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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설교

제목
2차 영혼육 (14) 마음의 구성 요소 [롬 7:21-23]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2.01.30
오늘은 큰마음, 영의 마음을 이루기 위해 마음의 구성 요소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자신의 마음 안에 어떤 비진리가 있는지 알아서 그 비진리를 빼어 버리고 진리로 채울 때에 마침내 온전한 영의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원래 아담의 마음은 진리의 지식들만 채워진 진리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그가 범죄하여 영이 죽게 되자, 그 안에 담긴 진리의 지식들은 점점 사라지고 비진리의 지식들로 채워졌지요
그러나 진리의 마음도 일부는 남아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선한 것을 좋다고 생각하며 선을 추구하려고 합니다.


1. 사람의 본성

생령이었던 아담의 영이 죽자 아담의 마음에는 원래 아담의 근본 재료인 흙의 성질이 적용되기 시작했습니다. 흙은 그 안에 어떤 성분을 가미하느냐에 따라 토질이 달라지는 특성이 있지요. 맨 처음 영의 지식으로만 채워져 있던 아담의 마음이 옥토와 같이 기름지고 부드러운 본성을 갖고 있었다면 점차 독하고 악한 성분들이 첨가되어 변질된 본성을 갖게 된 것입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보고 듣고 느끼는 속에서 마음에 악이 들어오는 만큼 그 본성이 변질됩니다.
예를 들어, 간사하고 교활한 성질, 비겁한 성질, 거칠고 포학한 성질, 자기 유익을 구하는 성질, 거짓되고 핑계 대는 성질, 교만하고 무례한 성질, 이런 악한 성질들이 들어와서 사람의 마음 밭을 점점 비진리로 변질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에 비진리가 들어오면서 만들어진 본성은 사람의 “기”를 통해 그 자녀와 후손들에게 전달이 됩니다. “기”라는 것은 “사람의 전신에서 나오는 진액의 결정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정자와 난자 안에 각 사람의 기가 담기게 하셨지요.
기 속에는 외모는 물론 체질이나 지능, 성격, 심지어 버릇까지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를 물려받은 자녀들은 부모를 닮게 되지요. 이때 마음의 성질 곧 부모의 본성도 기 안에 담겨서 후손에게 전달됩니다. 부모의 마음 밭이 옥토일 때는 자녀도 옥토의 마음을 타고나기 쉽고, 부모의 마음이 길가 밭 같은 토질을 가졌을 때는 자녀도 대체로 강퍅한 것을 봅니다.
그런데 본성은 타고나는 것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타고난 마음 밭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지만 본인이 태어나고 자라면서 접하는 환경 속에서 마음에 어떤 것을 받아들였는가에 따라서 변합니다.
악한 환경 속에서 비진리를 많이 접하고, 악한 것을 보고 듣고 느끼며 마음에 받아들이는 만큼 본성이 악해집니다. 반대로 선한 환경 속에서 자라면 본성에 악이 비교적 적게 심어질 수 있지요.
이렇게 본성은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바탕 위에 후천적으로 입력되는 성분들이 더해져서 사람마다 독자적으로 생겨납니다.


2. 양심

각 사람이 태어나서부터 만들어진 본성 속에서 나름대로 “이것이 선이다. 저것은 악이다” 하고 기준을 세워 놓은 것이 바로 양심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떤 일의 선과 악을 분별할 때 양심이라는 것을 기준으로 평가합니다. 악을 행하게 되면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므로 “양심에 가책을 느낀다” 말하기도 하고, 악한 사람들을 보면 “저 사람은 양심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양심은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므로 절대적인 선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본성이 사람마다 다른 것처럼 그 본성 가운데서 분별하는 선과 악의 기준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가령, 어떤 사람은 흉악한 범죄자가 있을 때 의분에 못 이겨서 그를 처벌해야 한다며 죽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분명히 살인이라는 죄임에도 “내 양심에는 옳은 일을 했다. 나는 떳떳하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또 “도둑질이 선이냐 악이냐” 묻는다면 대부분이 악한 일이라고 답하겠지만, “어떤 일에 대해 도둑질이냐 아니냐” 물으면 각 사람의 양심이 다른 것이 드러납니다.
어떤 사람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남의 것을 취하면 양심의 가책을 받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주 사소한 물건을 주인에게 알리지 않고 사용했거나 적은 돈을 빌려 쓰고 갚지 않는 것 정도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요. 이때 상대가 “왜 남의 것을 함부로 손대느냐” 하거나 “빌려준 것을 갚으라” 하면 오히려 “그렇게 작은 것을 가지고 속 좁게 군다”고 오히려 상대를 좋지 않게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세대와 지역에 따라서도 양심의 기준이 많이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누구나 “부모님을 공경해야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공경하는 방법도 사람마다 다릅니다.
예전에는 제가 서울에 있다가 시골의 부모님께 가면 집 안에 들어가서 부모님께 인사드리기 전에는 형님이나 누님을 만나도 인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부모님께 먼저 인사를 드린 후에야 다른 분들께 인사를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배웠기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양심에 거리끼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서양 사람들이나 젊은 사람들은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기 전에 다른 가족을 만나 먼저 인사해도 부모님께 무례히 행했다고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이렇게 세상 사람들의 양심은 각각이라서 선과 악의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기 양심의 기준이 선하고 옳은 것이라고 착각하면서 살아가지요.
그러면 과연 우리는 어떤 기준에 맞추어야 참으로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일까요? 참된 선의 절대적인 기준은 오직 선 자체요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양심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진리로 변화시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3. 마음의 구성 요소

로마서 7장 21절에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다” 했는데, 이는 사람의 마음 안에는 진리의 속성이 있는가 하면 비진리의 속성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어지는 22~23절을 보면 사람의 마음을 다시 세 가지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먼저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했는데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속사람”이란 명백한 진리의 마음 곧 하얀 마음입니다.
다음으로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했는데 여기서 “내 마음의 법”이라는 것은 바로 스스로 만들어 낸 “양심”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이란 명백한 비진리의 마음 곧 원수 마귀로부터 심어진 검은 마음을 말합니다. 결국 이 말씀은 사람이 진리의 마음에서는 하나님의 법을 지키고 싶지만 비진리의 마음이 양심마저도 억제하여 이기며 죄악을 행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양심의 소리를 무시하고 죄악을 범해 나갈수록 점점 더 검은 마음으로 물들게 되고 양심도 무디어져서 악하게 변하는 것이지요. 그만큼 본성도 악해지며, 이런 조상의 기를 물려받으니 세대가 지날수록 세상은 더욱 악해지는 것입니다.


4. 영의 마음을 이루려면

우리가 영의 마음을 이루려면 명백한 비진리의 마음을 벗어 버릴 뿐 아니라 본성 속에 있는 비진리까지 발견해서 버려야 합니다.
미움, 혈기, 시기, 질투, 판단, 정죄, 간음 등 명백한 비진리의 마음은 쉽게 구분이 되므로 신속히 빼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성 속의 비진리는 숨겨져 있어서 쉽게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나름대로의 양심에 어긋남이 없게 행동하기 때문에 자신이 옳고 선하다고 생각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본성 속의 비진리는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까요? 컵을 흔들면 물 위로 찌꺼기가 올라오는 것처럼, 사람이 연단을 받아 어려움을 겪을 때에 본성 속의 비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혈기를 다 버린 줄 알았는데 연단 중에 마음이 고통받다 보니 순간 혈기가 나와서 스스로 놀라는 경우가 있지요. 미움, 시기를 다 버린 줄 알았는데 형제가 사랑받고 크게 축복받는 것을 보자 온전히 기뻐하지 못하는 마음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지극히 겸비하고 무익한 종의 마음으로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는 마음이라 생각했는데, 성도들의 사랑과 인정을 받게 되자 어느 순간 교만한 모습이 드러나기도 하지요. 주님을 사랑하고 100% 신뢰한다고 생각했는데 심한 고난 중에 그렇지 못한 마음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믿음이 좋고 선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에게도 때때로 하나님께서 연단을 허락하시는 것은 바로 이러한 본성 속의 비진리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예를 들어, 연단받기 전의 욥은 스스로 어떤 악을 발견할 수가 없었는데, 그가 심한 고난에 처하게 되니 하나님께 원망을 쏟아냅니다. 또한 자신을 권면하고 지적하는 친구들을 교만한 말들로 무시하고 누르려고 했지요. 의로운 욥의 본성 깊은 곳에 이렇게 악한 것이 숨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께서 만나 주시고 자신에게 이런 악이 있음을 발견하자 지체하지 않고 마음에서 벗어 버릴 수가 있었습니다.

또한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 인정받을 정도로 아름다운 마음과 중심을 가졌고 하나님과 백성을 지극히 사랑했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니 본성의 악이 드러납니다. 신하 우리아의 아내를 취하여 아이가 잉태되자, 이를 은폐하려다가 뜻대로 되지 않으니 결국 궤계를 써서 우리아를 이방인의 손에 전사하게 만들었지요.
다윗은 자신의 죄를 깨닫자 즉각적으로 철저히 회개하였고, 그로 인해 큰 연단이 왔을 때도 지극히 겸비한 모습으로 연단을 받았으며, 이를 통해 이전보다 더욱 선하고 온전한 마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시편 119편 71절에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말씀하신 대로 영적인 복이 이뤄진 것이지요.
욥도 다윗도 이렇게 연단을 통해 본성 속에 있는 비진리까지 버린 후에는 영적인 축복뿐만 아니라 육적으로도 이전과 비할 수 없는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장차 천국에서 누릴 각 사람의 영광은 다릅니다(고전 15:41). 이는 우리 마음이 얼마나 하나님을 닮아 온전한 영의 마음을 이루었는가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므로 영혼육 말씀을 잘 양식 삼아 온전한 영의 마음을 이루어 천국에서 해와 같은 영광의 자리에 이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2-02-04 오전 10:33:26 Posted
2022-02-04 오후 11:14:03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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