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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설교

제목
2차 영혼육 (3)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만드신 이유, 믿음의 성장 속도, 양심 [살전 5:23]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1.11.07
오늘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만드신 이유, 그리고 믿음의 성장 속도와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양심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사람은 흙으로 지어졌기에 흙과 같은 속성이 있습니다. 흙에 어떤 성분을 가미하느냐에 따라 토질이 변하는 것처럼, 사람도 그 안에 어떤 성분을 채우느냐에 따라 기질이 변하는 것입니다.
어떤 음식물로부터 어떤 성분을 취하는지, 마음에 어떤 생각과 감정을 담아 가는지, 어떠한 행동을 하며 어떤 가치를 추구해 나가는지, 이 모든 것들이 사람의 기질에 영향을 미치게 되지요.
성령을 받은 우리는 육을 취해 육을 계속 낳아 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를 좇아 영을 낳아가야 합니다. 악하고 추하고 변질되는 육이 아니라 진리와 선과 사랑 등 아름답고 영원한 영의 것들을 담아야 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께서 흙으로 아담을 만드신 이유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요 4:24) 살과 뼈가 없으시고, 천군 천사들도 영으로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따라 아담을 지으실 때에 그냥 영으로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굳이 흙으로 몸을 만드시고 그 안에 생기를 불어넣는 과정을 거치셨지요.
천사들처럼 영으로 지으시면 더 간단하고, 몸도 성분에 따라 변하는 흙보다는 잘 변하지 않는 금이나 쇠 같은 성분으로 지으셔도 좋지 않았을까요?
하나님께서 아담을 흙으로 지으신 것은 경작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경작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며, 서로 사랑을 주고받을 참자녀를 얻기 위한 것이었지요.
그런데 아담이 맨 처음 지음받아 에덴동산에 살 때는 참자녀라고 말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오직 선과 진리만 가르치셨기에 편안한 삶을 살기는 했지만 죄와 악과 불행과 고통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에덴에 있는 것들은 썩어지거나 변질되는 것이 없었기에 아담은 죽음의 의미도 잘 몰랐지요. 그러니 이와 반대되는 선이나 행복, 사랑, 영생 등의 개념도 잘 깨달을 수가 없었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처음부터 선과 악,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 등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나 사람은 한계가 있는 피조물이기에 상대적인 것을 체험해 보아야만 진정한 행복과 감사를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참행복을 알지 못하고 참된 기쁨과 감사도, 사랑도 모르는 상태로 영원히 살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아담으로 하여금 육의 모든 것을 체험하게 하기 위해서 선악과를 두신 것입니다. 육의 세상에서 슬픔, 아픔, 사망 등을 겪어 본 후 경작을 받아 다시 영으로 돌아옴으로 영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마음 중심에서 깨달을 수 있게 하신 것이지요.
만일 아담이 천사들과 같이 영으로만 지어졌다면 육의 모든 것들을 체험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육이 어떤 것인지 다양하게 체험을 한 다음에, 다시 영으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첨가되는 성분에 따라 토질이 변하는 흙으로 지어져야만 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면 “왜 선악과를 만들어 사람이 고통받게 하셨는가” 하고 하나님을 원망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경작의 과정을 허락하시고 독생자까지 내어 주신 하나님께 중심으로 감사하게 되지요.
또 경작을 잘 받아 참자녀로 나올 때 영원한 천국의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알기에 어떤 어려움을 만날 때도 선과 진리를 좇아 승리해 나가는 것입니다.


2. 사람마다 다른 양심

우리가 온전한 참자녀로 나올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경험케 하시는데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아무렇게나 살아가면 안 됩니다. 우리가 왜 세상에서 경작을 받는지 깨달아서 사람의 본분에 맞게 살아가야 하지요.
세상 사람들은 고통과 불행을 겪으며 살아가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은 하나님 안에서 행복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물론 주를 믿는 사람도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은 나름대로 연단을 받는 일들이 있습니다. 하지만원수 마귀가 주는 시험 환난에 시달리거나 재앙으로 고통받아야 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요한일서 5장 18절에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하신 것처럼, 우리가 범죄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혹여 사람 편에서 실수하여 시험을 당해도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주시며 연단이 있어도 능히 이길 힘을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서 변화되어 가면 이 세상에서도 형통하고 복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모두가 신속하게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님을 영접하고 성령을 받으면 그때부터 부지런히 말씀을 배우는 대로 순종하여 죄악을 벗어 버립니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성령을 받고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데도 즉시 순종하지 못하므로 믿음의 성장이 더디지요.
이런 차이는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요?
짐승과 달리 사람에게는 마음이 있습니다. 원래 첫 사람 아담의 마음은 진리로만 채워진 영의 마음이었고, 그래서 마음이 곧 영이었습니다. 아담이 범죄한 후 사람의 영이 죽어지면서 마음에 비진리가 계속 들어오게 되었고 원래 있던 진리의 마음과 섞여서 새로운 마음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중에서 나름대로 옳고 그름을 분별하여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좇아 살아가려고 하는 양심이라는 것이 생겨났습니다.
양심은 사람마다 선한 정도가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양심이 선해서 진리대로 살아가려는 마음이 더 강하지만, 어떤 사람은 양심이 악해서 진리를 추구하기보다는 자기 유익을 좇아 살아가지요.

비록 주님을 모르는 사람이라 해도 양심이 깨끗한 사람은 사람의 도리를 좇아서 살아가려고 애를 씁니다.
어린 학생들 중에도 어떤 학생은 자기 위치를 지키고 본분을 다하려고 노력합니다. 학교생활도 성실히 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며 행동과 외모도 단정하게 하지요. 이런 학생은 마음과 몸을 스스로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는 힘이 그만큼 강하고, 어른이 되어도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학생은 양심의 소리를 무시하고 ‘게으름 부리고 싶다’, ‘학교에가지 않고 놀고 싶다’, ‘이성을 찾아 만나고 싶다’ 하면서 육이 원하는 대로 순종하여 취해 갑니다. 물론 ‘착한 자녀가 되고 싶다’, ‘학생의 본분을 다하고 싶다’ 이렇게 선을 좇으려는 마음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양심의 소리대로 자기를 다스릴 능력이 쉽게 오지 않으니 사람의 도리와 본분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이지요.
이처럼 양심을 따라 자신을 다스리며 지배할 수 있는 능력, 자기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 갈 수 있는 능력이 사람마다 다릅니다.


3. 양심의 차이는 어디서 오는가?

첫째로, 부모에게서 옵니다.
사람의 정자와 난자 속에는 부모의 기가 들어 있어서 자녀가 그 기를 그대로 물려받는데, 양심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가 선을 좇아 살아왔고 마음밭이 좋은 사람이라면 자녀도 양심이 좋은 사람으로 태어날 확률이 높지요.

둘째로, 환경에서 옵니다.
비록 부모로부터 좋은 기를 타고 났다 해도 열악한 환경에서 자라면서 악한 것들을 보고 듣고 입력한다면 그만큼 양심이 더럽혀지기 쉽지요.
반면에 선한 것을 보고 듣고 좋은 환경에서 자란 사람은 비교적 선한 양심을 갖기가 쉽습니다.

셋째로, 자신이 선한 양심을 갖기 위해 어떻게 노력해 왔는가 하는 것입니다.
같은 부모 아래, 또한 같은 환경에서 자랐다 해도 자신이 어떻게 노력해 왔느냐에 따라 사람의 길이 완전히 달라지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서 죄악을 벗어 버리고 자신을 진리 가운데 복종시키려고 해도, 과거에 자신을 어떻게 만들어 왔는가에 따라 쉽게 할 수 있는 사람도 있고 힘들다 하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기 전에 의지가 약하고 쉽게 변개했던 사람들은 신앙생활도 비슷하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무기력하고 게으르며 무질서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 주를 믿고 성령을 받았다 해서 갑자기 돌변하여 부지런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학생 때 공부를 해야 하는데도 놀고 싶고 쉬고 싶은 대로 육을 좇아 나가거나, 무절제하여 의무를 다하지 못했던 사람은 신앙 안에서도 그런 모습이 되기 쉽지요. 남들은 더 큰 믿음의 단계를 향해 열심히 전진하는데 늘 믿음의 초입에 머물러 있고, 은혜를 받아서 좀 충만하게 달려가는가 싶다가도 무슨 일이 있으면 또 주저앉아 버립니다.
그렇지만 세상에서 도리를 좇아 자신을 다스려 나간 사람은 진리 안에서도 마음을 지키기가 그만큼 쉽습니다. 말씀을 듣는 대로 명심하여 자신을 복종시켜 나가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게 느껴지지요.
이처럼 어떤 부모에게서 났으며, 어떤 환경에서 무엇을 보고 듣고 배웠는가, 그리고 스스로 어떻게 노력해 왔는가 하는 조건들이 복합되어 사람의 양심을 만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좋은 부모에게서 태어나서 좋은 환경 가운데 자랐고 자신을 잘 다스려 왔다면 그만큼 신속하게 진리로 변화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해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변화시킬 힘이 없다 해도 하나님은 능히 하십니다(막 9:23, 빌4:13). 자신의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 발견하고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구하면서 노력하면 하나님께서 그 믿음과 행함을 보시고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의지가 약하고 변개하는 사람을 진실한 사람으로, 게으르고 나약한 사람을 부지런하고 열심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게 하시지요. 깨달은 말씀을 명심하지 못하고 흘려버리는 사람도 성령의 능력으로 명심하게 하시고 말씀대로 행할 수 있도록 인도해 가십니다.
그러므로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하신 대로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능력으로 변화되어 신속하게 영으로, 온 영으로 들어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1-11-10 오후 3:37:21 Posted
2021-11-12 오후 3:07:34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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