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이 가로되 네 아우가 간교하게 와서 네 복을 빼앗았도다
에서가 가로되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합당치 아니하니이까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 번째니이다
전에는 나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이제는 내 복을 빼앗았나이다
또 가로되 아버지께서 나를 위하여 빌 복을 남기지 아니하셨나이까
이삭이 에서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그를 너의 주로 세우고 그 모든 형제를 내가 그에게 종으로 주었으며
곡식과 포도주를 그에게 공급하였으니 내 아들아 내가 네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에서가 아비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의 빌 복이 이 하나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하고 소리를 높여 우니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너의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뜨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뜰 것이며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 버리리라 하였더라
그 아비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을 인하여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
1.서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이 아직 온전해지기 전까지는 실수라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의 성품이 어떠하냐’ 하는 것과 ‘얼마나 마음을 다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실수를 하지 않을 수도 있지요. 성품이 꼼꼼하고 차분한 사람과 반대로 덜렁거리고 건성으로 하는 사람과는 같은 일을 함에 있어서도 많은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또한 마음을 다해서 일을 할 때와 그렇지 않고 대충대충 일을 할 때와도 결과에 있어서 많은 차이가 납니다.
이처럼 성품이나 마음씀에 따라 실수가 나올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실수를 자주 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체로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어떤 일에 대해 같은 실수를 했을 때 그것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람과 그렇지 않고 인정하려 하지 않는 사람과는 변화의 정도가 전혀 다르지요. 이는 꼭 실수뿐만이 아닙니다. 자신의 부족한 점이나 아직 버리지 못한 비진리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또는 누가 지적해 주었을 때 얼마나 마음 중심에서 인정하고 받아들이냐에 따라 진리로 변화되는 속도가 크게 달라지지요.
물론 자신의 부족되고 허물된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이 때로는 마음 아프고 힘든 일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초신자나 아직 믿음이 연약할 때의 이야기지요. 정녕 믿음이 있어서 영을 사모하며 진리로 변화되기 위해 달려가시는 분들이라면 누군가 자신의 부족함을 지적해 주거나 스스로 발견하게 되었을 때 오히려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여 여전히 육에 머무르고 있는 것과 비록 잠시 동안은 마음이 아파도 자신을 발견하고 변화되어 영으로 달려가는 것 중에 어느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진정 영을 사모하시는 분이라면 당연히 후자를 택할 것입니다.
연단을 받을 때도 그것이 축복임을 깨달아 기쁨과 감사함으로 통과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이 연단을 받을 때에는 그 자체가 행복한 사람은 없겠지요. 연단 중에는 마음 아파 눈물도 흘려야 하고 때로는 마음을 찢는 애통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연단을 축복이라 하는 이유는 바로 연단 뒤에 오는 변화 때문이지요. 욥 23:10에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는 말씀처럼 단련 즉 연단을 통해서만이 정금같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연단 중에도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연단을 통해 발견되는 자신의 모습을 겸허히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연단도 더 신속히 마칠 수가 있지요. 반면에 발견되는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그것을 인정하여 변화될 때까지 연단의 수레바퀴 속을 돌아야 합니다. 그러니 실수가 되었든 또는 자신의 부족하고 허물된 모습이 되었든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서 명심하여 이후로 변화되어 나간다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영으로, 온 영으로 신속히 변화될 수 있습니다.
2. 본론
1) 자신의 잘못을 야곱에게 돌리는 이삭과 에서
본문에 나오는 이삭이나 에서는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려 하지는 않고 오히려 남의 탓으로 돌리는 모습입니다. 이삭은 자신이 장자의 축복을 빌어 준 것이 에서가 아니라 야곱이었음을 알게 되자 에서에게 “네 아우가 간교하게 와서 네 복을 빼앗았도다” 말합니다. 이런 모습이기 때문에 이삭은 여전히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 이러한 일이 발생한 것일까?’ 하며 먼저 자신을 돌아보는 마음이었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발견하고 깨달을 수 있는 은혜를 주셨을 것입니다.
에서 또한 마찬가지이지요. 자신에게 이러한 일이 생겼다면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를 먼저 돌아보아야 할 텐데 에서 역시 야곱의 탓만 하기에 급급했지요. 이전에 있었던 일까지도 거론하며 모든 탓이 야곱에게 있다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겼고 장자의 축복을 받기에는 하나님 앞에 얼마나 합당하지 않은 모습인지는 생각지 않았지요. 남의 탓만을 하는 모습으로는 자신의 부족된 모습을 발견할 수가 없고 변화될 수도 없습니다. 에서가 만약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돌이키며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겸비한 모습을 보시고 더 축복된 길을 열어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말이 얼마나 악에서 나온 것인지조차 깨닫지 못한 채 복을 빌어달라고만 강청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한 지 얼마 안 되신 분들은 예전의 모습을 떠올려 볼 때에 자신의 말이 얼마나 악한 지조차도 깨닫지 못하던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수년 전의 말과 행동을 떠올려 보십시오. 아마 그때 쓰던 말을 다시 쓰고 그때 하던 행동을 다시 하라고 하면 부끄러워서 도저히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비진리의 말들과 거친 말들, 심지어 욕설까지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하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고, 행함 역시 진리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경우가 대부분이었겠지요. 이제 진리 안에 들어오고 나니 그런 말과 행함이 차츰차츰 사라지면서 어느덧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진리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육에 거하고 있을 때는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발견하지 못했지만, 영으로 나아와 빛으로 비추어 보니 조그마한 악의 모양이라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이지요. 여러분이 영으로 온전히 들어가면 그때는 능히 육과 영을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제 경우는 대화 몇 마디만 해 보거나 짧은 몇 줄의 글만 보아도, 상대방이 얼마나 선으로 들어와 있고 그 마음을 영으로 일구었는지를 분별할 수가 있지요. 에서의 경우는 스스로 악한 말을 하면서도 그것이 악인지조차 깨닫지 못하는 육의 모습 가운데 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삭과 야곱과 에서의 믿음의 분량에 대해 잠시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2) 이삭의 신앙과 천국에서의 처소
만약 이삭이 그의 아비 아브라함처럼 넓고 큰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찌 했겠습니까? 요 6:63 전반절에 “살리는 것은 영이니” 말씀하신 대로 모두를 살리는 길을 찾았을 것입니다. 야곱도 아들이니 오히려 이번 일로 에서와의 사이가 더 나빠지지 않도록 마음을 쓰지요. 그런데 이삭은 영의 마음으로 넓게 보려 하기보다는 모든 탓을 야곱에게 돌리는 데만 급급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이 뻔히 보이는 좋은 땅을 먼저 택해갈 때도 마음에 아무런 불편함이 없었지요. 또한 좋은 땅을 택해 갔던 롯이 전쟁에 포로로 잡혀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아브라함의 마음씀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육의 사람이라면 “그것 봐라, 먼저 좋은 땅을 택해서 가더니 결국 그렇게 되고 말았지.” 하며 모든 책임을 롯에게 돌렸겠지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런 상황에서도 롯의 탓만을 한 것이 아니라 롯에 대한 걱정이 앞섰습니다. 어찌하면 롯을 구할까 하는 마음뿐이었기에 집에서 길리운 군사들을 이끌고 달려가 롯을 구해 옵니다. 이것이 바로 선으로 일구어진 영의 마음이며, 아버지 하나님을 닮은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아브라함의 마음과는 달리 책임을 피하기에만 급급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인 아브라함에게 가르침 받은 것을 명심하여 행했고 나름대로는 선한 마음을 이루며 믿음을 내보이는 삶을 살았지만 아브라함과 비교할 때에 많은 차이가 났던 것입니다. 이삭의 온전하지 못한 모습을 통해 그의 신앙이 온전한 영의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역사에 남는 중요한 사명을 감당했음에도 새 예루살렘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의 신앙을 진리에 비추어 본다면 영의 단계 즉 악은 모양이라도 버린 성결의 차원에 들어왔다고 말할 수 없지요. 하지만 행위적인 구약 시대의 신앙을 오늘날과 같은 성령시대의 기준으로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이삭과 같은 신앙으로 오늘날 성령시대를 살아간다면 능히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 성결의 차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비록 그가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자격은 안 되지만 3천층에는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삭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한 인물이고 그 마음은 어떻게든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었기에 3천층에 이를 수 있습니다.
3) 야곱의 신앙과 천국에서의 처소
그렇다면 야곱은 어떨까요? 야곱은 이미 태중에서부터 하나님께서 그의 중심을 보시고 택한 사람입니다. 그 마음에 간교한 속성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연단하여 깨뜨리셔서 결국에는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로 삼으셨지요. 하지만 이러한 야곱이라도 온전하지는 못했습니다. 아버지 이삭의 편애로 그처럼 자신이 고통을 받았는데도 요셉에 대한 편애가 있었습니다.
창 37:3에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즉 야곱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 옷을 지었더니” 말씀하지요. 야곱의 이러한 편애는 다시 한 번 자녀들 사이에 비극을 초래합니다. 이어지는 4절에 “그 형들이 아비가 형제들보다 그를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언사가 불평하였더라” 했습니다. 마침내 요셉이 형제들에 의해 종으로 팔리고 마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지요. 야곱의 온전치 못한 마음으로 인해 자신이 겪었던 고통을 가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으로 하여금 되풀이하게 한 것입니다.
야곱이 비록 오랜 연단을 통해 근본에 있던 간교한 속성은 벗었다 해도 이러한 모습이 남아 있기 때문에 온전한 성결을 이루었다고 할 수 없지요. 그러나 이삭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중요한 사명을 감당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었기에 3천층에는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 하여 어렵다는 뜻도 아닙니다. 이삭이나 야곱처럼 성경상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던 인물이라도 들어갈 수 없었던 곳이 바로 새 예루살렘입니다. 하나님께서 공의 가운데 정해 놓으신 기준에 온전히 합격을 해야만 들어갈 수 있지요. ‘대충 이 정도면 들어가겠지’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정확한 기준을 통과해야 합니다. 자신을 돌아볼 때 팔복의 열매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사랑장의 사랑의 열매는 얼마나 맺혀 있는지를 정확하게 분별해 보아야 합니다.
가령 이삭과 자기 자신을 비교해 볼 때 이삭처럼 남의 탓을 하거나 더 크고 넓은 마음으로 포용하지 못하는 모습이 있다면 아직 영의 마음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또한 야곱처럼 간교한 속성이 있다거나 그의 아비처럼 편애하는 마음 등이 남아 있다면 역시 영의 마음과는 아직 거리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 에서와 같은 마음이 남아 있다면 이런 사람은 영의 마음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입니다.
4) 에서의 신앙과 천국에서의 처소
에서는 자신에게 돌아올 장자의 축복이 야곱에게 돌아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를 죽이려는 마음까지 먹었습니다.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영의 마음인데 에서는 미움과 감정과 서운함 등 악의 모양들이 속속들이 드러나고 그것을 행하려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는 구원조차 받을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에서라도 오랜 연단 후에는 야곱을 용서하는 마음에까지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야곱을 용서했다고 해서 에서가 선의 마음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야곱을 용서하기에 앞서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인정해서 변화되어야 하는데 에서는 그것이 안 되어 있었지요. 에서가 야곱을 용서한 것도 스스로 가진 마음이 아니라 야곱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역사된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에서의 신앙을 말씀의 기준에 비추어 본다면 낙원에 이를 수밖에 없는 정도이지요. 하지만 구약 시대의 사람으로서 행함으로 죄를 짓지는 않고 야곱을 용서하는 마음이었기에 1천층에 들어가게 됩니다. 낙원은 벗어났다 해도 1천층 역시 육체의 일을 벗지 못한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이기에 하나님의 자녀라 하기에는 부끄러운 것입니다.
혹여 믿음의 1,2단계에서 여전히 육체의 일을 다 벗어내지 못한 분이 있다면 ‘나는 믿음의 1,2단계니까 아직 육체의 일을 행해도 구원해 주시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이 연약하여 온전히 육체의 일을 벗지 못했다 해도 하나님 말씀을 듣고 깨달을 때마다 그것을 벗어내고자 노력해 나갈 때만이 행함 있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5) 장자와 머리된 사람에게 주어지는 축복
에서가 아버지 이삭에게 복을 빌어 달라 간청을 하자 이삭은 37절에 “내가 그를(즉 야곱을) 너의 주로 세우고 그 모든 형제를 내가 그에게 종으로 주었으며 곡식과 포도주를 그에게 공급하였으니 내 아들아 내가 네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대답합니다. 이 내용만 보아도 계보를 잇는 정통성을 가진 장자에게 돌아가는 축복권이 얼마나 큰지 알 수가 있지요.
마찬가지로 머리된 사람에게 주어지는 축복도 이와 같습니다. 그렇다고 스스로 머리 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영으로 변화되며 충성하는 사람은 당연히 성도들 사이에서도 인정을 받아 머리가 됩니다. 이렇게 영적인 질서를 따라 머리로 세워진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만큼 축복과 보장을 해 주시지요. 또한 머리된 사람에게는 또 다른 차원의 연단이 오지만 이러한 연단을 통해서 더 신속히 영의 마음을 이룰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영적인 사모함을 가지고 사명을 침노해 들어가는 것은 매우 중요하며 그럴 때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도 갖추게 됩니다. 이렇게 머리로 세워진 사람에게는 영적인 질서를 좇아 순종해야 합니다.
롬 13:1-2에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했습니다. 물론 이것이 주 안에서의 순종이라야 하지만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거나 질서를 따라 내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다면 이는 곧 하나님에 대한 판단과 불순종이 되지요. 또한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인치셨으면 사람 편에서 임의로 바꿀 수 없으며 자기가 싫다고 마음대로 그만둘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장자의 축복을 사모하여 영혼이 잘되는 축복과 함께 범사가 잘되며 강건한 축복 가운데 거하시기를 바랍니다.
3. 결론
하나님께서는 참 자녀를 얻으시기 위해 이 땅에 인간 경작을 시작하셨습니다. 겨우 낙원이나 1천층 또는 2천층에 들어갈 수 있는 자녀를 얻으시고자 인간 경작을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낙원과 1천층, 2천층에 들어가는 영혼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뜻은 아닙니다. 사랑과 긍휼의 하나님께서는 비록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나아온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은총과 함께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아 주시지요. 하지만 영원한 천국에서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며 자녀된 권세를 마음껏 누리며 살기 위해서는 못해도 3천층에는 들어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천국 책자를 읽어 보시면 3천층 이상의 천국과 그 아래 단계의 천국이 얼마나 큰 차이가 나는지를 느낄수 있습니다. 바로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모두를 참된 자녀들이 들어올 수 있는 3천층 이상의 천국으로 이끌어 들이시고자 지금까지 만민을 연단하시며 인도해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 한 사람을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 전체와 바꾸지 않으실 만큼 영의 사람 온 영의 사람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영으로 들어온 사람에게는 영육간에 놀라운 축복을 주시지요. 이처럼 영으로 온 영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많으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저와 여러분과 본제단을 기뻐하시겠습니까? 기뻐하시는 것으로만 끝나시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대한 대가로 반드시 축복을 주시지요. 이러한 사실을 정녕 믿는다면 어떻게든 영으로, 온 영으로 들어오기 위해 최선을 다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삭과 야곱의 신앙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신앙을 목표 삼고 힘차게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올해를 마치는 순간에는 정녕 많은 분들이 아버지 하나님 앞에 “아버지여 감사하나이다. 저를 이처럼 영으로, 온 영으로 인도하여 주셔서 저 아름다운 새 예루살렘의 영광을 바라보며 달려가게 하심에 감사하나이다” 눈물로 감사의 고백을 하실 수 있기를 존귀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3-24 오전 1:01:01 Posted
2015-09-08 오후 2:00:19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