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시간으로,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 ‘육체의 소욕’은 무엇이며 성령의 음성을 듣는 데 있어서 어떤 작용을 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성령의 음성을 밝히 들으려면 마음에서 비진리를 벗어 버려야 합니다.
비진리는 첫째로 육신의 생각을 발동시킵니다. 육신의 생각은 성령의 음성을 차단하거나 ‘이게 성령의 음성이 맞나?’ 하고 혼동하게 하지요. 성령께서 아무리 음성을 들려주셔도 육신의 생각이 강한 만큼 들을 수가 없습니다. 결국 자기 생각을 좇아가게 되는데, 이는 엄밀히 말하면 원수 마귀 사단의 주관대로 좇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리의 말씀을 듣고 읽고 배우다 보면 성령의 음성과 육신의 생각이 어느 정도 분별이 됩니다. 진리를 좇게 하는 쪽이 성령의 음성이지요. 마음에서 비진리를 벗어 버리는 만큼 육신의 생각도 점점 줄어들고, 그런 만큼 성령의 음성도 더 밝히 들을 수가 있습니다.
비진리는 둘째로 육체의 소욕을 발동시킵니다. 진리를 배워가다 보면 성령의 음성과 육신의 생각이 어느 정도 분별 되지만 많은 성도가 성령의 음성대로 순종을 못 합니다. 이는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기 싫어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성령의 소욕을 좇고 싶은 마음보다 육체의 소욕을 좇고 싶은 마음이 더 크기 때문이지요.
갈라디아서 5장 17절에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말씀한 대로 육신의 생각과 더불어 육체의 소욕 또한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육체의 소욕’은 무엇이며 성령의 음성을 듣는 데 있어서 어떤 작용을 하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육체의 소욕’이란
‘육체의 소욕’은 쉽게 말하면 ‘육체가 하고 싶어 하는바’입니다. 여기서 ‘육체’는 단순히 사람의 몸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지요. 영적으로 ‘비진리의 속성이 구체적인 행함으로 드러나는 것’을 총칭합니다. 따라서 ‘육체의 소욕’은 ‘마음의 비진리를 구체적인 행함으로 드러내려 하는 속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의 소욕을 거스릅니다. 예를 들어 성령께서는 원수도 사랑하라 하시는데 ‘미움’이라는 육체의 소욕이 강하면 막상 미운 사람을 볼 때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기가 싫어집니다. 상대를 고운 눈으로 보고 싶지 않지요. 뾰족한 눈으로 퉁명스럽게 말하고 싶고 상대를 콕콕 찌르는 말을 한바탕 쏟아내면 속이 후련할 것 같습니다. 다른 예로, 성령께서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다니엘 철야에 갈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오늘은 TV 보고 좀 쉬다가 일찍 자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육이 편하고 즐거운 대로 행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처럼 육을 좇기를 원하는 마음이 바로 육체의 소욕입니다.
2. 육체의 소욕을 좇지 않으려면
갈라디아서 5장 16절에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말씀합니다. 바로 육체의 소욕을 좇지 않으려면 늘 성령의 소욕을 좇아 행하면 됩니다. 성령의 음성을 듣거나 어떤 것을 주관 받을 때마다 그대로 행하면 되지요. 이렇게 성령의 소욕을 좇아 계속 행해 나가면 육체의 소욕이 점점 약해지다가 결국은 없어집니다. 마음에서 육체의 소욕 근원인 ‘비진리’가 점점 사라지기 때문이지요.
처음에는 성령의 소욕만 좇는 것이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두 마음이 싸우기 때문입니다. 즉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맞서 싸우지요. 이 싸움은 주로 믿음의 2단계에서 가장 격렬합니다.
믿음의 1단계에서는 싸울 일이 별로 없습니다. 대부분 믿음의 1단계에서는 세상에 살 때처럼 육체의 소욕을 좇아 행하지요. 아직 진리를 잘 모르기도 하거니와 말씀에 온전히 순종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실하게 못 느끼기 때문입니다. 물론 좋은 중심을 가진 사람은 주님을 영접하자마자 말씀을 듣는 대로 열심히 순종하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가 많지는 않습니다.
대부분의 성도님은 믿음의 2단계에 접어들면서부터 말씀대로 살기 위해 힘쓰기 시작합니다. 말씀을 들어서 천국과 지옥, 심판에 대해 알았기 때문에 말씀에 순종하려고 노력하지요. 그런데 구습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성령의 소욕만을 좇는 것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물론 성령 충만함을 잃지 않는다면 믿음의 2단계도 쉽게 통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이 성령 충만함을 계속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의 싸움을 거치게 되지요.
믿음의 2단계 중에서도 싸움이 가장 격렬한 시점은 자기 안에 진리와 비진리의 비율이 반반일 때입니다.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이 가장 팽팽하게 맞서기 때문이지요. 로마서 7장 15절에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했습니다. 즉 육체의 소욕이 성령의 소욕을 거스르고 비진리를 행하도록 이끈다는 말이지요. 21~24절에는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했습니다.
이처럼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마음과 악을 행하기를 원하는 마음이 싸우고 있으면 참으로 곤고하지요. 그럴지라도 이 고비를 반드시 잘 이겨야 합니다. 믿음의 3단계에만 들어가도 성령의 소욕을 좇는 것이 한결 쉬워집니다. 3단계 초입에는 잠시 두 마음이 맞설 때도 있지만 이내 돌이켜 성령의 소욕을 좇지요.
그런데 많은 분이 믿음의 2단계에서 지쳐 버립니다. 사람에 따라서 싸움이 1, 2년도 가고 심하게는 5, 10년 그 이상도 갑니다. 싸움이 지속되면서 계속 마음이 곤고하니, 신앙생활이 힘들게 느껴집니다. 악을 벗어 나가는 것이 신앙생활임을 알면서도 충만함을 잃어버리니 악을 더 쌓아가지요. 전에 버렸던 세상 것을 다시 취하기도 합니다. 성령의 음성을 거듭거듭 무시하고 육을 취하다가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짓기도 하지요. 그 결과 성령의 역사가 점점 희미해집니다. 진리의 말씀을 수년간 들어왔는데도 막상 현실 속에서는 떠오르지 않습니다. 이렇게 세상 사람과 다름없이 살다가 결국 성령의 역사가 끊어지는 지경에 이르지요.
이처럼 육체의 소욕과 싸우는 것이 힘들다고 해서 육을 취하면 싸움이 길어질 뿐입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은 육체의 소욕을 북돋아 주는 원군이기 때문이지요. 긴 코스를 달리는 마라톤 경주에도 끝이 있고 캄캄하고 긴 터널에도 끝이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을 벗는 여정에도 끝은 있지요. 그 시기는 여러분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쉼 없이 달리면 싸움이 빨리 끝나는데 중간에 멈춰 있거나 뒤로 가고 있으면 그 싸움이 길고 지루하게 느껴지지요. 싸움을 끝내고 믿음의 4단계 이상, 영으로 온 영으로 들어오면 육체의 소욕을 좇기가 오히려 더 어렵습니다. 성령의 소욕을 좇는 것이 더 쉽고 행복하지요. 성령의 소욕만을 좇아 신속하게 마음의 싸움을 마치고 영으로 들어오시기를 부탁드립니다.
3. 육체의 소욕과의 싸움을 빨리 끝내려면
첫째, 성령의 음성을 들려주실 때 바로바로 순종해야 합니다.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자, 다음에 순종하면 되지.’ 하고 성령의 음성을 무시해 나가면 점점 성령의 음성이 희미해지다가 결국 끊어져 버립니다. 거듭거듭 불순종하는 만큼 하나님과의 사이에 담이 쌓이기도 하지요. 반면에 듣는 대로 그때그때 순종하면 머지않아 성령의 인도를 밝히 받을 수가 있습니다.
성령의 음성을 밝히 듣기까지는 수년씩 걸리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굳게 결단하고 이렇게 행해 보시기 바랍니다.
둘째, 기도를 쉬지 않아야 합니다.
기도는 마치 자동차에 주유하듯 영혼에 영적인 에너지를 불어넣는 힘입니다. 기도를 쉬면 성령 충만함을 입을 수 없으므로 눌렸던 육체의 소욕이 다시 힘을 얻지요. 그러므로 늘 불같이 기도해서 성령 충만함을 입어야 합니다.
셋째, 육에 대한 느낌을 부지런히 바꿔 나가야 합니다.
육의 사람이 육체의 소욕을 좇는 것은 그것이 더 좋게, 더 편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말씀대로 사는 것은 어렵게 느껴지지요. 이는 잘못된 느낌으로 원수 마귀 사단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실상은 성령의 소욕을 좇는 쪽이 더 편하고 행복합니다.
그런데 왜 육의 사람은 비진리를 좇는 것이 더 좋다고 느낄까요? 구습이 몸에 배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영접하고 죄 용서받기 전에 우리는 세상 풍속을 좇아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았습니다(엡 2:2~3). 성령께서 원하시는 바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원하는 바를 행했지요. 이 구습이 몸에 배어 있는 한은 육체의 소욕을 좇는 것이 편하게 느껴집니다. 또 육체의 소욕을 좇으면 잠시나마 즐거움을 얻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순간에 불과하고 그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곤고하지요. 즐거움은 이내 사라지고 허무함만 남습니다.
그러니 기도를 쉬는 것은 즐겁고 기도하는 것이 어렵다, 이렇게 느꼈던 사람은 그 느낌을 바꿔야 합니다. ‘기도 쉬고 오락을 취하면 곤고하고, 피곤을 이기고 충만히 기도하면 행복하고 뿌듯하다.’ 이렇게 생각과 느낌을 함께 바꿔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8절에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했습니다. 구약 시대에 율법을 어긴 사람에게는 징계나 죽음이 따랐습니다. 오늘날도 육체의 소욕을 좇아 살며 하나님 말씀을 어기는 사람은 ‘이러다가 지옥 가지는 않을까? 재앙을 만나지는 않을까?’ 하고 늘 염려가 됩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 말씀은 구속이요 무서운 채찍같이 느껴지지요.
반면에 육체의 소욕을 다 벗어 버리고 성령의 소욕을 좇아 사는 사람은 늘 자유와 평안을 누리며 삽니다. 율법에 구속받을 일이 없지요. 성령 충만하니 참된 기쁨과 평안, 천국 소망이 넘칩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늘 찬양이 솟아나고 공의의 법대로 항상 하나님께 지킴 받고 축복받으며 살아갑니다. 재앙이나 사고를 만날 일도 없고 외로움이나 근심, 걱정, 두려움 같은 어둠이 틈탈 수도 없지요. 성령께서 늘 동행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의 음성을 밝히 듣는 비결은 간단합니다. 마음의 비진리를 다 벗어 버리고 성결한 마음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닮은 성결한 자녀가 되면 자연히 하나님과 밝히 교통하게 됩니다. 마음과 뜻이 하나가 되기 때문이지요. 무엇을 마음에 품든지, 무슨 말을 하든지, 혹은 무엇을 행하든지 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할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성령과 밝히 교통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직접 느껴보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이 마지막 때에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크신 뜻을 마음껏 펼치는 존귀한 자녀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2-11-30 오전 10:32:15 Posted
2022-12-02 오전 10:04:14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