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론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이 신앙생활을 해 나가면서 받는 연단 중에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사람 사이에서 오는 연단일 것입니다. 오히려 예전에 세상에 살아갈 때 같았으면 그냥 보기 싫고 만나기 싫은 사람은 안 보면 되고, 아니면 한바탕 큰 소리 나게 싸워서라도 서로 간에 쌓인 감정을 풀었을 텐데, 신앙 안에서 사람 사이에 걸림이 되면 세상 사람들처럼 할 수도 없기에 의외로 서로 간에 불편한 관계가 오래가면서 이로 인해 마음에 연단을 받게 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는 늘 은혜의 기회가 있기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때를 만나게 되면 그제서야 자신이 잘못했음을 깨닫고 먼저 손을 내밀어 화해를 구하는 경우들이 있지요. 그런데 여러분이 이처럼 사람 사이에 걸림이 되었던 것을 회개하면서 부르는 찬양 중에 이런 내용의 가사가 있습니다.
"내가 먼저 손 내밀지 못하고 내가 먼저 용서하지 못하고 내가 먼저 웃음 주지 못하고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네 그가 먼저 손 내밀기 원했고 그가 먼저 용서하길 원했고
그가 먼저 웃음 주길 원했네 나는 어찌된 사람인가"
그런데 이러한 찬양의 배경이 되었던 은혜로운 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 어떤 전도사님이 목회를 하던 중에 집사님 한 분과 걸리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마음 안의 성령님께서는 탄식하실 수밖에 없으셨고, 이로 인해 전도사님은 너무나 마음이 곤고(困苦)한 시간을 보내게 되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집사님이 먼저 전도사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잘못했다고 하면서 회개를 하시더라는 것이지요. 집사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 전도사님은 통회자복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신이 주의 종이면서도 먼저 화평을 좇지 못했고 집사님보다도 더 못했던 자신의 지난 모습을 깨우치며 고백한 내용이 바로 이 찬양의 가사 안에 담겨 있지요. 자신이 먼저 손 내밀지 못했고, 먼저 섬기지 못했던 지난날의 모습을 회개하는 마음이 가사 전체에 절절이 담겨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회개하는 단계에 머물고 마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돌이켜 변화된 모습으로 나와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찬양의 마지막 절 가사는 이렇게 나오지요.
"내가 먼저 손 내밀게 되었고 내가 먼저 용서하게 되었고 내가 먼저 웃음 주게 되었네
주님의 귀한 그 사랑으로… 내가 먼저 섬겨 주게 되었고 내가 먼저 이해하게 되었고
내가 먼저 높여 주게 되었네 주님의 귀한 그 사랑으로"
이러한 찬양 가사대로 여러분이 그런 행함이라고 하면 그분은 이미 영으로 들어온 분들입니다. 그러나 전반 절에 있는 그런 마음이라고 하면 그분들은 아직도 믿음의 1단계나 2단계에 머물러 있는 분들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과연 어떠하신지요? 이제 2004년도가 다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혹여 아직까지도 서로 걸림이 되어 인사도 잘하지 않고 대화도 하지 않으며 마음에 불편함을 가지고 대하는 사람이 있으십니까?
오늘 말씀을 들으시면서 자신의 말씀으로 깨달아지는 분은 이 시간이 바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은혜의 기회이니 이제는 우리를 위해 화목제가 되어 주신 주님의 귀한 사랑을 가지고 먼저 손 내밀고 용서하고 웃어 주며 섬겨 주고 이해하고 높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마 5:9에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말씀하신 대로 정녕 복 있는 사람으로 나와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 론 /
1. 자기 앞에 나온 아들이 에서인가를 확인하는 이삭
에서와 야곱에게도 이러한 화평의 마음이 있었다면, 그래서 먼저 손을 내밀 수 있고 먼저 상대를 섬겨 주며 용서할 수 있었다면 형제끼리 원수가 되는 상황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선(善)을 좇았을 때 하나님께서도 모두에게 축복된 길로 인도해 주셨겠지요. 이삭 역시 두 아들 사이의 화평까지 고려하는 좀더 넓은 마음으로 두 아들을 품어 나갔다면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는 마음까지 갖게 되는 비극적인 상황을 맞지는 않았을 것이구요.
그러나 이삭은 이미 자기 좋을 대로 정한 마음이 있었고, 그 마음을 좇아 행하려 하였기에 육의 눈만이 아니라 정확한 분별을 할 수 있는 영의 눈까지도 어두워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리브가와 야곱의 간교한 꾀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결국 에서로 가장하여 그의 앞에 나온 야곱에게 에서에게 빌어 주려 했던 축복을 빌어 주지요.
만약 이삭이 선한 마음에서 두 아들을 모두 불러 각각에게 장자의 축복과 차자의 축복을 빌어 주려 했다면 이처럼 속을 리도 없었을 것이고 자기 마음에 원하던 대로 에서에게 장자의 축복을 빌어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삭은 자기 생각과 욕심 가운데 에서만을 축복하려 하였기에 오히려 자신이 더 사랑하던 에서에게는 빌어 줄 복조차 남지 않게 되었지요.
물론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되어진 일이었지만 이삭 편에서 좀더 선한 마음을 가졌다면 하나님께서도 선한 방법 가운데 모두에게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그러한 마음이 되지 못했기에 자신이 원하던 바와는 달리 야곱에게 모든 축복이 돌아가고 말았지요. 사실 이삭 편에서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다시 한번 자기 앞에 나온 아들이 에서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려고 했습니다.
26절에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와서 내게 입맞추라" 하였는데 이삭은 이렇게 해서 아들이 가까이 나왔을 때 그에게서 나는 향취를 맡아봄으로 그가 누구인지를 확인하려 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삭이 이처럼 "내게 입맞추라" 했던 데에는 물론 다시 한번 아들을 확인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동시에 입맞춤에는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입맞춤을 한다는 데에는 바로 이 아들이 장자의 축복을 받을 자임을 공표하는 의미가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야곱이 이삭 가까이 나왔을 때에 이삭은 그의 옷에서 나는 향취를 맡아보고는 오히려 이를 통해 그가 에서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야곱이 입은 옷이 에서의 것이었기에 그의 옷에서는 당연히 에서의 향취가 났기 때문이지요. 리브가는 바로 이러한 것까지도 계산에 넣어 야곱에게 에서의 옷을 입힐 만큼 치밀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 에서로 변장하고 이삭으로부터 축복기도를 받은 야곱
이러한 리브가와 야곱의 간교한 꾀에 넘어간 이삭은 그만 에서를 가장해 나온 야곱에게 축복을 빌어 줍니다.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했지요.
여기서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의 향취라 한 것은 지금 빌어 주고 있는 복이 누구의 이름으로 빌어 주고 있는지를 나타내 줍니다. 이삭 개인의 이름으로 빌어 주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빌어 주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지요. 또한 이삭은 야곱에게 영적인 축복 외에도 육적인 축복까지 빌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라 한 것은 육적인 축복 역시 복의 근원은 하나님뿐이심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러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주시라고 복을 빌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축복은 영적인 축복이지요. 예전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부르시며 그에게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셨는데 지금 바로 그 축복이 이삭을 거쳐 장자의 축복을 받는 야곱에게도 그대로 전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곧 야곱 개인에 대한 말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장차 그를 통해 나와질 선민 이스라엘에 대한 말씀이기도 하지요. 하나님께서 선민 이스라엘을 어떻게 축복하실지를 말씀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 민족은 인간 경작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하나님의 특별한 긍휼하심을 입을 수 있는 것이구요.
3. 야곱이 이삭의 축복기도를 받고 나간 후 사냥에서 돌아온 에서
그런데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을 빌어 주고 나서 야곱이 나가자 마자 에서가 사냥을 하여 돌아옵니다. 타이밍까지도 너무 정확한 것을 볼 수가 있지요. 만약 야곱이 기도받기 전이나 기도받는 도중에 에서가 왔다면 상황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섭리하시고 간섭하시는 일은 그 시간까지도 정확한 것을 볼 수 있지요. 주 안에서는 우연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모든 일이 공의의 법칙에 따라 정확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지요.
그러므로 잠 3:6에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는 말씀대로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간섭하셔도 그것을 무시하고 그냥 지나친다거나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자기 뜻대로 해 나가게 되면 나중에는 하나님께서 간섭해 주셔도 깨닫지 못하고 차츰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길로 빠지게 됩니다.
저는 지금까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 왔을 때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것을 수없이 체험해 왔습니다. 개인적으로 재정을 채워 주시는 것도 그렇고, 어떤 일을 정확한 타이밍에 맞추어 역사해 주시는 것도 그렇고, 지금까지 한 번도 어려움이나 민망함을 당하지 않도록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셨지요. 여러분도 삶 속에서 바로 이러한 하나님,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고 책임져 주시는 좋으신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장자의 축복 기도를 받는데 준비함 없이 나온 에서
뒤늦게 별미를 준비해 온 에서는 아버지 이삭에게 "아버지여 일어나서 아들의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말하는 것을 봅니다. 이 말하는 어투 하나도 여러분이 잘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아버지여 일어나서는 아버지의 자유의사여야 하는데 명령조가 따르고 있습니다. 아랫사람인 아들이 아버지에게 일어나서 아들의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또한 잡수시고 안 잡수시고도 아버지의 마음이지 명할 일이 아닙니다.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하면서 자신에게 장자의 축복을 빌어 주는 것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당당히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마음껏 축복해 달라 말하고 있습니다.
앞서 야곱이 기도를 받기 위해 준비했던 것처럼 좋은 의복을 갖춰 입는다거나 겸비한 태도로 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받을 것을 받으러 왔다는 식의 태도이지요. 바로 이러한 모습을 통해서도 에서의 마음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장자의 축복을 받는 자리에 너무나 준비함 없이 나오는 모습을 볼 때에 그가 장자에게 주어지는 축복의 소중함을 경홀히 여기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낄 수가 있지요.
또한 그가 얼마나 선한 마음과는 거리가 멀며 자기중심적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에서가 정말 선한 마음을 가졌다면 처음에 아버지 이삭이 자신에게 축복을 빌어 주겠다고 하면서 사냥을 하여 별미를 만들어 오라고 할 때 이미 동생 야곱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그러면 야곱에게는 어찌하시겠습니까?" 이렇게 물을 수도 있었겠지요. 선한 마음이라면 자신만 축복을 받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동생에게 돌아갈 축복까지도 생각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에서는 아버지로부터 별미를 만들어 오면 마음껏 축복해 주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 동생 야곱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든 빨리 나가 사냥을 하여 별미를 만들어 가지고 와서 자신에게 돌아올 축복을 받으려는 마음뿐이었지요. 그러니 막상 사냥을 해서 별미를 만들어 왔을 때도 동생에 대한 언급은 한 마디도 없이 자신에게만 "마음껏 축복을 빌어 달라" 청하고 있습니다. 에서의 마음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며 자기의 유익만을 좇고자 하는 마음인지 또한 얼마나 상대를 배려하지 못하는 좁은 마음을 가진 사람인지가 잘 나타나고 있지요.
넓고 포용하는 마음이라면 당연히 야곱의 입장까지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상대의 유익을 먼저 구해 주려는 마음, 좋은 것이 있으면 함께 나누려는 마음, 소외되고 약자의 입장에 있는 사람까지 늘 살피고 돌봐주려는 마음, 바로 이러한 마음이 넓은 마음이지요. 만약 여러분이라면 어떤 좋은 것이 있을 때에 그것을 자기 혼자만 갖고자 하시겠습니까? 또는 어떤 은혜의 자리가 있을 때에 그곳에 나만 가서 은혜받아야겠다는 이러한 마음은 없으신지요? 여러분이 좋은 것을 먹고 입고 누릴 때에 그러지 못하고 있을 믿음의 형제, 자매들을 얼마나 생각하시는지요?
5. 아버지 이삭에게 복을 빌어달라고 간청하는 에서
에서는 한 피를 나눈 형제이면서도 야곱에 대해 좁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자기가 받을 축복만을 생각했으나 결과는 오히려 모든 축복이 야곱에게 돌아가고 말지요. 에서가 이삭 앞에 나아가 "아버지여 일어나 아들의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말했을 때 이삭은 너무나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방금 전에 에서에게 축복을 다 빌어 주었는데 또다시 에서가 나타나서 축복을 빌어 달라 하니 이삭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당황하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너는 누구냐" 하고 물었을 때 "나는 아버지의 아들 곧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하는 답을 듣게 됩니다. 그제서야 이삭은 상황이 파악되었지요.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음을 알았습니다.
33절에 보면 이때 "이삭이 심히 크게 떨었다" 말씀하고 있지요. 이는 이삭이 어떤 당황함이나 야곱에 대한 분개함 때문에 떨었던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 앞에 심히 떨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삭은 왜 하나님 앞에 떨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게 축복을 빌어 주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장자의 축복이 당연히 에서에게 가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요. 이것은 이삭 자신의 생각 가운데 나온 것이었지만 이삭의 생각에는 에서가 장자였기에 당연히 에서에게 장자의 축복이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물론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 장자의 축복이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이미 태중에서부터 말씀해 주셨음에도 이삭은 워낙 자기 생각에 굳게 잡혀 있었기에 여전히 에서에게 장자의 축복이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러니 지금 상황에서 이삭이 생각하기에는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게 엉뚱한 사람에게 장자의 축복을 빌어 준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마음에 이삭은 심히 크게 떨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이삭은 한번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을 빌어 준 것을 다시 돌이킬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요. 그래서 "그런즉 사냥한 고기를 내게 가져온 자가 누구냐 너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정녕 복을 받을 것이니라"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미 축복을 다 빌어 주었기에 돌이킬 수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 말을 들은 에서는 방성대곡하며 말합니다.
34절에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 하소서"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에서는 예전에 자신이 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았던 일을 전혀 마음에 두고 있지 않았지요. 여전히 장자의 명분은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의 아버지 이삭이 돌이켜 다시 자신에게 장자의 축복을 빌어 주어서 그 축복이 자기에게 임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그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모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에서도 아버지 이삭의 말을 통해 상황을 인식했기에 돌이킬 수 없는 상황임을 깨닫고 이처럼 방성대곡을 했던 것이지요. 이삭도 상황을 파악하게 되면서 이내 책임을 회피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5절에 "이삭이 가로되 네 아우가 간교하게 와서 네 복을 빼앗았도다" 했지요. 물론 사실이었지만 이삭은 자신의 불찰이나 잘못은 전혀 생각지 않고 모든 탓을 간교한 속임수를 쓴 야곱에게 돌리고 있지요. 그러나 이처럼 이삭이 자신은 속아서 야곱에게 축복을 빌어 주었다고 생각할지라도 이미 한번 빌어 준 축복은 돌이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빌어 준 것이기에 이삭이 입술로 낸 말은 그대로 이루어지지요. 그럼에도 에서는 끝까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이삭에게 자신에게도 복을 빌어 달라 간청합니다.
36절에 "에서가 가로되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합당치 아니하니이까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 번째니이다 전에는 나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이제는 내 복을 빼앗았나이다 또 가로되 아버지께서 나를 위하여 빌 복을 남기지 아니하셨나이까" 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이삭이 에서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은 일반적인 복을 빌어 주는 차원이었습니다. 야곱에게 이미 빌어 준 장자의 축복을 에서에게 또 빌어 준다고 해서 축복이 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상황에서 에서는 마침내 동생 야곱을 죽이려는 마음까지 먹게 됩니다. 이때부터 야곱에게는 본격적인 연단이 시작되지요. 그 내용은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결 론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 55:11에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말씀합니다. 이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 가운데 선포된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게 되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번 선포된 말 역시 다시 주워 담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본교회에는 하나님께서 이미 개척 때에 세계를 이루는 교회, 대성전을 이루는 교회라는 놀라운 축복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22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져 가는 것을 보고 있지요.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택했을 때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아십니다. 그래서 야곱을 택하신 것도 그가 아직은 부족하지만 연단 후에 변화될 모습을 아시기에 그를 택하시고 장자의 축복을 받도록 섭리해 가셨던 것이지요.
본교회 역시 개척 당시의 모습을 보시고 그처럼 원대한 꿈과 비전이 담긴 축복의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연단을 통해 정금같이 나와질 여러분의 모습을 아셨기에 축복의 말씀을 주시고 지금까지 여러분을 아름답게 연단해 오신 것입니다. 금년도 두 번째 기도 제목과 같이 "영의 사람" 즉 "열매"로 만들어 오신 것이지요. 이제 금년도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지만 여러분은 2004년을 아름답게 마무리하시고 영광의 해인 2005년을 멋있게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야곱은 연단의 길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꿈을 꾸게 되었을 때 믿음으로 받았습니다. 그러했기에 그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연단을 잘 받아 마침내는 그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칭함 받으며 이스라엘 민족의 시초가 되어지지요. 그리고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다 이루어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여러분도 본 제단에 주신 약속의 말씀, 또한 만민의 성도에게 주신 언약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 온전히 성취해 드리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과 본 제단의 영광이 온 땅에 널리 드러나게 될 2005년에 하나님께서 씌워 주시는 아름다운 면류관들이 여러분 모두에게도 영광중에 임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1-19 오전 1:01:01 Posted
2008-04-09 오후 7:29:48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