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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설교

제목
십계명 (7) 제7계명 [출 20:14]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1.07.18
오늘은 십계명 중 제7계명 “간음하지 말지니라” 하신 말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간음’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부부간이 아닌 남녀가 성적 관계를 맺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3, 40년 전만 해도 이는 윤리를 크게 벗어난 죄라고 여겼지만, 오늘날은 사람들의 양심이 무뎌지고 죄의식이 약해져서 급속히 세상 정욕에 물들어 이런 범죄가 늘고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13장 12절에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말씀하신 대로 아무리 세상에 죄악이 관영되어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깨어 빛 가운데 행해야 합니다.
“간음하지 말지니라” 하신 제7계명에는 단순히 행위적인 간음을 금하신 것만 아니라 더욱 깊은 영적인 의미들이 담겨 있습니다.


1. 행위적인 간음

행위적인 간음은 대표적인 육체의 일로서 구원조차 받지 못할 죄임을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6장 9~10절에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했지요.
물론 아직 진리를 잘 모르는 초신자라면 하나님께서도 회개할 기회를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3단계 이상에 들어서서 어느 정도 진리를 아는 사람이 이런 현저한 육체의 일을 행할 때는 회개의 영조차 받기 어렵습니다.
레위기 20장 10절에도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하여 엄격히 경계하십니다. 혼인 관계가 아닌 남녀 간의 일뿐만 아니라 짐승과 혹은 동성 간의 범죄에 대해서도 성경에서는 엄격히 금하고 있음을 반드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날은 의식들이 예전과 많이 달라서 비윤리적인 간음에 관한 것을 아름다운 사랑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미혼 남녀 사이에서 “앞으로 결혼할 사이라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육체적인 죄들을 엄하게 금하고 계시니 결코 세상 풍조를 좇아 자신을 더럽히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2. 마음의 간음

예수님께서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만으로도 이미 “간음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27~28). 모든 육체의 일들이 그런 것처럼 사람이 행함으로 범죄하기까지는 먼저 마음에 죄악을 품게 됩니다.
마음으로 미워하기 때문에 상대에게 해를 입히며 마음에 분을 품었기 때문에 혈기도 내지요. 마찬가지로 마음에 음욕을 품으면 결국 행위적인 간음으로 발전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음욕을 단지 마음에만 품고 있어도 이미 간음이요, 죄의 뿌리는 같은 것이지요.
혹자는 “마음에서까지 간음을 버릴 수는 없다. 버리고자 노력할 뿐이다.”라고 가르치는데, 이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기도하고 금식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받으면 반드시 마음의 죄성까지도 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이 마음과 생각으로 짓는 죄까지 사하시고자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보혈을 흘려 주셨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 주셔서 우리 마음에 있는 죄성까지 뽑아 버릴 수 있도록 도와주시지요. 결국 마음에서 죄성 자체를 뽑아 버리면 이후로는 아예 비진리의 생각이 떠오르지도 않습니다.

물론 죄를 버려나가는 과정에서는 같은 죄성이 반복해서 나오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녕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죄악을 버리고자 한다면 결코 똑같은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양파를 벗기다 보면 한 겹 두 겹 벗겨도 다시 비슷한 모양의 속껍질이 나오지만 계속 벗겨 나가다 보면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지요.
죄성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는 “내가 그토록 노력했는데도 여전히 죄악을 못 버렸구나” 하고 낙심하지 않습니다. 버린 줄 알았는데 여전히 그대로인 것이 아니요, 또 예전에는 그런 악이 없었는데 새로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전에는 마음에 있는데도 알지 못했던 것을 이제 발견하여 버리게 된 것이고, 그래서 결국 한 걸음 더 온전함에 근접하는 것이 감사하지요.
노력하는 과정에서 혹 생각 속에 간음이 순간 틈탔다 해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정죄하지는 않으십니다. 생각 속에 틈탄 것을 계속 받아들여서 상상하고 발전시켜 나갈 때 문제가 되는 것이지, 깨닫는 즉시 회개하며 온전히 성결되고자 계속 노력해 나갈 때는 승리할 수 있도록 더욱 은혜와 능력을 주십니다.


3. 영적인 간음

앞서 설명한 육체의 간음과 마음의 간음은 육적인 의미의 간음입니다. 이런 육적인 간음보다 더 무서운 것이 영적인 간음입니다.
영적인 간음이란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육적인 간음 역시 근원을 따지고 보면 하나님보다 세상 정욕을 더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골로새서 3장 5~6절에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했지요. 사람이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역사들을 체험하여 믿음이 있다 해도 마음에서 탐심을 버리지 못하면 세상 것들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게 됩니다.
제2계명에서 설명한 것처럼,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것은 영적으로 우상 숭배입니다. 그래서 탐심이 있으면 영적으로 우상 숭배를 낳게 되는 것이고 이는 더 나아가 영적인 간음이 됩니다.

그러면 2계명에 나오는 ‘우상 숭배’와 7계명의 ‘영적인 간음’은 어떻게 다를까요? 2계명에서 영적인 우상이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이라 했지요.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떤 형상을 만들어 신으로 섬기는 경우가 육적인 의미의 우상이라면, 하나님을 믿지만 아직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 세상 것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할 때 이것이 영적인 의미의 우상입니다.
초신자 때는 아직 믿음이 약하므로 세상을 버리지 못하고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여전히 돈이나 명예, 가족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등 영적인 우상들을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점점 말씀을 듣고 기도해 나가면서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고 성경 말씀이 참이요,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믿으며 하나님을 제일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이렇게 분명한 믿음이 생겼는데도 여전히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여 어둠에 속한 것들을 취해 나간다면, 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리는 것이며 영적인 간음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의 관계를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서로 간에 마음 다해 사랑하기로 언약한 부부와 같은 관계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저버리고 이방신들을 섬긴 일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택하여 수많은 기사와 표적을 보여 주시며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주셨지만, 그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욕심을 따라 미혹되니 이방인들의 우상을 받아들이고 섬겼던 것입니다. 역대상 5장 25절에는 “저희가 그 열조의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이 저희 앞에서 멸하신 그 땅 백성의 신들을 간음하듯 섬긴지라” 하여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 숭배가 영적인 간음임을 말씀합니다.
예레미야 3장 8절에는 “내게 배역한 이스라엘이 간음을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를 내어 쫓고 이혼서까지 주었으되 그 패역한 자매 유다가 두려워 아니하고 자기도 가서 행음함을 내가 보았노라” 말씀하십니다. 북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김으로 영적으로 간음하다가 결국 하나님께 버림받고 멸망당했는데 남유다 역시 이것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고 계속 우상을 섬기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간음하는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된 이스라엘은 결국 이방인들의 칼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신약에 와서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절에 “내가(곧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했습니다. 신랑 되신 주님께 나아감에 있어서 성도들이 정결한 신부로서 단장할 수 있도록 사도 바울이 성도들을 가르치며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주를 믿고 성령을 받아 천국과 지옥을 알고 주님을 “나의 신랑”이라 말하면서도 세상을 사랑하며 비진리와 타협해 나간다면 이는 영적인 간음입니다. 야고보서 4장 4절에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 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게 행하며 주님을 배신하고 간음한 사람은 주님의 신부라 할 수 없으며, 장차 주님의 혼인 잔치에 참여할 수도 없지요.
그래서 “영적인 간음이 육적인 간음보다 더 무서운 죄”인 것입니다. 비유를 들어, 동생이 형에게 욕을 하고 침을 뱉었다면, 그것도 큰 잘못이지만 그나마 회개하고 돌이킬 때 형이 용서해 줄 여지가 조금은 있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아버지에게 그런 행동을 했다면 너무나 패륜적인 행동이요, 용서받기가 심히 어려운 일이지요. 이처럼 사람 사이에 육적인 간음을 행한 것도 용서받기 어려운 범죄이지만 영적 간음으로 하나님과 주님을 배신하면 그 죄질이 더 중한 것입니다.
예레미야 11장 11~14절에, 하나님께서는 영적 간음이 관영한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하지도 말라 하셨고 그들이 부르짖을지라도 듣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도 영적인 간음이 어느 한계를 넘어서면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도 없고 기도해도 응답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멀어지니 점점 더 세상에 물들게 되고 육적인 간음을 비롯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현저히 못 박는 죄들을 범해 나감으로 결국 사망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히 6장, 10장).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린도전서 3장 16~17절에,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몸은 성령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전으로서 부끄럽지 않도록 행함으로나 마음으로나 자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육적인 간음은 물론 영적인 간음과도 전혀 상관없이 오직 진리만 사모하여 마음에 채워 나감으로 흠도 점도 없는 온전한 주님의 신부로서 혼인 잔치에 참석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1-07-21 오후 5:15:34 Posted
2021-07-23 오후 3:20:11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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