히 쓰는 그릇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딤후 2:21에는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말씀합니다. 그릇의 재질도 중요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좋은 재질의 그릇이라 하여 무조건 쓰시는 것이 아니라 먼저 깨끗한 그릇을 택하여 쓰십니다.
야곱의 경우는 비록 간교한 속성이 있기는 했지만 곧은 중심과 함께 아브라함과 이삭으로부터 타고난 중심의 선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중심을 보시고 택하여 연단하셔서 마침내는 목적한 쓰임에 합당한 도구로 만들어 가셨던 것입니다.
4) 하나님의 뜻 앞에서는 순종하는 중심을 지닌 이삭
이삭 역시 비록 편애하는 마음으로 인해 가족의 화평을 이루지 못한 면이 있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뜻 앞에서는 순종하는 중심이었습니다. 자신이 에서 대신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빌어주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 당장은 그 탓을 야곱에게 돌리며 야곱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지만 그것을 사람의 방법으로 돌이키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만약 이삭이 사람의 방법을 동원하는 사람이었다면 얼마든지 “아까 해준 기도는 무효다 에서에게 다시 장자의 축복을 빌어 주리라” 이렇게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 “야곱 네가 나를 속였으니까 내가 너에게 축복기도한 것은 무효다. 네가 애비를 속였으니까” 그렇게 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삭은 모든 것을 주관해 가시는 하나님을 믿었기에 그것을 사람의 생각과 방법으로 돌이키려 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응해 가는 것을 볼 수 있지요.
그런데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내가 너에게 이렇게 해 주겠다 했지만 네가 나를 속였으니까 나는 못해 주겠다”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금방 변개하지요. 자기 유익이 안 맞으면 유익이 안 되면 금방 말했던 것을 변개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러나 한 번 약속했다면 끝까지 지킬 수 있는 사람, 내가 손해가 되어도 지킬 수 있는 사람, 더군다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했을 때 하나님의 이름으로 약속했을 때는 어떤 상황에서도 꼭 지켜 나가야 합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다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야곱을 떠나보낼 때 장자의 축복을 다시 한 번 기도해 주며 하나님의 보장하심 가운데 보냈던 것입니다. 이삭이 비록 아버지 아브라함에 비하면 많은 면에서 부족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쓰임받을 수 있는 중심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을 향해 떠남으로 그의 본격적인 연단이 시작되는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야곱에게 먼저 언약의 약속을 주십니다. 야곱이 이 약속을 믿고 연단을 끝까지 잘 승리해 내도록 하시기 위함이지요. 그냥 아무런 소망 없이 연단 중에 두신 것이 아니라 그가 소망 가운데 연단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먼저 그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그 내용은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3. 결론
에서의 중심은 앞서 말씀드린 야곱이나 이삭과는 달랐습니다. 물론 에서의 입장에서는 지금 자신이 당한 상황을 육으로 보면 모든 것이 너무 억울하고 야곱이 미울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이 선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여 결국 모든 것을 선으로 바꿔 나간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 앞에 믿고 맡기면서 하나님의 선으로 이해하고 용서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서는 어떠했습니까? 선으로 이해하고 바꿔 가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자신이 당한 것을 악으로 갚을까’ 하는 마음뿐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서 중심의 차이가 나오는 것이지요.
이러한 중심을 가진 에서와 야곱 중에 하나님께서 당연히 누구를 택하여 쓰시겠습니까? 더욱이 에서는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게 이방 여인을 아내로 취하기까지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중심이 아니었지요. 반면에 야곱은 비록 형 에서를 피하기 위해서 간 것이기는 하지만 성경에 보면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가서 그곳에서 아내를 취한 것이 “부모의 명을 좇은 것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서는 부모가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어도 하나님의 뜻을 좇지 않고 이방인을 아내로 취했지만 야곱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기에 순종했던 것이지요. 이처럼 두 사람이 같은 일에 대해 어떤 마음과 태도로 나오는가를 보면 이를 통해 두 사람의 중심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중심은 어떠하신지요? ‘나는 과연 하나님의 뜻을 알았을 때 그것에 순종할 중심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인 줄 알면서도 순종하지 않는 중심인가?’ ‘나는 상대가 악으로 나왔을 때 그것을 악으로 갚으려는 중심인가? 아니면 그 악으로 인해 차라리 내가 고통을 받더라도 상대를 이해하고 마음을 선으로 바꾸려는 중심인가?’ 이러한 것들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중심이란 타고난 것이니 어쩔 수 없지’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능히 중심까지도 변화시켜 나갈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자신을 진리로 변화시키며 자신을 깨끗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느냐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뜻에 합당한 그릇으로 자신을 개조하고 만들어 가야 하나님이 마음껏 쓰시며 축복해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정녕히 하나님의 쓰시기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된 그릇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3-24 오전 1:01:01 Posted
2015-09-08 오후 2:00:19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