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성령의 음성과 사단의 음성이 각각 어떻게 사람을 주관하는지를, 하나님을 믿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육신의 생각에 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성령의 음성과 사단의 음성이 각각 사람을 주관하는 방법
성령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성전 삼아 마음 안에 거하십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말씀한 대로이지요. 곧 성령은 마음 안의 진리를 주관합니다.
반면에 사단은 사람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밖에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2절에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말씀한 대로 사단은 공중에서 역사합니다. 마치 전파를 보내듯이 공중에 사단의 마음과 능력을 흩뿌려 놓으므로 마음 안의 비진리는 안테나처럼 이 사단의 음성을 받아들이지요. 비진리에서 비롯되는 육신의 생각을 통해 받아들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기억 장치에 입력된 지식 중에서 비진리의 지식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사단은 이 육신의 생각을 통해 사단의 음성을 들려주지요.
사단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 ‘생각’은 대문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집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 안방이라고 할 때 대문을 통과해야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고 안방에도 들어갈 수 있지요. 안방은 바로 우리 ‘마음’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사람 마음에 자신의 음성을 침투시켜 그 마음을 자기 뜻대로 주관하려고 항상 노리는 사단은 사람이 육신의 생각을 해서 대문을 열어 주면 ‘이때다.’ 하고 어찌하든 생각의 문을 통해 마음으로 침투하려고 합니다.
반면에 성령은 외부에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 안에 항상 좌정해 계십니다. 사단이 집 밖에 있다면 성령은 안방에 계신 것이지요. 마음 안에서 그 사람 마음에 일궈진 진리를 활용해서 성령의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생각의 문을 통과하실 필요 없이 마음에서 곧바로 음성을 들려주시지요.
그런데 혹시 이 설명을 들으시고 요한계시록 3장 20절 말씀과 혼동하면 안 됩니다. 주님께서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하심은 아직 주님을 영접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린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사람의 마음 안에 들어오시기 전에 먼저 생각의 문을 두드리신다는 것입니다. 전도자를 통해 ‘구원의 도’와 ‘내세’에 대해 알려 주시며 각 사람 생각의 문을 두드리시지요. 이때 생각의 문을 여는 사람들은 ‘십자가 사건이 참인가? 하나님이 진정 살아 계시는가? 천국이 있을까?’ 등등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복음을 긍정하고 마음 문을 열면 주님께서 마음 안에 들어오십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주님과 하나이신 성령이 마음에 임하시지요. 이렇게 마음 안에 들어오신 성령은 우리 마음 안에 늘 함께 거하시니 더 이상 생각의 문을 통해 들어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2. 사단의 음성이 사람에게 더 빨리 전달되는 이유
사단이 주관하는 육신의 생각은 머리에서 나오고 성령의 음성은 마음에서 옵니다. 그러니 언뜻 생각하기에는 사단의 음성보다 성령의 음성을 더 잘 들을 수 있을 것 같아 보입니다. 사단은 사람의 외부에서 역사하고 성령은 우리 마음 안에 계시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마음에 비진리가 있는 한은 육신의 생각이 먼저 떠오릅니다. 비진리가 많을수록 육신의 생각이 더 빨리 떠오르지요. 즉 사단의 음성이 사람에게 더 빨리 전달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들은 마음과 머리 중 머리로 먼저 전달됩니다. 보는 것은 시신경을 통해, 듣는 것은 청신경을 통해 뇌에 전달되지요. 뇌는 이 정보들을 바탕으로 생각합니다. 마음에 비진리가 있는 사람은 이 원칙이 그대로 적용됩니다. 무엇을 보고 들으면 머리의 생각이 먼저 작용하지요. 비진리의 지식이 많이 입력되었다면 생각 중에서도 육신의 생각이 주로 떠오릅니다.
그러나 비진리를 다 버린 진리의 사람은 무엇을 보고 들으면 그것이 생각으로 즉각 이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는 마음에 전달되지요. 물론 본 것이 시신경을 통해, 들은 것이 청신경을 통해 뇌에 전달되는 경로는 비진리의 사람과 동일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생각을 지배하기 때문에, 즉 영이 혼을 지배하기 때문에 생각해도 마음에서 울리는 성령의 음성에 따라 생각합니다.
보고 들은 어떤 정보가 머리에서 즉시 생각으로 재생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거쳐서 재생된다고 할 수 있지요. 그래서 마음 안에 계신 성령의 주관에 따라 영에 속한 진리의 생각만 떠오릅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받아 영이 살아나기는 했는데 아직 마음에 비진리가 있으면 어떨까요? 무엇을 보고 들었을 때 성령은 마음을 주관하시지만 비진리가 있으면 그 주관을 받기에 앞서 육신의 생각을 떠올리기가 쉽습니다. 육신의 생각이 먼저 떠오르면 성령의 음성을 차단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3. 성령의 음성 듣기를 사모하고 순종할 마음 가져야
마음에서 비진리가 없어지면 머리에서도 비진리의 지식이 지워집니다. 육신의 생각도 없어지지요. 육신의 생각을 떠올리려고 애를 써도 잘 안 됩니다. 어떤 상황에 부닥치든지, 어떤 문제를 만나든지 더 이상 사단의 주관을 받지 않지요. 사단이 주관할 근거 자체가 아예 없어졌기 때문에 바로 어떤 상황의 어떤 문제를 만나도 사단의 주관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대문, 곧 생각의 문을 사단에게는 결코 열어 주지 않기 때문에 사단의 음성이 들어올 수가 없지요. 오직 마음 안에 계시는 성령이 마음을 주관하십니다.
비진리를 벗고 진리를 채우는 만큼 사단의 음성이 점점 작아지고, 성령의 음성은 점점 커집니다. 예를 들어 마음의 진리와 비진리가 각각 80퍼센트, 20퍼센트라면 그때는 성령의 음성이 확연하게 구분됩니다. 사단의 음성이 들려온다고 해도 무시하고 성령의 음성만 듣게 되지요. 성령의 음성이 훨씬 더 또렷하고 육체의 소욕보다 성령의 소욕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육을 다 버렸다고 해도 그 흔적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사단의 음성이 세미하게나마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성령의 음성을 들을 마음이기 때문에 그 희미한 사단의 음성을 귀 기울여 들으려고 하지 않지요.
그런데 반대로 사단의 음성이 성령의 음성보다 좀 더 크게 들리는 경우라도 성령의 음성을 듣고자 하면 들을 수 있습니다. 즉 초신자라도 성령의 음성에 순종할 마음으로 열심히 말씀을 행하면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순종할 수 있지요. 그러면 비진리도 신속하게 버려집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사모함입니다. 성령의 음성 듣기를 사모하고 순종할 마음이라면 성령의 음성이 미세해도 듣게 됩니다. 반면에 진리와 비진리가 대등해도 사모함이 적고 순종할 마음이 없으면 성령의 음성을 듣지 못하지요.
4. 믿음의 분량에 따라 단계가 나뉘는 육신의 생각
믿음의 분량에 따라 떠오르는 육신의 생각도 다릅니다. 믿음의 분량에 따라 마음에 일군 진리의 분량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음성을 듣기 위해 깨뜨려야 할 육신의 생각을 단계별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단계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육신의 생각입니다.
성령의 음성을 듣기 위해 깨뜨려야 하는 육신의 생각 중 아주 초보적인 단계이지요. 세상의 많은 사람이 이 육신의 생각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못합니다. 교회는 나오지만, 아직 구원받을 믿음을 갖지 못하는 사람도 여기에 해당하지요.
이 육신의 생각은 대부분 세상 지식과 이론 등에서 비롯됩니다. 고린도후서 10장 5절에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했습니다. 세상 이론이나 지식, 인간적인 지혜가 가득한 사람은 하나님을 믿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하는 육신의 생각이 그만큼 많이 동원되기 때문입니다.
평생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온 사람을 전도하면 복음을 단번에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지만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세상 지식이나 이론에서 나오는 생각이 복음을 믿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근본 하나이신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의 몸에서 나셨지요. 그런데 세상 지식에 따르면 생명은 남자의 정자와 여자의 난자 결합에 의해 잉태됩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 여자가 어떻게 잉태하여 아이를 낳을 수 있는가?’ 하는 의심의 생각이 들지요. 사단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이런 생각을 물고 늘어지며 육신의 생각을 부추깁니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의문을 가진 정도였다면 점점 ‘거짓말이다. 황당한 일이다.’ 이런 판단, 정죄로 발전하게 되지요. 그 결과 복음을 받아들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어떻게 믿겠습니까?
또 성경은 분명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없는 무(無) 상태에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만물의 기원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많은 사람이 진화론을 믿습니다. ‘천지 창조’라는 실제 사건을 하나의 신화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지요. 자신이 배운 이 세상의 지식이나 이론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 10장에 보면 해와 달이 같은 위치에 일정 시간 동안 머문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 지식에 따르면 해와 달은 멈출 수 없습니다. 만약 멈춘다면 지구는 엄청난 타격을 받지요. 그런데 영의 공간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이 육의 공간을 영의 공간으로 덧입히면 지구에 어떤 충격도 주지 않고 해와 달을 멈추게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해와 달이 멈추면 지구에 엄청난 타격을 준다는 이론은 참입니다. 그러나 이런 지식과 이론을 바탕으로 성경에 기록된 기사를 부인한다면 이 지식은 무익한 지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이로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사망에 이르는 육신의 생각을 낳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절절히 깨달았기 때문에 이전에 쌓은 세상 지식과 이론을 오히려 해로운 것으로 여겼습니다. 빌립보서 3장 8절에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라고 고백한 대로이지요.
그런데 전도해 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많은 사람이 세상 지식은 고상하고 주를 아는 지식, 곧 복음이 미련한 것으로 생각합니다(고전 1:21). 전도하는 여러분을 어리석게 여기고 거짓말쟁이로 만들기도 하지요. 자신의 지식과 아는 이론에 비춰 보면 도무지 맞지 않기 때문에 사실을 사실로 믿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평안과 축복의 길을 밝히 보여 줍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귀한 보화인 ‘천국’을 얻는 길을 알려주지요. 잠시 잠깐 후면 쓸모없어질 세상 지식이나 육신의 생각을 낳아 사망으로 인도하는 헛된 지식에 비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사도 바울은 마음으로 깨달았기 때문에 모든 이론, 지식, 생각을 파하고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긴 것입니다.
2022-09-21 오후 2:12:33 Posted
2022-09-23 오후 4:58:40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