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서가 아비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의 빌 복이 이 하나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하고 소리를 높여 우니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너의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뜨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뜰 것이며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 버리리라 하였더라
그 아비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을 인하여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왔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
맏아들 에서의 이 말이 리브가에게 들리매 이에 보내어 작은아들 야곱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 형 에서가 너를 죽여 그 한을 풀려 하나니
내 아들아 내 말을 좇아 일어나 하란으로 가서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 피하여
네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 동안 그와 함께 거하라
네 형의 분노가 풀려 네가 자기에게 행한 것을 잊어버리거든 내가 곧 보내어
너를 거기서 불러오리라 어찌 하루에 너희 둘을 잃으랴
1. 서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이 악을 버리고 선을 이루었을 때 오는 마음의 평안과 기쁨과 행복은 그것을 체험해 본 사람만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머리로는 선(善)이 좋다는 것을 알아도 정작 마음에 선을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는 결국 악이 나오므로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게 되지요.
예를 들어, 진리인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선(善)은 상대가 잘되는 것을 보았을 때 함께 기뻐해 주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입니다. 자신이 무척 갖고 싶은 것을 다른 사람이 가졌을 때 여러분 마음은 어떠하신지요? ‘속상하다. 저 사람은 가지는데 왜 나는 갖지 못하는 것일까’ 혹여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또는 비슷한 위치에 있던 사람이 나보다 앞서 가는 모습을 보면 괜히 마음이 불편하고 낙망되지는 않으셨는지요? 만약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 마음이 발동되었을 때 얼마나 힘이 들고 고통스러웠는지를 스스로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힘이 들었다, 고통스러웠다”라고 한다면 내 마음이 그만큼 악하다하는 증거입니다. 오히려 그것이 기뻤다, 행복했다고 하면 자신의 마음이 선하다는 것을 증명하지요.
이 밖에도 다른 사람이 칭찬받고 인정받는 모습, 사랑받는 모습 등 상대가 잘되는 모습을 보면서 단순히 부러워하는 차원을 넘어 시기하고 투기하면 그 마음이 바로 지옥과 같은 느낌이 되지요. 그러다 보면 어떤 사람은 밥도 못 먹고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며 고통받다가 나중에는 병까지 얻는 경우도 있습니다. 반면에 마음을 진리로 일구어서 상대가 잘되는 것을 함께 기뻐하며 자신의 일처럼 행복해할 수 있는 선한 마음이라면 그 마음이 바로 천국과 같은 느낌이지요.
본문에 나오는 에서의 경우는 그 마음이 지옥과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자신에게 올 줄 알았던 장자의 축복이 동생 야곱에게 가게 된 것을 보면서 너무나 마음이 분하여 참지 못했고, 나아가 동생을 죽이려는 마음까지 품은 것입니다. 선한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에서도 어떻게 하는 것이 선의 방법인가를 먼저 생각했을 것입니다. 온전한 선이 임한 사람이라면 동생에게 장자의 축복이 가는 것을 보면서도 함께 기뻐할 수 있었을 것이고, 비록 당장에는 그러지 못한다 해도 어떻게든 선(善)으로 생각해 나가지요.
2. 본론
1) 야곱에게 속하게 된 에서
에서가 만약 자신을 먼저 돌아보면서 조용히 물러서고자 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하나님께서 어찌 축복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에서의 머리에는 오직 ‘장자의 축복은 내가 받아야 한다’는 한 가지 생각뿐이었지요. 그래서 38절에 이삭에게 “내 아버지여 아버지의 빌 복이 이 하나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 하소서” 하며 소리 높여 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아비인 이삭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이삭은 안타까운 마음에 에서를 위해서 축복 기도를 해 주지만 영적인 법칙을 잘 아는 이삭으로서는 야곱과 동일한 축복을 에서에게 빌어 줄 수는 없었지요. 오히려 야곱이 먼저요 에서가 나중이라고 하는 둘 사이의 영적인 질서를 더 분명히 짚어 주는 기도를 해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39-40절에 “너의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뜨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뜰 것이며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하였지요. ‘집 주소’라고 하면 ‘내가 지금 어디에 살고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나타내 줍니다. 여기서 ‘너의 주소’는 에서의 소속이 어디에 있는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에서에게 속한 모든 것 즉 그가 먹고 마시며 살아가는 것이 어디로부터 오는지를 말해 주지요.
그렇다면 무슨 의미일까요? 28절에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기도해 주었지요. 이때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은 풍성한 수확의 원천이 되는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말합니다. 결국 모든 축복 또한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보장된 축복이 임하기를 기도해 준 것이지요.
이삭이 에서를 위해 기도하면서 “너의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뜨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뜰 것이라” 한 것은 에서가 앞으로 받을 축복이 이제는 장자의 축복을 받은 야곱에게 속해 있음을 말해 줍니다.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의 축복이 장자의 축복을 받은 야곱에게 돌아갔기에 에서는 결국 야곱에게 속한 바 되어 야곱이 받는 축복의 일부를 받다는 말이지요. 에서는 야곱에게 속해 있다는 뜻입니다.
또한 이삭은 에서에게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다” 했습니다. 이는 그가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지를 말해 주지요. ‘칼을 믿고 생활한다’는 것은 그가 성실히 행하는 만큼 얻는다는 뜻이며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 변질되어 나갔을 때는 끊임없는 침략과 전쟁 가운데서 지킴받지 못할 것을 뜻합니다. 그러면서 “네 아우를 섬길 것이라” 말씀했는데 이는 야곱과 에서의 상하관계를 정확히 해 주는 것입니다. 야곱이 주권자로 서며 에서는 그 하위에 속한다는 것이지요.
다음으로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 버리리라” 했습니다. 에서가 야곱에게 속한 바 되어 묶인 것이 그가 이 땅의 생을 마감할 때가 되어야 풀린다는 의미입니다. 에서가 장자이면서 야곱에게 속한 바 되어 질서상 아랫사람으로 묶이게 된 멍에가 그가 매임을 벗을 때에 즉 이 땅의 생을 마감하는 때가 되어야 비로소 목에서 떨쳐 버리고 자유로워진다는 의미이지요.
그런데 이 땅의 생을 마감하고 나면 비록 이 땅에서 묶인 멍에는 풀려도 정확한 영적인 질서 가운데 살아가는 내세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장차 우리가 가게 될 천국에서는 이 땅에서 얼마나 마음을 영으로 일구었고 어떻게 행했느냐에 따라서 정확한 질서관계가 세워지지요. 심은 대로 행한 대로 갚아 주신다는 영계의 법칙에 따라 이 땅에서 영으로 심고 일군 만큼 반드시 그대로 거enq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서 비록 A라는 사람이 B라는 사람보다 질서상 더 위에 있었다 해도 나중에 천국에 가서는 서열이 얼마든지 바뀔 수 있지요. 이 땅에서의 부와 명예와 권세와 힘 등은 나중에 천국에서의 서열을 결정짓는 데에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얼마나 믿음 소망 사랑이 있고 마음이 성결되었으며 선으로 일구었느냐,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충성했느냐 바로 이러한 것들을 종합해서 장차 천국의 서열이 정해지지요.
아직 영의 세계를 잘 모르는 분들은 혹여 천국에도 서열이 있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천국은 서열이 있기 때문에 더 행복하고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는 윗사람은 더 섬김 받으려 하고 아랫사람은 마음에도 없는데 겉으로만 섬기는 척하는 모습도 많지만 천국의 서열은 그러한 관계가 아니지요. 서열이 높은 사람은 오히려 아랫사람을 더 사랑하며 섬기려 하고 아랫사람 역시 윗사람을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사랑과 존경으로 섬기는 곳이 천국입니다. 이러한 서열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정해 주신 것이기에 절대로 변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천국에서는 서로 간의 서열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천국에서는 서로가 영으로 통하기 때문에 영으로 느낍니다. 또한 영체에서 나오는 빛과 입고 있는 옷 그리고 장식품 등이 영적인 서열과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정도를 알려 주지요. 그러니 에서가 비록 이 땅의 생을 마감하면서 야곱과의 관계 속에 매여 있던 멍에를 벗는다 해도 야곱이 에서보다는 훨씬 더 좋은 천국에 갔기 때문에 장차 천국에서도 에서가 또 다시 야곱을 영원히 섬기면서 살게 됩니다.
에서가 왜 야곱보다 못한 천국에 갈 수밖에 없었는지는 이어지는 41절에서 알 수 있지요. “그 아비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을 인하여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왔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 했습니다. 아무리 야곱이 밉고 감정이 나도 어떻게 친 동생을 죽이려는 마음까지 품을 수 있었을까를 생각하면 그의 마음의 악이 얼마나 깊은지를 알 수 있지요.
인류 최초의 살인이 형제간의 시기, 질투로 일어난 것을 보면 미움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를 알아야 합니다. 에서와 야곱 사이를 볼 때에도 형제 사이였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에 여자만 시기, 질투가 많은 것이 아니라 남자 역시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야곱을 변화시키시기 위해 허락하신 20년의 연단
에서는 마음에 악의 뿌리가 깊었고 동생을 죽이려는 마음까지 먹었지만 아버지가 살아 있을 동안에는 행함으로 옮기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나마 아버지 생전에 그러한 악을 행하는 것이 아버지에 대한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지요. 물론 동생을 죽이려는 마음을 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부모님에 대한 도리가 아니지만 당시는 행위적인 시대이기에 악을 당장 행하지 않은 것이 에서가 나중에 구원에 이르는 조그마한 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독한 마음이 에서에게 있었기에 결국 야곱도 연단의 길로 접어들게 되지요. 만약 에서가 넓은 마음으로 야곱을 용서하고 품었다면 굳이 야곱이 집을 떠나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에서가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야곱은 형을 피해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쳐야 했습니다. 또 에서가 동생 야곱을 따뜻하게 품었다면 야곱이 후에 잘 되어서 형을 얼마나 극진히 잘 섬겨드렸겠습니까?
맏아들 에서가 동생을 죽이려는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에게 알림과 동시에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하게 합니다. 42-45절에 “맏아들 에서의 이 말이 리브가에게 들리매 이에 보내어 작은아들 야곱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 형 에서가 너를 죽여 그 한을 풀려 하나니 내 아들아 내 말을 좇아 일어나 하란으로 가서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 피하여 네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 동안 그와 함께 거하라 네 형의 분노가 풀려 네가 자기에게 행한 것을 잊어버리거든 내가 곧 보내어 너를 거기서 불러오리라 어찌 하루에 너희 둘을 잃으랴” 했던 것입니다. 어머니가 타이른다고 해서 들을 그런 아들들이 아님을 어머니도 알기에 이렇게 조처하였습니다.
여기서 에서의 말 즉 야곱을 죽이겠다는 말이 리브가에게 들렸다는 것은 에서의 분노가 얼마나 컸는지를 말해 줍니다. 비록 아버지 이삭의 생전에는 야곱을 죽이지 않는다 해도 분(忿)을 단지 마음속에 담아둔 차원이 아니라 그것이 겉으로 불거져 나온 것이지요. 상황이 이 정도에 이르자 리브가는 더 이상 둘을 함께 둘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둘이 마주치는 일이라도 있으면 자칫 다툼으로 둘 다 잃게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리브가는 에서의 분노가 그렇게 마음 깊이 자리 잡았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지요. 그래서 야곱을 외삼촌의 집으로 보내면서도 “네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 동안 그와 함께 거하라” 했습니다.
리브가는 잠시 동안만 둘을 떨어뜨려 놓으면 에서의 분노가 풀려서 야곱이 자기에게 행한 것을 잊어버릴 것이라 했지만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었지요. 그 시간이 무려 20년이나 되고 말았습니다. 어차피 하나님께서 야곱을 변화시키시기 위해 허락하신 연단이었기에 야곱이 철저히 깨어지고 변화되기 위해서는 20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마침내 야곱이 하나님 앞에 철저히 깨어져서 낮아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때야 비로소 야곱과 에서 사이도 화목케 역사해 주시지요. 사람의 생각처럼 얼마 동안 떨어져 있다 해서 둘의 사이가 회복된 것이 아니라 철저히 깨어지고 변화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셨지요. 잠 16:7에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말씀하셨지요. 이처럼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빠르고 확실한 응답의 길입니다. 야곱은 바로 자신의 생각과 틀을 철저히 깨뜨리고 변화되는 행함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림으로 사람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풀릴 수 없을 것 같았던 문제를 해결받았습니다.
리브가가 사람의 생각을 동원했을 때 야곱의 연단의 시간이 20년이나 되었던 것처럼 사람의 생각 가운데 사람의 방법으로 연단을 벗고자 했을 때는 오히려 문제가 더 꼬이고 틀어질 뿐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에 순종했을 때에 연단도 쉽게 마칠 수 있지요. 만약 야곱이 이러한 사실을 일찍 깨달아서 어머니의 말대로 순종할 것이 아니라 즉시로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자신을 철저히 낮추었다면 연단의 시간이 그처럼 길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야곱은 본성 속의 간교한 속성을 좇아 결국 자신의 살 길을 찾기 위해 어머니의 말을 들었고 그 속성을 뽑기 위해 20년의 연단이 필요했지요. 리브가가 어떠한 꾀를 써서 야곱을 외삼촌의 집으로 피신 시켰는지 그 과정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3. 결론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 연단을 받으면서 나오는 악의 모습을 보며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악한가?”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자신이라면 그러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지요. 그런데 막상 자신이 그 같은 상황에 처하면 생각한 대로 될까요? 악은 모양이라도 온전히 버리기 전까지는 막상 자신에게 가장 취약한 부분을 드러내는 연단이 오면 깊은 곳에 있던 악의 모양까지도 나오게 마련입니다.
욥1:1에는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했습니다. 이러한 욥도 연단을 받으니 마침내 근본 속 악의 모양이 하나하나 드러났습니다. 욥이 하나님과 친구들에게 뱉은 말을 듣고 어떻게 저런 사람을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 했을까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욥에게 이러한 연단을 허락하신 것은 그를 더욱 온전케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욥은 연단을 통해 결국 자신의 근본에 내재된 악의 모양을 깨닫고 발견하여 버림으로 이전보다 훨씬 더 영혼이 잘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예전에 하나님을 안다 해도 바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욥은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섬겼습니다. 그러나 연단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니 철저히 회개함으로 깨끗이 치료받고 축복이 갑절로 임한 것입니다. “악에서 떠난 자라” 했던 욥도 하나님께서 연단을 허락하시니 악의 모양이 나오는데 하물며 아직 육체의 일이나 육신의 일도 벗어내지 못한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따라서 자신은 그러한 연단에 있지 않는다 하여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육체의 일을 벗어 버리면 그 다음에 육신의 일을 벗기 위해서 열심히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려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본성 속에 있는 악을 하나님이 연단해서 꺼내게 하십니다. 그래야 본성 속에 있는 악이 발견이 되고 그것을 돌이켜 다 벗어냈을 때 비로소 영으로 들어갑니다.
고전 2:15에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신령한 자 즉 흠과 점과 티가 없이 악에서 떠나 온전히 영으로 들어온 사람만이 진리에 비추어 분별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온전한 영의 차원에 들어오기까지는 부단히 자신의 깊은 속에 내재된 악의 모양까지도 열심히 발견하여 벗어 나가야 합니다. 물론 자신의 깊은 속에 내재된 악의 모양을 자기 스스로 발견할 수 없기에 연단이 필요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연단을 받을 영적인 수준에 와 있는 사람에게는 때가 되면 연단을 허락하셔서 온전한 영의 차원으로 이끌어 들이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으로, 온 영으로 많은 사람이 들어올 올해에는 그만큼 여러분이 자신을 발견하여 변화되는 데 노력을 해 나가야지요.
그러므로 연단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기쁨과 감사함으로 받아서 자신을 발견하고 변화되는 사람이 신속히 영으로, 온 영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 하여 미리부터 ‘연단이 어떻게 올까’ 하며 긴장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수준에 맞게 연단을 허락하시기 때문이지요. 고전 10:13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 연단은 하나님이 다 아셔서 피할 길을 주시되 감당할 시험 외에는 주시지 않습니다. 그 그릇에 따라 주십니다.
다윗은 믿음과 사랑과 그릇이 컸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신뢰함이 컸기 때문에 사울을 통해서 그런 큰 연단이 왔습니다. 그 연단을 이겼을 때 얼마나 큰 그릇이 되었겠습니까.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한 시험을 하나님을 믿고 변개함과 타협함이 없이 오직 정도를 향해 걸어갔을 때에 오히려 더 인정받고 더 큰 축복을 받아 더 높은 자리에 올라 하나님께 크게 영광을 돌렸지 않습니까? 아브라함도 보면 다 감당할 시험이었습니다. 그릇이 크면 큰 만큼 시험도 크되 그 그릇이 이겨낼 만큼 시험을 주십니다.
더욱이 올해는 많은 사람이 함께 영의 흐름을 타고 나가기 때문에 혼자 연단을 받는 것보다 훨씬 수월하게 연단을 통과해 갈 수 있습니다. 또한 금년은 축복과 영광의 해이기 때문에 기쁨과 감사와 감격의 소식들을 들으며 믿음과 소망이 더해 연단을 신속히 통과할 수 있지요. 다만 여러분 안에 깊이 내재된 악의 모양까지도 발견하여 벗어내는 온 영의 해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이 여러분을 통해 더 크게 펼쳐져 나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3-24 오전 1:01:01 Posted
2015-09-08 오후 2:00:19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