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TAL : 1056 PAGE : 1/35
2021-04-23
제17과육적인 믿음과 영적인 믿음
히브리서 11:1~3
읽을말씀 : 히브리서 11:1~3 | 외울말씀 : 마가복음 9:23 | 참고 말씀: 야고보서 2:26
교육목표 : 믿음이 있다 하면서도 응답받지 못하는 이유와, 육적인 믿음의 특징에 대해 알아본다.
1. 믿음이 있다 하면서도 응답받지 못하는 이유
믿음은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보배 중에 보배요, 세상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입니다. 사람의 힘과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도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해와 달의 운행이 멈추거나 홍해가 갈라지며, 중과부적의 전쟁에서 승리하거나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등 하나님의 능력으로 불가능이 가능으로 변하는 수많은 기록이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므로 우리에게 믿음만 있다면 질병과 연약함의 치료나, 가정과 사업터의 꼬인 문제의 해결도 어려울 것이 없지요.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면서도 구원의 확신조차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이 질병과 각종 문제들로 고통받고 시험 환난 속에 살아가며, 기도해도 응답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중요한 것은 반드시 참된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입술로 아버지 하나님을 부르며 “주여 믿습니다” 하고 기도한다 해도, 참믿음이 없다면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9장 23절에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시편 37편 4절에는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했고, 히브리서 11장 6절에는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말씀했습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무엇이나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응답을 받지 못한다면 이는 참된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요?
믿음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응답해 주시는 참된 믿음, 곧 영적인 믿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시는 육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2.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 않는 육적인 믿음
1) 자신의 지식과 생각에 일치하는 것만 믿는 믿음
육적인 믿음은 세상 사람들도 가질 수 있습니다. 가령, “이 물수건은 흰색입니다.”라고 했을 때, 사실을 확인한 사람들은 누구나 믿습니다. 자신이 배우고 받아들인 지식과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옳다고 배운 지식들이 모두 진리는 아닙니다. 세월이 지나면 변하는 것이 너무나 많지요. 나라와 민족, 개인마다 진리라고 생각하는 지식이나 옳다고 생각하는 기준도 동일하지 않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자기가 배운 지식과 맞지 않으면 진리까지 비진리로 간주해 버립니다. 오늘날 복음을 듣고도 창조주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 경우에 해당합니다. 어릴 때부터 진화론이라는 거짓 이론을 진리라고 배웠기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 역사를 가르쳐 줘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진화론은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짜맞춘 잘못된 이론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수천만 년, 수억만 년이 지나도 물고기가 육지 동물이 될 수 없고, 원숭이가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면서도 성경을 자기의 지식과 이론에 맞는 부분만 믿습니다. 세상 지식과 이론에 맞추려고 한다면, 성경에는 믿을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지요. 사람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권능의 역사들도 납득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기사와 표적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 아니라, 상징이나 비유라 여기는 것입니다.
가령,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다는 말씀을 대하면 물이 얕은 곳을 걸었을 거라고 말합니다. 약을 먹고 수술해서 질병이 나았다고 하면 믿지만, 단지 기도로 치료받았다고 하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의심하지요. 이렇게 자신의 지식과 생각에 일치하는 것만 믿는 것이 육적인 믿음입니다. 이는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고 구원받을 수도 없습니다. 참된 믿음은 자신의 생각과 지식에 상관없이 성경 말씀 전체가 하나님 말씀이요 절대적인 진리임을 믿는 것입니다.
2) 변개하는 믿음
어떤 사람은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기 위해 열심히 기도하며 충성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원하는 때에 응답이 오지 않으면 조급해지고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신가, 내가 기도하면 참으로 들으시는가?” 하며 의심이 틈타지요. 점점 은혜가 떨어지고 예전에 본인이 응답받은 것이나 다른 사람의 간증까지도 우연의 일치로 돌립니다.
야고보서 1장 6~7절을 보면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했습니다. 이처럼 변개하는 믿음은 응답받을 수 있는 참믿음이 아닙니다. 마가복음 11장 24절에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말씀하신 대로 구하는 것마다 이미 응답받은 줄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질병의 문제도 그러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말씀한 대로, 약 이천 년 전에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악과 저주를 대속하셨으니 이미 나음을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이 있다면 더 이상 힘들고 고통스러운 모습이 아니라 소망으로 가득 차서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증거가 없어도 응답받았다는 믿음에 변개함이 없을 때 온전히 치료받을 수 있습니다.
3) 행함이 없는 믿음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별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식으로아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중심에서 믿어야 합니다. 그럴 때라야 말씀대로 순종하는 행함이 따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신다” 하셨는데. 이는 건강이나 물질을 포함한 모든 분야에 해당되는 영계의 법칙입니다.
사르밧 과부는 하나님의 종 엘리야의 말에 순종하여 오랜 가뭄 중에 마지막으로 남은 양식을 엘리야에게 드렸습니다. 사람의 생각을 동원하면 도무지 드릴 수 없는 생명과 같은 양식이지만 하나님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순종하였습니다. 그 결과 가뭄이 끝날 때까지 기름병과 가루통에서 양식이 떨어지지 않는 축복을 받았지요(왕상 17장).
그런데 육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이런 말씀을 들어서 지식으로는 알지만 막상 어려운 현실에 직면하면 행하지 못합니다. 당장 생활비가 부족하겠다 싶으면 십일조를 온전히 드리지 않는가 하면, 각종 예물을 심는 데에도 인색합니다. 하나님께 심는 것마다 축복으로 갚아 주신다는 사실을 참으로 믿는다면 인색하게 드리지 않습니다. 지식으로만 알기 때문에 아까워하고 온전한 행함이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예로,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심을 믿는 사람이라면 질병에 걸렸을 때 세상 방법을 동원할까요? 하나님의 능력을 지식으로는 알지만 마음으로는 믿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 방법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하나님께서 얼마나 서운해하시는지 아사왕이 병들었을 때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다가 죽었다 한 기록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대하 16:12~13).
그 밖에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원수도 사랑하라, 섬기라, 화평하라’ 하신 말씀을 아무리 줄줄 암송해도 정작 행하지 못하면 하나님 역사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야고보서 2장 26절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행함이 없는 육적인 믿음으로는 응답이나 축복을 받을 수 없음은 물론, 자칫 구원조차 받을 수 없음을 기억하여 영적인 믿음을 소유해야 하겠습니다.
영적인 믿음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을 알맞게 채워 보세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응답해 주시는 참된 믿음, 곧 ( ) 믿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시는 ( ) 믿음이 있다.
2. ( ) 안에 육적인 믿음의 특징을 써 넣으세요.
첫째, 자신의 ( )과 ( )에 일치하는 것만 믿는다.
둘째, ( )하는 믿음이다.
셋째, ( )이 없는 믿음이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진화론이란?
각종 동식물은 서로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낮은 단계로부터 높은 단계로, 단순한 형태로부터 복잡한 형태로, 불완전한 것으로부터 완전한 것으로 발전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생물학 이론이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창조론과 정반대되는 이론이다.
1859년 영국의 생물학자 다윈의 저서인 《종의 기원》에서 부각되었기에 ‘다윈 진화론’이라고도 부른다.
교육목표 : 믿음이 있다 하면서도 응답받지 못하는 이유와, 육적인 믿음의 특징에 대해 알아본다.
1. 믿음이 있다 하면서도 응답받지 못하는 이유
믿음은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보배 중에 보배요, 세상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입니다. 사람의 힘과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도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해와 달의 운행이 멈추거나 홍해가 갈라지며, 중과부적의 전쟁에서 승리하거나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등 하나님의 능력으로 불가능이 가능으로 변하는 수많은 기록이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므로 우리에게 믿음만 있다면 질병과 연약함의 치료나, 가정과 사업터의 꼬인 문제의 해결도 어려울 것이 없지요.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면서도 구원의 확신조차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이 질병과 각종 문제들로 고통받고 시험 환난 속에 살아가며, 기도해도 응답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중요한 것은 반드시 참된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입술로 아버지 하나님을 부르며 “주여 믿습니다” 하고 기도한다 해도, 참믿음이 없다면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9장 23절에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시편 37편 4절에는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했고, 히브리서 11장 6절에는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말씀했습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무엇이나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응답을 받지 못한다면 이는 참된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요?
믿음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응답해 주시는 참된 믿음, 곧 영적인 믿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시는 육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2.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 않는 육적인 믿음
1) 자신의 지식과 생각에 일치하는 것만 믿는 믿음
육적인 믿음은 세상 사람들도 가질 수 있습니다. 가령, “이 물수건은 흰색입니다.”라고 했을 때, 사실을 확인한 사람들은 누구나 믿습니다. 자신이 배우고 받아들인 지식과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옳다고 배운 지식들이 모두 진리는 아닙니다. 세월이 지나면 변하는 것이 너무나 많지요. 나라와 민족, 개인마다 진리라고 생각하는 지식이나 옳다고 생각하는 기준도 동일하지 않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자기가 배운 지식과 맞지 않으면 진리까지 비진리로 간주해 버립니다. 오늘날 복음을 듣고도 창조주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 경우에 해당합니다. 어릴 때부터 진화론이라는 거짓 이론을 진리라고 배웠기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 역사를 가르쳐 줘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진화론은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짜맞춘 잘못된 이론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수천만 년, 수억만 년이 지나도 물고기가 육지 동물이 될 수 없고, 원숭이가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면서도 성경을 자기의 지식과 이론에 맞는 부분만 믿습니다. 세상 지식과 이론에 맞추려고 한다면, 성경에는 믿을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지요. 사람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권능의 역사들도 납득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기사와 표적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 아니라, 상징이나 비유라 여기는 것입니다.
가령,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다는 말씀을 대하면 물이 얕은 곳을 걸었을 거라고 말합니다. 약을 먹고 수술해서 질병이 나았다고 하면 믿지만, 단지 기도로 치료받았다고 하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의심하지요. 이렇게 자신의 지식과 생각에 일치하는 것만 믿는 것이 육적인 믿음입니다. 이는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고 구원받을 수도 없습니다. 참된 믿음은 자신의 생각과 지식에 상관없이 성경 말씀 전체가 하나님 말씀이요 절대적인 진리임을 믿는 것입니다.
2) 변개하는 믿음
어떤 사람은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기 위해 열심히 기도하며 충성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원하는 때에 응답이 오지 않으면 조급해지고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신가, 내가 기도하면 참으로 들으시는가?” 하며 의심이 틈타지요. 점점 은혜가 떨어지고 예전에 본인이 응답받은 것이나 다른 사람의 간증까지도 우연의 일치로 돌립니다.
야고보서 1장 6~7절을 보면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했습니다. 이처럼 변개하는 믿음은 응답받을 수 있는 참믿음이 아닙니다. 마가복음 11장 24절에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말씀하신 대로 구하는 것마다 이미 응답받은 줄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질병의 문제도 그러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말씀한 대로, 약 이천 년 전에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악과 저주를 대속하셨으니 이미 나음을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이 있다면 더 이상 힘들고 고통스러운 모습이 아니라 소망으로 가득 차서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증거가 없어도 응답받았다는 믿음에 변개함이 없을 때 온전히 치료받을 수 있습니다.
3) 행함이 없는 믿음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별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식으로아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중심에서 믿어야 합니다. 그럴 때라야 말씀대로 순종하는 행함이 따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신다” 하셨는데. 이는 건강이나 물질을 포함한 모든 분야에 해당되는 영계의 법칙입니다.
사르밧 과부는 하나님의 종 엘리야의 말에 순종하여 오랜 가뭄 중에 마지막으로 남은 양식을 엘리야에게 드렸습니다. 사람의 생각을 동원하면 도무지 드릴 수 없는 생명과 같은 양식이지만 하나님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순종하였습니다. 그 결과 가뭄이 끝날 때까지 기름병과 가루통에서 양식이 떨어지지 않는 축복을 받았지요(왕상 17장).
그런데 육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이런 말씀을 들어서 지식으로는 알지만 막상 어려운 현실에 직면하면 행하지 못합니다. 당장 생활비가 부족하겠다 싶으면 십일조를 온전히 드리지 않는가 하면, 각종 예물을 심는 데에도 인색합니다. 하나님께 심는 것마다 축복으로 갚아 주신다는 사실을 참으로 믿는다면 인색하게 드리지 않습니다. 지식으로만 알기 때문에 아까워하고 온전한 행함이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예로,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심을 믿는 사람이라면 질병에 걸렸을 때 세상 방법을 동원할까요? 하나님의 능력을 지식으로는 알지만 마음으로는 믿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 방법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하나님께서 얼마나 서운해하시는지 아사왕이 병들었을 때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다가 죽었다 한 기록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대하 16:12~13).
그 밖에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원수도 사랑하라, 섬기라, 화평하라’ 하신 말씀을 아무리 줄줄 암송해도 정작 행하지 못하면 하나님 역사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야고보서 2장 26절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행함이 없는 육적인 믿음으로는 응답이나 축복을 받을 수 없음은 물론, 자칫 구원조차 받을 수 없음을 기억하여 영적인 믿음을 소유해야 하겠습니다.
영적인 믿음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을 알맞게 채워 보세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응답해 주시는 참된 믿음, 곧 ( ) 믿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시는 ( ) 믿음이 있다.
2. ( ) 안에 육적인 믿음의 특징을 써 넣으세요.
첫째, 자신의 ( )과 ( )에 일치하는 것만 믿는다.
둘째, ( )하는 믿음이다.
셋째, ( )이 없는 믿음이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진화론이란?
각종 동식물은 서로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낮은 단계로부터 높은 단계로, 단순한 형태로부터 복잡한 형태로, 불완전한 것으로부터 완전한 것으로 발전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생물학 이론이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창조론과 정반대되는 이론이다.
1859년 영국의 생물학자 다윈의 저서인 《종의 기원》에서 부각되었기에 ‘다윈 진화론’이라고도 부른다.
2021-04-18
제0과천국 (36) - 새 예루살렘 ⑤
요한계시록 21:19~20
읽을말씀 : 요한계시록 21:19~20 | 외울말씀 : 이재록 목사
교육목표 : 오늘은 새 예루살렘 성곽의 아홉째 기초석인 담황옥과 열째 기초석인 비취옥, 열한째 기초석인 청옥, 열두째 기초석인 자정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아홉 번째 기초석 ‘담황옥’
담황옥은 토파즈라 불리는 붉은 오렌지색의 투명한 보석입니다. 이 담황옥이 상징하는 영의 마음은 ‘양선(良善)’입니다.
양선의 영적 의미는 ‘성령 안에서 선을 추구하는 마음’입니다. 비슷한 의미로, 세상에서는 ‘양심’이 있습니다. 옳고 그름이나 선과 악을 판단하는 자기 나름의 기준으로서 시대마다, 나라마다,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러나 ‘양선’의 기준은 오직 하나입니다. 진리인 하나님 말씀, 오직 그것만이 변함없는 기준입니다. ‘내가 보기에 선’을 추구하는 마음은 영적 양선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선’과 이 선을 추구하는 마음이 바로 영적 양선입니다.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낸다”(마 12:35) 했습니다. 영적 양선이 임한 사람에게서는 자연스럽게 선이 배어 나오기 때문에, 어디를 가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선한 말과 선한 행실이 나옵니다. 향수를 뿌린 사람에게서 좋은 향기가 나듯이, 양선한 사람에게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으로만 선을 추구하는 것은 양선이라 하지 않습니다. 선을 추구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선한 말과 행실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며 주변에 덕과 사랑을 베푸는 것,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양선입니다.
성경에서 영적 양선의 빛깔이 유독 강하게 나오는 구절이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 1~4절에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했습니다. 주 안에서 선을 추구하는 사람은 비록 자기 생각과 성품에 맞지 않아도 마음을 같이해 주고 뜻을 합해 줍니다.
누가복음 10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양선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알려 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됩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지나가다가 그를 봤지만 그냥 피해서 가버렸고, 레위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제사장과 레위인이라면 하나님 말씀을 지식적으로 잘 아는 사람들이지만 양선이 없으니 그냥 가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을 지나던 한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겨 상처를 싸매 주고, 자기가 타고 있던 짐승에 그를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를 잘 돌봐달라고 부탁하고 떠나면서 만약 돈이 더 들면 자신이 돌아올 때 갚겠다는 약속까지 했습니다. 이 사마리아인에게는 선을 좇아 행하는 양선이 마음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내 물질과 시간을 들여야 한다 해도 하나님 보시기에 선을 택할 수 있는 마음이 바로 양선입니다.
다음으로, 마태복음 12장 19~20절 말씀입니다.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했는데, 바로 예수님의 양선에 대한 내용입니다. 양선한 사람은 들레지 않으며 아무와도 다투지 않습니다. 또한 겉모습에서도 양선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걸음걸이나 몸가짐, 언어 습관은 흠이 없고 교양을 갖춘 참으로 온전한 모습입니다
또한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했습니다. ‘상한 갈대’란 영적으로 세상의 죄와 악으로 가득 찬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이라도 가난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찾으면 결코 외면치 않고 맞아 주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 주님의 마음이 바로 양선의 절정입니다. ‘꺼져가는 심지’란 ‘마음이 악으로 심히 물들어 영혼의 등불이 꺼져 가는 사람’이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 마음’은 구원받을 가능성이 아주 조금이라도 있다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신앙 안에서도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믿음이 연약하여 시험 환난에 넘어져서 혼자서는 다시 교회에 나올 영적인 힘이 없는 사람입니다. 또는 아직 버리지 못한 육으로 인해 성도들에게 해를 끼치고 그 일이 민망하고 부끄러워 다시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사람이지요. 또 신앙 안에서 먼저 되었으나 지금은 영적으로 나중 된 사람들 중에 자신도 사랑받고 인정받기 위해 몸부림치는데 잘 안 되니 때로는 속상하여 악을 발하는 사람입니다.
진정 양선한 사람이라면, 이런 사람들의 마음도 헤아리고 품을 줄 알아야 합니다. 흑백을 가리거나 옳고 그름을 논하여 상대를 꺾으려는 것은 양선이 아닙니다. 진실과 사랑으로 선대함으로써 악으로 나오는 사람들의 마음을 녹이고 감동을 주는 것이 진정한 양선입니다.
2. 열 번째 기초석 ‘비취옥’
비취옥은 옥수의 일종으로 반투명하며 청록색 빛이 나는 보석입니다. 비취옥이 상징하는 영의 마음은 ‘절제’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이 풍성하면 좋겠지만, 질서를 따라 아름답게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절제가 있어야 합니다.
디도서 1장 7~9절을 보면 교회의 감독 된 자의 자격이 나오는데, ‘절제하라’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 안에서는 무엇을 하든지 진리로 분별하고 매사에 절제하면서 성령의 소욕을 좇아 해야 합니다. 성령의 음성을 밝히 듣고 행하면, 절제해야 할 때 절제할 수 있으므로 괜한 시험을 자초하지 않습니다. 또한 진리 안에서 곧장 바른 길을 가므로 형통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절제치 못한 사람들은 일이 틀어지고 여러 어려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영도 절제를 통해서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성령의 마지막 열매가 절제인 것도 절제가 모든 것을 적절히 조절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입니다. 기쁨도 사랑도 절제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도 마음에 온다고 해서 무조건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진리로 분별해 봐야 합니다. 어떤 일이나 사람에 대해 진리 안에서 일러 줄 말이 생각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절제의 열매가 맺힌 사람은 성급히 말하지 않고 정확한 때를 맞출 줄 압니다. 이처럼 영으로 들어간 사람에게도 절제는 꼭 필요합니다. 하물며 아직 육을 다 버리지 못한 사람에게는 더욱 필요하지요.
세례 요한은 자신이 이 땅에 온 목적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참 빛이신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함을 알고, 그것을 감당하기 전까지 세상과 완전히 구별되어 살았습니다. 홀로 광야에서 기도와 말씀으로 무장했으며, 메뚜기와 석청을 먹는 등 매우 절제된 삶을 유지했습니다. 이러한 삶을 통해, 주의 길을 예비하는 준비된 사람으로서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해 냈습니다.
3. 열한 번째 기초석 ‘청옥’
청옥은 청색을 띠는 투명한 보석으로서, ‘청결함과 거룩함’을 상징합니다. ‘청결’의 사전적인 의미는 ‘맑고 깨끗함’인데, 하나님께서는 마음에 죄가 없는 상태, 즉 ‘어떤 흠도, 점도, 티도 없는 깨끗한 마음’을 청결하다고 인정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5장 19~20절에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하시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청결이 무엇인지 깨우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손이나 몸을 청결히 하려면 물로 씻듯이, 마음을 청결하게 하려면 영적인 물로 씻어야 합니다. 영적인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만큼 깨끗한 참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히 10:22).
마태복음 5장 8절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말씀한 대로,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천국에 가서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는 복이 주어집니다. 이는 최소한 3천층, 더 나아가 새 예루살렘에도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본다’는 진정한 의미는 단지 ‘본다’는 데 그치지 않고, 항상 하나님을 만나고, 도우심을 체험한다는 의미까지 포함됩니다. 이 땅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에녹은 죄가 전혀 없는 깨끗한 마음이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기에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도 늘 동행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살아 있는 채로 하늘로 올리셨지요. 그때 에녹의 나이는 365세였는데, 그 당시는 사람들이 900세 이상 살던 때이므로 오늘날의 나이로 환산해 보면 한창 청년의 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젊은 나이에 그를 데려가신 이유는 그가 너무 사랑스러워 곁에 두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깨끗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4. 열두 번째 기초석 ‘자정’
자수정이라고도 불리는 자정은 보랏빛을 내는 투명한 보석으로서 ‘온유’를 상징합니다. 영적으로 온유한 마음은 ‘성격이 온화하고 부드러우면서도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큰마음’으로서, 솜털같이 포근하고 부드러워 많은 사람이 깃들여 쉴 수 있는 마음, 모든 것을 선으로 이해해 주고 사랑으로 감싸 줄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입니다.
아무리 따뜻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가졌다 해도 그것이 마음속에만 있으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행함으로 선과 사랑을 나타내야 합니다. 나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힘을 얻고 따뜻함을 느끼며, 마음의 쉼을 얻게 해 주는 ‘덕(德)’도 함께 필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온유를 이룬 사람을 통해, 주변의 영혼들은 쉼을 얻고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영적으로 온유한 사람을 참으로 ‘아름답다’ 하시는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에게는 많은 영혼이 깃드는데, 이것이 곧 영적인 권세가 됩니다. 마태복음 5장 5절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 했지요. 이는 곧 흙으로 지어진 사람의 마음을 많이 얻는다는 뜻이며, 많은 영혼을 품어 진리로 인도한 상급으로 천국에서 넓은 땅을 받는다는 의미도 포함됩니다.
모세는 2백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켰고, 광야에서 약 40년을 인도했습니다. 마치 부모가 자녀를 양육하듯 수많은 백성들을 마음에 품고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했지요. 그래서 민수기 12장 3절에 하나님께서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하신 것입니다.
열두 기초석이 상징하는 영의 마음을 이루어 새 예루살렘성에서 영원히 하나님의 기쁨과 위로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육목표 : 오늘은 새 예루살렘 성곽의 아홉째 기초석인 담황옥과 열째 기초석인 비취옥, 열한째 기초석인 청옥, 열두째 기초석인 자정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아홉 번째 기초석 ‘담황옥’
담황옥은 토파즈라 불리는 붉은 오렌지색의 투명한 보석입니다. 이 담황옥이 상징하는 영의 마음은 ‘양선(良善)’입니다.
양선의 영적 의미는 ‘성령 안에서 선을 추구하는 마음’입니다. 비슷한 의미로, 세상에서는 ‘양심’이 있습니다. 옳고 그름이나 선과 악을 판단하는 자기 나름의 기준으로서 시대마다, 나라마다,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러나 ‘양선’의 기준은 오직 하나입니다. 진리인 하나님 말씀, 오직 그것만이 변함없는 기준입니다. ‘내가 보기에 선’을 추구하는 마음은 영적 양선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선’과 이 선을 추구하는 마음이 바로 영적 양선입니다.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낸다”(마 12:35) 했습니다. 영적 양선이 임한 사람에게서는 자연스럽게 선이 배어 나오기 때문에, 어디를 가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선한 말과 선한 행실이 나옵니다. 향수를 뿌린 사람에게서 좋은 향기가 나듯이, 양선한 사람에게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으로만 선을 추구하는 것은 양선이라 하지 않습니다. 선을 추구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선한 말과 행실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며 주변에 덕과 사랑을 베푸는 것,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양선입니다.
성경에서 영적 양선의 빛깔이 유독 강하게 나오는 구절이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 1~4절에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했습니다. 주 안에서 선을 추구하는 사람은 비록 자기 생각과 성품에 맞지 않아도 마음을 같이해 주고 뜻을 합해 줍니다.
누가복음 10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양선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알려 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됩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지나가다가 그를 봤지만 그냥 피해서 가버렸고, 레위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제사장과 레위인이라면 하나님 말씀을 지식적으로 잘 아는 사람들이지만 양선이 없으니 그냥 가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을 지나던 한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겨 상처를 싸매 주고, 자기가 타고 있던 짐승에 그를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를 잘 돌봐달라고 부탁하고 떠나면서 만약 돈이 더 들면 자신이 돌아올 때 갚겠다는 약속까지 했습니다. 이 사마리아인에게는 선을 좇아 행하는 양선이 마음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내 물질과 시간을 들여야 한다 해도 하나님 보시기에 선을 택할 수 있는 마음이 바로 양선입니다.
다음으로, 마태복음 12장 19~20절 말씀입니다.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했는데, 바로 예수님의 양선에 대한 내용입니다. 양선한 사람은 들레지 않으며 아무와도 다투지 않습니다. 또한 겉모습에서도 양선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걸음걸이나 몸가짐, 언어 습관은 흠이 없고 교양을 갖춘 참으로 온전한 모습입니다
또한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했습니다. ‘상한 갈대’란 영적으로 세상의 죄와 악으로 가득 찬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이라도 가난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찾으면 결코 외면치 않고 맞아 주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 주님의 마음이 바로 양선의 절정입니다. ‘꺼져가는 심지’란 ‘마음이 악으로 심히 물들어 영혼의 등불이 꺼져 가는 사람’이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 마음’은 구원받을 가능성이 아주 조금이라도 있다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신앙 안에서도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믿음이 연약하여 시험 환난에 넘어져서 혼자서는 다시 교회에 나올 영적인 힘이 없는 사람입니다. 또는 아직 버리지 못한 육으로 인해 성도들에게 해를 끼치고 그 일이 민망하고 부끄러워 다시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사람이지요. 또 신앙 안에서 먼저 되었으나 지금은 영적으로 나중 된 사람들 중에 자신도 사랑받고 인정받기 위해 몸부림치는데 잘 안 되니 때로는 속상하여 악을 발하는 사람입니다.
진정 양선한 사람이라면, 이런 사람들의 마음도 헤아리고 품을 줄 알아야 합니다. 흑백을 가리거나 옳고 그름을 논하여 상대를 꺾으려는 것은 양선이 아닙니다. 진실과 사랑으로 선대함으로써 악으로 나오는 사람들의 마음을 녹이고 감동을 주는 것이 진정한 양선입니다.
2. 열 번째 기초석 ‘비취옥’
비취옥은 옥수의 일종으로 반투명하며 청록색 빛이 나는 보석입니다. 비취옥이 상징하는 영의 마음은 ‘절제’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이 풍성하면 좋겠지만, 질서를 따라 아름답게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절제가 있어야 합니다.
디도서 1장 7~9절을 보면 교회의 감독 된 자의 자격이 나오는데, ‘절제하라’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 안에서는 무엇을 하든지 진리로 분별하고 매사에 절제하면서 성령의 소욕을 좇아 해야 합니다. 성령의 음성을 밝히 듣고 행하면, 절제해야 할 때 절제할 수 있으므로 괜한 시험을 자초하지 않습니다. 또한 진리 안에서 곧장 바른 길을 가므로 형통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절제치 못한 사람들은 일이 틀어지고 여러 어려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영도 절제를 통해서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성령의 마지막 열매가 절제인 것도 절제가 모든 것을 적절히 조절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입니다. 기쁨도 사랑도 절제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도 마음에 온다고 해서 무조건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진리로 분별해 봐야 합니다. 어떤 일이나 사람에 대해 진리 안에서 일러 줄 말이 생각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절제의 열매가 맺힌 사람은 성급히 말하지 않고 정확한 때를 맞출 줄 압니다. 이처럼 영으로 들어간 사람에게도 절제는 꼭 필요합니다. 하물며 아직 육을 다 버리지 못한 사람에게는 더욱 필요하지요.
세례 요한은 자신이 이 땅에 온 목적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참 빛이신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함을 알고, 그것을 감당하기 전까지 세상과 완전히 구별되어 살았습니다. 홀로 광야에서 기도와 말씀으로 무장했으며, 메뚜기와 석청을 먹는 등 매우 절제된 삶을 유지했습니다. 이러한 삶을 통해, 주의 길을 예비하는 준비된 사람으로서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해 냈습니다.
3. 열한 번째 기초석 ‘청옥’
청옥은 청색을 띠는 투명한 보석으로서, ‘청결함과 거룩함’을 상징합니다. ‘청결’의 사전적인 의미는 ‘맑고 깨끗함’인데, 하나님께서는 마음에 죄가 없는 상태, 즉 ‘어떤 흠도, 점도, 티도 없는 깨끗한 마음’을 청결하다고 인정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5장 19~20절에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하시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청결이 무엇인지 깨우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손이나 몸을 청결히 하려면 물로 씻듯이, 마음을 청결하게 하려면 영적인 물로 씻어야 합니다. 영적인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만큼 깨끗한 참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히 10:22).
마태복음 5장 8절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말씀한 대로,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천국에 가서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는 복이 주어집니다. 이는 최소한 3천층, 더 나아가 새 예루살렘에도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본다’는 진정한 의미는 단지 ‘본다’는 데 그치지 않고, 항상 하나님을 만나고, 도우심을 체험한다는 의미까지 포함됩니다. 이 땅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에녹은 죄가 전혀 없는 깨끗한 마음이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기에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도 늘 동행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살아 있는 채로 하늘로 올리셨지요. 그때 에녹의 나이는 365세였는데, 그 당시는 사람들이 900세 이상 살던 때이므로 오늘날의 나이로 환산해 보면 한창 청년의 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젊은 나이에 그를 데려가신 이유는 그가 너무 사랑스러워 곁에 두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깨끗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4. 열두 번째 기초석 ‘자정’
자수정이라고도 불리는 자정은 보랏빛을 내는 투명한 보석으로서 ‘온유’를 상징합니다. 영적으로 온유한 마음은 ‘성격이 온화하고 부드러우면서도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큰마음’으로서, 솜털같이 포근하고 부드러워 많은 사람이 깃들여 쉴 수 있는 마음, 모든 것을 선으로 이해해 주고 사랑으로 감싸 줄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입니다.
아무리 따뜻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가졌다 해도 그것이 마음속에만 있으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행함으로 선과 사랑을 나타내야 합니다. 나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힘을 얻고 따뜻함을 느끼며, 마음의 쉼을 얻게 해 주는 ‘덕(德)’도 함께 필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온유를 이룬 사람을 통해, 주변의 영혼들은 쉼을 얻고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영적으로 온유한 사람을 참으로 ‘아름답다’ 하시는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에게는 많은 영혼이 깃드는데, 이것이 곧 영적인 권세가 됩니다. 마태복음 5장 5절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 했지요. 이는 곧 흙으로 지어진 사람의 마음을 많이 얻는다는 뜻이며, 많은 영혼을 품어 진리로 인도한 상급으로 천국에서 넓은 땅을 받는다는 의미도 포함됩니다.
모세는 2백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켰고, 광야에서 약 40년을 인도했습니다. 마치 부모가 자녀를 양육하듯 수많은 백성들을 마음에 품고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했지요. 그래서 민수기 12장 3절에 하나님께서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하신 것입니다.
열두 기초석이 상징하는 영의 마음을 이루어 새 예루살렘성에서 영원히 하나님의 기쁨과 위로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1-04-16
제16과그리스도의 사랑
에베소서 5:2
읽을말씀 : 에베소서 5:2 | 외울말씀 : 에베소서 5:2 | 참고 말씀: 로마서 8:35~39
교육목표 : 인류를 위해 나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율법을 사랑으로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본받게 한다.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사랑, 주님의 사랑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사람을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자로 바꿉니다. 배움이 많지 않은 어부, 죄인 취급받던 세리, 가난한 자, 과부 등 세상에서 대접받지 못하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 삶이 180도 달라졌습니다. 가난과 질병의 문제를 해결받았고, 무엇보다 이제껏 받아보지 못한 진실한 사랑을 느꼈습니다. 쓸모없는 존재라고 여겼던 영혼들이 하나님의 영광의 도구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힘입니다.
1. 구세주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
태초에 말씀으로 계셨던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의 형상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온 인류의 구세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늘 영광 다 버리고 죄악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 영광스런 분이 죄악에 물들어 하나님 형상을 잃어버리고 짐승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짐승의 우리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또한 참된 양식이 되시기 위해(요 6:51) 짐승의 먹이 그릇인 구유에 누이셨지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주무실 곳이 없어 들에서 몸을 누이며 추위를 견디셨고, 먹을 것이 없어 주리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능력이 없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가난을 대신 담당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예수님은 30세에 이르러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많은 기사와 표적을 나타내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지요. 보지 못하던 사람이 보고 듣지 못하던 사람이 들었습니다. 문둥병자가 고침 받았고 걷지 못하던 사람이 일어나 걷고 뛰었으며 귀신에 사로잡혔던 사람이 어둠의 세력에서 놓임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죽은 지 나흘이 된 사람이 무덤에서 걸어 나왔지요(요 11장).
근본 하나님과 하나이며 말씀 자체이신 예수님은 율법 또한 온전히 지키셨습니다. 그렇다고 율법을 지키지 못한 사람들을 정죄하지도 않으셨지요. 다만 한 영혼이라도 더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밤낮 진리로 가르치셨습니다.
2.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
성경에는 “하라, 하지 말라, 버리라, 지키라” 하신 하나님의 명령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단지 행위로 율법을 지키는 데 그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행하기를 바라시지요. 예수님은 이러한 하나님 마음을 잘 아시기에 친히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간음한 여인의 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끌고 와서 예수님께 고소합니다. 이때 예수님은 “율법대로 처벌하라.”고 하지 않고 몸을 굽힌 채 땅에다 무언가 쓰셨습니다. 바로 사람들이 짓는 공통 죄목들이었습니다. 죄를 나열하신 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말씀합니다.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이므로 서로 정죄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 뒤 또다시 몸을 굽히고 땅에 쓰십니다.
이번에는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죄를 본 듯이 언제, 어디서, 어떤 죄를 지었는지 상세하게 쓰셨지요. 양심의 가책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둘 슬그머니 그 자리를 떠납니다. 마침내 예수님과 여인만 남았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주위를 둘러보며 “주여, 없나이다.” 대답하는 여인을 향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말씀하셨지요. 이처럼 예수님은 여인뿐 아니라, 그녀를 정죄했던 사람들까지 율법으로 찌르지 않고, 그들이 회개할 수 있도록 사랑으로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율법은 필요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5장 17절에 예수님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말씀했지요. 누군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고백한다면 그 사랑이 얼마나 크고 넓은지 알 수 없지만 율법이 있기에 가늠할 수 있습니다. 마음 다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당연히 율법을 지키게 되며, 율법을 지키는 것이 조금도 힘들지 않습니다.
3. 죽기까지 순종하여 십자가 섭리를 이루신 사랑
3년간 공생애가 끝나갈 무렵 예수님은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 가서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는 죄가 전혀 없는 예수님 자신의 핏값으로 모든 영혼을 구원하시려는 생명을 건 절규였습니다. 얼마나 힘쓰고 애써 간절히 기도하셨던지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어 땅에 떨어질 정도였습니다(눅 22:42~44).
군병들에게 잡히신 예수님은 심문을 받으신 뒤 사형 판결을 받았습니다. 로마 병사들은 예수님의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침을 뱉고 때리며 처형장으로 끌고 갔습니다(마 27:28~31). 예수님은 밤새 희롱을 당하시고 채찍에 맞아 피로 얼룩진 몸으로 나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골고다 언덕에 이른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는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인 우리를 속량하시려고 나무 십자가에 달려 보혈을 다 쏟으셨습니다.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고 피 흘리심으로 우리가 생각으로 지은 모든 죄를 대속하셨고, 손과 발에 못 박히심으로 우리가 손과 발로 지은 죄를 대속해 주셨습니다.
극심한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을 위해 용서와 사랑의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기도하시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6시간이나 달려 고통당하신 뒤 운명하셨습니다. 인류 역사상 사랑의 절정을 이루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죄의 담이 허물어지고, 우리는 하나님과 직접 교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대제사장이 백성을 대신해서 죄를 속할 제사를 드렸으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가 직접 죄를 고하며 하나님과 교통하게 되었지요.
4. 천국 처소를 예비하시며 한 영혼이라도 더 이끄시는 사랑
요한복음 14장 2~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말씀합니다.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많은 사람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오르셨습니다. 바로 천국의 처소를 예비하러 가셨지요.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 끊임없이 중보 기도를 올리고 계십니다. 아무것도 드시지 않으며 간절히 기도하시지요(마 26:29). 우리가 인간 경작을 잘 받아 승리하고 영혼이 잘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도록 간구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 경작을 마친 후 백보좌 대심판 때에도 주님은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십니다. 공의 가운데 모든 사람이 자신의 행한 일들에 대해 심판받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구원받은 자녀들이 더 좋은 처소와 상급을 받을 수 있도록 변호해 주십니다. 사람들이 겪는 모든 것을 직접 체험하셨기에 변호사 같은 역할을 하면서 상대의 입장에서 대변해 주시지요.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 주셨습니다. 이 사랑은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도 아끼지 않는 생명 다한 사랑이셨습니다. 과연 이 사랑에서 누가 우리를 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온 세상에 외치심으로 죽어가는 수많은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에 알맞은 단어를 넣어 보세요.
예수님은 우리 ( )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 )의 삯은 ( )’이라는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인 우리를 속량하시려고 ( )에 달려 보혈을 다 쏟으셨다.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고 피 흘리심으로 우리가 ( )으로 지은 모든 죄를 대속하셨고, 손과 발에 못 박히심으로 우리가 ( )과 ( )로 지은 죄를 대속해 주셨다.
2.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에 관한 성경 구절을 찾으세요.
① 요한복음 1:12 ② 요한복음 1:14 ③ 사무엘상 15:22 ④ 요한복음 4:24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십자가 형벌
가장 잔혹한 사형법 중의 하나다. 손과 발에 못 박힌 채 살이 찢기는 고통뿐 아니라 심한 탈수와 혈액 순환 장애로 장기들이 서서히 기능을 상실하고, 피 냄새를 맡고 몰려드는 벌레들에게 시달리는 고통까지 가중된다. 예수님은 이러한 고통 때문에 괴로워하신 것이 아니라 구세주의 사역을 이루기 위한 지난날과,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과 경작하시는 의미, 자신을 화목 제물로 주실 수밖에 없는 이유를 생각하며 마음속 깊이 감사의 기도를 올리셨다.
교육목표 : 인류를 위해 나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율법을 사랑으로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본받게 한다.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사랑, 주님의 사랑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사람을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자로 바꿉니다. 배움이 많지 않은 어부, 죄인 취급받던 세리, 가난한 자, 과부 등 세상에서 대접받지 못하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 삶이 180도 달라졌습니다. 가난과 질병의 문제를 해결받았고, 무엇보다 이제껏 받아보지 못한 진실한 사랑을 느꼈습니다. 쓸모없는 존재라고 여겼던 영혼들이 하나님의 영광의 도구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힘입니다.
1. 구세주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
태초에 말씀으로 계셨던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의 형상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온 인류의 구세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늘 영광 다 버리고 죄악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 영광스런 분이 죄악에 물들어 하나님 형상을 잃어버리고 짐승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짐승의 우리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또한 참된 양식이 되시기 위해(요 6:51) 짐승의 먹이 그릇인 구유에 누이셨지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주무실 곳이 없어 들에서 몸을 누이며 추위를 견디셨고, 먹을 것이 없어 주리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능력이 없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가난을 대신 담당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예수님은 30세에 이르러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많은 기사와 표적을 나타내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지요. 보지 못하던 사람이 보고 듣지 못하던 사람이 들었습니다. 문둥병자가 고침 받았고 걷지 못하던 사람이 일어나 걷고 뛰었으며 귀신에 사로잡혔던 사람이 어둠의 세력에서 놓임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죽은 지 나흘이 된 사람이 무덤에서 걸어 나왔지요(요 11장).
근본 하나님과 하나이며 말씀 자체이신 예수님은 율법 또한 온전히 지키셨습니다. 그렇다고 율법을 지키지 못한 사람들을 정죄하지도 않으셨지요. 다만 한 영혼이라도 더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밤낮 진리로 가르치셨습니다.
2.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
성경에는 “하라, 하지 말라, 버리라, 지키라” 하신 하나님의 명령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단지 행위로 율법을 지키는 데 그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행하기를 바라시지요. 예수님은 이러한 하나님 마음을 잘 아시기에 친히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간음한 여인의 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끌고 와서 예수님께 고소합니다. 이때 예수님은 “율법대로 처벌하라.”고 하지 않고 몸을 굽힌 채 땅에다 무언가 쓰셨습니다. 바로 사람들이 짓는 공통 죄목들이었습니다. 죄를 나열하신 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말씀합니다.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이므로 서로 정죄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 뒤 또다시 몸을 굽히고 땅에 쓰십니다.
이번에는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죄를 본 듯이 언제, 어디서, 어떤 죄를 지었는지 상세하게 쓰셨지요. 양심의 가책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둘 슬그머니 그 자리를 떠납니다. 마침내 예수님과 여인만 남았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주위를 둘러보며 “주여, 없나이다.” 대답하는 여인을 향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말씀하셨지요. 이처럼 예수님은 여인뿐 아니라, 그녀를 정죄했던 사람들까지 율법으로 찌르지 않고, 그들이 회개할 수 있도록 사랑으로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율법은 필요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5장 17절에 예수님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말씀했지요. 누군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고백한다면 그 사랑이 얼마나 크고 넓은지 알 수 없지만 율법이 있기에 가늠할 수 있습니다. 마음 다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당연히 율법을 지키게 되며, 율법을 지키는 것이 조금도 힘들지 않습니다.
3. 죽기까지 순종하여 십자가 섭리를 이루신 사랑
3년간 공생애가 끝나갈 무렵 예수님은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 가서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는 죄가 전혀 없는 예수님 자신의 핏값으로 모든 영혼을 구원하시려는 생명을 건 절규였습니다. 얼마나 힘쓰고 애써 간절히 기도하셨던지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어 땅에 떨어질 정도였습니다(눅 22:42~44).
군병들에게 잡히신 예수님은 심문을 받으신 뒤 사형 판결을 받았습니다. 로마 병사들은 예수님의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침을 뱉고 때리며 처형장으로 끌고 갔습니다(마 27:28~31). 예수님은 밤새 희롱을 당하시고 채찍에 맞아 피로 얼룩진 몸으로 나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골고다 언덕에 이른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는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인 우리를 속량하시려고 나무 십자가에 달려 보혈을 다 쏟으셨습니다.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고 피 흘리심으로 우리가 생각으로 지은 모든 죄를 대속하셨고, 손과 발에 못 박히심으로 우리가 손과 발로 지은 죄를 대속해 주셨습니다.
극심한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을 위해 용서와 사랑의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기도하시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6시간이나 달려 고통당하신 뒤 운명하셨습니다. 인류 역사상 사랑의 절정을 이루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죄의 담이 허물어지고, 우리는 하나님과 직접 교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대제사장이 백성을 대신해서 죄를 속할 제사를 드렸으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가 직접 죄를 고하며 하나님과 교통하게 되었지요.
4. 천국 처소를 예비하시며 한 영혼이라도 더 이끄시는 사랑
요한복음 14장 2~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말씀합니다.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많은 사람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오르셨습니다. 바로 천국의 처소를 예비하러 가셨지요.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 끊임없이 중보 기도를 올리고 계십니다. 아무것도 드시지 않으며 간절히 기도하시지요(마 26:29). 우리가 인간 경작을 잘 받아 승리하고 영혼이 잘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도록 간구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 경작을 마친 후 백보좌 대심판 때에도 주님은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십니다. 공의 가운데 모든 사람이 자신의 행한 일들에 대해 심판받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구원받은 자녀들이 더 좋은 처소와 상급을 받을 수 있도록 변호해 주십니다. 사람들이 겪는 모든 것을 직접 체험하셨기에 변호사 같은 역할을 하면서 상대의 입장에서 대변해 주시지요.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 주셨습니다. 이 사랑은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도 아끼지 않는 생명 다한 사랑이셨습니다. 과연 이 사랑에서 누가 우리를 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온 세상에 외치심으로 죽어가는 수많은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 안에 알맞은 단어를 넣어 보세요.
예수님은 우리 ( )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 )의 삯은 ( )’이라는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인 우리를 속량하시려고 ( )에 달려 보혈을 다 쏟으셨다.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고 피 흘리심으로 우리가 ( )으로 지은 모든 죄를 대속하셨고, 손과 발에 못 박히심으로 우리가 ( )과 ( )로 지은 죄를 대속해 주셨다.
2.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에 관한 성경 구절을 찾으세요.
① 요한복음 1:12 ② 요한복음 1:14 ③ 사무엘상 15:22 ④ 요한복음 4:24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십자가 형벌
가장 잔혹한 사형법 중의 하나다. 손과 발에 못 박힌 채 살이 찢기는 고통뿐 아니라 심한 탈수와 혈액 순환 장애로 장기들이 서서히 기능을 상실하고, 피 냄새를 맡고 몰려드는 벌레들에게 시달리는 고통까지 가중된다. 예수님은 이러한 고통 때문에 괴로워하신 것이 아니라 구세주의 사역을 이루기 위한 지난날과,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과 경작하시는 의미, 자신을 화목 제물로 주실 수밖에 없는 이유를 생각하며 마음속 깊이 감사의 기도를 올리셨다.
2021-04-09
제15과하나님의 사랑
요한일서 4:16
읽을말씀 : 요한일서 4:16 | 외울말씀 : 이사야 49:15 | 참고 말씀: 로마서 8:26~27
교육목표 : 인간을 창조하시고 경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깨달아 비진리를 온전히 벗어버리고 알곡 신앙을 소유하게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생령 아담을 창조하신 뒤 동방의 에덴이라는 곳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를 이끌어 들이셨습니다. 에덴동산은 생령 아담을 위한 하나님의 배려였습니다. 아담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하와라는 사랑스런 배필도 주셨지요. 아담이 스스로 외롭다고 느껴서가 아니라 오랜 세월 홀로 계셨던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의 형편을 미리 헤아려 베푸신 사랑이셨습니다.
1. 인간을 경작하시며 참 자녀로 이끄시는 사랑
하나님께서 주신 최상의 환경 속에서 아담은 무수한 세월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만물의 영장으로서 큰 권세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기에는 아직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마음껏 사랑을 주셨지만 정작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가지고 누렸지만 자신들이 수고하여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소중함과 고마움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죽음과 불행을 겪어 본 일이 없기 때문에 그 의미를 몰랐고, 미움을 체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사랑의 진정한 가치를 알 수 없었습니다. 지식적으로는 알았다 하더라도 직접적인 체험이 없으니 진정 마음에서 느끼지는 못한 것입니다. 즉 상대성을 체험해 보지 못한 것이지요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에 빠져 선악과를 먹은 것도 이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 말씀하셨지만 죽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지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선악과를 먹을 줄 모르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다 알고 계셨지만 아담과 하와에게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여기에는 인간 경작이라는 섭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경작을 통해 눈물, 슬픔, 고통, 사망 등을 체험함으로써 장차 천국에 이르면 자신이 누리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값진 것인지 깨달아 참된 행복을 누리기 원하셨습니다. 에덴동산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아름다운 천국에서 세세토록 하나님과 사랑을 주고받기를 원하셨지요.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는 더는 에덴동산에 살 수 없었습니다. 천하 만물을 호령하던 아담이 권세를 잃으니 이 땅의 동식물까지도 저주를 받기에 이릅니다. 풍요롭고 아름답던 이 땅도 가시와 엉겅퀴가 자라며, 땀 흘려 수고하지 않으면 소산을 얻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비록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과 전혀 환경이 다른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할 그들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창 3:21). 에덴동산을 떠나 지구에서 살게 될 그들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염려하며 걱정해 주셨지요. 이런 하나님의 마음과 달리 인간 경작이 시작된 이래 인류는 급속도로 죄로 물들어 하나님과 멀어져 갔습니다(롬 1:21~23).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어찌하든 사망의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바라며 무한한 사랑을 나타내 주셨습니다. 혹여 세상과 짝하며 잠시 하나님을 멀리한다 해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집 나간 자녀가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부모보다 더한 심정으로 기다리고 계시지요.
2. 만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신 사랑
디모데전서 2장 4절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말씀한 대로, 하나님의 사랑은 특정 시대, 특정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러 아름다운 천국에서 영원히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구원의 문을 열어 놓고 한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마다 기뻐하시고 반갑게 맞아 주시지요.
이처럼 끝까지 우리를 놓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이 불순종의 죄를 지을 것을 아셨기에 만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셨지요. 그리고 때가 이르자 예수님의 보혈로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죄인들이 치러야 할 죗값을 대신 지불해 주셨습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에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모든 죄를 속량하기 위해 예수님의 보혈을 흘리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진한 사랑이셨지요. 그래서 요한일서 4장 9절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말씀합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죄악에 빠져 사망으로 달음박질해 가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내주셨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수님은 나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나 아무 죄가 없으셨기에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삼 일 만에 부활하셨고, 이로써 우리에게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독생자 아들을 주신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녀는 자신의 생명보다 소중한 존재이므로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것은 사랑의 극치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3. 성령을 선물로 주시며 천국까지 인도하시는 사랑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죄를 용서받은 사람에게는 누구나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이 승천하신 후 우리 마음에 보혜사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로마서 8장 26~27절에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하셨습니다.
성령은 우리가 죄를 지으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돌이키도록 이끄십니다. 믿음이 적은 이에게 믿음을 더하고, 소망이 없는 이에게는 천국 소망을 더해 주십니다. 어머니가 자녀를 섬세하게 양육하듯이 행여 넘어질세라, 다칠세라 때에 따라 성령의 음성을 들려 주시지요.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 주고 천국까지 인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깊이 깨우친다면 누구나 하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면 하나님께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놀라운 사랑으로 되돌려 주십니다. 강건함의 축복뿐만 아니라 범사에 잘되고 형통한 복을 주십니다. 이는 영계의 법칙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축복과 응답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처음 하나님을 만나 갖가지 문제를 해결받았을 때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나 같은 죄인도 용서해 주셨다.”는 사랑을 느꼈을 것입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노라.” 하는 것이 진정한 고백이었을 것입니다.
또 근심 걱정이 없고 질병이나 이별, 사망이 없는 영원한 천국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얼마나 가슴 벅차며 감격하였는지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찾아와 손을 내밀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있어 사랑하신 것이 아니지요. 죄인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 독생자까지 내어주셨습니다.
여인이 젖먹이 자녀를 한시도 잊지 못하는, 그 이상의 크신 사랑으로 우리 모두를 살피시고 천 년을 하루같이 기다리고 또 기다리시는 분이 바로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사랑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진실한 사랑입니다. 장차 아름다운 천국에서 영광 중에 함께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 깊이 느낌으로 늘 감사가 넘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을 줄 아셨는데도 막지 않으시고 스스로 선택하도록 놔두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2.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도록 하나님께서 사랑의 극치를 보여 준 사건은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가죽옷에 담긴 영적 의미
1.가죽옷은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풍요로운 에덴동산을 떠나 척박한 지구에서 살아갈 아담과 하와를 매우 안쓰러워하시며 사랑의 표현으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앞으로 변질된 땅에서 받게 될 충격과 몸소 겪어야 할 고통이 어떠함을 아셨기에 가죽옷으로 몸을 보호하게 하셨던 것이다.
2.가죽옷은 ‘구원의 끈’을 의미한다.
가죽옷은 하나님과 두 사람 사이를 연결해 주는 구원의 끈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놓지 않으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사랑의 징표요, 구원의 끈인 가죽옷이 있었기에 이 땅의 삶을 견디며 자신들의 죄를 회개함으로 결국 구원에 이를 수 있었다.
교육목표 : 인간을 창조하시고 경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깨달아 비진리를 온전히 벗어버리고 알곡 신앙을 소유하게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생령 아담을 창조하신 뒤 동방의 에덴이라는 곳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를 이끌어 들이셨습니다. 에덴동산은 생령 아담을 위한 하나님의 배려였습니다. 아담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하와라는 사랑스런 배필도 주셨지요. 아담이 스스로 외롭다고 느껴서가 아니라 오랜 세월 홀로 계셨던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의 형편을 미리 헤아려 베푸신 사랑이셨습니다.
1. 인간을 경작하시며 참 자녀로 이끄시는 사랑
하나님께서 주신 최상의 환경 속에서 아담은 무수한 세월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만물의 영장으로서 큰 권세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기에는 아직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마음껏 사랑을 주셨지만 정작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가지고 누렸지만 자신들이 수고하여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소중함과 고마움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죽음과 불행을 겪어 본 일이 없기 때문에 그 의미를 몰랐고, 미움을 체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사랑의 진정한 가치를 알 수 없었습니다. 지식적으로는 알았다 하더라도 직접적인 체험이 없으니 진정 마음에서 느끼지는 못한 것입니다. 즉 상대성을 체험해 보지 못한 것이지요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에 빠져 선악과를 먹은 것도 이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 말씀하셨지만 죽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지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선악과를 먹을 줄 모르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다 알고 계셨지만 아담과 하와에게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여기에는 인간 경작이라는 섭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경작을 통해 눈물, 슬픔, 고통, 사망 등을 체험함으로써 장차 천국에 이르면 자신이 누리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값진 것인지 깨달아 참된 행복을 누리기 원하셨습니다. 에덴동산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아름다운 천국에서 세세토록 하나님과 사랑을 주고받기를 원하셨지요.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는 더는 에덴동산에 살 수 없었습니다. 천하 만물을 호령하던 아담이 권세를 잃으니 이 땅의 동식물까지도 저주를 받기에 이릅니다. 풍요롭고 아름답던 이 땅도 가시와 엉겅퀴가 자라며, 땀 흘려 수고하지 않으면 소산을 얻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비록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과 전혀 환경이 다른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할 그들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창 3:21). 에덴동산을 떠나 지구에서 살게 될 그들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염려하며 걱정해 주셨지요. 이런 하나님의 마음과 달리 인간 경작이 시작된 이래 인류는 급속도로 죄로 물들어 하나님과 멀어져 갔습니다(롬 1:21~23).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어찌하든 사망의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바라며 무한한 사랑을 나타내 주셨습니다. 혹여 세상과 짝하며 잠시 하나님을 멀리한다 해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집 나간 자녀가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부모보다 더한 심정으로 기다리고 계시지요.
2. 만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신 사랑
디모데전서 2장 4절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말씀한 대로, 하나님의 사랑은 특정 시대, 특정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러 아름다운 천국에서 영원히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구원의 문을 열어 놓고 한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마다 기뻐하시고 반갑게 맞아 주시지요.
이처럼 끝까지 우리를 놓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이 불순종의 죄를 지을 것을 아셨기에 만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셨지요. 그리고 때가 이르자 예수님의 보혈로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죄인들이 치러야 할 죗값을 대신 지불해 주셨습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에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모든 죄를 속량하기 위해 예수님의 보혈을 흘리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진한 사랑이셨지요. 그래서 요한일서 4장 9절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말씀합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죄악에 빠져 사망으로 달음박질해 가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내주셨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수님은 나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나 아무 죄가 없으셨기에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삼 일 만에 부활하셨고, 이로써 우리에게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독생자 아들을 주신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녀는 자신의 생명보다 소중한 존재이므로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것은 사랑의 극치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3. 성령을 선물로 주시며 천국까지 인도하시는 사랑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죄를 용서받은 사람에게는 누구나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이 승천하신 후 우리 마음에 보혜사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로마서 8장 26~27절에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하셨습니다.
성령은 우리가 죄를 지으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돌이키도록 이끄십니다. 믿음이 적은 이에게 믿음을 더하고, 소망이 없는 이에게는 천국 소망을 더해 주십니다. 어머니가 자녀를 섬세하게 양육하듯이 행여 넘어질세라, 다칠세라 때에 따라 성령의 음성을 들려 주시지요.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 주고 천국까지 인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깊이 깨우친다면 누구나 하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면 하나님께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놀라운 사랑으로 되돌려 주십니다. 강건함의 축복뿐만 아니라 범사에 잘되고 형통한 복을 주십니다. 이는 영계의 법칙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축복과 응답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처음 하나님을 만나 갖가지 문제를 해결받았을 때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나 같은 죄인도 용서해 주셨다.”는 사랑을 느꼈을 것입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노라.” 하는 것이 진정한 고백이었을 것입니다.
또 근심 걱정이 없고 질병이나 이별, 사망이 없는 영원한 천국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얼마나 가슴 벅차며 감격하였는지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찾아와 손을 내밀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있어 사랑하신 것이 아니지요. 죄인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 독생자까지 내어주셨습니다.
여인이 젖먹이 자녀를 한시도 잊지 못하는, 그 이상의 크신 사랑으로 우리 모두를 살피시고 천 년을 하루같이 기다리고 또 기다리시는 분이 바로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사랑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진실한 사랑입니다. 장차 아름다운 천국에서 영광 중에 함께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 깊이 느낌으로 늘 감사가 넘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을 줄 아셨는데도 막지 않으시고 스스로 선택하도록 놔두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2.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도록 하나님께서 사랑의 극치를 보여 준 사건은 무엇일까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가죽옷에 담긴 영적 의미
1.가죽옷은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풍요로운 에덴동산을 떠나 척박한 지구에서 살아갈 아담과 하와를 매우 안쓰러워하시며 사랑의 표현으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앞으로 변질된 땅에서 받게 될 충격과 몸소 겪어야 할 고통이 어떠함을 아셨기에 가죽옷으로 몸을 보호하게 하셨던 것이다.
2.가죽옷은 ‘구원의 끈’을 의미한다.
가죽옷은 하나님과 두 사람 사이를 연결해 주는 구원의 끈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놓지 않으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사랑의 징표요, 구원의 끈인 가죽옷이 있었기에 이 땅의 삶을 견디며 자신들의 죄를 회개함으로 결국 구원에 이를 수 있었다.
2021-04-02
제14과부활의 주
사도행전 1:11
읽을말씀 : 사도행전 1:11 | 외울말씀 : 고린도후서 1:19 | 참고 말씀: 빌립보서 2:9~11
교육목표 :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주님은 하나님께 어떠한 열매로 나오셨는지 알아본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후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구원과 응답, 영생과 천국을 소유할 수 있도록 온 인류의 구세주가 되신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탐스런 열매를 맺기 위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주님에 대해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겠습니다.
1. 부활의 주님은 순종의 열매를 드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세주의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 어떤 고난이 따를지 잘 아셨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이 땅에 내려오셨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아무 조건 없이 하나님의 뜻에 따랐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 19절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온전히 헤아리셨기 때문입니다.
첫 사람 아담의 범죄 후 인생들은 점차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갔습니다. 죄를 짓고 불법을 행하며 마귀의 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녀들을 보시며 매우 슬퍼하셨지요. 예수님은 이런 하나님 마음을 아셨고 그 슬픔을 고스란히 느끼셨습니다. 이에 죄인들을 구원하여 아버지 하나님 마음을 위로해 드리고자 처참한 십자가 처형을 당하시며 구세주의 사명을 기쁘게 감당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핏값으로 원수 마귀 사단에게서 영혼들을 사서 아버지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로마서 5장 19절에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는 말씀대로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순종을 통해 많은 의인을 얻으셨고, 죄가 없으신 주님은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여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셨습니다.
우리도 ‘순종하면 축복이니까’ 하는 차원에 머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서 오직 “예”와 “아멘”만 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만 주기 원하십니다. 그분의 마음을 헤아려 순종하면 누구든지 온전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2. 부활의 주님은 사랑의 열매를 드리셨습니다.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심으로 보배로운 사랑의 열매로 나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귀한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신 이유 중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입게 됨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잠언 8장 17절에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말씀하신 대로이지요. 예수님은 이 땅에서 구세주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어떠한 고난도 달게 받으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셨기에 그리할 수 있었지요. 그 결과 어떤 사랑을 입으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 최고의 영광을 입혀 주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 9~11절에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말씀하신 대로이지요.
예수님은 이 땅에 사시는 동안 참으로 고단한 나날을 보내셨습니다. 가난하게 사셨고 마치 종처럼 쉴 틈 없이 일하셨지요. 배고픔과 피곤함도 느끼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기 위해 잡히셨을 때는 매우 초라한 모습으로 피조물들에게 멸시 천대를 받으셨지요.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혀 제물로 바쳐진 짐승처럼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후에는 전혀 다른 모습이셨습니다. 공간의 제약 없이 예루살렘과 갈릴리를 자유롭게 오가셨고, 문이 굳게 닫혀 있는데도 들어가셨습니다. 사람들이 먹는 음식을 드셨고, 드시지 않아도 상관없는 몸이 되셨지요. 하물며 승천하신 주님은 얼마나 영화로우실까요? 그 영화는 이 세상의 언어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만이 아니라 우리도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사랑의 열매로 맺혀 하늘의 영광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려 주시고자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이 땅에 보내셨지요.
물론 육적인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고난이 따릅니다. 온갖 죄악으로 더러워진 마음 가죽을 베어낼 때 그 과정에는 아픔이 따르기 마련이지요. 마음밭을 갈아엎고 돌과 가시떨기를 걷어내어 옥토로 개간하는 데에는 많은 수고가 따릅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서 영혼을 구원하려면 그리스도의 고난을 자신의 몸에 채워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어떤 고난이든 감내합니다. 진실하게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한 사람은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입게 되지요. 그로 인한 영광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 이상입니다. 육을 입고 육의 세상에 살아가는 사람으로서는 다 이해할 수 없고 측량할 수 없는 큰 영광을 입혀 주시지요. 물론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복을 누리게 하십니다.
주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날마다 마음에 새기고 또 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도 능히 그 사랑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할 수 있기에 주님께서 그 본을 보여 주신 것이지요. 그러므로 온전한 사랑을 이루어서 아버지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3. 부활의 주님은 소망의 열매를 드리셨습니다.
육의 사람들의 눈에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깊은 절망 속에 계신 듯 보였습니다. 아무 희망도 없어 보였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에는 소망으로 빛났습니다. 이로 인해 모진 고통을 꿋꿋하게 견딜 수 있었지요. 이 소망대로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셨고 큰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또한 죄인으로서 죽을 수밖에 없는 영혼들에게는 구원의 길과 천국의 문을 활짝 열어 놓으셨지요.
마가복음 16장 19절에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한 대로 승천하신 주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였던 요한은 성령의 감동 속에 하나님의 보좌를 보았습니다. 요한계시록 4장 2~4절에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 말씀했지요.
요한계시록 21장에는 요한이 환상 가운데 보고 기록한 새 예루살렘 성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새 예루살렘 성은 천국에서 가장 아름답고 영화로운 곳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주실 영광을 소망하며 이 땅의 고난을 잘 이기셨습니다. 구속의 사역을 완수하신 후에는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이르셨지요.
하나님의 보좌 곁에는 24장로의 보좌들이 둘려 있습니다. 24장로들도 하나님께서 주실 영광을 바라보고 주어진 삶을 아름답게 살았습니다. 그로 인해 장차 천국에서 하나님과 주님의 보좌 곁에 앉게 되지요.
주님은 우리에게도 이 소망을 안겨 주고 가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3절에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약속하셨지요. 여러분들이 이 소망을 품고 자신을 변화시키는 만큼 더 좋은 천국을 침노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온 집에 충성하여 온 영의 사람이 되면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게 되지요. 그러므로 주님의 마음을 온전히 닮아 새 예루살렘 성의 주인공이 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부활의 첫 열매이신 주님은 하나님 앞에 어떤 열매로 나오셨을까요?
① 순종의 열매 ② 사랑의 열매 ③ ( )의 열매
2. 고린도후서 1장 19절 말씀을 외워 봅시다.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 ) 하고 ( )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 )만 되었느니라.”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계 22:13)
▶ 알파와 오메가 - 인류의 모든 지식과 문명을 시작하고 마무리 지으시는 성부 하나님의 사역을 의미한다.
▶ 처음과 나중 - 인간 구원을 위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고, 재림을 통해 구속 사업을 마무리하시는 성자 하나님의 사역을 의미한다.
▶ 시작과 끝 - 인간 경작의 시작과 끝을 감당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사역을 의미한다.
교육목표 :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주님은 하나님께 어떠한 열매로 나오셨는지 알아본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후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구원과 응답, 영생과 천국을 소유할 수 있도록 온 인류의 구세주가 되신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탐스런 열매를 맺기 위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주님에 대해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겠습니다.
1. 부활의 주님은 순종의 열매를 드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세주의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 어떤 고난이 따를지 잘 아셨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이 땅에 내려오셨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아무 조건 없이 하나님의 뜻에 따랐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 19절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온전히 헤아리셨기 때문입니다.
첫 사람 아담의 범죄 후 인생들은 점차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갔습니다. 죄를 짓고 불법을 행하며 마귀의 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녀들을 보시며 매우 슬퍼하셨지요. 예수님은 이런 하나님 마음을 아셨고 그 슬픔을 고스란히 느끼셨습니다. 이에 죄인들을 구원하여 아버지 하나님 마음을 위로해 드리고자 처참한 십자가 처형을 당하시며 구세주의 사명을 기쁘게 감당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핏값으로 원수 마귀 사단에게서 영혼들을 사서 아버지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로마서 5장 19절에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는 말씀대로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순종을 통해 많은 의인을 얻으셨고, 죄가 없으신 주님은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여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셨습니다.
우리도 ‘순종하면 축복이니까’ 하는 차원에 머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서 오직 “예”와 “아멘”만 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만 주기 원하십니다. 그분의 마음을 헤아려 순종하면 누구든지 온전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2. 부활의 주님은 사랑의 열매를 드리셨습니다.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심으로 보배로운 사랑의 열매로 나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귀한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신 이유 중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입게 됨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잠언 8장 17절에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말씀하신 대로이지요. 예수님은 이 땅에서 구세주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어떠한 고난도 달게 받으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셨기에 그리할 수 있었지요. 그 결과 어떤 사랑을 입으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 최고의 영광을 입혀 주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 9~11절에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말씀하신 대로이지요.
예수님은 이 땅에 사시는 동안 참으로 고단한 나날을 보내셨습니다. 가난하게 사셨고 마치 종처럼 쉴 틈 없이 일하셨지요. 배고픔과 피곤함도 느끼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기 위해 잡히셨을 때는 매우 초라한 모습으로 피조물들에게 멸시 천대를 받으셨지요.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혀 제물로 바쳐진 짐승처럼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후에는 전혀 다른 모습이셨습니다. 공간의 제약 없이 예루살렘과 갈릴리를 자유롭게 오가셨고, 문이 굳게 닫혀 있는데도 들어가셨습니다. 사람들이 먹는 음식을 드셨고, 드시지 않아도 상관없는 몸이 되셨지요. 하물며 승천하신 주님은 얼마나 영화로우실까요? 그 영화는 이 세상의 언어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만이 아니라 우리도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사랑의 열매로 맺혀 하늘의 영광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려 주시고자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이 땅에 보내셨지요.
물론 육적인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고난이 따릅니다. 온갖 죄악으로 더러워진 마음 가죽을 베어낼 때 그 과정에는 아픔이 따르기 마련이지요. 마음밭을 갈아엎고 돌과 가시떨기를 걷어내어 옥토로 개간하는 데에는 많은 수고가 따릅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서 영혼을 구원하려면 그리스도의 고난을 자신의 몸에 채워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어떤 고난이든 감내합니다. 진실하게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한 사람은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입게 되지요. 그로 인한 영광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 이상입니다. 육을 입고 육의 세상에 살아가는 사람으로서는 다 이해할 수 없고 측량할 수 없는 큰 영광을 입혀 주시지요. 물론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복을 누리게 하십니다.
주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날마다 마음에 새기고 또 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도 능히 그 사랑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할 수 있기에 주님께서 그 본을 보여 주신 것이지요. 그러므로 온전한 사랑을 이루어서 아버지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3. 부활의 주님은 소망의 열매를 드리셨습니다.
육의 사람들의 눈에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깊은 절망 속에 계신 듯 보였습니다. 아무 희망도 없어 보였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에는 소망으로 빛났습니다. 이로 인해 모진 고통을 꿋꿋하게 견딜 수 있었지요. 이 소망대로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셨고 큰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또한 죄인으로서 죽을 수밖에 없는 영혼들에게는 구원의 길과 천국의 문을 활짝 열어 놓으셨지요.
마가복음 16장 19절에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한 대로 승천하신 주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였던 요한은 성령의 감동 속에 하나님의 보좌를 보았습니다. 요한계시록 4장 2~4절에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 말씀했지요.
요한계시록 21장에는 요한이 환상 가운데 보고 기록한 새 예루살렘 성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새 예루살렘 성은 천국에서 가장 아름답고 영화로운 곳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주실 영광을 소망하며 이 땅의 고난을 잘 이기셨습니다. 구속의 사역을 완수하신 후에는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이르셨지요.
하나님의 보좌 곁에는 24장로의 보좌들이 둘려 있습니다. 24장로들도 하나님께서 주실 영광을 바라보고 주어진 삶을 아름답게 살았습니다. 그로 인해 장차 천국에서 하나님과 주님의 보좌 곁에 앉게 되지요.
주님은 우리에게도 이 소망을 안겨 주고 가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3절에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약속하셨지요. 여러분들이 이 소망을 품고 자신을 변화시키는 만큼 더 좋은 천국을 침노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온 집에 충성하여 온 영의 사람이 되면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게 되지요. 그러므로 주님의 마음을 온전히 닮아 새 예루살렘 성의 주인공이 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부활의 첫 열매이신 주님은 하나님 앞에 어떤 열매로 나오셨을까요?
① 순종의 열매 ② 사랑의 열매 ③ ( )의 열매
2. 고린도후서 1장 19절 말씀을 외워 봅시다.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 ) 하고 ( )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 )만 되었느니라.”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계 22:13)
▶ 알파와 오메가 - 인류의 모든 지식과 문명을 시작하고 마무리 지으시는 성부 하나님의 사역을 의미한다.
▶ 처음과 나중 - 인간 구원을 위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고, 재림을 통해 구속 사업을 마무리하시는 성자 하나님의 사역을 의미한다.
▶ 시작과 끝 - 인간 경작의 시작과 끝을 감당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사역을 의미한다.
2021-03-26
제13과온전한 사랑
고린도전서 13:8~13
읽을말씀 : 고린도전서 13:8~13 | 외울말씀 : 고린도전서 13:13 | 참고 말씀: 시편 103:15
교육목표 :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 중 제일은 사랑이라 하신 말씀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살펴본다.
이 세상에 속한 풀, 꽃, 나무와 같이 육의 모든 것들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편 103편 15절에 “인생은 그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말씀합니다. 부와 명예, 권세 등도 모두 변하고 결국에는 사라집니다. 미움, 다툼, 시기, 질투 등 죄와 어둠도 없어지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사랑만은 영원히 변하지 않기에 천국에까지 가지고 갈 수 있습니다.
1.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 13:8)
예언이나 방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신령한 것인데 왜 이것도 사라진다고 하는 것일까요? 영의 세계인 천국은 온전한 곳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예언한다 해도 장차 천국에서 알고 깨닫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지요. 천국에서는 하나님과 주님의 마음을 잘 알기 때문에 예언이 더 이상 필요치 않습니다.
방언도 그렇습니다. 지금은 나라나 민족, 지역에 따라 다른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대화하려면 서로의 언어를 배워야 합니다. 천국에 가면 이런 걱정이 없습니다. 언어가 하나이기 때문에 알아듣지 못할 염려가 없고, 선한 마음이 그대로 전달되기 때문에 오해나 편견이 생기지 않지요.
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지식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을 알기 위해 열심히 배웁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받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배우지만 이는 천국 가는 데 필요한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예언이나 방언, 지식 등은 천국 가기 위해 한시적으로 필요할 뿐이기에 결국 폐하게 되지요.
하지만 사랑은 천국에서도 폐하지 않으며, 우리가 경작받는 동안 마음을 할례하여 영적인 사랑을 이루는 만큼 더 좋은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영적인 사랑을 이루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2. “…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9~12)
어린아이에게 오백 원짜리 동전과 오만 원짜리 지폐를 내밀면 으레 동전을 집습니다. 오백 원으로 과자를 사 봤지만 지폐로는 안 사 보았기 때문에 그 가치를 모르지요. 우리가 천국을 알고 깨닫는 깊이도 이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천국이 아름다운 곳이라는 것은 알지만,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광채가 얼마나 찬란한지 온전히 깨닫기가 어렵습니다.
장차 천국에 이르면 그때는 무한히 넓고 신비로운 영의 세계와 모든 것이 운행되는 원리도 얼마든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 11절에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육의 세계와 영의 세계는 이처럼 확연히 차이가 납니다. 물론 이 땅에서도 믿음의 분량에 따라 말하고 깨닫고 생각하는 것에 차이가 나지요. 요한일서 2장을 보면 믿음의 각 단계를 자녀, 아이, 청년, 아비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자녀나 아이의 믿음은 말씀대로 행하지 못하고 잘 깨닫지도 못합니다. 청년의 믿음이 되고 더 장성하여 아비의 믿음이 되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깨닫는 차원도 달라지지요. 하지만 아무리 이 땅에서 아비의 믿음을 이뤘다 해도 육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천국에 비하면 역시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또한 영원한 천국에 비하면 이 세상은 그림자와 같습니다. 그림자는 해가 지면 사라지는 허상이며, 실체가 아니라 실체를 닮은 모형에 불과하지요. 이 세상은 영원한 세계가 어떠한지 짐작하게 하는 그림자일 뿐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림자 같은 삶이 지나면 그때에는 실체인 천국이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 12절에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말씀했습니다.
지금은 영의 세계를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지만 천국에 가면 얼굴을 마주하고 보는 것처럼 뚜렷이 알게 되지요. 사도 바울이 사랑장을 기록한 시대는 약 2천 년 전입니다. 당시 거울은 은, 청동, 철 등으로 만들어져 지금처럼 선명하지 않았기에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다고 한 것입니다.
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는 데 있어 믿음과 소망은 매우 귀한 덕목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구원받아 천국에 가고,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구원과 영생, 천국을 얻을 수 있기에 믿음은 보배 중에 보배이며, 응답의 열쇠입니다. 또한 소망을 가짐으로써 더 좋은 천국을 침노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믿음이 있다면 당연히 소망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고 천국과 지옥을 확실히 믿는다면 천국을 소망하지요. 또한 소망이 있다면 죄를 버리고 성결되기 위해 힘쓰고 열심히 충성합니다. 이처럼 믿음과 소망은 천국에 가는 그날까지 꼭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 그중에 사랑이 제일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믿음과 소망은 이 땅에서 인간 경작을 받을 동안 필요한 것일 뿐 천국에 가면 영적인 사랑만 남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가면 그때부터는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 필요 없으며, 소망 역시 필요치 않습니다. 진정 믿음이 있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세월이 흐를수록, 믿음이 장성할수록 천국에 대한 소망이 더욱 커지게 마련입니다. 시간이 갈수록 주님이 사무치도록 뵙고 싶어지지요.
이처럼 천국의 소망이 있는 사람은 아무리 이 땅에서 좁고 험한 길을 가더라도 “힘들다, 괴롭다.” 하지 않고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최종 목적지인 천국에 이르면 믿음과 소망은 더 이상 필요치 않습니다. 오직 사랑만 천국에서도 영원토록 이어지기 때문에 사랑이 제일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둘째로, 믿음으로 천국을 소유하지만 영적인 사랑이 없으면 가장 좋은 천국 처소인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과 소망으로 행한 만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죄를 버리고 아름다운 마음을 이룬 만큼 영적인 믿음이 주어지고 이 믿음의 분량에 따라 낙원, 1천층, 2천층, 3천층, 새 예루살렘 성으로 처소가 구분됩니다.
낙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겨우 구원받을 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들어갑니다. 1천층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들어갑니다. 2천층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대로 행하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충성한 사람들이 들어가지요. 3천층은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여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성결된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나아가 새 예루살렘 성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온전한 믿음을 소유하고 온 집에 충성한 사람들이 들어갑니다.
새 예루살렘 성은 믿음으로 온전한 사랑을 이룬 하나님 자녀들에게 주어지는 천국으로서 사랑의 결정체입니다. 원래 새 예루살렘 성에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피조물인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온전한 믿음을 소유하면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집니다.
우리가 주님을 닮아 새 예루살렘 성에 거하기 위해서는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야 하는데 그 길이 곧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있어야 우리에게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와 팔복이 임하여 주님의 성품을 닮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갖출 수 있지요.
결론적으로, 믿음과 소망은 분명히 필요한 것이지만 온전한 사랑이 있을 때라야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으므로 사랑이 제일인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예언이나 방언,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영적 지식은 신령한 것인데 천국에 가면 왜 폐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2.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① 믿음과 소망은 우리가 이 땅에서 인간 경작을 받을 동안 필요한 것일 뿐 천국에 가면 영적인 ( )만 남기 때문이다.
② 믿음으로 천국을 소유하지만 영적인 사랑이 없으면 가장 좋은 천국 처소인 ( )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새 예루살렘 성 ‘열두 기초석’에 담긴 영적 의미
① 벽옥(영적 믿음) ② 남보석(곧음과 절개)
③ 옥수(결백과 희생적 사랑) ④ 녹보석(의와 푸름, 정의롭고 깨끗함)
⑤ 홍마노(영적 충성) ⑥ 홍보석(열정적 사랑) ⑦ 황옥(자비)
⑧ 녹옥(오래 참음) ⑨ 담황옥(양선) ⑩ 비취옥(절제)
⑪ 청옥(청결함과 거룩함) ⑫ 자정(온유)
교육목표 :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 중 제일은 사랑이라 하신 말씀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살펴본다.
이 세상에 속한 풀, 꽃, 나무와 같이 육의 모든 것들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편 103편 15절에 “인생은 그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말씀합니다. 부와 명예, 권세 등도 모두 변하고 결국에는 사라집니다. 미움, 다툼, 시기, 질투 등 죄와 어둠도 없어지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사랑만은 영원히 변하지 않기에 천국에까지 가지고 갈 수 있습니다.
1.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 13:8)
예언이나 방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신령한 것인데 왜 이것도 사라진다고 하는 것일까요? 영의 세계인 천국은 온전한 곳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예언한다 해도 장차 천국에서 알고 깨닫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지요. 천국에서는 하나님과 주님의 마음을 잘 알기 때문에 예언이 더 이상 필요치 않습니다.
방언도 그렇습니다. 지금은 나라나 민족, 지역에 따라 다른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대화하려면 서로의 언어를 배워야 합니다. 천국에 가면 이런 걱정이 없습니다. 언어가 하나이기 때문에 알아듣지 못할 염려가 없고, 선한 마음이 그대로 전달되기 때문에 오해나 편견이 생기지 않지요.
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지식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을 알기 위해 열심히 배웁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받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배우지만 이는 천국 가는 데 필요한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예언이나 방언, 지식 등은 천국 가기 위해 한시적으로 필요할 뿐이기에 결국 폐하게 되지요.
하지만 사랑은 천국에서도 폐하지 않으며, 우리가 경작받는 동안 마음을 할례하여 영적인 사랑을 이루는 만큼 더 좋은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영적인 사랑을 이루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2. “…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9~12)
어린아이에게 오백 원짜리 동전과 오만 원짜리 지폐를 내밀면 으레 동전을 집습니다. 오백 원으로 과자를 사 봤지만 지폐로는 안 사 보았기 때문에 그 가치를 모르지요. 우리가 천국을 알고 깨닫는 깊이도 이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천국이 아름다운 곳이라는 것은 알지만,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광채가 얼마나 찬란한지 온전히 깨닫기가 어렵습니다.
장차 천국에 이르면 그때는 무한히 넓고 신비로운 영의 세계와 모든 것이 운행되는 원리도 얼마든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 11절에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육의 세계와 영의 세계는 이처럼 확연히 차이가 납니다. 물론 이 땅에서도 믿음의 분량에 따라 말하고 깨닫고 생각하는 것에 차이가 나지요. 요한일서 2장을 보면 믿음의 각 단계를 자녀, 아이, 청년, 아비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자녀나 아이의 믿음은 말씀대로 행하지 못하고 잘 깨닫지도 못합니다. 청년의 믿음이 되고 더 장성하여 아비의 믿음이 되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깨닫는 차원도 달라지지요. 하지만 아무리 이 땅에서 아비의 믿음을 이뤘다 해도 육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천국에 비하면 역시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또한 영원한 천국에 비하면 이 세상은 그림자와 같습니다. 그림자는 해가 지면 사라지는 허상이며, 실체가 아니라 실체를 닮은 모형에 불과하지요. 이 세상은 영원한 세계가 어떠한지 짐작하게 하는 그림자일 뿐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림자 같은 삶이 지나면 그때에는 실체인 천국이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 12절에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말씀했습니다.
지금은 영의 세계를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지만 천국에 가면 얼굴을 마주하고 보는 것처럼 뚜렷이 알게 되지요. 사도 바울이 사랑장을 기록한 시대는 약 2천 년 전입니다. 당시 거울은 은, 청동, 철 등으로 만들어져 지금처럼 선명하지 않았기에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다고 한 것입니다.
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는 데 있어 믿음과 소망은 매우 귀한 덕목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구원받아 천국에 가고,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구원과 영생, 천국을 얻을 수 있기에 믿음은 보배 중에 보배이며, 응답의 열쇠입니다. 또한 소망을 가짐으로써 더 좋은 천국을 침노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믿음이 있다면 당연히 소망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고 천국과 지옥을 확실히 믿는다면 천국을 소망하지요. 또한 소망이 있다면 죄를 버리고 성결되기 위해 힘쓰고 열심히 충성합니다. 이처럼 믿음과 소망은 천국에 가는 그날까지 꼭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 그중에 사랑이 제일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믿음과 소망은 이 땅에서 인간 경작을 받을 동안 필요한 것일 뿐 천국에 가면 영적인 사랑만 남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가면 그때부터는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 필요 없으며, 소망 역시 필요치 않습니다. 진정 믿음이 있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세월이 흐를수록, 믿음이 장성할수록 천국에 대한 소망이 더욱 커지게 마련입니다. 시간이 갈수록 주님이 사무치도록 뵙고 싶어지지요.
이처럼 천국의 소망이 있는 사람은 아무리 이 땅에서 좁고 험한 길을 가더라도 “힘들다, 괴롭다.” 하지 않고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최종 목적지인 천국에 이르면 믿음과 소망은 더 이상 필요치 않습니다. 오직 사랑만 천국에서도 영원토록 이어지기 때문에 사랑이 제일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둘째로, 믿음으로 천국을 소유하지만 영적인 사랑이 없으면 가장 좋은 천국 처소인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과 소망으로 행한 만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죄를 버리고 아름다운 마음을 이룬 만큼 영적인 믿음이 주어지고 이 믿음의 분량에 따라 낙원, 1천층, 2천층, 3천층, 새 예루살렘 성으로 처소가 구분됩니다.
낙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겨우 구원받을 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들어갑니다. 1천층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들어갑니다. 2천층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대로 행하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충성한 사람들이 들어가지요. 3천층은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여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성결된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나아가 새 예루살렘 성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온전한 믿음을 소유하고 온 집에 충성한 사람들이 들어갑니다.
새 예루살렘 성은 믿음으로 온전한 사랑을 이룬 하나님 자녀들에게 주어지는 천국으로서 사랑의 결정체입니다. 원래 새 예루살렘 성에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피조물인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온전한 믿음을 소유하면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집니다.
우리가 주님을 닮아 새 예루살렘 성에 거하기 위해서는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야 하는데 그 길이 곧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있어야 우리에게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와 팔복이 임하여 주님의 성품을 닮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갖출 수 있지요.
결론적으로, 믿음과 소망은 분명히 필요한 것이지만 온전한 사랑이 있을 때라야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으므로 사랑이 제일인 것입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예언이나 방언,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영적 지식은 신령한 것인데 천국에 가면 왜 폐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2.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① 믿음과 소망은 우리가 이 땅에서 인간 경작을 받을 동안 필요한 것일 뿐 천국에 가면 영적인 ( )만 남기 때문이다.
② 믿음으로 천국을 소유하지만 영적인 사랑이 없으면 가장 좋은 천국 처소인 ( )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새 예루살렘 성 ‘열두 기초석’에 담긴 영적 의미
① 벽옥(영적 믿음) ② 남보석(곧음과 절개)
③ 옥수(결백과 희생적 사랑) ④ 녹보석(의와 푸름, 정의롭고 깨끗함)
⑤ 홍마노(영적 충성) ⑥ 홍보석(열정적 사랑) ⑦ 황옥(자비)
⑧ 녹옥(오래 참음) ⑨ 담황옥(양선) ⑩ 비취옥(절제)
⑪ 청옥(청결함과 거룩함) ⑫ 자정(온유)
2021-03-19
제12과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는 것
고린도전서 13:7
읽을말씀 : 고린도전서 13:7 | 외울말씀 : 베드로전서 1:7 | 참고 말씀: 마태복음 5:11~12
교육목표 :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진리 안에서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며 어떤 연단이든지 능히 견딜 수 있음을 알려 준다.
우리가 사랑에 위배되는 모든 것을 참다 보면 그에 따른 여파가 오기 마련입니다. 마치 큰 물결이 지나가면 그 뒤를 따라 잔물결이 이는 것처럼 모든 것을 참을 때에도 참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험이 오기도 하고 마음에 고통이 따르기도 합니다. 바로 이런 여파를 견디는 것이 모든 것을 견디는 것입니다.
1.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는 것
예수님께서는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고 당부하시며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권면하셨습니다(마 5:39~42).
이 말씀대로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고 잠잠히 참는다 해도 그에 따르는 아픔은 어쩔 수 없습니다. 마음에 얼마나 사랑을 일구었느냐에 따라 느끼는 아픔도 다르지요. 참음의 여파는 이뿐만이 아닙니다. 외부 환경으로부터 올 수도 있습니다. 상대가 오른뺨을 때릴 때 참고 왼편을 돌려 댔는데 사정없이 왼뺨까지 때립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해서 참았는데도 상황이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나빠진 것처럼 보입니다. 다니엘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다니엘은 사자 굴에 들어갈 줄 알고도 기도를 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했기에 생명의 위협 앞에서도 타협하지 않았지요. 또 자신을 시기하여 죽음으로 몰아가는 무리에게 악으로 대항치 않았습니다. 이처럼 다니엘이 하나님 말씀대로 참으니 상황이 곧바로 좋아졌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굶주린 사자가 울부짖는 굴에 던져졌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랑에 위배되는 것을 참았으니 곧바로 시험이 물러가야 할 것 같은데 이러한 연단이 따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우리를 온전케 하고 축복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농작물은 비, 바람, 따가운 햇살을 견딤으로 실한 열매를 맺듯이 우리도 견디는 시간을 통해 알곡으로 맺혀지지요. 연단을 통해 하나님의 참 자녀로 나오는 것이 바로 인간 경작의 섭리입니다.
2. 연단은 하나님의 참 자녀로 이끄시는 축복
원수 마귀 사단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빛 가운데 살지 못하도록 어찌하든 훼방합니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며 조금의 흠과 티만 보여도 송사하지요.
예컨대, 악을 행하는 사람을 볼 때 겉으로는 참지만 마음에는 여전히 ‘보기 싫다, 이해할 수 없다.’라는 감정이 있다고 합시다. 이것을 아는 원수 마귀 사단이 송사하면 연단이 따릅니다. 마음에 악이 없다고 인정받기까지는 크든 작든 연단이라는 테스트가 따르는 것입니다.
물론 악이 전혀 없다 해도 연단이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축복을 주시려는 연단입니다. 마음에 악이 없는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사랑, 온전한 선으로 이끄시기 위함이지요. 개인적인 축복을 주실 때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이룰 때에도 이런 원리가 적용됩니다.
하나님께서 큰 역사를 베푸시기 위해서는 그만큼 공의가 충족되어야 합니다. 큰 믿음과 사랑의 행함으로 응답받을 만한 그릇임을 증명해야 원수 마귀 사단이 송사하지 못하지요. 이런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시련의 비바람을 견디게 하십니다. 그럴 때 오직 선과 사랑으로 인내하면 결국 승리하여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특히 주님의 이름을 인하여 애매히 받는 핍박이나 고난을 잘 이기면 반드시 축복이 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장 11~12절에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모든 것을 참고 믿으며 바라고 견뎌야 할까요?
3. 모든 것을 참고 믿으며 바라고 견디려면
첫째로, 연단 중에도 하나님 사랑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7절에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의 삶이 끝나는 날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추도록 연단을 허락하십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다 보면 애매히 고난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내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구나.’ 하고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오히려 모든 것이 감사의 조건이 됩니다. 나를 더 좋은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해 허락하신 연단이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 사랑을 믿되 끝까지 믿어야 합니다. 믿음의 시련에는 아픔이 따를 수도 있습니다.
연단의 시간이 길어지면 ‘하나님께서 정말 나를 사랑하실까?’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럴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인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에 더 좋은 천국으로 이끄신다는 것을 믿어야 하지요.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끝까지 인내하면 결국 온전한 사람으로 나오게 됩니다(약 1:4).
둘째로, 연단이 소망을 이루는 지름길임을 믿어야 합니다.
로마서 5장 3~4절에 보면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말씀한 대로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지름길입니다. 때로 자신을 볼 때 ‘어느 세월에 변화될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연마 끝에 빛나는 보석처럼 연단을 잘 견딤으로 변화되고 또 변화되면 결국 하나님을 닮은 온전한 자녀가 됩니다.
그러므로 연단을 통과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좀 더 쉬운 길로 가기 원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지만 연단을 피해 가면 그만큼 더딜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주위에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요? 싫은 내색을 하지는 않지만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이럴 때에도 문제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마주해야 합니다. 문제를 마주할 때의 힘듦을 인내하며 상대를 진정 이해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이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며 변화되도록 이끄십니다. 이처럼 연단의 상황들 하나하나가 소망을 이루는 징검다리가 되고 지름길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모든 것을 견디려면 오직 선만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모든 것을 참았는데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으면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왜 상황이 바뀌지 않습니까?” 하고 불평하지요. 육적으로 보면 시험 환난은 사람이나 환경으로 인해 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믿음의 시련은 원수 마귀 사단이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곧 시험 환난은 선과 악의 싸움입니다.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영계의 법칙대로 싸워야 합니다. 영계의 법칙은 결국 선이 승리합니다.
로마서 12장 21절에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말씀했습니다. 때로는 선을 행하면 지는 것 같고 손해 보는 것 같지만 반드시 선은 승리합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 혹여 시험, 환난, 핍박이 온다면 더욱 선을 행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저 사람 때문에 힘들다.’라고 느껴지는 사람이 있습니까? 걸핏하면 불평하고 토라지고 안하무인 하여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마음에 참사랑을 이루면 견디기 힘든 사람이 없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9) 하신 대로 상대를 자신처럼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이해하고 품게 되지요. 하나님께서도 우리들을 이러한 사랑으로 이해하고 견뎌 주십니다.
참사랑을 이루기 위해서는 모든 아픔을 믿음과 소망으로 잘 견뎌야 합니다. ‘영적인 사랑’이라는 최상품의 사랑을 만들면 장차 하나님 보좌가 있는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 하나님을 뵈올 때에 “모든 것을 참고 믿으며 바라고 견뎌 주심에 감사합니다.”라는 감동의 고백을 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 ( ) 안에 알맞은 답을 넣어 보세요.
1. 모든 것을 참는다는 것은 ( )에 위배되는 모든 것을 참는 것이다.
2. 모든 것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100% 신뢰하고 사랑하기에, 어떤 ( )이든 믿어 주는 것이다.
3. 모든 것을 ( )는 것은 믿는 것이 실상으로 나타날 때까지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4. 모든 것을 ( )는 것은 모든 것을 참을 때 밀려오는 여파를 견디는 것이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천국에 가져갈 수 있는 것 ♡
천국에 원하는 것 한 가지를 가져갈 수 있다면 무엇을 가져가야 할까? 이 땅에서 귀히 여기는 황금보석, 다이아몬드도 천국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다. 그런데 한 가지 이 땅에서 가져가면 너무나 가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사랑’이다.
눈물, 슬픔, 죄가 있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마음에 이룬 사랑, 천국에 가져가서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교육목표 :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진리 안에서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며 어떤 연단이든지 능히 견딜 수 있음을 알려 준다.
우리가 사랑에 위배되는 모든 것을 참다 보면 그에 따른 여파가 오기 마련입니다. 마치 큰 물결이 지나가면 그 뒤를 따라 잔물결이 이는 것처럼 모든 것을 참을 때에도 참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험이 오기도 하고 마음에 고통이 따르기도 합니다. 바로 이런 여파를 견디는 것이 모든 것을 견디는 것입니다.
1.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는 것
예수님께서는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고 당부하시며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권면하셨습니다(마 5:39~42).
이 말씀대로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고 잠잠히 참는다 해도 그에 따르는 아픔은 어쩔 수 없습니다. 마음에 얼마나 사랑을 일구었느냐에 따라 느끼는 아픔도 다르지요. 참음의 여파는 이뿐만이 아닙니다. 외부 환경으로부터 올 수도 있습니다. 상대가 오른뺨을 때릴 때 참고 왼편을 돌려 댔는데 사정없이 왼뺨까지 때립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해서 참았는데도 상황이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나빠진 것처럼 보입니다. 다니엘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다니엘은 사자 굴에 들어갈 줄 알고도 기도를 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했기에 생명의 위협 앞에서도 타협하지 않았지요. 또 자신을 시기하여 죽음으로 몰아가는 무리에게 악으로 대항치 않았습니다. 이처럼 다니엘이 하나님 말씀대로 참으니 상황이 곧바로 좋아졌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굶주린 사자가 울부짖는 굴에 던져졌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랑에 위배되는 것을 참았으니 곧바로 시험이 물러가야 할 것 같은데 이러한 연단이 따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우리를 온전케 하고 축복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농작물은 비, 바람, 따가운 햇살을 견딤으로 실한 열매를 맺듯이 우리도 견디는 시간을 통해 알곡으로 맺혀지지요. 연단을 통해 하나님의 참 자녀로 나오는 것이 바로 인간 경작의 섭리입니다.
2. 연단은 하나님의 참 자녀로 이끄시는 축복
원수 마귀 사단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빛 가운데 살지 못하도록 어찌하든 훼방합니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며 조금의 흠과 티만 보여도 송사하지요.
예컨대, 악을 행하는 사람을 볼 때 겉으로는 참지만 마음에는 여전히 ‘보기 싫다, 이해할 수 없다.’라는 감정이 있다고 합시다. 이것을 아는 원수 마귀 사단이 송사하면 연단이 따릅니다. 마음에 악이 없다고 인정받기까지는 크든 작든 연단이라는 테스트가 따르는 것입니다.
물론 악이 전혀 없다 해도 연단이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축복을 주시려는 연단입니다. 마음에 악이 없는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사랑, 온전한 선으로 이끄시기 위함이지요. 개인적인 축복을 주실 때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이룰 때에도 이런 원리가 적용됩니다.
하나님께서 큰 역사를 베푸시기 위해서는 그만큼 공의가 충족되어야 합니다. 큰 믿음과 사랑의 행함으로 응답받을 만한 그릇임을 증명해야 원수 마귀 사단이 송사하지 못하지요. 이런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시련의 비바람을 견디게 하십니다. 그럴 때 오직 선과 사랑으로 인내하면 결국 승리하여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특히 주님의 이름을 인하여 애매히 받는 핍박이나 고난을 잘 이기면 반드시 축복이 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장 11~12절에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모든 것을 참고 믿으며 바라고 견뎌야 할까요?
3. 모든 것을 참고 믿으며 바라고 견디려면
첫째로, 연단 중에도 하나님 사랑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7절에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의 삶이 끝나는 날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추도록 연단을 허락하십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다 보면 애매히 고난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내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구나.’ 하고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오히려 모든 것이 감사의 조건이 됩니다. 나를 더 좋은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해 허락하신 연단이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 사랑을 믿되 끝까지 믿어야 합니다. 믿음의 시련에는 아픔이 따를 수도 있습니다.
연단의 시간이 길어지면 ‘하나님께서 정말 나를 사랑하실까?’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럴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인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에 더 좋은 천국으로 이끄신다는 것을 믿어야 하지요.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끝까지 인내하면 결국 온전한 사람으로 나오게 됩니다(약 1:4).
둘째로, 연단이 소망을 이루는 지름길임을 믿어야 합니다.
로마서 5장 3~4절에 보면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말씀한 대로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지름길입니다. 때로 자신을 볼 때 ‘어느 세월에 변화될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연마 끝에 빛나는 보석처럼 연단을 잘 견딤으로 변화되고 또 변화되면 결국 하나님을 닮은 온전한 자녀가 됩니다.
그러므로 연단을 통과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좀 더 쉬운 길로 가기 원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지만 연단을 피해 가면 그만큼 더딜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주위에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요? 싫은 내색을 하지는 않지만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이럴 때에도 문제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마주해야 합니다. 문제를 마주할 때의 힘듦을 인내하며 상대를 진정 이해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이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며 변화되도록 이끄십니다. 이처럼 연단의 상황들 하나하나가 소망을 이루는 징검다리가 되고 지름길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모든 것을 견디려면 오직 선만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모든 것을 참았는데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으면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왜 상황이 바뀌지 않습니까?” 하고 불평하지요. 육적으로 보면 시험 환난은 사람이나 환경으로 인해 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믿음의 시련은 원수 마귀 사단이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곧 시험 환난은 선과 악의 싸움입니다.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영계의 법칙대로 싸워야 합니다. 영계의 법칙은 결국 선이 승리합니다.
로마서 12장 21절에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말씀했습니다. 때로는 선을 행하면 지는 것 같고 손해 보는 것 같지만 반드시 선은 승리합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 혹여 시험, 환난, 핍박이 온다면 더욱 선을 행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저 사람 때문에 힘들다.’라고 느껴지는 사람이 있습니까? 걸핏하면 불평하고 토라지고 안하무인 하여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마음에 참사랑을 이루면 견디기 힘든 사람이 없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9) 하신 대로 상대를 자신처럼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이해하고 품게 되지요. 하나님께서도 우리들을 이러한 사랑으로 이해하고 견뎌 주십니다.
참사랑을 이루기 위해서는 모든 아픔을 믿음과 소망으로 잘 견뎌야 합니다. ‘영적인 사랑’이라는 최상품의 사랑을 만들면 장차 하나님 보좌가 있는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 하나님을 뵈올 때에 “모든 것을 참고 믿으며 바라고 견뎌 주심에 감사합니다.”라는 감동의 고백을 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 ( ) 안에 알맞은 답을 넣어 보세요.
1. 모든 것을 참는다는 것은 ( )에 위배되는 모든 것을 참는 것이다.
2. 모든 것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100% 신뢰하고 사랑하기에, 어떤 ( )이든 믿어 주는 것이다.
3. 모든 것을 ( )는 것은 믿는 것이 실상으로 나타날 때까지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4. 모든 것을 ( )는 것은 모든 것을 참을 때 밀려오는 여파를 견디는 것이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천국에 가져갈 수 있는 것 ♡
천국에 원하는 것 한 가지를 가져갈 수 있다면 무엇을 가져가야 할까? 이 땅에서 귀히 여기는 황금보석, 다이아몬드도 천국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다. 그런데 한 가지 이 땅에서 가져가면 너무나 가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사랑’이다.
눈물, 슬픔, 죄가 있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마음에 이룬 사랑, 천국에 가져가서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2021-03-12
제11과사랑은 모든 것을 참고 믿으며 바라는 것
고린도전서 13:7
읽을말씀 : 고린도전서 13:7 | 외울말씀 : 고린도전서 13:7 | 참고 말씀: 고린도전서 15:19
교육목표 : 영적인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참고 믿고 바라는지에 대해 알려 준다.
우리가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다 보면 참아야 할 일이 매우 많습니다. 혈기나 짜증이 나도 참아야 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려는 마음도 참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랑의 개념을 설명할 때에도 가장 먼저 ‘오래 참고’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비진리를 버리기 위해 온갖 시련을 참는 자기와의 싸움이 ‘오래 참음’이라면 ‘모든 것을 참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바로 자신의 마음을 진리로 일군 후에 상대로 인해 겪어야 하는 모든 고통을 참는 것입니다. 즉 ‘오래 참음’보다 넓은 의미로 ‘영적인 사랑에 위배되는 모든 것을 참는 것’이지요.
1. 사랑은 모든 것을 참는 것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도 죄인들에 대해 잠잠히 참아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오직 선만 행하셨는데도 악한 사람들은 조롱하고 멸시하며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인생들이라 할지라도 참아 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위해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기도하셨지요. 이처럼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참으신 사랑의 결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사람마다 하나님 자녀가 되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망에서 벗어나 영생에 이르게 되었지요.
우리 영혼의 주인 되신 아버지 하나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모든 고통을 기쁨으로 참고 기다리십니다. 수천 년의 세월 동안 사람들이 악을 행할지라도 선으로 변화되기를 바라보며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가증한 우상을 섬길지라도 다시 하나님이 참 신임을 나타내 보이셨지요. 만약 “너는 불의가 가득하니 도저히 안 되겠어. 가망이 없구나. 더 이상은 못 참겠다.”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면 구원받을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우리는 당회장님을 통해서도 한 영혼 한 영혼이 변화될 때까지 얼마나 사랑으로 기다리며 오래 참아 주시는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연약하고 성격이 모난 사람이라도 언젠가 변화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을 기대하며 항상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셨지요. 온전히 변화될 때까지 성결의 복음을 가르치며 간절히 기도하기를 쉬지 않으셨습니다. 이처럼 모든 것을 참으며 기다리고 또 기다리니 결국 많은 성도가 좋은 일꾼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2. 사랑은 모든 것을 믿는 것
상대를 진정 사랑한다면 그의 모든 것을 믿어 줍니다. 설령 허물이 있고 부족한 모습이 보이더라도 흠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앞으로 변화될 것을 믿기에 사랑스럽게 바라봐 주지요. 서로를 신뢰하는 부부는 사랑으로 더욱 결속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서로 믿지 못하는 부부는 사사건건 다투며 의심하지요.
믿음은 상대에 대한 사랑의 크기를 보여 주는 척도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한다는 말과 같지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음으로 하나님의 벗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신실했던지 자신의 생명보다 귀한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믿음을 보시고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며 아브라함의 사랑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모든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면 하나님 말씀을 백 퍼센트 믿습니다. 모든 것을 믿기 때문에 또한 모든 것을 참습니다. 영적인 사랑에 위배되는 모든 것을 참으려면 반드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믿을 때라야 열심히 마음에 할례하여 사랑과 위배되는 것을 버릴 수 있지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죄인인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주심으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여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해 주셨고 그 사실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사실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영적인 사랑을 이루면 사랑하기 때문에 믿는 차원에 이릅니다.
영적인 사랑을 이뤘다는 것은 비진리의 마음을 다 버렸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비진리가 없으면 하늘로부터 믿어지는 영적인 믿음이 옵니다. 이때부터는 하나님 말씀을 의심하거나 신뢰가 흔들리는 일이 없습니다. 영적인 사랑을 온전히 이룬 사람은 모든 사람을 믿습니다. 상대가 믿을 만해서가 아니라 허물 많고 부족해도 믿음으로 바라봐 주는 것입니다.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부족한 모습에 실망하고 주저앉을 것이 아니라, 나를 놓지 않으시고 변화시키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어야지요. 성령님은 항상 우리에게 “할 수 있다.”고 용기를 주십니다. 그 사랑을 믿고 변화되기 위해 노력하면 그 믿음대로 이뤄 주십니다. 그러니 믿는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그러므로 자신뿐 아니라 어떤 사람도 믿어 줄 수 있는 영적인 사랑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3.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는 것
사람들은 상대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자기가 원하는 대로 바꾸려고 합니다. 그러나 치약을 위에서 짜느냐, 밑에서부터 짜느냐 하는 등의 사소한 습관조차 바꾸지 못해 다투는 부부가 얼마나 많습니까? 상대를 변화시키기 전에 내가 변화되면 됩니다. 그리고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상대가 변화되기를 기대하고 바라며 기다려 주면 되지요.
모든 것을 바란다는 것은 믿는 것이 실상으로 나타날 때까지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말씀을 믿고 말씀대로 이뤄질 것을 바라게 됩니다. 장차 아름다운 천국에서 하나님과 세세토록 사랑을 나누며 살게 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참으며 달려갑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아름답고 행복한 천국에 대한 소망이 없습니다. 이러한 소망이 없으니 현실이 전부인 양 살아갑니다. 더 많은 것을 가지려 하고 욕심을 채우기 위해 다투지요. 하지만 아무리 갖고 누린다 해도 참된 만족이 없습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과 두려움 속에 살아가지요.
반면에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은 모든 것을 바람으로 세상과 구별된 좁은 길을 갑니다. 왜 좁은 길이라 할까요? 이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 믿지 않는 사람 편에서 볼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오락을 즐기지 않고, 주일에는 온종일 교회에서 예배드리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충성, 봉사하는 등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며 기도합니다. 이 자체가 믿음이 없으면 힘들기 때문에 좁은 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 15:19) 말씀했습니다. 육적으로 보면 성도들은 세상에서 많은 것을 절제하고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하니 고생스럽게 보입니다. 그러나 이 길이 영생의 길이기에 힘들지 않고 행복하지요. 아름다운 천국에서 사랑하는 주님과 영원히 살아갈 것을 생각한다면 얼마나 설레고 즐겁겠습니까? 이처럼 사랑은 믿는 모든 것이 실상으로 나타날 때까지 변함없이 기다리고 바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믿음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큰 힘이 있습니다. 말썽을 부리거나 공부를 못하는 자녀라도 부모가 “잘할 수 있어!” 하며 믿어 주고 소망의 눈으로 바라봐 주면 얼마든지 착하고 공부도 잘하는 아이로 바뀔 수 있습니다. 영혼들을 갈무리할 때에도 자신의 생각 가운데 상대를 단정 지어서는 안 됩니다. ‘저 사람은 변화되기 어려울 것 같다.’ 하거나 ‘여전히 그 모습이구나.’ 하고 실망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변화될 것을 소망의 눈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당신도 할 수 있습니다!” 격려하며 끊임없이 기도해 주어야 하지요.
천 년을 하루같이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같이 어떤 영혼이든지 소망의 눈으로 바라봐 줄 수 있어야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마음에 있는 비진리를 버리기 위해 온갖 시련을 참는 자기와의 싸움이 ( )이라면, ( )는 것은 오래 참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진리로 일군 후에 상대로 인해 겪어야 하는 모든 고통을 참는 것을 말한다.
2. 사랑은 ‘사랑에 위배되는 모든 것을 참는 것’이라 했는데, 사랑에 위배되는 모든 것을 참으려면 반드시 ( )이 있어야 한다.
3. ( )는 것은 믿는 것이 실상으로 나타날 때까지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말씀을 믿고 그대로 이뤄질 것을 바라게 된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고린도교회
사도 바울의 선교 여행을 통해 그리스에서 가장 활발한 상업도시인 고린도 지방에 세워진 교회이다. 고린도교회는 은사가 넘쳤음에도 불구하고 각종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분쟁, 소송 문제, 은사 나눔 문제, 부활 논쟁, 심지어 바울의 사도권까지 문제 삼았다.
또한 거짓 선지자가 훼방하며, 음행 같은 세상 문화가 들어와 교회를 더럽혔다. 빈부 격차에 제사 음식 먹는 것 가지고도 싸웠기에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사도 바울이 쓴 서신이 고린도전·후서이다.
교육목표 : 영적인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참고 믿고 바라는지에 대해 알려 준다.
우리가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다 보면 참아야 할 일이 매우 많습니다. 혈기나 짜증이 나도 참아야 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려는 마음도 참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랑의 개념을 설명할 때에도 가장 먼저 ‘오래 참고’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비진리를 버리기 위해 온갖 시련을 참는 자기와의 싸움이 ‘오래 참음’이라면 ‘모든 것을 참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바로 자신의 마음을 진리로 일군 후에 상대로 인해 겪어야 하는 모든 고통을 참는 것입니다. 즉 ‘오래 참음’보다 넓은 의미로 ‘영적인 사랑에 위배되는 모든 것을 참는 것’이지요.
1. 사랑은 모든 것을 참는 것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도 죄인들에 대해 잠잠히 참아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오직 선만 행하셨는데도 악한 사람들은 조롱하고 멸시하며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인생들이라 할지라도 참아 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위해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기도하셨지요. 이처럼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참으신 사랑의 결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사람마다 하나님 자녀가 되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망에서 벗어나 영생에 이르게 되었지요.
우리 영혼의 주인 되신 아버지 하나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모든 고통을 기쁨으로 참고 기다리십니다. 수천 년의 세월 동안 사람들이 악을 행할지라도 선으로 변화되기를 바라보며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가증한 우상을 섬길지라도 다시 하나님이 참 신임을 나타내 보이셨지요. 만약 “너는 불의가 가득하니 도저히 안 되겠어. 가망이 없구나. 더 이상은 못 참겠다.”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면 구원받을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우리는 당회장님을 통해서도 한 영혼 한 영혼이 변화될 때까지 얼마나 사랑으로 기다리며 오래 참아 주시는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연약하고 성격이 모난 사람이라도 언젠가 변화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을 기대하며 항상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셨지요. 온전히 변화될 때까지 성결의 복음을 가르치며 간절히 기도하기를 쉬지 않으셨습니다. 이처럼 모든 것을 참으며 기다리고 또 기다리니 결국 많은 성도가 좋은 일꾼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2. 사랑은 모든 것을 믿는 것
상대를 진정 사랑한다면 그의 모든 것을 믿어 줍니다. 설령 허물이 있고 부족한 모습이 보이더라도 흠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앞으로 변화될 것을 믿기에 사랑스럽게 바라봐 주지요. 서로를 신뢰하는 부부는 사랑으로 더욱 결속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서로 믿지 못하는 부부는 사사건건 다투며 의심하지요.
믿음은 상대에 대한 사랑의 크기를 보여 주는 척도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한다는 말과 같지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음으로 하나님의 벗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신실했던지 자신의 생명보다 귀한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믿음을 보시고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며 아브라함의 사랑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모든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면 하나님 말씀을 백 퍼센트 믿습니다. 모든 것을 믿기 때문에 또한 모든 것을 참습니다. 영적인 사랑에 위배되는 모든 것을 참으려면 반드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믿을 때라야 열심히 마음에 할례하여 사랑과 위배되는 것을 버릴 수 있지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죄인인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주심으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여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해 주셨고 그 사실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사실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영적인 사랑을 이루면 사랑하기 때문에 믿는 차원에 이릅니다.
영적인 사랑을 이뤘다는 것은 비진리의 마음을 다 버렸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비진리가 없으면 하늘로부터 믿어지는 영적인 믿음이 옵니다. 이때부터는 하나님 말씀을 의심하거나 신뢰가 흔들리는 일이 없습니다. 영적인 사랑을 온전히 이룬 사람은 모든 사람을 믿습니다. 상대가 믿을 만해서가 아니라 허물 많고 부족해도 믿음으로 바라봐 주는 것입니다.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부족한 모습에 실망하고 주저앉을 것이 아니라, 나를 놓지 않으시고 변화시키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어야지요. 성령님은 항상 우리에게 “할 수 있다.”고 용기를 주십니다. 그 사랑을 믿고 변화되기 위해 노력하면 그 믿음대로 이뤄 주십니다. 그러니 믿는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그러므로 자신뿐 아니라 어떤 사람도 믿어 줄 수 있는 영적인 사랑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3.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는 것
사람들은 상대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자기가 원하는 대로 바꾸려고 합니다. 그러나 치약을 위에서 짜느냐, 밑에서부터 짜느냐 하는 등의 사소한 습관조차 바꾸지 못해 다투는 부부가 얼마나 많습니까? 상대를 변화시키기 전에 내가 변화되면 됩니다. 그리고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상대가 변화되기를 기대하고 바라며 기다려 주면 되지요.
모든 것을 바란다는 것은 믿는 것이 실상으로 나타날 때까지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말씀을 믿고 말씀대로 이뤄질 것을 바라게 됩니다. 장차 아름다운 천국에서 하나님과 세세토록 사랑을 나누며 살게 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참으며 달려갑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아름답고 행복한 천국에 대한 소망이 없습니다. 이러한 소망이 없으니 현실이 전부인 양 살아갑니다. 더 많은 것을 가지려 하고 욕심을 채우기 위해 다투지요. 하지만 아무리 갖고 누린다 해도 참된 만족이 없습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과 두려움 속에 살아가지요.
반면에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은 모든 것을 바람으로 세상과 구별된 좁은 길을 갑니다. 왜 좁은 길이라 할까요? 이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 믿지 않는 사람 편에서 볼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오락을 즐기지 않고, 주일에는 온종일 교회에서 예배드리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충성, 봉사하는 등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며 기도합니다. 이 자체가 믿음이 없으면 힘들기 때문에 좁은 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 15:19) 말씀했습니다. 육적으로 보면 성도들은 세상에서 많은 것을 절제하고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하니 고생스럽게 보입니다. 그러나 이 길이 영생의 길이기에 힘들지 않고 행복하지요. 아름다운 천국에서 사랑하는 주님과 영원히 살아갈 것을 생각한다면 얼마나 설레고 즐겁겠습니까? 이처럼 사랑은 믿는 모든 것이 실상으로 나타날 때까지 변함없이 기다리고 바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믿음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큰 힘이 있습니다. 말썽을 부리거나 공부를 못하는 자녀라도 부모가 “잘할 수 있어!” 하며 믿어 주고 소망의 눈으로 바라봐 주면 얼마든지 착하고 공부도 잘하는 아이로 바뀔 수 있습니다. 영혼들을 갈무리할 때에도 자신의 생각 가운데 상대를 단정 지어서는 안 됩니다. ‘저 사람은 변화되기 어려울 것 같다.’ 하거나 ‘여전히 그 모습이구나.’ 하고 실망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변화될 것을 소망의 눈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당신도 할 수 있습니다!” 격려하며 끊임없이 기도해 주어야 하지요.
천 년을 하루같이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같이 어떤 영혼이든지 소망의 눈으로 바라봐 줄 수 있어야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마음에 있는 비진리를 버리기 위해 온갖 시련을 참는 자기와의 싸움이 ( )이라면, ( )는 것은 오래 참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진리로 일군 후에 상대로 인해 겪어야 하는 모든 고통을 참는 것을 말한다.
2. 사랑은 ‘사랑에 위배되는 모든 것을 참는 것’이라 했는데, 사랑에 위배되는 모든 것을 참으려면 반드시 ( )이 있어야 한다.
3. ( )는 것은 믿는 것이 실상으로 나타날 때까지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말씀을 믿고 그대로 이뤄질 것을 바라게 된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고린도교회
사도 바울의 선교 여행을 통해 그리스에서 가장 활발한 상업도시인 고린도 지방에 세워진 교회이다. 고린도교회는 은사가 넘쳤음에도 불구하고 각종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분쟁, 소송 문제, 은사 나눔 문제, 부활 논쟁, 심지어 바울의 사도권까지 문제 삼았다.
또한 거짓 선지자가 훼방하며, 음행 같은 세상 문화가 들어와 교회를 더럽혔다. 빈부 격차에 제사 음식 먹는 것 가지고도 싸웠기에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사도 바울이 쓴 서신이 고린도전·후서이다.
2021-03-05
제10과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
고린도전서 13:6
읽을말씀 : 고린도전서 13:6 | 외울말씀 : 요한복음 15:14 | 참고 말씀: 역대하 19:7, 요한복음 14:6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불의란 무엇이며,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지 깨닫게 한다.
불의는 국가의 흥망성쇠를 결정하고 개인의 삶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1.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것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랑의 속성 중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지만 차이가 있습니다.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다’는 것은 마음에 악은 모양도 품지 않는다는 뜻이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것’은 행위로 드러나는 불의한 일들을 기뻐하지 않으며, 거기에 가담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가령, 부유한 친구를 보았을 때 시기, 질투가 나서 ‘친구는 잘사는데 나는 이게 뭔가? 친구가 망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스쳤다고 합시다. 이는 악한 생각입니다.
그런데 그 친구의 회사가 부도났을 때, “잘산다고 뽐내더니 고소하다.” 하면서 쾌재를 부른다면 이는 불의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악한 일에 동조하고 가담했다면 적극적으로 불의를 기뻐한 것이지요. 불의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1) 세상 사람들도 불의라고 여기는 경우
세상 사람들이 볼 때도 불의라 여기는 ‘일반적인 불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옳지 않은 방법으로 부를 축적하거나 법과 절차를 어기면서까지 자신의 이익을 쌓아나가는 것은 불의입니다. 판사가 뇌물을 받고 부당한 판결을 내려 죄 없는 사람이 억울한 처벌을 받았다면 이 또한 불의이지요.
역대하 19장 7절에 “너희는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삼가 행하라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불의함도 없으시고 편벽됨도 없으시고 뇌물을 받으심도 없으시니라” 말씀합니다. 사람의 눈은 가릴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으니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사랑을 받는 사람은 정당한 대가 외에는 바라지 않지요.
2) 하나님께서 불의라고 여기시는 경우
주 안에서의 불의는 일반적인 의미와는 조금 다릅니다. 세상의 법을 어기거나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뿐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어긋나는 온갖 죄가 다 불의입니다. 불의는 마음의 악이 구체적인 형태로 나온 죄이며, 죄 중에서도 특히 육체의 일에 해당합니다. 즉 마음에 있는 미움, 시기, 질투와 같은 악이 다툼, 폭행, 사기, 살인 등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온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9~10절에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말씀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안에서 불의는 구원과 직결됩니다. 그러니 불의를 행하는 형제를 본다면 애통하며 사랑으로 기도하고 말씀대로 살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나도 적당히, 좀 편하게 신앙생활 하고 싶다.’ 하며 부러워하거나 함께 동조한다면 주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없지요.
주님은 흠과 티도 없으신 분인데 불의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벧전 3:18).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의 담을 헐기 위해 화목제물이 되어 주셨지요. 바로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런 큰 사랑을 깨닫는다면 결코 불의를 기뻐해서는 안 됩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사람은 단순히 불의를 행하지 않는 차원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갑니다. 요한복음 15장 14절에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말씀했습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애통하는 사람은 그만큼 주님의 마음을 닮아 사랑이 많은 것입니다.
2.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면 불의를 행치 않을 뿐 아니라 진리를 행하고, 나아가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그렇다면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첫째로, 복음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복음이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아 천국에 간다는 복된 소식입니다. 많은 사람이 진리를 찾기 위해 사상과 철학, 학문을 탐구하며 여러 종교 교리에서 답을 얻고자 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4장 6절에 참된 진리가 무엇인지 명쾌하게 나와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말씀하셨지요. 즉 참된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통하지 않고는 천국에 갈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주님의 보혈로 죄 사함 받아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갈 수 있게 되었지요. 이처럼 삶의 목적을 알아 가치 있는 삶을 살게 되었으니 복음을 기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2장 4절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 뜻을 알기 때문에 복음을 듣고 주님을 영접해 구원받는 이들이 더해가는 것을 기뻐합니다. 자신보다 더 충성해 열매 맺는 사람을 보면 내 일처럼 기뻐하고 감사하며, 부흥하는 교회를 볼 때도 함께 기뻐하지요.
둘째로, 진리에 속한 모든 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사랑이 있으면 선, 사랑, 공의 등 진리에 속한 것을 보고 듣고 행하는 것을 기뻐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 말씀에 ‘섬기라, 이해하고 용서하라.’ 하셨으니 기쁨으로 순종합니다. 상대를 미워하고, 시기, 질투, 판단, 정죄하는 것이 너무나 싫어지지요. 그래서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사람은 상대가 잘되면 함께 기뻐하고 시기, 질투하지 않습니다. ‘상대가 잘못되었으면’ 하고 악한 생각을 하거나, 상대의 불행을 기뻐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불의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애통합니다. 또한 변개하지 않는 마음, 진실함, 정직함 등 선의 마음을 좋아합니다. 선한 말과 행실을 기뻐하지요.
요한삼서 1장 4절에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을 너무나 기뻐하십니다. 따라서 영적인 사랑을 마음에 가득 채움으로 진리에 속한 일들을 볼 때 더욱 기뻐하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하나님 말씀을 믿고 그대로 행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진리만 기뻐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마음에 어둠과 비진리가 있을 때는 악한 것을 생각하고 불의를 기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차츰 변화되어 비진리의 마음을 온전히 벗으면 진리만 기뻐하는 마음이 됩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열심히 노력하는 과정이 따르지요.
예를 들어, 초신자의 경우에는 예배드리는 것이 무조건 행복한 것만은 아닙니다. 교회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진리의 맛을 모릅니다. 예배 시간에 피곤해하거나 마음이 다른 데 있기도 하지요. 그렇지만 어찌하든 성전에 나와 예배드리며 말씀대로 순종하고자 열심히 노력합니다. 구원받아 천국에 가기 위해서입니다. 진리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믿기에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사실도 믿습니다. 천국에서 각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급이 다르다는 것도 알지요. 그러니 더 열심히 성결을 이루며 충성하려고 노력합니다. 이처럼 진리와 함께 온전히 기뻐하지는 못한다 해도, 각자 믿음의 분량대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로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의를 벗고 오직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영적인 사랑을 온전히 이루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 ( ) 안에 알맞은 답을 넣어 보세요.
1. 사랑은‘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다’는 것은 ( )에 악은 ( )도 품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랑은 ‘( )를 기뻐하지 않는 것’은 행위로 드러나는 어떤 불미스런 일들을 기뻐하지 않고 거기에 가담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2.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① ( )을 기뻐하는 것이다.
② ( )에 속한 모든 것을 기뻐하는 것이다.
③ ( )을 믿고 그대로 행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불의를 행하다가 멸망당한 ‘아간’
아간은 여리고성을 함락시킬 때 전리품을 숨겨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죽임당한 사람이다. 여호수아는 전리품을 모두 하나님께 바치라고 명령했는데 아간은 시날 산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중의 금덩이 하나를 취한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은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하고 만다. 결국 아간은 그의 가족들과 소유물들과 함께 돌에 맞은 후 불살라졌다. 그 위에 돌무더기를 쌓았는데, 그곳이 바로 아골 골짜기이다(수 7장).
교육목표 :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불의란 무엇이며,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지 깨닫게 한다.
불의는 국가의 흥망성쇠를 결정하고 개인의 삶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1.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것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랑의 속성 중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지만 차이가 있습니다.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다’는 것은 마음에 악은 모양도 품지 않는다는 뜻이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것’은 행위로 드러나는 불의한 일들을 기뻐하지 않으며, 거기에 가담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가령, 부유한 친구를 보았을 때 시기, 질투가 나서 ‘친구는 잘사는데 나는 이게 뭔가? 친구가 망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스쳤다고 합시다. 이는 악한 생각입니다.
그런데 그 친구의 회사가 부도났을 때, “잘산다고 뽐내더니 고소하다.” 하면서 쾌재를 부른다면 이는 불의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악한 일에 동조하고 가담했다면 적극적으로 불의를 기뻐한 것이지요. 불의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1) 세상 사람들도 불의라고 여기는 경우
세상 사람들이 볼 때도 불의라 여기는 ‘일반적인 불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옳지 않은 방법으로 부를 축적하거나 법과 절차를 어기면서까지 자신의 이익을 쌓아나가는 것은 불의입니다. 판사가 뇌물을 받고 부당한 판결을 내려 죄 없는 사람이 억울한 처벌을 받았다면 이 또한 불의이지요.
역대하 19장 7절에 “너희는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삼가 행하라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불의함도 없으시고 편벽됨도 없으시고 뇌물을 받으심도 없으시니라” 말씀합니다. 사람의 눈은 가릴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으니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사랑을 받는 사람은 정당한 대가 외에는 바라지 않지요.
2) 하나님께서 불의라고 여기시는 경우
주 안에서의 불의는 일반적인 의미와는 조금 다릅니다. 세상의 법을 어기거나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뿐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어긋나는 온갖 죄가 다 불의입니다. 불의는 마음의 악이 구체적인 형태로 나온 죄이며, 죄 중에서도 특히 육체의 일에 해당합니다. 즉 마음에 있는 미움, 시기, 질투와 같은 악이 다툼, 폭행, 사기, 살인 등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온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9~10절에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말씀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안에서 불의는 구원과 직결됩니다. 그러니 불의를 행하는 형제를 본다면 애통하며 사랑으로 기도하고 말씀대로 살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나도 적당히, 좀 편하게 신앙생활 하고 싶다.’ 하며 부러워하거나 함께 동조한다면 주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없지요.
주님은 흠과 티도 없으신 분인데 불의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벧전 3:18).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의 담을 헐기 위해 화목제물이 되어 주셨지요. 바로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런 큰 사랑을 깨닫는다면 결코 불의를 기뻐해서는 안 됩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사람은 단순히 불의를 행하지 않는 차원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갑니다. 요한복음 15장 14절에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말씀했습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애통하는 사람은 그만큼 주님의 마음을 닮아 사랑이 많은 것입니다.
2.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면 불의를 행치 않을 뿐 아니라 진리를 행하고, 나아가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그렇다면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첫째로, 복음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복음이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아 천국에 간다는 복된 소식입니다. 많은 사람이 진리를 찾기 위해 사상과 철학, 학문을 탐구하며 여러 종교 교리에서 답을 얻고자 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4장 6절에 참된 진리가 무엇인지 명쾌하게 나와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말씀하셨지요. 즉 참된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통하지 않고는 천국에 갈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주님의 보혈로 죄 사함 받아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갈 수 있게 되었지요. 이처럼 삶의 목적을 알아 가치 있는 삶을 살게 되었으니 복음을 기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2장 4절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 뜻을 알기 때문에 복음을 듣고 주님을 영접해 구원받는 이들이 더해가는 것을 기뻐합니다. 자신보다 더 충성해 열매 맺는 사람을 보면 내 일처럼 기뻐하고 감사하며, 부흥하는 교회를 볼 때도 함께 기뻐하지요.
둘째로, 진리에 속한 모든 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사랑이 있으면 선, 사랑, 공의 등 진리에 속한 것을 보고 듣고 행하는 것을 기뻐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 말씀에 ‘섬기라, 이해하고 용서하라.’ 하셨으니 기쁨으로 순종합니다. 상대를 미워하고, 시기, 질투, 판단, 정죄하는 것이 너무나 싫어지지요. 그래서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사람은 상대가 잘되면 함께 기뻐하고 시기, 질투하지 않습니다. ‘상대가 잘못되었으면’ 하고 악한 생각을 하거나, 상대의 불행을 기뻐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불의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애통합니다. 또한 변개하지 않는 마음, 진실함, 정직함 등 선의 마음을 좋아합니다. 선한 말과 행실을 기뻐하지요.
요한삼서 1장 4절에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을 너무나 기뻐하십니다. 따라서 영적인 사랑을 마음에 가득 채움으로 진리에 속한 일들을 볼 때 더욱 기뻐하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하나님 말씀을 믿고 그대로 행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진리만 기뻐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마음에 어둠과 비진리가 있을 때는 악한 것을 생각하고 불의를 기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차츰 변화되어 비진리의 마음을 온전히 벗으면 진리만 기뻐하는 마음이 됩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열심히 노력하는 과정이 따르지요.
예를 들어, 초신자의 경우에는 예배드리는 것이 무조건 행복한 것만은 아닙니다. 교회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진리의 맛을 모릅니다. 예배 시간에 피곤해하거나 마음이 다른 데 있기도 하지요. 그렇지만 어찌하든 성전에 나와 예배드리며 말씀대로 순종하고자 열심히 노력합니다. 구원받아 천국에 가기 위해서입니다. 진리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믿기에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사실도 믿습니다. 천국에서 각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급이 다르다는 것도 알지요. 그러니 더 열심히 성결을 이루며 충성하려고 노력합니다. 이처럼 진리와 함께 온전히 기뻐하지는 못한다 해도, 각자 믿음의 분량대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로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의를 벗고 오직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영적인 사랑을 온전히 이루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 ( ) 안에 알맞은 답을 넣어 보세요.
1. 사랑은‘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다’는 것은 ( )에 악은 ( )도 품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랑은 ‘( )를 기뻐하지 않는 것’은 행위로 드러나는 어떤 불미스런 일들을 기뻐하지 않고 거기에 가담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2.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① ( )을 기뻐하는 것이다.
② ( )에 속한 모든 것을 기뻐하는 것이다.
③ ( )을 믿고 그대로 행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불의를 행하다가 멸망당한 ‘아간’
아간은 여리고성을 함락시킬 때 전리품을 숨겨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죽임당한 사람이다. 여호수아는 전리품을 모두 하나님께 바치라고 명령했는데 아간은 시날 산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중의 금덩이 하나를 취한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은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하고 만다. 결국 아간은 그의 가족들과 소유물들과 함께 돌에 맞은 후 불살라졌다. 그 위에 돌무더기를 쌓았는데, 그곳이 바로 아골 골짜기이다(수 7장).
2021-02-26
제9과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 것
고린도전서 13:5
읽을말씀 : 고린도전서 13:5 | 외울말씀 : 누가복음 6:45 | 참고 말씀: 야고보서 4:12, 갈라디아서 6:7
교육목표 : 악한 것이란 무엇이며, 악한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깨달아 영적인 사랑을 이루게 한다.
무슨 일이든 좋은 뜻으로, 선한 동기로 해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악한 생각을 하며 부정적으로 판단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혀 본인에게 한 말이 아닌데도 자신을 겨냥한 것이라며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기도 하고, 주위 사람들과 자주 충돌하면서 작은 일에도 과민반응을 일으킵니다. 또 쉽게 자존심에 상처를 받고 스스로를 주위와 격리시키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이처럼 악한 생각은 자신의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백해무익한 것입니다.
1.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 것
사랑의 속성 중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마음에 악은 모양도 품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가령 잘사는 친구를 보면 시기, 질투가 나고 괜히 뽐내는 것 같아 밉기도 하지요. ‘친구는 잘사는데 나는 이게 뭔가?’ ‘그가 망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스친다면 이것이 바로 악한 생각입니다.
그러면 악한 것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 말씀에 비춰 볼 때 하나님 뜻이 아닌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악한 생각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상대가 잘못되기를 바라는 생각입니다.
마음에 영적인 사랑이 있으면 결코 악한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거나 사고가 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지요. 내 아내가, 내 남편이, 내자녀가 항상 건강하고 안전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남이 잘못되기를 바라고 상대의 불행을 기뻐하는 것은 그만큼 사랑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 상대의 허물이나 약점을 들추며 전하려고 하지요.
혹여 남의 험담에 귀가 솔깃해진다면 자신을 점검해 봐야 합니다. 만일 자신의 부모를 헐뜯는다면 가만히 있을 사람이 없으며 당장 나무랄 것입니다. 혹 상대가 그릇된 길로 가는 것을 막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 위해 사실을 알아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가 아닌데도 남의 말이 궁금하고 솔깃해진다면 대개 험담하고 수군수군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잠언 17장 9절에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말씀했습니다. 선하고 사랑이 있는 사람은 남의 허물을 덮어 주려고 합니다. 또 마음에 영적인 사랑이 있으면 남이 잘될 때 시기 질투하지도 않으며 상대가 잘되고 사랑받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상대를 판단 정죄하는 생각입니다.
어떤 성도가 크리스천으로서 가서는 안 될 곳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때 여러분이라면 무슨 생각이 먼저 떠오르겠습니까? 마음에 악이 있는 만큼 ‘어떻게 저럴 수 있지?’ 하고 안 좋게 생각합니다. 좀 더 선하다면 ‘왜 저런 곳에 갈까?’ 의아해하다가 ‘뭔가 사정이 있겠지.’ 하고 좋은 쪽으로 바꾸지요. 그러나 영적인 사랑이 있으면 처음부터 악한 생각 자체가 들지 않습니다. 설령 상대에 대해 좋지 않은 말을 전해 듣는다 해도 사실을 확인할 때까지 섣불리 판단하지 않지요.
야고보서 4장 12절에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말씀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재판장으로서 판단하시기에 사람이 남을 판단하는 것은 악입니다. 설령 상대가 잘못했을지라도 영적인 사랑이 있으면 ‘상대가 옳다, 그르다’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습니다. 그를 긍휼히 여기며 어찌하든 살릴 길을 생각하지요.
영적인 사랑은 허물을 덮어 주고 용서할 뿐 아니라 상대가 회개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바른길로 가도록 진리를 알려 주고 변화되도록 감동을 줍니다. 허물 많은 사람도 사랑하기에 어찌하든 믿어 주고 도움을 주고자 하지요.
셋째로, 하나님 뜻에 위배되는 모든 생각입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도덕적이고 양심적인 사람을 선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도덕이나 양심은 선의 절대적인 기준이 아닙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것도 많습니다. 오직 하나님 말씀만이 선의 절대적인 기준입니다. 주님을 처음 영접한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아무리 선하게 살았다고 자부하던 사람도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 보면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악한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의 절대적인 기준인 하나님 말씀에 어긋난 것은 다 악이며 죄이기 때문입니다(요일 3:4).
그러면 죄와 악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이 둘을 나무에 비유한다면, ‘악’은 보이지 않는 땅속의 뿌리와 같습니다. ‘죄’는 눈에 보이는 줄기와 잎, 열매입니다. 뿌리가 있으므로 줄기와 잎, 열매가 나오듯이 죄는 악에서 나오는 산물입니다. 즉 악은 땅속 깊숙이 자리 잡은 뿌리와 같이 마음 안의 ‘속성’입니다. 이 악이 구체적인 모양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6장 45절에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말씀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욕을 하며 가시 돋친 말과 함께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이는 마음에 있는 미움이라는 악이 욕이나 가시 돋친 말, 폭력이라는 행함 곧 죄로 나온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에 악이 있다고 반드시 죄를 짓지는 않습니다. 교양이 있거나 하나님 말씀을 듣고 절제한다면 죄를 짓지는 않지요.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본성 속의 악까지 다 버려야 성결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계명도 압축하면 ‘사랑’이지요. 결국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악이며 죄입니다. 하나님과 영혼들을 사랑하는 만큼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으며 영적인 사랑을 이룰 수 있습니다.
2.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으려면
악한 것을 보고 듣지 않으면 악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만일 보고 들었다면 떠올리거나 기억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마음대로 쉽게 통제되지가 않습니다. 악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하면 더욱 잘 떠오르기 때문에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불같이 기도하면서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하지요.
혹여 일부러 악한 것을 보고 듣고 떠올리는 일은 없어야 하며 순간적으로 스치는 악한 생각까지도 버려야 합니다. 악한 일에 결코 가담해서도 안 되지요.
요한이서 1장 10~11절에 “누구든지 이 교훈(그리스도의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 말씀한 대로 철저히 악을 경계하고 용납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은 타고난 죄성과 성장하면서 보고 들은 비진리를 바탕으로 자기를 만들어 나갑니다. 주님을 영접한 후 죄성과 비진리를 발견하여 버려 나가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죄성과 비진리를 버리는 데에는 많은 인내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진리보다 비진리가 더 익숙하고, 비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만 버리기는 상대적으로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하면 그가 좋아하는 것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싫어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면 계명을 지키며 악은 모양이라도 버릴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7절에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말씀했습니다. 악은 무익한 것이요, 악을 심으면 재앙을 거둘 뿐입니다(잠 22:8). 자신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에게 질병이 오거나 사고를 당하고 가난을 겪으며 가정불화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악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악을 미워하면서 ‘말씀’과 ‘기도’가 반드시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해야 악한 생각을 물리치고 선한 생각을 할 수 있지요. 또한 불같이 기도하면서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하고 되새길 때 미처 깨닫지 못했던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실 속의 악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불같이 기도할 때에 마음의 악을 버릴 수 있지요. 그러므로 말씀과 기도로 신속히 악을 벗어 버림으로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는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악한 것을 생각하는 것이란 무엇일까요?
① 상대가 ( )되기를 바라는 생각이다.
② 상대를 ( ) ( )하는 생각이다.
③ 하나님 ( )에 ( )되는 모든 생각이다.
2. 죄와 악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3. 악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악의 모양 (살전 5:22)
사람의 본성에는 부모의 기를 통해 받은 악이 있지만 평소에는 잘 드러나지 않다가 극한 상황에 부딪히면 드러난다.
“사흘 굶어서 남의 집 담장 안 넘을 사람 없다”는 속담처럼 온전히 성결을 이루기 전에는 극한 상황에서 자신도 모르는 악이 드러나는 것이다. 파리 똥이 아무리 작아도 똥인 것처럼 설령 죄를 짓지 않는다 해도 흠도 티도 없으신 하나님에 비할 때 온전하지 않은 것이 모두 악의 모양이다.
교육목표 : 악한 것이란 무엇이며, 악한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깨달아 영적인 사랑을 이루게 한다.
무슨 일이든 좋은 뜻으로, 선한 동기로 해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악한 생각을 하며 부정적으로 판단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혀 본인에게 한 말이 아닌데도 자신을 겨냥한 것이라며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기도 하고, 주위 사람들과 자주 충돌하면서 작은 일에도 과민반응을 일으킵니다. 또 쉽게 자존심에 상처를 받고 스스로를 주위와 격리시키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이처럼 악한 생각은 자신의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백해무익한 것입니다.
1.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 것
사랑의 속성 중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마음에 악은 모양도 품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가령 잘사는 친구를 보면 시기, 질투가 나고 괜히 뽐내는 것 같아 밉기도 하지요. ‘친구는 잘사는데 나는 이게 뭔가?’ ‘그가 망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스친다면 이것이 바로 악한 생각입니다.
그러면 악한 것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 말씀에 비춰 볼 때 하나님 뜻이 아닌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악한 생각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상대가 잘못되기를 바라는 생각입니다.
마음에 영적인 사랑이 있으면 결코 악한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거나 사고가 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지요. 내 아내가, 내 남편이, 내자녀가 항상 건강하고 안전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남이 잘못되기를 바라고 상대의 불행을 기뻐하는 것은 그만큼 사랑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 상대의 허물이나 약점을 들추며 전하려고 하지요.
혹여 남의 험담에 귀가 솔깃해진다면 자신을 점검해 봐야 합니다. 만일 자신의 부모를 헐뜯는다면 가만히 있을 사람이 없으며 당장 나무랄 것입니다. 혹 상대가 그릇된 길로 가는 것을 막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 위해 사실을 알아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가 아닌데도 남의 말이 궁금하고 솔깃해진다면 대개 험담하고 수군수군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잠언 17장 9절에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말씀했습니다. 선하고 사랑이 있는 사람은 남의 허물을 덮어 주려고 합니다. 또 마음에 영적인 사랑이 있으면 남이 잘될 때 시기 질투하지도 않으며 상대가 잘되고 사랑받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상대를 판단 정죄하는 생각입니다.
어떤 성도가 크리스천으로서 가서는 안 될 곳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때 여러분이라면 무슨 생각이 먼저 떠오르겠습니까? 마음에 악이 있는 만큼 ‘어떻게 저럴 수 있지?’ 하고 안 좋게 생각합니다. 좀 더 선하다면 ‘왜 저런 곳에 갈까?’ 의아해하다가 ‘뭔가 사정이 있겠지.’ 하고 좋은 쪽으로 바꾸지요. 그러나 영적인 사랑이 있으면 처음부터 악한 생각 자체가 들지 않습니다. 설령 상대에 대해 좋지 않은 말을 전해 듣는다 해도 사실을 확인할 때까지 섣불리 판단하지 않지요.
야고보서 4장 12절에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말씀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재판장으로서 판단하시기에 사람이 남을 판단하는 것은 악입니다. 설령 상대가 잘못했을지라도 영적인 사랑이 있으면 ‘상대가 옳다, 그르다’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습니다. 그를 긍휼히 여기며 어찌하든 살릴 길을 생각하지요.
영적인 사랑은 허물을 덮어 주고 용서할 뿐 아니라 상대가 회개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바른길로 가도록 진리를 알려 주고 변화되도록 감동을 줍니다. 허물 많은 사람도 사랑하기에 어찌하든 믿어 주고 도움을 주고자 하지요.
셋째로, 하나님 뜻에 위배되는 모든 생각입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도덕적이고 양심적인 사람을 선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도덕이나 양심은 선의 절대적인 기준이 아닙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것도 많습니다. 오직 하나님 말씀만이 선의 절대적인 기준입니다. 주님을 처음 영접한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아무리 선하게 살았다고 자부하던 사람도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 보면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악한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의 절대적인 기준인 하나님 말씀에 어긋난 것은 다 악이며 죄이기 때문입니다(요일 3:4).
그러면 죄와 악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이 둘을 나무에 비유한다면, ‘악’은 보이지 않는 땅속의 뿌리와 같습니다. ‘죄’는 눈에 보이는 줄기와 잎, 열매입니다. 뿌리가 있으므로 줄기와 잎, 열매가 나오듯이 죄는 악에서 나오는 산물입니다. 즉 악은 땅속 깊숙이 자리 잡은 뿌리와 같이 마음 안의 ‘속성’입니다. 이 악이 구체적인 모양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6장 45절에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말씀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욕을 하며 가시 돋친 말과 함께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이는 마음에 있는 미움이라는 악이 욕이나 가시 돋친 말, 폭력이라는 행함 곧 죄로 나온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에 악이 있다고 반드시 죄를 짓지는 않습니다. 교양이 있거나 하나님 말씀을 듣고 절제한다면 죄를 짓지는 않지요.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본성 속의 악까지 다 버려야 성결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계명도 압축하면 ‘사랑’이지요. 결국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악이며 죄입니다. 하나님과 영혼들을 사랑하는 만큼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으며 영적인 사랑을 이룰 수 있습니다.
2.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으려면
악한 것을 보고 듣지 않으면 악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만일 보고 들었다면 떠올리거나 기억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마음대로 쉽게 통제되지가 않습니다. 악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하면 더욱 잘 떠오르기 때문에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불같이 기도하면서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하지요.
혹여 일부러 악한 것을 보고 듣고 떠올리는 일은 없어야 하며 순간적으로 스치는 악한 생각까지도 버려야 합니다. 악한 일에 결코 가담해서도 안 되지요.
요한이서 1장 10~11절에 “누구든지 이 교훈(그리스도의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 말씀한 대로 철저히 악을 경계하고 용납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은 타고난 죄성과 성장하면서 보고 들은 비진리를 바탕으로 자기를 만들어 나갑니다. 주님을 영접한 후 죄성과 비진리를 발견하여 버려 나가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죄성과 비진리를 버리는 데에는 많은 인내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진리보다 비진리가 더 익숙하고, 비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만 버리기는 상대적으로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하면 그가 좋아하는 것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싫어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면 계명을 지키며 악은 모양이라도 버릴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7절에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말씀했습니다. 악은 무익한 것이요, 악을 심으면 재앙을 거둘 뿐입니다(잠 22:8). 자신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에게 질병이 오거나 사고를 당하고 가난을 겪으며 가정불화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악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악을 미워하면서 ‘말씀’과 ‘기도’가 반드시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해야 악한 생각을 물리치고 선한 생각을 할 수 있지요. 또한 불같이 기도하면서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하고 되새길 때 미처 깨닫지 못했던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실 속의 악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불같이 기도할 때에 마음의 악을 버릴 수 있지요. 그러므로 말씀과 기도로 신속히 악을 벗어 버림으로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는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악한 것을 생각하는 것이란 무엇일까요?
① 상대가 ( )되기를 바라는 생각이다.
② 상대를 ( ) ( )하는 생각이다.
③ 하나님 ( )에 ( )되는 모든 생각이다.
2. 죄와 악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3. 악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악의 모양 (살전 5:22)
사람의 본성에는 부모의 기를 통해 받은 악이 있지만 평소에는 잘 드러나지 않다가 극한 상황에 부딪히면 드러난다.
“사흘 굶어서 남의 집 담장 안 넘을 사람 없다”는 속담처럼 온전히 성결을 이루기 전에는 극한 상황에서 자신도 모르는 악이 드러나는 것이다. 파리 똥이 아무리 작아도 똥인 것처럼 설령 죄를 짓지 않는다 해도 흠도 티도 없으신 하나님에 비할 때 온전하지 않은 것이 모두 악의 모양이다.
2021-02-19
제8과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고 성내지 않는 것
고린도전서 13:5
읽을말씀 : 고린도전서 13:5 | 외울말씀 : 야고보서 1:20 | 참고 말씀: 고린도전서 10:31, 요한복음 2:13~16
교육목표 :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고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성내지 아니하고 선과 사랑으로 마음을 채우는 성도가 되게 한다.
현대 사회는 자기의 이익만을 꾀하고 일반의 이익을 염두에 두지 않는 이기주의가 팽배합니다. 단지 개인의 이익을 위해 갓난아이들이 먹는 분유에 유해성 화학물질을 첨가하는가 하면, 국가적으로 중대한 원천 기술을 빼돌려 막대한 손실을 입히기도 합니다. 이처럼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고 일상생활에서도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지요.
1.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는 것
많은 사람이 자기의 유익을 구하면서도 잘 모르고 살아갑니다. 가령, 여러 사람이 함께 식당에 갔다고 합시다. 이때 어떤 사람은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을 주장하고, 어떤 이는 상대가 원하는 것에 맞추는 것 같지만 마음은 불편해합니다. 반면 다수가 선호하는 것을 맛있게 먹는 사람도 있습니다. 과연 여러분은 어느 유형에 해당합니까?
또 직장에서 자기 의견이 관철될 때까지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기 의견을 강하게 주장하지는 않지만 상대 의견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반면에 다른 사람의 의견을 귀 기울여 듣고, 설령 자기의 의견과 다르더라도 기쁨으로 따라 주는 사람도 있지요. 이처럼 각 사람의 마음에 얼마큼 영적인 사랑이 있느냐에 따라 나오는 현상이 다릅니다.
만일 의견 대립이 심해져서 다툼이 생기고 화평이 깨진다면 이는 바로 자기 입장만 고집하며 자기 유익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부부간에도 자기 입장만 고집하면 자꾸 부딪치고 마음에 상처만 깊어지지요. 서로 양보하고 상대 입장을 생각한다면 얼마든지 화평할 수 있는데도 자기 입장만 고집하므로 화평이 깨집니다.
우리가 상대를 사랑하면 늘 나보다는 상대를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 인물로는 아브라함을 들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이 더 이상 함께 살 수 없을 정도로 소유가 많아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롯의 목자들과 아브라함의 목자들이 가축에게 먹일 물이 부족하여 다투게 되지요.
이때 아브라함은 롯에게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하며 먼저 좋은 곳을 선택하여 떠나라고 하지요(창 13:9).
그러자 롯은 한 번의 사양도 없이 자기가 보기에 좋은 요단 들을 택하여 떠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유익만 구하여 떠난 롯에 대해 섭섭해하지 않고 잘살기만을 바랐습니다. 그가 오직 상대의 유익을 구하니 범사가 잘되고 형통하며 거부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자신의 유익을 구치 않고 기쁨으로 상대의 유익을 구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과 응답이 따릅니다.
2.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려면
우리가 영적인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는 매사에 나보다 주변을 먼저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보다 이웃, 나보다 하나님, 주님, 교회가 우선이 되어야 하지요. 가정에서도 나보다 부모, 형제, 남편, 아내, 자녀부터 돌아봐야 합니다. ㅇㅣ렇게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상대의 유익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더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십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 생활에 치우쳐 가정, 일터, 학교 등에서 남에게 피해를 주기도 합니다. 금식하여 힘이 없다며 업무에 지장을 주거나 교회 일을 한다고 가족을 등한시합니다. 학생의 본분인 학업을 게을리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경우, 자신은 놀거나 쉬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유익을 구했다고 생각지 않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주의 일에 충성했어도 온 집에 충성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본분을 다했다 할 수 없습니다. 결국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것과 같지요.
그렇다면 범사에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성령을 의뢰해야 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마음으로서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성령의 주관 따라 행하면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만 위해 살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려면 마음의 악을 버려야 합니다. 악이 없어야 마음에 참사랑을 이룰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바로 분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나 도움이 될 만한 사람에게는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배려합니다. 그러나 나를 힘들게 하고 친분이 없는 사람에게는 맞춰 주려 하지 않고 희생하기를 꺼린다면, 이는 내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마음에 맞지 않더라도 보듬어 줄 수 있어야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요, 영적인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3. 사랑은 성내지 않는 것
화를 잘 내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보다 사망률이 20%가량 높다고 합니다. 습관성 분노가 일시적으로 기분을 망치게 할 뿐 아니라 생명을 단축시키기 때문입니다. 화를 냄으로써 상대방에게 인격적인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그전에 자신의 상처가 더욱 깊어진다는 것입니다. 심하게 화를 내는 사람의 신체는 권투선수의 강펀치를 맞는 것 같은 타격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화를 참고 살면 병이 된다며 직장이나 가정에서 화를 폭발시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불이익을 당하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아무런 이유 없이 원망을 듣거나 피해를 보았을 때, 자신의 지시나 요구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누군가에게 모욕을 당했을 때 쉽게 화를 내지요. 하지만 화를 내는 것은 최악의 방법이며 심신을 망치는 지름길입니다. 화를 냄으로써 스트레스를 해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스트레스를 확대시킬 뿐이지요.
사랑은 사람의 마음을 긍정적으로 만들지만 성내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부정적으로 만듭니다. 원수 마귀 사단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성을 내도록 부추기지요. 미움과 성냄은 원수 마귀 사단의 덫입니다.
성내는 것은 단지 격렬히 화를 내고 큰소리로 욕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얼굴이 굳어지고 안색이 변하는 것, 퉁명스러운 말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의분과 성냄의 차이는 어떻게 다를까요? 요한복음 2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제사에 쓰일 가축을 내쫓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이들의 의자를 엎으셨습니다. 유월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상인들이 성전 뜰에 좌판을 펴고 돈을 환전해 주거나 가축을 사고팔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이 혈기를 내시네?’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 미움이 있어서가 아니라 의분을 내신 것입니다. 비록 좋은 목적이라도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음을 깨우쳐 주신 것이지요. 이처럼 성냄과 의분은 전혀 다릅니다. 성결하여 죄가 없을 때 의분이나 책망을 통해서도 영혼들에게 생명을 주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흔히 ‘감정이 상한다’ 하면 성냄의 전초 단계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내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없고, 영적 성장에 막대한 지장을 줍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약 1:19~20)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성을 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조건 꾹 눌러 참으면 될까요? 스프링은 누를수록 더욱 강한 반동이 생깁니다. 참아서 순간의 위기는 모면할 수 있어도 언젠가는 폭발하지요. 성내게 하는 감정 자체를 온전히 뽑아 버려야 합니다. 억지로 눌러 참는 것이 아니라 아예 참을 것이 없도록 선과 사랑으로 승화시켜야 하지요.
하루아침에 감정을 버리고 선과 사랑으로 마음을 채우기는 어렵지만 꾸준히 노력하면 됩니다. 우선 화가 나면 기도하며 참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 성내는 것이 무슨 유익을 주는가?’ 생각하면서, 후회하거나 부끄럼을 당하지 않도록 어떤 상황에서도 화를 내거나 다투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 ( ) 안에 알맞은 말을 채워 보세요.
1. 범사에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려면 ( )을 의뢰해야 한다.
2. 우리가 성내지 않기 위해서는 성내게 하는 ( ) 자체를 온전히 버리고, 억지로 눌러 참는 것이 아니라 아예 참을 것이 없도록 ( )과 ( )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3. 성결하여 죄가 없을 때 ( )이나 ( )을 통해서도 영혼들에게 생명을 주는 역사가 일어난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분냄과 성냄에 관한 성경구절
약 1:20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잠 15:18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
잠 16:32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잠 29:22 노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분하여 하는 자는 범죄함이 많으니라
전 7:9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자의 품에 머무름이니라
교육목표 :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고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성내지 아니하고 선과 사랑으로 마음을 채우는 성도가 되게 한다.
현대 사회는 자기의 이익만을 꾀하고 일반의 이익을 염두에 두지 않는 이기주의가 팽배합니다. 단지 개인의 이익을 위해 갓난아이들이 먹는 분유에 유해성 화학물질을 첨가하는가 하면, 국가적으로 중대한 원천 기술을 빼돌려 막대한 손실을 입히기도 합니다. 이처럼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고 일상생활에서도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지요.
1.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는 것
많은 사람이 자기의 유익을 구하면서도 잘 모르고 살아갑니다. 가령, 여러 사람이 함께 식당에 갔다고 합시다. 이때 어떤 사람은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을 주장하고, 어떤 이는 상대가 원하는 것에 맞추는 것 같지만 마음은 불편해합니다. 반면 다수가 선호하는 것을 맛있게 먹는 사람도 있습니다. 과연 여러분은 어느 유형에 해당합니까?
또 직장에서 자기 의견이 관철될 때까지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기 의견을 강하게 주장하지는 않지만 상대 의견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반면에 다른 사람의 의견을 귀 기울여 듣고, 설령 자기의 의견과 다르더라도 기쁨으로 따라 주는 사람도 있지요. 이처럼 각 사람의 마음에 얼마큼 영적인 사랑이 있느냐에 따라 나오는 현상이 다릅니다.
만일 의견 대립이 심해져서 다툼이 생기고 화평이 깨진다면 이는 바로 자기 입장만 고집하며 자기 유익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부부간에도 자기 입장만 고집하면 자꾸 부딪치고 마음에 상처만 깊어지지요. 서로 양보하고 상대 입장을 생각한다면 얼마든지 화평할 수 있는데도 자기 입장만 고집하므로 화평이 깨집니다.
우리가 상대를 사랑하면 늘 나보다는 상대를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 인물로는 아브라함을 들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이 더 이상 함께 살 수 없을 정도로 소유가 많아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롯의 목자들과 아브라함의 목자들이 가축에게 먹일 물이 부족하여 다투게 되지요.
이때 아브라함은 롯에게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하며 먼저 좋은 곳을 선택하여 떠나라고 하지요(창 13:9).
그러자 롯은 한 번의 사양도 없이 자기가 보기에 좋은 요단 들을 택하여 떠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유익만 구하여 떠난 롯에 대해 섭섭해하지 않고 잘살기만을 바랐습니다. 그가 오직 상대의 유익을 구하니 범사가 잘되고 형통하며 거부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자신의 유익을 구치 않고 기쁨으로 상대의 유익을 구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과 응답이 따릅니다.
2.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려면
우리가 영적인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는 매사에 나보다 주변을 먼저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보다 이웃, 나보다 하나님, 주님, 교회가 우선이 되어야 하지요. 가정에서도 나보다 부모, 형제, 남편, 아내, 자녀부터 돌아봐야 합니다. ㅇㅣ렇게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상대의 유익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더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십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 생활에 치우쳐 가정, 일터, 학교 등에서 남에게 피해를 주기도 합니다. 금식하여 힘이 없다며 업무에 지장을 주거나 교회 일을 한다고 가족을 등한시합니다. 학생의 본분인 학업을 게을리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경우, 자신은 놀거나 쉬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유익을 구했다고 생각지 않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주의 일에 충성했어도 온 집에 충성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본분을 다했다 할 수 없습니다. 결국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것과 같지요.
그렇다면 범사에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성령을 의뢰해야 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마음으로서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성령의 주관 따라 행하면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만 위해 살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려면 마음의 악을 버려야 합니다. 악이 없어야 마음에 참사랑을 이룰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바로 분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나 도움이 될 만한 사람에게는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배려합니다. 그러나 나를 힘들게 하고 친분이 없는 사람에게는 맞춰 주려 하지 않고 희생하기를 꺼린다면, 이는 내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마음에 맞지 않더라도 보듬어 줄 수 있어야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요, 영적인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3. 사랑은 성내지 않는 것
화를 잘 내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보다 사망률이 20%가량 높다고 합니다. 습관성 분노가 일시적으로 기분을 망치게 할 뿐 아니라 생명을 단축시키기 때문입니다. 화를 냄으로써 상대방에게 인격적인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그전에 자신의 상처가 더욱 깊어진다는 것입니다. 심하게 화를 내는 사람의 신체는 권투선수의 강펀치를 맞는 것 같은 타격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화를 참고 살면 병이 된다며 직장이나 가정에서 화를 폭발시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불이익을 당하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아무런 이유 없이 원망을 듣거나 피해를 보았을 때, 자신의 지시나 요구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누군가에게 모욕을 당했을 때 쉽게 화를 내지요. 하지만 화를 내는 것은 최악의 방법이며 심신을 망치는 지름길입니다. 화를 냄으로써 스트레스를 해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스트레스를 확대시킬 뿐이지요.
사랑은 사람의 마음을 긍정적으로 만들지만 성내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부정적으로 만듭니다. 원수 마귀 사단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성을 내도록 부추기지요. 미움과 성냄은 원수 마귀 사단의 덫입니다.
성내는 것은 단지 격렬히 화를 내고 큰소리로 욕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얼굴이 굳어지고 안색이 변하는 것, 퉁명스러운 말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의분과 성냄의 차이는 어떻게 다를까요? 요한복음 2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제사에 쓰일 가축을 내쫓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이들의 의자를 엎으셨습니다. 유월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상인들이 성전 뜰에 좌판을 펴고 돈을 환전해 주거나 가축을 사고팔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이 혈기를 내시네?’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 미움이 있어서가 아니라 의분을 내신 것입니다. 비록 좋은 목적이라도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음을 깨우쳐 주신 것이지요. 이처럼 성냄과 의분은 전혀 다릅니다. 성결하여 죄가 없을 때 의분이나 책망을 통해서도 영혼들에게 생명을 주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흔히 ‘감정이 상한다’ 하면 성냄의 전초 단계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내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없고, 영적 성장에 막대한 지장을 줍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약 1:19~20)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성을 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조건 꾹 눌러 참으면 될까요? 스프링은 누를수록 더욱 강한 반동이 생깁니다. 참아서 순간의 위기는 모면할 수 있어도 언젠가는 폭발하지요. 성내게 하는 감정 자체를 온전히 뽑아 버려야 합니다. 억지로 눌러 참는 것이 아니라 아예 참을 것이 없도록 선과 사랑으로 승화시켜야 하지요.
하루아침에 감정을 버리고 선과 사랑으로 마음을 채우기는 어렵지만 꾸준히 노력하면 됩니다. 우선 화가 나면 기도하며 참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 성내는 것이 무슨 유익을 주는가?’ 생각하면서, 후회하거나 부끄럼을 당하지 않도록 어떤 상황에서도 화를 내거나 다투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 ( ) 안에 알맞은 말을 채워 보세요.
1. 범사에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려면 ( )을 의뢰해야 한다.
2. 우리가 성내지 않기 위해서는 성내게 하는 ( ) 자체를 온전히 버리고, 억지로 눌러 참는 것이 아니라 아예 참을 것이 없도록 ( )과 ( )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3. 성결하여 죄가 없을 때 ( )이나 ( )을 통해서도 영혼들에게 생명을 주는 역사가 일어난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분냄과 성냄에 관한 성경구절
약 1:20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잠 15:18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
잠 16:32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잠 29:22 노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분하여 하는 자는 범죄함이 많으니라
전 7:9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자의 품에 머무름이니라
2021-02-12
제7과사랑은 교만하지 않고 무례히 행치 않는 것
고린도전서 13:4~5
읽을말씀 : 고린도전서 13:4~5 | 외울말씀 : 잠언 16:18 | 참고 말씀 / 야고보서 4:10
교육목표 :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교만과 무례한 행동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섬김과 영적인 사랑을 이루는 성도가 되게 한다.
자기 자랑이 많은 사람은 남보다 우월하다 느끼고 쉽게 교만에 빠집니다. 또 일이 술술 풀리고 잘되면 자기가 잘나서 그런 줄 알고 우쭐대거나 나태해지기 쉽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특히 싫어하시는 악 중에 하나가 바로 교만입니다. 서로 소통할 수 없도록 이 땅의 언어가 혼잡하게 나뉘었던 바벨탑 사건도 사람이 하나님과 겨루고자 하는 교만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1. 사랑은 교만하지 아니하며
교만이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지 못하고 무시하는 것, 내가 모든 면에서 우월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을 제일로 여깁니다. 매사에 상대를 무시하고 얕잡아보며 가르치려 하지요. 자신을 가르쳐 주고 이끌어 준 사람이나 질서상 윗사람까지도 무시합니다.
윗사람이 어떤 권면이나 지적을 해 주어도 “뭘 모르고 저렇게 말씀하시네.”라고 불평하거나 “그 정도는 나도 다 아는데…. 잘할 수 있는데.” 하고 귀찮아합니다. 이런 사람과 대화를 하면 곧잘 변론으로 이어집니다.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며 혈기를 내니 결국 다툼과 싸움으로 번지는 일도 있지요.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설령 자신의 주장이 옳고 상대가 틀려도 변론하지 않습니다. 백 퍼센트 확신이 있다 해도 만에 하나 자신이 맞지 않을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 두지요. 굳이 상대를 누르고 싶은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마음에는 그만큼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영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상대가 자신에 비해 가난하든 배움이 적든, 힘이 약하든 진심으로 자신보다 낫게 여기지요. 모든 영혼은 예수님의 피 값으로 구원받은 하나님 자녀로서 존귀한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2. 육적인 교만과 영적인 교만
교만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대체로 눈에 띄게 자신을 뽐내고, 남을 무시하는 등 겉으로 드러나는 교만을 육적인 교만이라고 합니다. 주님을 영접하여 진리를 알면 육적인 교만을 버리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버려집니다. 하지만 영적인 교만은 스스로 발견하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버리기도 어렵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 말씀을 들어 많이 압니다. 직분과 사명을 받아 위치가 높아지지요. 그러다 보면 자신이 아는 말씀을 마음에 이룬 것처럼 착각합니다. 또 상대를 지적하고 판단, 정죄하면서도 자신은 진리로 옳고 그름을 분별한다 하지요. 마음이 높아지니 꼭 지켜야 할 절차도 무시해 버립니다. 명백히 질서를 거스르는 행동인데도 ‘나는 이만한 위치에 있으니 괜찮다. 나는 예외다.’라고 생각하지요. 이처럼 높아진 마음을 영적인 교만이라고 합니다.
잠언 16장 18절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말씀했습니다. 또 야고보서 4장 10절에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하셨습니다. 즉 낮아지면 주님께서 높여 주시지요.
작은 웅덩이에 고여 있는 물은 썩지만 끊임없이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은 끝을 알 수 없는 대양에 이르러 생명의 보고(寶庫)를 이룹니다. 그러므로 겸손으로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 앞에 지극히 큰 자, 존귀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식사 매너, 대화 매너, 전화받는 매너, 공공장소에서의 매너 등 우리의 생활 속에는 다양한 예절이 필요합니다. 이는 사소한 것 같지만 당연히 갖추어야 할 기본 소양이지요. 바른 몸가짐과, 때와 장소에 맞는 언행은 상대에게 호감을 갖게 합니다. 반대로 기본적인 예의가 결여되어 있으면 주변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줍니다.
무례하다는 것은 ‘예의가 없는 것, 예의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많은 사람이 무례히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간에 거슬리는 행동을 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모르지요.
그러면 하나님 앞에 무례를 범한다는 것은 어떤 경우를 말할까요?
가령, 예배 시간에 좁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대통령이나 상사 앞에서 조는 것도 무례한 일인데, 하물며 하나님 앞에 존다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진실인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예배 시간에 대화하거나 딴생각을 하는 것도 매우 무례한 일입니다. 예배 도중에 나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를 돕는 사명 때문에 나가는 경우를 빼고는 끝까지 자리에 앉아 예배에 집중해야 합니다. 묵도나 사도신경으로 시작해서 축도나 주기도문으로 마칠 때까지 모든 순서를 마음 다해 드려야 하지요. 찬양이나 기도 시간은 물론 헌금이나 광고 시간에도 집중해야 합니다.
예배 시간에 지각하는 것도 하나님 앞에 무례한 행동입니다. 사람들과의 약속 시간에도 늦으면 민망한데 예배에 지각한다는 것은 너무 불손한 행동이지요. 예배를 시작하기 전에 미리 와서 기도로 준비하는 것이 당연한 예의입니다.
이 밖에도 술 담배를 하고 예배드리거나 예배 시간에 휴대폰을 사용하는 것, 아이들이 떠들고 장난하는 것을 방치하는 것, 껌을 씹거나 음식을 먹는 것도 무례한 행동이지요.
예배에 나올 때 몸가짐도 중요합니다. 집에서 편하게 입던 옷 그대로 아무렇게나 오는 것은 예의가 아닙니다. 복장은 상대에 대한 존경심을 표시하는 에티켓입니다.
물론 예외의 경우도 있습니다. 직장에서 바로 오는 경우에는, 예배 시간에 맞춰 서두르다 보면 작업복 차림으로 올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하나님께서 바쁜 일과 중에도 어찌하든 예배에 참석하려는 마음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와 기도를 통해 사랑의 교제를 하기 원하십니다. 특히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상대가 기도하고 있는데 다급한 일로 툭툭 쳐서 기도를 중단시킨다면 마치 윗사람과 대화할 때 불쑥 끼어드는 것과 같습니다. 또 기도하는데 누가 자신을 부른다고 곧바로 멈춘다면 하나님과의 대화를 일방적으로 끝내는 것이지요. 마무리 기도까지 마친 후 응수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성전에서도 무례히 행하는 일들이 빈번합니다. 성전은 예배실뿐 아니라, 마당과 부속 시설 등 모든 공간을 의미합니다. 성전에서 큰소리로 다투거나 사업이나 연예인, 드라마, 오락 등 세상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성물을 함부로 다루어 상하게 하거나 헌금봉투를 임의로 사용해서도 안 되지요. 성전 부속 사무실에서 인터넷 결제를 하고 물건을 받는 것 역시 명백한 매매입니다. 교회 마당에서 바자회 같은 행사를 여는 것도 합당치 않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에게 무례한 행동이란 어떤 것일까요?
보통 상대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유익만을 구하다 보니 무례함이 나옵니다. 가령, 밤늦게 전화를 한다거나 바쁜 사람에게 전화해서 장시간 붙들고 있다면 상대에게 피해를 주는 것입니다. 또 약속 시간에 늦는 것, 남의 집에 예고 없이 불쑥 찾아가는 것도 무례한 일입니다. 내 편에서는 친해서라고 여기지만 상대는 다를 수 있지요. 가깝고 편한 사이일수록 더 조심하며 무례히 행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가까운 사이라 해서 말을 가리지 않고 함부로 하여 상처를 주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가족 또는 절친한 친구에게 예의 없이 대하다 보면 오히려 남보다 못한 관계가 될 수도 있습니다. 또 나이가 어리거나 지위가 낮은 사람한테 쉽게 반말을 하거나 무시하고 명령하는 태도는 불쾌감을 줍니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 사이에도 도리를 다하는 것이니 세상의 법과 질서도 잘 지켜서 무례히 행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공공장소에서 소란을 피우거나 침을 뱉고 교통 법규를 어기는 것도 무례한 행위이지요.
우리는 세상의 빛과 소금 역할을 감당해야 할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므로 더욱 말과 행실에 본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 육체의 결여 속에 하나님과 사람 앞에 무례히 행치 않는지 체크해봅시다.
□ 예배 시간이나 다니엘철야 시간에 핸드폰을 사용한다.
□ 성전에서 드라마나 연예인, 직장, 사업터 이야기를 한다.
□ 예배 시간에 지각하거나 시간이 임박해 헐레벌떡 온다.
□ 축도나 주기도문이 끝나기 전에 나간다.
□ 친하다고 밤늦게 전화를 스스럼없이 한다.
□ 아무에게나 쉽게 반말을 한다.
□ 약속 시간을 종종 어긴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육체의 결여란?
사람이 성장하면서 거쳐야 할 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못함으로 인해
보편적으로 갖춰야 할 능력이 부족한 상태를 통틀어 일컫는다.
유아기, 아동기, 청소년기 과정을 정상적으로 거치지 못하면
지적인 능력, 행동 능력이 결여되거나 정서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많이 동떨어진 감정 상태를 느낀다.
육체의 결여는 범위가 넓고 형태도 다양하며, 신앙생활 전반에
영향을 끼친다.
교육목표 :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교만과 무례한 행동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섬김과 영적인 사랑을 이루는 성도가 되게 한다.
자기 자랑이 많은 사람은 남보다 우월하다 느끼고 쉽게 교만에 빠집니다. 또 일이 술술 풀리고 잘되면 자기가 잘나서 그런 줄 알고 우쭐대거나 나태해지기 쉽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특히 싫어하시는 악 중에 하나가 바로 교만입니다. 서로 소통할 수 없도록 이 땅의 언어가 혼잡하게 나뉘었던 바벨탑 사건도 사람이 하나님과 겨루고자 하는 교만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1. 사랑은 교만하지 아니하며
교만이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지 못하고 무시하는 것, 내가 모든 면에서 우월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을 제일로 여깁니다. 매사에 상대를 무시하고 얕잡아보며 가르치려 하지요. 자신을 가르쳐 주고 이끌어 준 사람이나 질서상 윗사람까지도 무시합니다.
윗사람이 어떤 권면이나 지적을 해 주어도 “뭘 모르고 저렇게 말씀하시네.”라고 불평하거나 “그 정도는 나도 다 아는데…. 잘할 수 있는데.” 하고 귀찮아합니다. 이런 사람과 대화를 하면 곧잘 변론으로 이어집니다.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며 혈기를 내니 결국 다툼과 싸움으로 번지는 일도 있지요.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설령 자신의 주장이 옳고 상대가 틀려도 변론하지 않습니다. 백 퍼센트 확신이 있다 해도 만에 하나 자신이 맞지 않을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 두지요. 굳이 상대를 누르고 싶은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마음에는 그만큼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영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상대가 자신에 비해 가난하든 배움이 적든, 힘이 약하든 진심으로 자신보다 낫게 여기지요. 모든 영혼은 예수님의 피 값으로 구원받은 하나님 자녀로서 존귀한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2. 육적인 교만과 영적인 교만
교만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대체로 눈에 띄게 자신을 뽐내고, 남을 무시하는 등 겉으로 드러나는 교만을 육적인 교만이라고 합니다. 주님을 영접하여 진리를 알면 육적인 교만을 버리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버려집니다. 하지만 영적인 교만은 스스로 발견하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버리기도 어렵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 말씀을 들어 많이 압니다. 직분과 사명을 받아 위치가 높아지지요. 그러다 보면 자신이 아는 말씀을 마음에 이룬 것처럼 착각합니다. 또 상대를 지적하고 판단, 정죄하면서도 자신은 진리로 옳고 그름을 분별한다 하지요. 마음이 높아지니 꼭 지켜야 할 절차도 무시해 버립니다. 명백히 질서를 거스르는 행동인데도 ‘나는 이만한 위치에 있으니 괜찮다. 나는 예외다.’라고 생각하지요. 이처럼 높아진 마음을 영적인 교만이라고 합니다.
잠언 16장 18절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말씀했습니다. 또 야고보서 4장 10절에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하셨습니다. 즉 낮아지면 주님께서 높여 주시지요.
작은 웅덩이에 고여 있는 물은 썩지만 끊임없이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은 끝을 알 수 없는 대양에 이르러 생명의 보고(寶庫)를 이룹니다. 그러므로 겸손으로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 앞에 지극히 큰 자, 존귀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식사 매너, 대화 매너, 전화받는 매너, 공공장소에서의 매너 등 우리의 생활 속에는 다양한 예절이 필요합니다. 이는 사소한 것 같지만 당연히 갖추어야 할 기본 소양이지요. 바른 몸가짐과, 때와 장소에 맞는 언행은 상대에게 호감을 갖게 합니다. 반대로 기본적인 예의가 결여되어 있으면 주변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줍니다.
무례하다는 것은 ‘예의가 없는 것, 예의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많은 사람이 무례히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간에 거슬리는 행동을 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모르지요.
그러면 하나님 앞에 무례를 범한다는 것은 어떤 경우를 말할까요?
가령, 예배 시간에 좁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대통령이나 상사 앞에서 조는 것도 무례한 일인데, 하물며 하나님 앞에 존다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진실인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예배 시간에 대화하거나 딴생각을 하는 것도 매우 무례한 일입니다. 예배 도중에 나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를 돕는 사명 때문에 나가는 경우를 빼고는 끝까지 자리에 앉아 예배에 집중해야 합니다. 묵도나 사도신경으로 시작해서 축도나 주기도문으로 마칠 때까지 모든 순서를 마음 다해 드려야 하지요. 찬양이나 기도 시간은 물론 헌금이나 광고 시간에도 집중해야 합니다.
예배 시간에 지각하는 것도 하나님 앞에 무례한 행동입니다. 사람들과의 약속 시간에도 늦으면 민망한데 예배에 지각한다는 것은 너무 불손한 행동이지요. 예배를 시작하기 전에 미리 와서 기도로 준비하는 것이 당연한 예의입니다.
이 밖에도 술 담배를 하고 예배드리거나 예배 시간에 휴대폰을 사용하는 것, 아이들이 떠들고 장난하는 것을 방치하는 것, 껌을 씹거나 음식을 먹는 것도 무례한 행동이지요.
예배에 나올 때 몸가짐도 중요합니다. 집에서 편하게 입던 옷 그대로 아무렇게나 오는 것은 예의가 아닙니다. 복장은 상대에 대한 존경심을 표시하는 에티켓입니다.
물론 예외의 경우도 있습니다. 직장에서 바로 오는 경우에는, 예배 시간에 맞춰 서두르다 보면 작업복 차림으로 올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하나님께서 바쁜 일과 중에도 어찌하든 예배에 참석하려는 마음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와 기도를 통해 사랑의 교제를 하기 원하십니다. 특히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상대가 기도하고 있는데 다급한 일로 툭툭 쳐서 기도를 중단시킨다면 마치 윗사람과 대화할 때 불쑥 끼어드는 것과 같습니다. 또 기도하는데 누가 자신을 부른다고 곧바로 멈춘다면 하나님과의 대화를 일방적으로 끝내는 것이지요. 마무리 기도까지 마친 후 응수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성전에서도 무례히 행하는 일들이 빈번합니다. 성전은 예배실뿐 아니라, 마당과 부속 시설 등 모든 공간을 의미합니다. 성전에서 큰소리로 다투거나 사업이나 연예인, 드라마, 오락 등 세상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성물을 함부로 다루어 상하게 하거나 헌금봉투를 임의로 사용해서도 안 되지요. 성전 부속 사무실에서 인터넷 결제를 하고 물건을 받는 것 역시 명백한 매매입니다. 교회 마당에서 바자회 같은 행사를 여는 것도 합당치 않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에게 무례한 행동이란 어떤 것일까요?
보통 상대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유익만을 구하다 보니 무례함이 나옵니다. 가령, 밤늦게 전화를 한다거나 바쁜 사람에게 전화해서 장시간 붙들고 있다면 상대에게 피해를 주는 것입니다. 또 약속 시간에 늦는 것, 남의 집에 예고 없이 불쑥 찾아가는 것도 무례한 일입니다. 내 편에서는 친해서라고 여기지만 상대는 다를 수 있지요. 가깝고 편한 사이일수록 더 조심하며 무례히 행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가까운 사이라 해서 말을 가리지 않고 함부로 하여 상처를 주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가족 또는 절친한 친구에게 예의 없이 대하다 보면 오히려 남보다 못한 관계가 될 수도 있습니다. 또 나이가 어리거나 지위가 낮은 사람한테 쉽게 반말을 하거나 무시하고 명령하는 태도는 불쾌감을 줍니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 사이에도 도리를 다하는 것이니 세상의 법과 질서도 잘 지켜서 무례히 행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공공장소에서 소란을 피우거나 침을 뱉고 교통 법규를 어기는 것도 무례한 행위이지요.
우리는 세상의 빛과 소금 역할을 감당해야 할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므로 더욱 말과 행실에 본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 육체의 결여 속에 하나님과 사람 앞에 무례히 행치 않는지 체크해봅시다.
□ 예배 시간이나 다니엘철야 시간에 핸드폰을 사용한다.
□ 성전에서 드라마나 연예인, 직장, 사업터 이야기를 한다.
□ 예배 시간에 지각하거나 시간이 임박해 헐레벌떡 온다.
□ 축도나 주기도문이 끝나기 전에 나간다.
□ 친하다고 밤늦게 전화를 스스럼없이 한다.
□ 아무에게나 쉽게 반말을 한다.
□ 약속 시간을 종종 어긴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육체의 결여란?
사람이 성장하면서 거쳐야 할 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못함으로 인해
보편적으로 갖춰야 할 능력이 부족한 상태를 통틀어 일컫는다.
유아기, 아동기, 청소년기 과정을 정상적으로 거치지 못하면
지적인 능력, 행동 능력이 결여되거나 정서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많이 동떨어진 감정 상태를 느낀다.
육체의 결여는 범위가 넓고 형태도 다양하며, 신앙생활 전반에
영향을 끼친다.
2021-02-05
제6과사랑은 투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는 것
고린도전서 13:4
읽을말씀 : 고린도전서 13:4 | 외울말씀 : 요한일서 2:15~16 | 참고 말씀: 욥기 4:8, 잠언 14:30
교육목표 : 투기와 육적인 자랑의 무익함을 깨닫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오직 주 안에서 자랑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가 되게 한다.
시기 질투는 무서운 범죄 행위의 암적인 요소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의 특성은 자기와 관계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잘 느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가령, 옷 가게 하는 사람이 어떤 회사원이 출세하여 인정받는다고 시기하지는 않습니다. 화장품 가게 하는 사람이 어느 농산물 가게가 잘된다고 질투하지는 않지요.
그런데 같은 업종이나 경쟁 관계에 있을 때에는 전혀 다른 현상이 나타납니다. 근처에 동일 업종의 음식점을 경영하는데 상대 쪽이 잘되면 싫고 불안해집니다. 손님들이 그 가게로 몰리면 말리고 싶어지지요. 이처럼 가까운 사이나 경쟁 관계에 있을 때 시기 질투가 심해지고 여기서 더하면 투기가 나옵니다.
1. 사랑은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투기는 마음의 시기 질투가 심해져 남에게 악을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남이 잘되거나 사랑받을 때 마음이 불편해진다는 것은 시기, 질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나보다 지식이 많고 부유하며 능력이 많은 사람을 보면 자존심이 상합니다. 같이 입사한 동료는 고속 승진을 하는데 자신은 아직도 말단이니 부럽기도 하고 마음이 씁쓸해집니다. 힘이 빠지고 일할 의욕까지 상실하지요.
이렇게 시기 질투가 있으면 낙심이 됩니다. ‘저 사람은 인정받고 사랑받는데 나는 뭔가? 왜 나는 이 모양인가?’ 하고 주저앉습니다. 상대와 나를 비교하며 열등감만 깊어지지요. 만일 영적인 사랑이 있다면 진리와 함께 기뻐해 줄 것입니다. 상대의 기쁨이 곧 나의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남이 잘되니 낙심이 되고 힘이 빠진다는 것은 그만큼 사랑이 없다는 반증입니다. 곧 ‘자기(自己)’가 살아 있다는 뜻이지요.
남보다 더 사랑과 인정을 받고 싶은 자아가 살아 있으면 자존심이 상하고 시기심이 생깁니다. 이런 시기 질투가 심해져 악한 말과 행동으로 나오는 것이 바로 투기입니다. 상대에게 해를 입히거나 심지어 살인하는 일까지 생기지요.
이처럼 투기는 악하고 추한 마음의 죄성이 겉으로 드러난 현저한 육체의 일이기 때문에 투기하는 사람은 구원받기 어렵습니다(갈 5:19∼21).
사울왕은 다윗을 투기하다가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였습니다. 다윗은 블레셋 적장 골리앗에게서 나라를 구한 은인이었습니다. 3미터 가까운 장신(長身)에 청동갑옷으로 무장한 블레셋 최고의 전사 골리앗이 40일 동안 하나님과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사울왕과 이스라엘 군대는 말 한마디 못하고 좌불안석 떨고만 있었지요.
이때 혜성처럼 나타난 다윗이 하나님을 모욕한 적장을 물맷돌로 단번에 쓰러뜨립니다. 이스라엘은 대승리를 거두고 다윗은 일약 국가적 영웅이 되고 백성들의 인기를 독차지하지요. 사울왕은 다윗이 맡기는 일마다 지혜롭게 해결하므로 그를 군대장관으로 삼습니다.
그런데 사울의 시기 질투를 자극하는 일이 발생하고 맙니다. 어느 날 여인들이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 18:7)라고 노래를 하였지요. 이 노래를 들은 사울왕은 심히 불쾌해하며 분개합니다.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밖에 무엇이냐?” 하며 그날부터 다윗을 주목합니다. 이튿날 악신으로 고통받는 자신을 위해 수금을 타는 다윗에게 단창을 던져 죽이려 하지요.
또 블레셋 사람의 손에 다윗이 죽도록 음모를 꾸미고, 이스라엘 최고의 무사들을 시켜 살해하려고 했습니다. 집요한 사울왕의 투기는 그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나서야 그칠 수 있었습니다.
욥기 4장 8절에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말씀했고, 잠언 14장 30절에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 말씀했습니다.
자신이 행한 악은 부메랑처럼 되돌아오기 마련입니다. 악을 뿌린 대가로 병을 얻거나 가정과 일터에 재앙을 당하기도 하지요. 시기, 질투, 투기는 백해무익하며 영으로 들어가는 데 큰 장애물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에서 온전히 뽑아내야 합니다.
2.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자랑한다는 것은 ‘자기를 드러내는 것, 자기를 내세우는 것’을 말합니다. 대개 사람들은 남보다 자신이 더 나은 분야가 있으면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많은 사람들 가운데 드러나 칭찬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런 부류의 특징은 다른 사람이 잘한 것을 인정하고 칭찬하는 데에는 몹시 인색합니다. 남이 드러나는 만큼 자신이 가려지기 때문에 상대를 깎아 내리려고 하지요. 그러니 자랑이 다툼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자랑하면 높아지고 인정받을 것 같지만 진심 어린 존경이나 사랑을 받기는 어렵습니다.
요한일서 2장 15~16절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이생의 자랑이란 현실의 모든 향락을 좇아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자랑하려는 속성을 말합니다.
육의 사람들은 가문이나 명예, 권세, 고급 승용차, 집이나 보석 등을 자랑합니다. 권세자나 유명인과 친분이 있으면 으쓱해지고 자랑스러워하지요. 이들은 인생의 가치를 세상적인 것에 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을 자랑한들 자신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해 아래서 수고한 모든 것이 헛되고(전 1:2~3), 인생은 그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이 지나가 버립니다(시 103:15). 이 세상에서 자랑하는 것으로는 참된 가치와 생명을 얻을 수 없으며 오히려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사망의 길로 갈 뿐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게 만드는 육을 벗어 버리면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나 세상을 취하고자 하는 정욕도 없어집니다.
3. 주 안에서 자랑하라
고린도전서 1장 31절에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말씀했습니다. 자신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랑하라는 것이지요.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십자가를 자랑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응답받은 것을 간증하는 일은 매우 바람직합니다. 이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사람들에게 믿음과 소망을 심어 주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주 안에서 자랑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영육 간에 축복으로 갚아 주십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는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 하면서 자기를 자랑합니다. “내가 이만큼 노력했기 때문에 축복받을 수 있었다”며 은근히 자신을 드러내지요. 결국에는 자신의 공로로 돌리는 것이니, 사단의 송사를 받아 이런저런 시험 환난을 당하기도 합니다. 또 자신을 알아주지 않으면 하나님을 떠나는 것도 볼 수 있지요.
세상의 자랑거리는 영원한 생명이나 만족을 줄 수 없습니다. 오히려 헛된 욕심을 불러일으켜 멸망으로 가게 만들 뿐이지요.
하지만 우리 안에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채워 나가면 이생의 자랑을 뽑아 버릴 수 있는 힘이 옵니다. 마치 어렸을 때는 그렇게 좋았던 장난감이 어른이 되면 너무 시시해지는 것처럼, 마음을 진리로 채워 나가면 육적인 자랑이나 세상적인 것은 너무나 보잘것없어 보입니다.
사도 바울이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 6:14)라고 고백한 것처럼, 오직 우리를 구원하시고 천국을 주신 주님을 더욱 높이며 자랑해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다음 중 시기 질투와 육적인 자랑에 관한 말씀이 아닌 것을 고르시오.
① 사무엘상 15:22 ② 잠언 14:30 ③ 야고보서 4:16 ④ 요한일서 2:15~16
2. 다음 설명 중 맞지 않은 것을 고르시오.
① 시기 질투가 발전하여 악한 말과 행동으로 나오는 것이 투기이다.
② 이생의 자랑이란 현실의 모든 향락을 좇아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자랑하려는 속성이다.
③ 간증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사람들에게 믿음과 소망을 심어 준다.
④ 투기가 발전하여 시기 질투가 나온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랑에 관해 알려 주신 말씀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렘 9:23~24)
교육목표 : 투기와 육적인 자랑의 무익함을 깨닫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오직 주 안에서 자랑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가 되게 한다.
시기 질투는 무서운 범죄 행위의 암적인 요소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의 특성은 자기와 관계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잘 느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가령, 옷 가게 하는 사람이 어떤 회사원이 출세하여 인정받는다고 시기하지는 않습니다. 화장품 가게 하는 사람이 어느 농산물 가게가 잘된다고 질투하지는 않지요.
그런데 같은 업종이나 경쟁 관계에 있을 때에는 전혀 다른 현상이 나타납니다. 근처에 동일 업종의 음식점을 경영하는데 상대 쪽이 잘되면 싫고 불안해집니다. 손님들이 그 가게로 몰리면 말리고 싶어지지요. 이처럼 가까운 사이나 경쟁 관계에 있을 때 시기 질투가 심해지고 여기서 더하면 투기가 나옵니다.
1. 사랑은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투기는 마음의 시기 질투가 심해져 남에게 악을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남이 잘되거나 사랑받을 때 마음이 불편해진다는 것은 시기, 질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나보다 지식이 많고 부유하며 능력이 많은 사람을 보면 자존심이 상합니다. 같이 입사한 동료는 고속 승진을 하는데 자신은 아직도 말단이니 부럽기도 하고 마음이 씁쓸해집니다. 힘이 빠지고 일할 의욕까지 상실하지요.
이렇게 시기 질투가 있으면 낙심이 됩니다. ‘저 사람은 인정받고 사랑받는데 나는 뭔가? 왜 나는 이 모양인가?’ 하고 주저앉습니다. 상대와 나를 비교하며 열등감만 깊어지지요. 만일 영적인 사랑이 있다면 진리와 함께 기뻐해 줄 것입니다. 상대의 기쁨이 곧 나의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남이 잘되니 낙심이 되고 힘이 빠진다는 것은 그만큼 사랑이 없다는 반증입니다. 곧 ‘자기(自己)’가 살아 있다는 뜻이지요.
남보다 더 사랑과 인정을 받고 싶은 자아가 살아 있으면 자존심이 상하고 시기심이 생깁니다. 이런 시기 질투가 심해져 악한 말과 행동으로 나오는 것이 바로 투기입니다. 상대에게 해를 입히거나 심지어 살인하는 일까지 생기지요.
이처럼 투기는 악하고 추한 마음의 죄성이 겉으로 드러난 현저한 육체의 일이기 때문에 투기하는 사람은 구원받기 어렵습니다(갈 5:19∼21).
사울왕은 다윗을 투기하다가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였습니다. 다윗은 블레셋 적장 골리앗에게서 나라를 구한 은인이었습니다. 3미터 가까운 장신(長身)에 청동갑옷으로 무장한 블레셋 최고의 전사 골리앗이 40일 동안 하나님과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사울왕과 이스라엘 군대는 말 한마디 못하고 좌불안석 떨고만 있었지요.
이때 혜성처럼 나타난 다윗이 하나님을 모욕한 적장을 물맷돌로 단번에 쓰러뜨립니다. 이스라엘은 대승리를 거두고 다윗은 일약 국가적 영웅이 되고 백성들의 인기를 독차지하지요. 사울왕은 다윗이 맡기는 일마다 지혜롭게 해결하므로 그를 군대장관으로 삼습니다.
그런데 사울의 시기 질투를 자극하는 일이 발생하고 맙니다. 어느 날 여인들이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 18:7)라고 노래를 하였지요. 이 노래를 들은 사울왕은 심히 불쾌해하며 분개합니다.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밖에 무엇이냐?” 하며 그날부터 다윗을 주목합니다. 이튿날 악신으로 고통받는 자신을 위해 수금을 타는 다윗에게 단창을 던져 죽이려 하지요.
또 블레셋 사람의 손에 다윗이 죽도록 음모를 꾸미고, 이스라엘 최고의 무사들을 시켜 살해하려고 했습니다. 집요한 사울왕의 투기는 그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나서야 그칠 수 있었습니다.
욥기 4장 8절에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말씀했고, 잠언 14장 30절에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 말씀했습니다.
자신이 행한 악은 부메랑처럼 되돌아오기 마련입니다. 악을 뿌린 대가로 병을 얻거나 가정과 일터에 재앙을 당하기도 하지요. 시기, 질투, 투기는 백해무익하며 영으로 들어가는 데 큰 장애물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에서 온전히 뽑아내야 합니다.
2.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자랑한다는 것은 ‘자기를 드러내는 것, 자기를 내세우는 것’을 말합니다. 대개 사람들은 남보다 자신이 더 나은 분야가 있으면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많은 사람들 가운데 드러나 칭찬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런 부류의 특징은 다른 사람이 잘한 것을 인정하고 칭찬하는 데에는 몹시 인색합니다. 남이 드러나는 만큼 자신이 가려지기 때문에 상대를 깎아 내리려고 하지요. 그러니 자랑이 다툼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자랑하면 높아지고 인정받을 것 같지만 진심 어린 존경이나 사랑을 받기는 어렵습니다.
요한일서 2장 15~16절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이생의 자랑이란 현실의 모든 향락을 좇아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자랑하려는 속성을 말합니다.
육의 사람들은 가문이나 명예, 권세, 고급 승용차, 집이나 보석 등을 자랑합니다. 권세자나 유명인과 친분이 있으면 으쓱해지고 자랑스러워하지요. 이들은 인생의 가치를 세상적인 것에 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을 자랑한들 자신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해 아래서 수고한 모든 것이 헛되고(전 1:2~3), 인생은 그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이 지나가 버립니다(시 103:15). 이 세상에서 자랑하는 것으로는 참된 가치와 생명을 얻을 수 없으며 오히려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사망의 길로 갈 뿐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게 만드는 육을 벗어 버리면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나 세상을 취하고자 하는 정욕도 없어집니다.
3. 주 안에서 자랑하라
고린도전서 1장 31절에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말씀했습니다. 자신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랑하라는 것이지요.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십자가를 자랑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응답받은 것을 간증하는 일은 매우 바람직합니다. 이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사람들에게 믿음과 소망을 심어 주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주 안에서 자랑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영육 간에 축복으로 갚아 주십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는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 하면서 자기를 자랑합니다. “내가 이만큼 노력했기 때문에 축복받을 수 있었다”며 은근히 자신을 드러내지요. 결국에는 자신의 공로로 돌리는 것이니, 사단의 송사를 받아 이런저런 시험 환난을 당하기도 합니다. 또 자신을 알아주지 않으면 하나님을 떠나는 것도 볼 수 있지요.
세상의 자랑거리는 영원한 생명이나 만족을 줄 수 없습니다. 오히려 헛된 욕심을 불러일으켜 멸망으로 가게 만들 뿐이지요.
하지만 우리 안에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채워 나가면 이생의 자랑을 뽑아 버릴 수 있는 힘이 옵니다. 마치 어렸을 때는 그렇게 좋았던 장난감이 어른이 되면 너무 시시해지는 것처럼, 마음을 진리로 채워 나가면 육적인 자랑이나 세상적인 것은 너무나 보잘것없어 보입니다.
사도 바울이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 6:14)라고 고백한 것처럼, 오직 우리를 구원하시고 천국을 주신 주님을 더욱 높이며 자랑해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다음 중 시기 질투와 육적인 자랑에 관한 말씀이 아닌 것을 고르시오.
① 사무엘상 15:22 ② 잠언 14:30 ③ 야고보서 4:16 ④ 요한일서 2:15~16
2. 다음 설명 중 맞지 않은 것을 고르시오.
① 시기 질투가 발전하여 악한 말과 행동으로 나오는 것이 투기이다.
② 이생의 자랑이란 현실의 모든 향락을 좇아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자랑하려는 속성이다.
③ 간증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사람들에게 믿음과 소망을 심어 준다.
④ 투기가 발전하여 시기 질투가 나온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랑에 관해 알려 주신 말씀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렘 9:23~24)
2021-01-29
제5과사랑은 온유한 것
고린도전서 13:4
읽을말씀 : 고린도전서 13:4 | 외울말씀 : 마태복음 5:5 | 참고 말씀: 시편 37:11
교육목표 : 영적인 온유함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온유한 마음을 이룰 수 있는지 깨닫게 한다.
심리학자 ‘하아로우’ 교수가 젖먹이 원숭이들 앞에 두 개의 어미 원숭이 인형을 만들어 놓고 실험을 하였습니다. 하나는 철사로 만들고, 다른 하나는 부드러운 천으로 만들었지요. 그리고 각각 우윳병을 꽂아 두었습니다.
첫날 아기 원숭이들은 두 인형에 있는 우유를 모두 먹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부터는 철사로 만든 인형에는 한 마리도 가지 않고 부드럽고 따뜻한 인형한테만 모여들었지요. 이처럼 동물들도 차갑고 딱딱한 것보다는 부드러운 것을 선호하듯이, 인간관계에서도 날카롭고 매정한 사람보다는 온유한 사람을 선호하고, 그런 사람 품에 깃들여 쉼을 가지려고 합니다.
1.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 온유한 마음
영적으로 온유함은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마음, 많은 사람이 깃들여 쉴 수 있는 마음을 말합니다. 솜을 떠올려 보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솜은 아무리 단단한 물체가 부딪쳐 와도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딪쳐 오는 것들을 포근하게 감싸 안아 버리지요. 또한 온유한 마음은 많은 사람이 깃들여 쉴 수 있는 아름드리나무와도 같습니다. 무더운 여름 따가운 햇볕을 피하고 땀을 식히기 위해 사람들이 나무 그늘로 모여들듯이, 온유한 마음에는 많은 사람이 깃들이기 마련입니다.
세상에서는 흔히 성품이 유순해서 화를 내지 않고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은 사람을 온유하다 합니다. 나름대로 ‘이러이러한 사람이 온유하다.’라는 자기 기준이 있지요. 그러나 사람 편에서 온유하다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온유함은 다릅니다. 아무리 순하고 착해 보여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이 아니면 온유하다 할 수 없습니다. 가령, 본래 성품이 소극적이고 유약해서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따르거나 마음에서는 부글부글하는데 눌러 참는다면, 이런 사람을 온유하다고 하지 않지요. 마음속에 악을 버리지 않고 참고만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 온유한 사람은 마음에 악이 없고 지혜로우며 영적인 사랑으로 어떤 악한 사람도 대적하지 않고 포용합니다. 그렇다고 잘못했는데 무조건 용서하고 덮어 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때로는 반듯하고 위엄 있게 다스리지요. 따라서 영적인 온유함이란, 내면의 온유함과 함께 외적으로도 덕을 갖춘 상태를 말합니다.
2. 온유함의 척도는 성결
영적인 온유함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마음의 악을 버리고 성결되어야 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솜털과 같아서 누가 부딪혀 온다 해도 소리가 나지 않고 포근히 감싸 안습니다. 마음에 악이 없으니 걸리거나 부딪치지 않지요.
만일 우리 마음 안에 미움, 시기, 질투, 자기 의와 틀이 있으면 상대를 품지 못합니다. 딱딱한 돌이나 쇠에 물체가 떨어지면 깨지거나 소리를 내며 튕겨 나가는 것처럼, 자기가 있으면 누가 조금만 불편하게 해도 감정이 상합니다. 상대의 허물을 덮어 주기보다 판단 정죄하고 수군수군합니다. 누군가에게 지적을 받으면 발끈하고 마음이 상합니다. 누가 귓속말을 하면 내 험담은 하지 않나 힐끗힐끗 쳐다보고 판단하지요. 이는 소인배와 같아서 그 마음 안에 더러운 비진리가 들어 있기 때문에 진리의 마음을 더 이상 넓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악이 없는 것은 온유함의 기본 조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성결해야 ‘온유하다’ 인정해 주십니다. 마음에 악이 없어야 상대를 선과 사랑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매사에 자비와 긍휼의 마음으로 상대를 바라봅니다. 판단 정죄가 없고 선과 사랑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악한 사람이라도 그 따스함에 마음이 녹아나지요. 온전히 성결되면 성령의 주관을 정확히 받을 수 있고 양 떼의 상황을 잘 분별하여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3. 온유함을 온전케 하는 덕
사전을 보면 덕이란 ‘공정하고 남을 넓게 이해하며 받아들이는 마음이나 행동, 마음이 올바르고 사람의 도리에 합당한 일’이라 했습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덕이 있는 사람은 마음이 올바르고 공정하며 도리에 합당하게 행합니다. 잘 갖추어진 인격으로 남을 다스리지요. 상대를 물리적인 힘으로 굴복시키지 않습니다. 바른말과 행동으로 상대의 부족함을 이해하고 포용함으로써 많은 사람의 마음을 얻지요. 그러니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며 사랑을 받습니다.
덕은 우리 몸에 입는 옷과 같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지저분하고 남루한 차림으로 있으면 격이 떨어져 보입니다. 이처럼 마음이 온유해도 외적인 덕이 함께 갖춰져 있지 않으면 내면의 온유함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가령, 마음은 온유한데 대화할 때마다 불필요한 장광설을 늘어놓습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교양이 결여되어 있으니 상대에게 신뢰를 주지 못하지요. 또 마음이 온유해서 나쁜 감정을 품거나 상대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의 일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고 세심한 배려가 부족하다면, 이런 사람 역시 덕스러워 보이지는 않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이나 주변 사람들과 장난치고 농담을 하시며, 복장이 단정치 않고 신발을 질질 끌면서 다니셨다면 어떠했겠습니까? 사람들에게 존경받기가 어렵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외모에서부터 영적인 위엄과 권세가 흘러나왔기에 제자들은 물론 어떤 사람도 감히 함부로 대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것 하나 흐트러짐이 없는 모습이셨지요. 마태복음 12장 19절에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꽃에 아무리 꿀이 많아도 꽃의 고운 빛깔이 잘 드러나지도 않고 향기도 나지 않는다면 벌이나 나비가 날아오기가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온유한 사람이라 해도 말과 행실에 덕이 없으면 그 온유함이 온전히 빛을 발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말과 행실에 덕이 있는 것처럼 보여도 내면이 온유하지 않으면 외모만 포장한 것에 불과하지요. 내면의 온유함과 외면의 덕을 함께 갖출 때 온전하다 할 수 있습니다.
4. 온유한 사람이 받는 축복
우리가 마음에 악이 없고 덕을 겸비하여 온유해지면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복을 내려 주실까요? 마태복음 5장 5절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말씀했습니다. 또 시편 37편 11절에는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말씀했지요.
여기서 땅은 천국의 처소를 뜻하며,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는 것은 장차 천국에서 큰 권세를 누리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왜 그럴까요?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영혼들에게 힘을 주고 은혜를 끼칩니다. 온유할수록 더 많은 사람이 그 안에 깃들이고 그들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지요.
많은 사람을 품는다는 것은 그만큼 낮아지고 섬겼다는 뜻입니다. 하늘나라의 권세는 이처럼 섬기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마태복음 23장 11절에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신 대로 섬길수록 큰 자가 됩니다. 온유한 사람은 장차 천국에서 큰 권세를 누리고 넓은 땅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영혼이 잘되니 범사가 잘되고 축복을 받을 뿐 아니라, 천국에서도 세세토록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무수한 영혼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와 악이 없는 성결한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니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리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려 성결을 이루어, 내면의 온유함과 함께 외적으로도 덕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처럼 덕과 사랑으로 영적인 온유함을 이루어서 이 땅에서도 많은 사람을 품고 천국에서도 큰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온유함에 관한 성경 구절이 아닌 것을 고르시오.
① 민수기 12:3 ② 시편 37:11 ③ 마태복음 5:5 ④ 데살로니가전서 5:16
2. 온유함과 덕에 관한 설명 중 틀린 것을 고르시오.
① 덕이 있는 사람은 마음이 올바르고 공정하며 도리에 합당하게 행한다.
② 온유함은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마음, 많은 사람이 깃들여 쉴 수 있는 마음이다.
③ 온유한 자는 이 땅에서 넓은 땅을 상급으로 받는다.
④ 영적 온유함은 내면의 온유함과 함께 외적으로도 덕을 갖춘 것을 말한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사랑장과 성령의 열매, 팔복에서 온유의 차이
1) 사랑장의 온유(고전 13:4) : 영적인 사랑을 이루기 위한, 가장 기본적이며 기초적인 단계의 ‘온유’이다.
2) 성령의 열매의 온유(갈 5:23) : 범사에 온유한 것, 즉 포괄적인 의미의 온유를 말한다. 또한 온유함이 마음에 열매로 맺힌 것이다.
3) 팔복의 온유(마 5:5) : 마음에 열매로 맺힌 온유함이 삶 가운데 온전하게 효력을 발휘하여 축복을 끌어내리는 심화된 단계이다.
교육목표 : 영적인 온유함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온유한 마음을 이룰 수 있는지 깨닫게 한다.
심리학자 ‘하아로우’ 교수가 젖먹이 원숭이들 앞에 두 개의 어미 원숭이 인형을 만들어 놓고 실험을 하였습니다. 하나는 철사로 만들고, 다른 하나는 부드러운 천으로 만들었지요. 그리고 각각 우윳병을 꽂아 두었습니다.
첫날 아기 원숭이들은 두 인형에 있는 우유를 모두 먹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부터는 철사로 만든 인형에는 한 마리도 가지 않고 부드럽고 따뜻한 인형한테만 모여들었지요. 이처럼 동물들도 차갑고 딱딱한 것보다는 부드러운 것을 선호하듯이, 인간관계에서도 날카롭고 매정한 사람보다는 온유한 사람을 선호하고, 그런 사람 품에 깃들여 쉼을 가지려고 합니다.
1.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 온유한 마음
영적으로 온유함은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마음, 많은 사람이 깃들여 쉴 수 있는 마음을 말합니다. 솜을 떠올려 보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솜은 아무리 단단한 물체가 부딪쳐 와도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딪쳐 오는 것들을 포근하게 감싸 안아 버리지요. 또한 온유한 마음은 많은 사람이 깃들여 쉴 수 있는 아름드리나무와도 같습니다. 무더운 여름 따가운 햇볕을 피하고 땀을 식히기 위해 사람들이 나무 그늘로 모여들듯이, 온유한 마음에는 많은 사람이 깃들이기 마련입니다.
세상에서는 흔히 성품이 유순해서 화를 내지 않고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은 사람을 온유하다 합니다. 나름대로 ‘이러이러한 사람이 온유하다.’라는 자기 기준이 있지요. 그러나 사람 편에서 온유하다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온유함은 다릅니다. 아무리 순하고 착해 보여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이 아니면 온유하다 할 수 없습니다. 가령, 본래 성품이 소극적이고 유약해서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따르거나 마음에서는 부글부글하는데 눌러 참는다면, 이런 사람을 온유하다고 하지 않지요. 마음속에 악을 버리지 않고 참고만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 온유한 사람은 마음에 악이 없고 지혜로우며 영적인 사랑으로 어떤 악한 사람도 대적하지 않고 포용합니다. 그렇다고 잘못했는데 무조건 용서하고 덮어 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때로는 반듯하고 위엄 있게 다스리지요. 따라서 영적인 온유함이란, 내면의 온유함과 함께 외적으로도 덕을 갖춘 상태를 말합니다.
2. 온유함의 척도는 성결
영적인 온유함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마음의 악을 버리고 성결되어야 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솜털과 같아서 누가 부딪혀 온다 해도 소리가 나지 않고 포근히 감싸 안습니다. 마음에 악이 없으니 걸리거나 부딪치지 않지요.
만일 우리 마음 안에 미움, 시기, 질투, 자기 의와 틀이 있으면 상대를 품지 못합니다. 딱딱한 돌이나 쇠에 물체가 떨어지면 깨지거나 소리를 내며 튕겨 나가는 것처럼, 자기가 있으면 누가 조금만 불편하게 해도 감정이 상합니다. 상대의 허물을 덮어 주기보다 판단 정죄하고 수군수군합니다. 누군가에게 지적을 받으면 발끈하고 마음이 상합니다. 누가 귓속말을 하면 내 험담은 하지 않나 힐끗힐끗 쳐다보고 판단하지요. 이는 소인배와 같아서 그 마음 안에 더러운 비진리가 들어 있기 때문에 진리의 마음을 더 이상 넓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악이 없는 것은 온유함의 기본 조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성결해야 ‘온유하다’ 인정해 주십니다. 마음에 악이 없어야 상대를 선과 사랑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매사에 자비와 긍휼의 마음으로 상대를 바라봅니다. 판단 정죄가 없고 선과 사랑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악한 사람이라도 그 따스함에 마음이 녹아나지요. 온전히 성결되면 성령의 주관을 정확히 받을 수 있고 양 떼의 상황을 잘 분별하여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3. 온유함을 온전케 하는 덕
사전을 보면 덕이란 ‘공정하고 남을 넓게 이해하며 받아들이는 마음이나 행동, 마음이 올바르고 사람의 도리에 합당한 일’이라 했습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덕이 있는 사람은 마음이 올바르고 공정하며 도리에 합당하게 행합니다. 잘 갖추어진 인격으로 남을 다스리지요. 상대를 물리적인 힘으로 굴복시키지 않습니다. 바른말과 행동으로 상대의 부족함을 이해하고 포용함으로써 많은 사람의 마음을 얻지요. 그러니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며 사랑을 받습니다.
덕은 우리 몸에 입는 옷과 같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지저분하고 남루한 차림으로 있으면 격이 떨어져 보입니다. 이처럼 마음이 온유해도 외적인 덕이 함께 갖춰져 있지 않으면 내면의 온유함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가령, 마음은 온유한데 대화할 때마다 불필요한 장광설을 늘어놓습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교양이 결여되어 있으니 상대에게 신뢰를 주지 못하지요. 또 마음이 온유해서 나쁜 감정을 품거나 상대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의 일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고 세심한 배려가 부족하다면, 이런 사람 역시 덕스러워 보이지는 않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이나 주변 사람들과 장난치고 농담을 하시며, 복장이 단정치 않고 신발을 질질 끌면서 다니셨다면 어떠했겠습니까? 사람들에게 존경받기가 어렵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외모에서부터 영적인 위엄과 권세가 흘러나왔기에 제자들은 물론 어떤 사람도 감히 함부로 대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것 하나 흐트러짐이 없는 모습이셨지요. 마태복음 12장 19절에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꽃에 아무리 꿀이 많아도 꽃의 고운 빛깔이 잘 드러나지도 않고 향기도 나지 않는다면 벌이나 나비가 날아오기가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온유한 사람이라 해도 말과 행실에 덕이 없으면 그 온유함이 온전히 빛을 발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말과 행실에 덕이 있는 것처럼 보여도 내면이 온유하지 않으면 외모만 포장한 것에 불과하지요. 내면의 온유함과 외면의 덕을 함께 갖출 때 온전하다 할 수 있습니다.
4. 온유한 사람이 받는 축복
우리가 마음에 악이 없고 덕을 겸비하여 온유해지면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복을 내려 주실까요? 마태복음 5장 5절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말씀했습니다. 또 시편 37편 11절에는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말씀했지요.
여기서 땅은 천국의 처소를 뜻하며,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는 것은 장차 천국에서 큰 권세를 누리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왜 그럴까요?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영혼들에게 힘을 주고 은혜를 끼칩니다. 온유할수록 더 많은 사람이 그 안에 깃들이고 그들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지요.
많은 사람을 품는다는 것은 그만큼 낮아지고 섬겼다는 뜻입니다. 하늘나라의 권세는 이처럼 섬기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마태복음 23장 11절에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신 대로 섬길수록 큰 자가 됩니다. 온유한 사람은 장차 천국에서 큰 권세를 누리고 넓은 땅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영혼이 잘되니 범사가 잘되고 축복을 받을 뿐 아니라, 천국에서도 세세토록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무수한 영혼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와 악이 없는 성결한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니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리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려 성결을 이루어, 내면의 온유함과 함께 외적으로도 덕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처럼 덕과 사랑으로 영적인 온유함을 이루어서 이 땅에서도 많은 사람을 품고 천국에서도 큰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온유함에 관한 성경 구절이 아닌 것을 고르시오.
① 민수기 12:3 ② 시편 37:11 ③ 마태복음 5:5 ④ 데살로니가전서 5:16
2. 온유함과 덕에 관한 설명 중 틀린 것을 고르시오.
① 덕이 있는 사람은 마음이 올바르고 공정하며 도리에 합당하게 행한다.
② 온유함은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마음, 많은 사람이 깃들여 쉴 수 있는 마음이다.
③ 온유한 자는 이 땅에서 넓은 땅을 상급으로 받는다.
④ 영적 온유함은 내면의 온유함과 함께 외적으로도 덕을 갖춘 것을 말한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사랑장과 성령의 열매, 팔복에서 온유의 차이
1) 사랑장의 온유(고전 13:4) : 영적인 사랑을 이루기 위한, 가장 기본적이며 기초적인 단계의 ‘온유’이다.
2) 성령의 열매의 온유(갈 5:23) : 범사에 온유한 것, 즉 포괄적인 의미의 온유를 말한다. 또한 온유함이 마음에 열매로 맺힌 것이다.
3) 팔복의 온유(마 5:5) : 마음에 열매로 맺힌 온유함이 삶 가운데 온전하게 효력을 발휘하여 축복을 끌어내리는 심화된 단계이다.
2021-01-22
제4과사랑은 오래 참는 것
고린도전서 13:4
읽을말씀 : 고린도전서 13:4 | 외울말씀 : 마태복음 5:44 | 참고 말씀: 마태복음 5:39~40
교육목표 : 사랑은 오래 참는다는 말씀에 담긴 영적 의미를 깨닫고 영적인 오래 참음을 이루는 성도가 되게 한다.
많은 사람이 사랑을 갈구하지만 참사랑, 곧 영적인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참사랑은 우리 편에서 가지려고 애쓴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마음에서 악을 버려 나갈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면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린도전서 13장 4~7절을 통해 영적인 사랑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려 주셨습니다. 오래 참음이 부족하면 종종 상대를 절망케 합니다. 누군가에게 일을 맡겼다가 성과가 더디면 참지 못하고 그 일을 다른 사람에게 줍니다. 그러면 상대는 잘못을 만회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좌절할 수 있지요.
하나님께서 사랑의 항목 중 첫째로 오래 참음을 강조하시는 것은 사랑을 이루는 데에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참는 것이 지루하지 않습니다.
1. 오래 참는 사랑이란?
고린도전서 13장 4절 이하를 보면 영적인 사랑을 이루는 데 필요한 15가지 항목이 나옵니다. 그중에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바로 “사랑은 오래 참고”입니다. 여기서 ‘오래 참음’에 담긴 영적인 뜻은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하는 데 있어서 만나게 되는 여러 가지 시련들과 ‘나 자신’에 대해 오래 참으라는 말씀입니다.
가령, 나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누군가 시기 질투하며 미워합니다. 이런 사람이 내 주변에 있다면 사랑스럽기는커녕 피하고 싶고 우연히라도 만나고 싶지 않지요. 그러니 ‘어떻게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걱정스럽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사랑을 하려면 이런 사람들까지도 참고 사랑해야 합니다. 상대가 이유 없이 나를 헐뜯고 미워할지라도 마음을 다스려 참고 상대를 사랑해야 하지요.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랑하고자 할 때 만나게 되는 모든 어려움을 참고 견디는 것이 바로 오래 참음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사랑장의 ‘오래 참음’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의 ‘오래 참음’에 비하면 작은 범주의 사랑에 속합니다. 성령의 열매의 ‘오래 참음’은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 범사에 오래 참음인 반면, 사랑장의 ‘오래 참음’은 상대를 사랑하기 위해 참는 개인적인 차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장의 오래 참음은 성령의 열매 오래 참음의 범주 안에 포함되지요.
2. 오래 참는 사랑의 위력
마태복음 5장 44절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말씀합니다. 죄인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원수도 사랑하시고 핍박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인생들은 오직 선한 일만 행하신 예수님을 오히려 조롱하고 멸시 천대했지요. 그런데도 예수님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며 중보의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원수가 된 인생들을 오래 참으시고 사랑하셨습니다. 그 결과 주님을 구세주로 믿고 영접하는 사람마다 원수 마귀의 종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오래 참는 사랑의 힘은 위대합니다. 마태복음 5장 39~40절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말씀하십니다. 이는 사랑에 사랑을 더하라는 말씀입니다.
요즘은 남이 자기 신변이나 재산에 조금이라도 해를 끼치면 참지 못하고 곧바로 송사를 하기도 합니다. 오히려 참고 가만히 있으면 “바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자라 할지라도 악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참고 인내하며 선으로 대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믿음과 사랑이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바로 독생자 예수님을 죽인 죄인들을 오래 참으시고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믿는다면 아무리 큰 해를 끼치는 사람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생명도 아낌없이 내어주신 주님을 사랑한다면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 없지요.
3. 영적인 오래 참음을 이루려면
어떤 사람은 미움, 혈기, 감정을 억지로 꾹꾹 눌러 참다가 자기 한계점에 다다르면 폭발해 버리고 맙니다. 또 내성적인 성격으로 인해 겉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화병까지 얻는 사람도 있지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오래 참음은 변함없이 끝까지 참는 것입니다. 즉 참는다는 말 자체가 필요치 않는 참음이지요. 미움, 서운함 등을 마음에 쌓아 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생기게 하는 근본 악을 빼내 버리고 자비와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영적인 의미의 오래 참음입니다.
마음에 악이 없고 영적이 사랑만 가득하면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애당초 원수 맺을 일이 없지요. 아무리 이해 못할 사람이라도 사랑스러워 보이고, 허물이나 단점이 있어도 상대가 싫지 않습니다. 나를 미워하고 싫어해도 밉지가 않지요.
반면, 마음 안에 미움, 다툼, 시기, 질투 등 비진리가 있으면 아무리 좋은 사람을 보아도 내 마음에 맞지 않으면 단점이 보이고 싫은 마음이 앞섭니다. 또 자기가 거짓말을 잘하면 상대가 아무리 진실을 말해도 거짓말한다고 여깁니다. 그러니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렇다면 내게 악을 행하는 자에게 얼마나 오래 참아 주어야 할까요? 이에 대해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마 18:21)
그러자 예수님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고 말씀하시지요. ‘7’은 완전함을 의미하는 수로, 완전히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즉 무한대의 용서와 사랑을 말하지요.
우리가 하루아침에 미워하는 마음을 사랑으로 바꾸기란 쉽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아무리 미운 사람이라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선을 베풀고자 노력해야 하지요. 각자의 믿음의 분량에서 감정이나 혈기가 나더라도 그것을 버리기 위해 끊임없이 참고 노력하면 점점 진리로 바뀌고 영적인 사랑이 자라갑니다. 마음 깊이 뿌리내린 죄성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불같이 기도할 때 버릴 수 있습니다.
이처럼 행해 나가면 어느새 마음에서 미움이 사라지고 상대를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누구와도 걸림이 없고 미운 사람이 없으니 마치 천국에 있는 것처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행복을 느낄 때 ‘천국 같다’고 합니다. 마음에 천국이 있다는 것은 모든 비진리를 버리고 선과 사랑만 가득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상태가 되면 오래 참을 일이 없고 모두를 사랑하기 때문에 항상 기쁘고 행복하지요. 마음에 악이 없고 선한 사람일수록 오래 참을 일도 없습니다. 영적인 사랑을 이룬 만큼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라 평안함 가운데 상대가 변화되기를 기다려 주지요.
그렇다면 천국에도 오래 참음이 있을까요? 그곳에는 눈물, 슬픔, 고통, 악이 없고 오직 선과 사랑만 있습니다. 상대를 미워할 일도 없고 화를 내거나 짜증 낼 일도 없지요. 어떤 감정을 억누르고 다스리는 일 자체가 없으며, 당연히 오래 참을 일도 없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께서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람들 편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표현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면 아무리 악한 자라 할지라도 오래 참고 온전히 사랑할 수 있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사랑은 오래 참고”에 대한 말씀의 의미로 틀린 것을 고르시오.
① 사랑하는 데 있어서 만나는 여러 시련들과 자기 자신에 대해 오래 참으라는 말씀이다.
② 하나님이 원하시는 오래 참음은 변함없이 끝까지 참는 것이다.
③ 영적인 의미의 오래 참음은 미움, 서운함 등을 발동케 하는 근본 악을 빼내 버리고 자비와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④ 천국에 가서도 사랑을 이루기 위해 오래 참아야 한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성령의 열매 오래 참음을 세 가지로 분류하면?
첫째, 마음을 개조하기 위한 오래 참음(마음의 악을 버리기 위해)
둘째, 사람에 대한 오래 참음(나와 다른 사람들에 대해)
셋째, 하나님께 대한 오래 참음(하나님께 기도하고 응답받기까지)
교육목표 : 사랑은 오래 참는다는 말씀에 담긴 영적 의미를 깨닫고 영적인 오래 참음을 이루는 성도가 되게 한다.
많은 사람이 사랑을 갈구하지만 참사랑, 곧 영적인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참사랑은 우리 편에서 가지려고 애쓴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마음에서 악을 버려 나갈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면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린도전서 13장 4~7절을 통해 영적인 사랑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려 주셨습니다. 오래 참음이 부족하면 종종 상대를 절망케 합니다. 누군가에게 일을 맡겼다가 성과가 더디면 참지 못하고 그 일을 다른 사람에게 줍니다. 그러면 상대는 잘못을 만회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좌절할 수 있지요.
하나님께서 사랑의 항목 중 첫째로 오래 참음을 강조하시는 것은 사랑을 이루는 데에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참는 것이 지루하지 않습니다.
1. 오래 참는 사랑이란?
고린도전서 13장 4절 이하를 보면 영적인 사랑을 이루는 데 필요한 15가지 항목이 나옵니다. 그중에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바로 “사랑은 오래 참고”입니다. 여기서 ‘오래 참음’에 담긴 영적인 뜻은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하는 데 있어서 만나게 되는 여러 가지 시련들과 ‘나 자신’에 대해 오래 참으라는 말씀입니다.
가령, 나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누군가 시기 질투하며 미워합니다. 이런 사람이 내 주변에 있다면 사랑스럽기는커녕 피하고 싶고 우연히라도 만나고 싶지 않지요. 그러니 ‘어떻게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걱정스럽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사랑을 하려면 이런 사람들까지도 참고 사랑해야 합니다. 상대가 이유 없이 나를 헐뜯고 미워할지라도 마음을 다스려 참고 상대를 사랑해야 하지요.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랑하고자 할 때 만나게 되는 모든 어려움을 참고 견디는 것이 바로 오래 참음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사랑장의 ‘오래 참음’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의 ‘오래 참음’에 비하면 작은 범주의 사랑에 속합니다. 성령의 열매의 ‘오래 참음’은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 범사에 오래 참음인 반면, 사랑장의 ‘오래 참음’은 상대를 사랑하기 위해 참는 개인적인 차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장의 오래 참음은 성령의 열매 오래 참음의 범주 안에 포함되지요.
2. 오래 참는 사랑의 위력
마태복음 5장 44절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말씀합니다. 죄인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원수도 사랑하시고 핍박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인생들은 오직 선한 일만 행하신 예수님을 오히려 조롱하고 멸시 천대했지요. 그런데도 예수님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며 중보의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원수가 된 인생들을 오래 참으시고 사랑하셨습니다. 그 결과 주님을 구세주로 믿고 영접하는 사람마다 원수 마귀의 종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오래 참는 사랑의 힘은 위대합니다. 마태복음 5장 39~40절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말씀하십니다. 이는 사랑에 사랑을 더하라는 말씀입니다.
요즘은 남이 자기 신변이나 재산에 조금이라도 해를 끼치면 참지 못하고 곧바로 송사를 하기도 합니다. 오히려 참고 가만히 있으면 “바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자라 할지라도 악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참고 인내하며 선으로 대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믿음과 사랑이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바로 독생자 예수님을 죽인 죄인들을 오래 참으시고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믿는다면 아무리 큰 해를 끼치는 사람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생명도 아낌없이 내어주신 주님을 사랑한다면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 없지요.
3. 영적인 오래 참음을 이루려면
어떤 사람은 미움, 혈기, 감정을 억지로 꾹꾹 눌러 참다가 자기 한계점에 다다르면 폭발해 버리고 맙니다. 또 내성적인 성격으로 인해 겉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화병까지 얻는 사람도 있지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오래 참음은 변함없이 끝까지 참는 것입니다. 즉 참는다는 말 자체가 필요치 않는 참음이지요. 미움, 서운함 등을 마음에 쌓아 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생기게 하는 근본 악을 빼내 버리고 자비와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영적인 의미의 오래 참음입니다.
마음에 악이 없고 영적이 사랑만 가득하면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애당초 원수 맺을 일이 없지요. 아무리 이해 못할 사람이라도 사랑스러워 보이고, 허물이나 단점이 있어도 상대가 싫지 않습니다. 나를 미워하고 싫어해도 밉지가 않지요.
반면, 마음 안에 미움, 다툼, 시기, 질투 등 비진리가 있으면 아무리 좋은 사람을 보아도 내 마음에 맞지 않으면 단점이 보이고 싫은 마음이 앞섭니다. 또 자기가 거짓말을 잘하면 상대가 아무리 진실을 말해도 거짓말한다고 여깁니다. 그러니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렇다면 내게 악을 행하는 자에게 얼마나 오래 참아 주어야 할까요? 이에 대해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마 18:21)
그러자 예수님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고 말씀하시지요. ‘7’은 완전함을 의미하는 수로, 완전히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즉 무한대의 용서와 사랑을 말하지요.
우리가 하루아침에 미워하는 마음을 사랑으로 바꾸기란 쉽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아무리 미운 사람이라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선을 베풀고자 노력해야 하지요. 각자의 믿음의 분량에서 감정이나 혈기가 나더라도 그것을 버리기 위해 끊임없이 참고 노력하면 점점 진리로 바뀌고 영적인 사랑이 자라갑니다. 마음 깊이 뿌리내린 죄성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불같이 기도할 때 버릴 수 있습니다.
이처럼 행해 나가면 어느새 마음에서 미움이 사라지고 상대를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누구와도 걸림이 없고 미운 사람이 없으니 마치 천국에 있는 것처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행복을 느낄 때 ‘천국 같다’고 합니다. 마음에 천국이 있다는 것은 모든 비진리를 버리고 선과 사랑만 가득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상태가 되면 오래 참을 일이 없고 모두를 사랑하기 때문에 항상 기쁘고 행복하지요. 마음에 악이 없고 선한 사람일수록 오래 참을 일도 없습니다. 영적인 사랑을 이룬 만큼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라 평안함 가운데 상대가 변화되기를 기다려 주지요.
그렇다면 천국에도 오래 참음이 있을까요? 그곳에는 눈물, 슬픔, 고통, 악이 없고 오직 선과 사랑만 있습니다. 상대를 미워할 일도 없고 화를 내거나 짜증 낼 일도 없지요. 어떤 감정을 억누르고 다스리는 일 자체가 없으며, 당연히 오래 참을 일도 없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께서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람들 편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표현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면 아무리 악한 자라 할지라도 오래 참고 온전히 사랑할 수 있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사랑은 오래 참고”에 대한 말씀의 의미로 틀린 것을 고르시오.
① 사랑하는 데 있어서 만나는 여러 시련들과 자기 자신에 대해 오래 참으라는 말씀이다.
② 하나님이 원하시는 오래 참음은 변함없이 끝까지 참는 것이다.
③ 영적인 의미의 오래 참음은 미움, 서운함 등을 발동케 하는 근본 악을 빼내 버리고 자비와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④ 천국에 가서도 사랑을 이루기 위해 오래 참아야 한다.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성령의 열매 오래 참음을 세 가지로 분류하면?
첫째, 마음을 개조하기 위한 오래 참음(마음의 악을 버리기 위해)
둘째, 사람에 대한 오래 참음(나와 다른 사람들에 대해)
셋째, 하나님께 대한 오래 참음(하나님께 기도하고 응답받기까지)
2021-01-15
제3과영적인 사랑의 중요성
고린도전서 13:1~3
읽을말씀 : 고린도전서 13:1~3 | 외울말씀 : 골로새서 3:23 | 참고 말씀: 고린도전서 2:6~8
교육목표 : 영적인 사랑의 중요성과, 어떻게 하면 마음 안에 영적인 사랑을 이룰 수 있는지 알아본다.
요한복음 8장을 보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끌고 와서 예수님께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하고 묻습니다. 만일 율법대로 하면 예수님을 사랑이 없다 할 것이고, 용서하라 하면 율법을 무시한다고 정죄할 것이 뻔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바닥에 그들에게 해당되는 죄목을 하나하나 써 내려가셨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죄목을 보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 그 자리를 떠났고 여인만 남았지요. 예수님은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생명을 살리는 영적인 사랑을 지닌 분이십니다. 영적인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 고린도전서 13장 1~3절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여기서 ‘사람의 방언’이란 방언의 은사가 아닌 영어, 일어, 불어 등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의미합니다. 또한 ‘천사의 말’이란 매우 아름다운 말을 뜻합니다. 아름다운 목소리로 고운 말을 할 때 “천사같이 말한다.”고 하지요.
영적인 사랑이 담긴 말에는 생명을 살리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이 없는 말은 아무리 유창하고 아름다워도 참 기쁨과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가볍고 속이 비어 요란한 소리를 내는 구리나 꽹과리처럼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도 영적인 사랑이 없으면 쭉정이와 같습니다. 마음 안에 사랑이 가득 차서 하나님을 닮은 참 자녀가 될 때라야 인간을 경작하시는 하나님 앞에 알곡으로서 가치가 있지요. “무슨 말로 상대에게 힘이 될까?” “어떻게 하면 상대를 진리로 나오게 할까?” 기도하며, 말 한마디를 해도 상대에게 생명을 주고자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상대를 무조건 말씀으로 설득시키려 하거나 지적하여 자기 생각에 맞지 않는 부분을 고치려 듭니다. 설령 그 말이 백 번 옳다 해도 사랑에서 비롯되지 않으면 상대를 변화시키거나 참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을 할 때 내 의와 틀 속에 하지는 않는지, 그 말이 생명을 살리는 사랑에서 비롯되었는지 점검해 봐야 합니다. 어떤 유창한 말보다 영적인 사랑이 담긴 말 한마디가 사람들에게 힘과 위로가 됩니다.
2.“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예언’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앞으로 이루어질 일을 받아 선포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언은 사람의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을 입은 사람이 하나님께 받아 말하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장 21절에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말씀한 대로입니다.
여기서 ‘예언하는 능’이란 특정인에게 주어지는 은사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믿고 진리 안에 들어온 사람이라면 장차 일어날 일을 알아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장차 주님께서 강림하시면 구원받은 사람은 휴거되어 7년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7년 환난을 겪고 백보좌대심판 후 지옥에 갈 것 등을 알고 선포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예언하는 능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비밀’이란 만세 전에 감추어진 비밀, 곧 ‘십자가의 도’를 말합니다. 십자가의 도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섭리로서 하나님께서 만세 전부터 예비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범죄하여 사망으로 갈 것을 아시고 만세 전에 구세주가 될 예수님을 예비하셨습니다. 이 구원의 섭리를 성취하기까지 하나님은 비밀로 붙이셨습니다. 구원의 섭리가 알려지면 원수 마귀 사단이 방해하여 성취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고전 2:6∼8).
원수 마귀 사단은 예수님을 죽이면 아담의 범죄로 넘겨받은 권세를 영원히 가질 줄 알고 악한 사람들을 사주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죄 없으신 예수님을 죽임으로 도리어 구원의 길이 열리게 만들었지요. 이처럼 놀라운 비밀을 알아도 사랑이 없어 전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모든 지식’이란 단지 학문적인 것만이 아니라, 성경에 담긴 진리의 지식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알았다면 만나고 체험하여 마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는 데 그칠 뿐, 그 지식이 남을 판단 정죄하는 잣대가 되기도 하지요. 그러니 영적인 사랑이 없는 지식 역시 소용이 없습니다.
또한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실 때 잠시 따라 걸었습니다. 당시 베드로는 성령을 받은 것도, 죄를 버리고 마음의 할례를 한 것도 아니므로 영적인 사랑이 임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자신에게 생명의 위협이 오자 예수님을 부인하였지요.
이처럼 체험이 있을 때 믿음은 성장할 수 있지만 영적인 사랑은 죄를 버리려는 노력과 헌신, 희생이 따를 때 임합니다. 그렇다고 믿음과 사랑이 무관한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있기에 죄를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지요. 그러나 사랑을 이루려는 행함이 없으면 아무리 충성해도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3.“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자기를 자랑하고 싶어 형식적으로 구제하는 사람은 칭찬받을수록 마음이 높아지게 마련입니다. 자신을 의롭다 착각하여 마음의 할례를 하지 않으니 결국 아무 유익이 없으며 자신에게 해만 되지요. 그러나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구제는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상관이 없습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서 행한 대로 축복과 상급으로 갚아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마 6:3~4).
희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는 것은 완전히 희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희생은 사랑을 전제로 하지만 사랑 없이도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습니다. 즉 실컷 수고해 놓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과 정성, 시간, 물질을 다해 일했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면 서운해합니다. 열심 내지 않는 사람을 보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어쩜 저럴 수 있지?” 판단합니다. 이런 마음이면 자신도 힘들고 주변 사람과 화평을 깨니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있는데 어떻게 사랑 없는 희생이 나올 수 있을까요? 이는 중심에서 하나님의 것이 내 것이요, 내 것이 하나님 것이라는 주인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령, 농부가 자기 밭의 일을 할 때는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열심히 합니다. 하지만 남의 일을 할 때는 그 마음가짐이 다르지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삯을 받고 일하는 일꾼처럼 형식적으로 일하고, 당장 대가를 받지 못하면 불평이 나옵니다. 골로새서 3장 23~24절에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참된 희생을 하려면 무엇보다 마음에 영적인 사랑을 이뤄야 합니다. 마음 안에 사랑이 가득한 사람은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알아주든 몰라주든 묵묵히 헌신합니다. 마치 초가 자신의 몸을 태워 어둠을 밝히듯 아낌없이 자신을 내줍니다.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수많은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도 참사랑으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심으로 생명 다하기까지 그분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순간에도 영혼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올리셨지요. 누구든지 예수님처럼 어떤 욕심이나 거짓이 없이 자신을 희생한다면 하나님께서 높여 주시고 영광의 자리로 이끄십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인 사랑에 관한 말씀을 고르시오.
① 고린도전서 13:1~3
② 골로새서 3:23~24
③ 사도행전 13:3
④ 누가복음 17:10
2. 믿음은 있는데 어떻게 사랑 없는 희생이 나올 수 있을까요?
3. 믿음과 사랑은 비례할까요? 다르다면 왜 그런지 이유를 써 보세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계시’와 ‘예언’의 차이는?
계시 -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자에게 성령의 감동함 속에 환상이나 음성 등 여러 방법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 주시는 것, 또는 사람으로서는 풀 수 없는 영의 일들을 풀이해 주시는 것.
예언 - 성령의 감동함을 입은 사람이 하나님께 받은 계시를 고하는 일, 또는 그런 말(벧후 1:21).
교육목표 : 영적인 사랑의 중요성과, 어떻게 하면 마음 안에 영적인 사랑을 이룰 수 있는지 알아본다.
요한복음 8장을 보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끌고 와서 예수님께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하고 묻습니다. 만일 율법대로 하면 예수님을 사랑이 없다 할 것이고, 용서하라 하면 율법을 무시한다고 정죄할 것이 뻔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바닥에 그들에게 해당되는 죄목을 하나하나 써 내려가셨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죄목을 보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 그 자리를 떠났고 여인만 남았지요. 예수님은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생명을 살리는 영적인 사랑을 지닌 분이십니다. 영적인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 고린도전서 13장 1~3절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여기서 ‘사람의 방언’이란 방언의 은사가 아닌 영어, 일어, 불어 등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의미합니다. 또한 ‘천사의 말’이란 매우 아름다운 말을 뜻합니다. 아름다운 목소리로 고운 말을 할 때 “천사같이 말한다.”고 하지요.
영적인 사랑이 담긴 말에는 생명을 살리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이 없는 말은 아무리 유창하고 아름다워도 참 기쁨과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가볍고 속이 비어 요란한 소리를 내는 구리나 꽹과리처럼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도 영적인 사랑이 없으면 쭉정이와 같습니다. 마음 안에 사랑이 가득 차서 하나님을 닮은 참 자녀가 될 때라야 인간을 경작하시는 하나님 앞에 알곡으로서 가치가 있지요. “무슨 말로 상대에게 힘이 될까?” “어떻게 하면 상대를 진리로 나오게 할까?” 기도하며, 말 한마디를 해도 상대에게 생명을 주고자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상대를 무조건 말씀으로 설득시키려 하거나 지적하여 자기 생각에 맞지 않는 부분을 고치려 듭니다. 설령 그 말이 백 번 옳다 해도 사랑에서 비롯되지 않으면 상대를 변화시키거나 참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을 할 때 내 의와 틀 속에 하지는 않는지, 그 말이 생명을 살리는 사랑에서 비롯되었는지 점검해 봐야 합니다. 어떤 유창한 말보다 영적인 사랑이 담긴 말 한마디가 사람들에게 힘과 위로가 됩니다.
2.“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예언’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앞으로 이루어질 일을 받아 선포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언은 사람의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을 입은 사람이 하나님께 받아 말하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장 21절에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말씀한 대로입니다.
여기서 ‘예언하는 능’이란 특정인에게 주어지는 은사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믿고 진리 안에 들어온 사람이라면 장차 일어날 일을 알아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장차 주님께서 강림하시면 구원받은 사람은 휴거되어 7년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7년 환난을 겪고 백보좌대심판 후 지옥에 갈 것 등을 알고 선포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예언하는 능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비밀’이란 만세 전에 감추어진 비밀, 곧 ‘십자가의 도’를 말합니다. 십자가의 도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섭리로서 하나님께서 만세 전부터 예비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범죄하여 사망으로 갈 것을 아시고 만세 전에 구세주가 될 예수님을 예비하셨습니다. 이 구원의 섭리를 성취하기까지 하나님은 비밀로 붙이셨습니다. 구원의 섭리가 알려지면 원수 마귀 사단이 방해하여 성취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고전 2:6∼8).
원수 마귀 사단은 예수님을 죽이면 아담의 범죄로 넘겨받은 권세를 영원히 가질 줄 알고 악한 사람들을 사주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죄 없으신 예수님을 죽임으로 도리어 구원의 길이 열리게 만들었지요. 이처럼 놀라운 비밀을 알아도 사랑이 없어 전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모든 지식’이란 단지 학문적인 것만이 아니라, 성경에 담긴 진리의 지식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알았다면 만나고 체험하여 마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는 데 그칠 뿐, 그 지식이 남을 판단 정죄하는 잣대가 되기도 하지요. 그러니 영적인 사랑이 없는 지식 역시 소용이 없습니다.
또한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실 때 잠시 따라 걸었습니다. 당시 베드로는 성령을 받은 것도, 죄를 버리고 마음의 할례를 한 것도 아니므로 영적인 사랑이 임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자신에게 생명의 위협이 오자 예수님을 부인하였지요.
이처럼 체험이 있을 때 믿음은 성장할 수 있지만 영적인 사랑은 죄를 버리려는 노력과 헌신, 희생이 따를 때 임합니다. 그렇다고 믿음과 사랑이 무관한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있기에 죄를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지요. 그러나 사랑을 이루려는 행함이 없으면 아무리 충성해도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3.“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자기를 자랑하고 싶어 형식적으로 구제하는 사람은 칭찬받을수록 마음이 높아지게 마련입니다. 자신을 의롭다 착각하여 마음의 할례를 하지 않으니 결국 아무 유익이 없으며 자신에게 해만 되지요. 그러나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구제는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상관이 없습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서 행한 대로 축복과 상급으로 갚아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마 6:3~4).
희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는 것은 완전히 희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희생은 사랑을 전제로 하지만 사랑 없이도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습니다. 즉 실컷 수고해 놓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과 정성, 시간, 물질을 다해 일했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면 서운해합니다. 열심 내지 않는 사람을 보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어쩜 저럴 수 있지?” 판단합니다. 이런 마음이면 자신도 힘들고 주변 사람과 화평을 깨니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있는데 어떻게 사랑 없는 희생이 나올 수 있을까요? 이는 중심에서 하나님의 것이 내 것이요, 내 것이 하나님 것이라는 주인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령, 농부가 자기 밭의 일을 할 때는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열심히 합니다. 하지만 남의 일을 할 때는 그 마음가짐이 다르지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삯을 받고 일하는 일꾼처럼 형식적으로 일하고, 당장 대가를 받지 못하면 불평이 나옵니다. 골로새서 3장 23~24절에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참된 희생을 하려면 무엇보다 마음에 영적인 사랑을 이뤄야 합니다. 마음 안에 사랑이 가득한 사람은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알아주든 몰라주든 묵묵히 헌신합니다. 마치 초가 자신의 몸을 태워 어둠을 밝히듯 아낌없이 자신을 내줍니다.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수많은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도 참사랑으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심으로 생명 다하기까지 그분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순간에도 영혼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올리셨지요. 누구든지 예수님처럼 어떤 욕심이나 거짓이 없이 자신을 희생한다면 하나님께서 높여 주시고 영광의 자리로 이끄십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인 사랑에 관한 말씀을 고르시오.
① 고린도전서 13:1~3
② 골로새서 3:23~24
③ 사도행전 13:3
④ 누가복음 17:10
2. 믿음은 있는데 어떻게 사랑 없는 희생이 나올 수 있을까요?
3. 믿음과 사랑은 비례할까요? 다르다면 왜 그런지 이유를 써 보세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계시’와 ‘예언’의 차이는?
계시 -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자에게 성령의 감동함 속에 환상이나 음성 등 여러 방법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 주시는 것, 또는 사람으로서는 풀 수 없는 영의 일들을 풀이해 주시는 것.
예언 - 성령의 감동함을 입은 사람이 하나님께 받은 계시를 고하는 일, 또는 그런 말(벧후 1:21).
2021-01-08
제2과영적인 사랑과 육적인 사랑
고린도전서 13:4~7
읽을말씀 : 고린도전서 13:4~7 | 외울말씀 : 고린도전서 13:13 | 참고 말씀: 사무엘상 18:1~4
교육목표 :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적인 사랑과 자기 유익에 따라 변질되는 육적인 사랑에 대해 알아본다.
한 케이블 방송에서 기혼 여성을 대상으로 “만약 결혼을 다시 한다면 지금의 배우자를 다시 선택하겠는가?”라는 설문조사를 하였습니다. 다시 결혼하겠다는 사람은 겨우 4%에 불과했습니다. 사랑해서 결혼한 경우가 대부분일 텐데 왜 그 마음이 변한 것일까요? 바로 영적인 사랑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인 사랑이란 무엇인지 육적인 사랑과 비교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 영적인 사랑이란?
사전을 보면, 사랑은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또는 그런 일.’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더 차원 높은 영적인 사랑입니다. 곧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기쁨과 소망과 생명을 줄 뿐만 아니라, 영원히 변함없는 사랑이지요.
다윗과 요나단은 영적인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요나단은 이스라엘의 왕 사울의 아들입니다. 그는 다윗이 물맷돌로 블레셋 적장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신이 임한 용사임을 알아보았습니다. 자신도 군대를 이끄는 장수였기에 그의 용맹함이 흠모되었고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때부터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아끼고 사랑하였습니다. 다윗에게 어떠한 것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았지요.
그는 사울왕의 장남으로서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는 후계자였지만 사심이나 욕심이 없었기 때문에 왕이라는 직책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울이 왕위를 지키기 위해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을 때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다윗을 구해 주었지요. 이러한 사랑이 죽을 때까지 한결같았습니다.
요나단이 길보아 전투에서 전사하자 다윗은 식음을 폐하고 그의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왕위에 오른 후에는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찾아 사울의 재산을 모두 돌려주고 왕궁에서 자신의 아들처럼 돌봐주었습니다.
이처럼 영적인 사랑은 비록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않고 해가 될지라도 생명 다하기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떤 대가를 바라거나 나에게 잘해 준다고 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 조건 없이 순수하게 자기를 희생하며 상대를 위해 한결같이 줄 수 있는 사랑입니다.
2. 우리를 향한 하나님과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
혹여 여러분은 육적인 사랑 때문에 마음의 괴로움을 겪어 본 적이 있습니까? 쉽게 변하고 마는 사랑에 아파하고 외로워할 때 우리를 위로하고 친구가 되어 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이시지요. 주님은 아무 죄와 허물이 없는데도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멸시를 받으셨기에 누구보다 우리 마음을 잘 아십니다. 하늘 영광을 뒤로하고 이 땅에 오셔서 고난의 길을 가심으로 우리의 참된 위로자가 되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참된 사랑을 주셨지요.
우리는 당회장님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진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당회장님은 하나님을 영접하기 전 온갖 질병으로 고통받으며 가난한 삶을 사셨습니다. 7년 투병생활 끝에 남은 것이라고는 병든 몸과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빚뿐이었지요.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둘 떠나고, 철저히 외면당하고 멸시받은 인생이었습니다. 실낱같은 희망조차 없이 죽음의 문턱에 헤매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당회장님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때 단번에 모든 질병을 치료받아 새 생명을 얻었지요. 그 후 주님은 당회장님의 전부가 되셨고, 당회장님은 오직 영혼 구원을 위해 생명 다해 달려오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주신 사랑은 값없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와 손 내밀어 주셨습니다. 이사야 49장 15~16절에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요한일서 4장 9~10절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말씀하지요.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우리를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온갖 아름답고 값진 것들로 천국 처소를 예비하시고 하루를 천 년같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지요. 조금만 마음을 열어도 하나님의 섬세하고 풍성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3. 육적인 사랑
자신에게 잘해 주고, 유익이 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나 악한 사람도 합니다. 겉보기에는 그럴 듯해 보이나 실제로는 참이 아닌 가짜 사랑을 하는 것이지요. 이는 시간이 흐르면 변질되어 조그만 일에도 쉽게 깨지는 육적인 사랑입니다. 육적인 사랑은 세월이 흐르고 상황과 조건이 달라지면 변해 버립니다. 자신의 유익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하지요. 상대에게 내가 먼저 받아야 주고 자신에게 유익이 되어야 베풉니다.
이처럼 내가 준 만큼 상대에게서 받기 원하고, 상대가 주지 않으면 서운해하고 아쉬워하는 것은 모두 육적인 사랑입니다. 일반적으로 부모와 자녀 간의 사랑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부모가 정성을 다해 자녀를 뒷바라지하면서도 힘들다 하지 않는 것은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먹고 입는 것보다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기 원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부모가 자녀를 생각하는 마음 한편에는 대개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마음이 깔려 있지요. 진정 사랑한다면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자녀를 위해 생명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 유익과 영광을 위해서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다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야.”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만족을 채우거나 자랑하기 위해 자신의 뜻대로 자녀를 이끌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녀가 진로나 배우자를 선택할 때 부모의 뜻과 다르면 반대하며 서운해하지요. 결국 자녀를 위한 헌신과 희생이 대가를 바라는 조건적인 사랑이었음을 말해 줍니다.
자녀가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은 어떨까요?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처럼 부모가 늙고 병들면 무시하고 귀찮아합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떨어져 계신 부모님께 안부 전화 드리는 데도 인색합니다. 내 자녀, 내 생활 중심적이고 점점 부모님한테는 무관심해집니다. 더구나 부모에게 재산이나 돈을 요구해서 거절당하면 미워하고 심하면 부모를 죽이는 패륜적인 자녀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친구 간에 사랑은 어떻습니까? 끝까지 내 편이 되어 줄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친구의 배신으로 큰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급히 돈이 필요하다며 친구에게 목돈을 부탁하거나 담보를 서 달라고 합니다. 만일 친구가 거절하면 배신감을 느끼며 사이가 소원해지고 말지요.
정말 사랑하는 친구라면 그에게 고통을 주지 않습니다. 만약 부도가 난다면 담보를 서 준 친구와 가족들은 고통당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믿음의 형제간에 돈거래나 담보, 보증서는 일을 금하셨습니다. 이에 불순종할 경우 사단의 역사가 따르고 불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웃 간의 사랑은 어떻습니까? 요즘은 철저한 경비 시스템을 이용하여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이웃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에 이웃이 누구인지 알려고도 하지 않지요. 이웃끼리 고소하고 주차 문제 등 사소한 일로 얼굴을 붉히며 다투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이렇게 육적인 사랑은 자신의 실리를 따지고 유익이 없으면 멀리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러한 육적인 사랑이 아니라, 상대의 유익을 구하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영적인 사랑을 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인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 )
2. 육적인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 )
3. 여러분은 부모와 자녀, 형제, 친구, 성도 간에 영적인 사랑을 나누고
있는지요?
( )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물매’란?
가죽이나 천 조각에 돌멩이를 넣고 돌리다가 과녁을 향해 돌이 날아가게 하는 기구이다.
물매는 목자들이나 군인들의 무기로 사용하였다.
다윗은 물매로 골리앗을 물리쳤으며 베냐민 지파 중에서 택한 700명의 왼손잡이 병사들은 물매 사용에 능한 자들이었다(삿 20:16).
교육목표 :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적인 사랑과 자기 유익에 따라 변질되는 육적인 사랑에 대해 알아본다.
한 케이블 방송에서 기혼 여성을 대상으로 “만약 결혼을 다시 한다면 지금의 배우자를 다시 선택하겠는가?”라는 설문조사를 하였습니다. 다시 결혼하겠다는 사람은 겨우 4%에 불과했습니다. 사랑해서 결혼한 경우가 대부분일 텐데 왜 그 마음이 변한 것일까요? 바로 영적인 사랑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인 사랑이란 무엇인지 육적인 사랑과 비교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 영적인 사랑이란?
사전을 보면, 사랑은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또는 그런 일.’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더 차원 높은 영적인 사랑입니다. 곧 상대의 유익을 구하며 기쁨과 소망과 생명을 줄 뿐만 아니라, 영원히 변함없는 사랑이지요.
다윗과 요나단은 영적인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요나단은 이스라엘의 왕 사울의 아들입니다. 그는 다윗이 물맷돌로 블레셋 적장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신이 임한 용사임을 알아보았습니다. 자신도 군대를 이끄는 장수였기에 그의 용맹함이 흠모되었고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때부터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아끼고 사랑하였습니다. 다윗에게 어떠한 것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았지요.
그는 사울왕의 장남으로서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는 후계자였지만 사심이나 욕심이 없었기 때문에 왕이라는 직책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울이 왕위를 지키기 위해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을 때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다윗을 구해 주었지요. 이러한 사랑이 죽을 때까지 한결같았습니다.
요나단이 길보아 전투에서 전사하자 다윗은 식음을 폐하고 그의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왕위에 오른 후에는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찾아 사울의 재산을 모두 돌려주고 왕궁에서 자신의 아들처럼 돌봐주었습니다.
이처럼 영적인 사랑은 비록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않고 해가 될지라도 생명 다하기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떤 대가를 바라거나 나에게 잘해 준다고 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 조건 없이 순수하게 자기를 희생하며 상대를 위해 한결같이 줄 수 있는 사랑입니다.
2. 우리를 향한 하나님과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
혹여 여러분은 육적인 사랑 때문에 마음의 괴로움을 겪어 본 적이 있습니까? 쉽게 변하고 마는 사랑에 아파하고 외로워할 때 우리를 위로하고 친구가 되어 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이시지요. 주님은 아무 죄와 허물이 없는데도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멸시를 받으셨기에 누구보다 우리 마음을 잘 아십니다. 하늘 영광을 뒤로하고 이 땅에 오셔서 고난의 길을 가심으로 우리의 참된 위로자가 되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참된 사랑을 주셨지요.
우리는 당회장님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진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당회장님은 하나님을 영접하기 전 온갖 질병으로 고통받으며 가난한 삶을 사셨습니다. 7년 투병생활 끝에 남은 것이라고는 병든 몸과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빚뿐이었지요.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둘 떠나고, 철저히 외면당하고 멸시받은 인생이었습니다. 실낱같은 희망조차 없이 죽음의 문턱에 헤매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당회장님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때 단번에 모든 질병을 치료받아 새 생명을 얻었지요. 그 후 주님은 당회장님의 전부가 되셨고, 당회장님은 오직 영혼 구원을 위해 생명 다해 달려오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주신 사랑은 값없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와 손 내밀어 주셨습니다. 이사야 49장 15~16절에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요한일서 4장 9~10절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말씀하지요.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우리를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온갖 아름답고 값진 것들로 천국 처소를 예비하시고 하루를 천 년같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지요. 조금만 마음을 열어도 하나님의 섬세하고 풍성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3. 육적인 사랑
자신에게 잘해 주고, 유익이 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나 악한 사람도 합니다. 겉보기에는 그럴 듯해 보이나 실제로는 참이 아닌 가짜 사랑을 하는 것이지요. 이는 시간이 흐르면 변질되어 조그만 일에도 쉽게 깨지는 육적인 사랑입니다. 육적인 사랑은 세월이 흐르고 상황과 조건이 달라지면 변해 버립니다. 자신의 유익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하지요. 상대에게 내가 먼저 받아야 주고 자신에게 유익이 되어야 베풉니다.
이처럼 내가 준 만큼 상대에게서 받기 원하고, 상대가 주지 않으면 서운해하고 아쉬워하는 것은 모두 육적인 사랑입니다. 일반적으로 부모와 자녀 간의 사랑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부모가 정성을 다해 자녀를 뒷바라지하면서도 힘들다 하지 않는 것은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먹고 입는 것보다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기 원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부모가 자녀를 생각하는 마음 한편에는 대개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마음이 깔려 있지요. 진정 사랑한다면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자녀를 위해 생명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 유익과 영광을 위해서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다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야.”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만족을 채우거나 자랑하기 위해 자신의 뜻대로 자녀를 이끌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녀가 진로나 배우자를 선택할 때 부모의 뜻과 다르면 반대하며 서운해하지요. 결국 자녀를 위한 헌신과 희생이 대가를 바라는 조건적인 사랑이었음을 말해 줍니다.
자녀가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은 어떨까요?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처럼 부모가 늙고 병들면 무시하고 귀찮아합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떨어져 계신 부모님께 안부 전화 드리는 데도 인색합니다. 내 자녀, 내 생활 중심적이고 점점 부모님한테는 무관심해집니다. 더구나 부모에게 재산이나 돈을 요구해서 거절당하면 미워하고 심하면 부모를 죽이는 패륜적인 자녀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친구 간에 사랑은 어떻습니까? 끝까지 내 편이 되어 줄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친구의 배신으로 큰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급히 돈이 필요하다며 친구에게 목돈을 부탁하거나 담보를 서 달라고 합니다. 만일 친구가 거절하면 배신감을 느끼며 사이가 소원해지고 말지요.
정말 사랑하는 친구라면 그에게 고통을 주지 않습니다. 만약 부도가 난다면 담보를 서 준 친구와 가족들은 고통당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믿음의 형제간에 돈거래나 담보, 보증서는 일을 금하셨습니다. 이에 불순종할 경우 사단의 역사가 따르고 불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웃 간의 사랑은 어떻습니까? 요즘은 철저한 경비 시스템을 이용하여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이웃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에 이웃이 누구인지 알려고도 하지 않지요. 이웃끼리 고소하고 주차 문제 등 사소한 일로 얼굴을 붉히며 다투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이렇게 육적인 사랑은 자신의 실리를 따지고 유익이 없으면 멀리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러한 육적인 사랑이 아니라, 상대의 유익을 구하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영적인 사랑을 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영적인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 )
2. 육적인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 )
3. 여러분은 부모와 자녀, 형제, 친구, 성도 간에 영적인 사랑을 나누고
있는지요?
( )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고 복습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물매’란?
가죽이나 천 조각에 돌멩이를 넣고 돌리다가 과녁을 향해 돌이 날아가게 하는 기구이다.
물매는 목자들이나 군인들의 무기로 사용하였다.
다윗은 물매로 골리앗을 물리쳤으며 베냐민 지파 중에서 택한 700명의 왼손잡이 병사들은 물매 사용에 능한 자들이었다(삿 20:16).
2021-01-01
제1과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누가복음 5:36~39
읽을말씀 : 누가복음 5:36~39 | 외울말씀 : 에베소서 4:24 | 참고 말씀: 고린도후서 5:17
교육목표 : 새해를 맞아 새 포도주와 새 부대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깨달아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주님의 마음을 닮게 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내용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말씀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뜻을 모른 채 단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는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새해를 맞아 이 말씀의 영적인 의미를 살펴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물론, 마음의 할례를 통해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새 포도주’와 ‘묵은 포도주’의 영적 의미
누가복음 5장 3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말씀하십니다. 낡고 오래된 가죽은 신축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새 포도주를 넣으면 이산화탄소가 발생하여 결국 터지고 맙니다. 하지만 새 부대는 신축성이 좋기 때문에 그럴 염려가 없지요.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무엇을 깨우쳐 주고자 하신 것일까요? 그 의미를 알기 위해 먼저, 새 포도주와 묵은 포도주가 무엇을 뜻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을 포도나무에 비유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절에 예수님은 “내가 참 포도나무요”라고 말씀하시지요. 예수님이 포도나무라면 그 열매는 예수님이 이 땅에 사역하시면서 맺은 모든 열매라 할 수 있습니다. 즉 기사와 표적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나타내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신 모든 일들이 곧 포도나무의 열매들이지요. 또한 포도즙은 포도 열매를 짜낸 액으로, 영적으로는 예수님의 보혈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많은 열매를 내시고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보혈을 흘려 주심으로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위해 생명을 주시는 사랑으로 구약의 율법을 완성하셨지요. 따라서 주님께서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것이 신약이며, ‘새 포도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묵은 포도주’란 구약의 율법적인 삶의 방식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시기 전, 율법에 매인 삶의 방식이지요. 히브리서 10장 1절에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했습니다. 그래서 신약은 본체요,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라고 합니다.
2. 새 포도주와 묵은 포도주의 차이
구약 시대에는 사람이 죄를 사함 받으려면 짐승을 잡아 그 피로 행위적인 제사를 드렸습니다. 레위기 17장 11절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구약의 율법적인 삶의 방식이 바로 묵은 포도주를 마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보배로운 피를 흘려 주신 신약 시대에는 우리가 그 보혈의 공로를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즉 새 포도주를 마심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면 구약의 묵은 포도주와 신약의 새 포도주의 차이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9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었으니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하리라” 말씀하십니다. 이때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 이혼을 허락하지 않으셨냐고 반문하지요. 이에 예수님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결혼한 남녀가 변함없이 사랑하며 행복하게 사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런데도 율법에 이혼을 규정하신 것은 인간의 변질되고 악한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아내가 음행한 사실을 남편이 알고 도저히 용서가 안 되고 괴로운 상황이라고 합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함께 삶으로 인해 더 불행해져서는 안 되겠기에 모세의 율법에는 이혼해도 가하다고 규정해 놓았지요.
따라서 묵은 포도주는 하나님의 근본 뜻인 사랑보다는 율법적인 틀에 매인 삶의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일 남편이 아내의 허물을 용서하고 사랑으로 감싸 안았다면 새 포도주를 마신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한 주님을 닮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3. 묵은 포도주를 좋아하는 사람들
누가복음 5장 39절에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세상에서 포도주는 오래될수록 가치가 높습니다. 수십 년, 수백 년 묵을수록 비싸고 등급이 높은 상품으로 인정받지요. 세상에서 묵은 포도주를 귀히 여기는 것처럼 구약의 율법을 신약의 새 법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예수님 당시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이들은 모세의 율법 외에도 다른 규칙까지 만들어 지켰습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율법에다 부수적인 규칙들을 만들어 지켰지요. 즉 안식일에는 음식을 만들 불도 피워서도 안 되고, 몇 킬로미터 이상은 여행하면 안 되며, 무거운 물건을 운반해도 안 된다는 등 여러 규례를 만들었습니다.
본래 하나님의 뜻은 뒤로하고 자신들이 안식일에 대해 만든 규정들을 지키며 안식일을 잘 지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새 법이 옛 율법의 틀에 맞지 않는다고 배척했습니다. 마치 묵은 포도주에 길든 사람들이 새 포도주를 싫어하는 것처럼, 자기적인 율법의 틀에 얽매인 이들은 예수님의 새 교훈을 싫어했습니다.
이런 율법주의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말씀합니다(마 23:23). 아무리 구약의 율법을 좇아 제사를 드리고 십일조를 하며 기도와 금식을 드린다 해도 마음의 할례를 하지 않고 죄를 짓는다면 하나님께서 외면하십니다. 드러나는 행위만 옳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거룩하게 변화되어야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있는 새 부대가 될 수 있습니다.
4. 낡은 부대를 새 부대로 만들려면
에베소서 4장 22~24절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말씀합니다. 세상 것을 취하고 남을 판단 정죄하며 미워하는 등 여전히 변화되지 않는 마음은 낡은 부대라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의와 욕심, 잘못된 지식과 틀 등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은 모든 것을 버리고 심령을 새롭게 해야 하지요. 그럴 때라야 우리 마음이 새 부대가 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하고 말씀을 들어도 변화되지 않으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묵은 포도주를 고집하지요. 하나님 뜻이 아닌 육신의 생각 속에 틀을 만들고 사랑보다는 율법에 매여 판단 정죄합니다. 낡은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으면 부대가 터져서 포도주가 쏟아져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생각과 구습을 고집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결국 멸망의 길로 가고 말지요.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모든 죄악을 신속히 벗고 새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아야 합니다. 진리와 선으로 마음을 변화시켜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새해에는 말씀과 기도로 부지런히 자신의 마음을 변화시켜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말씀하신 대로 거룩한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서로 맞는 것끼리 연결해 보세요.
새 포도주 ● ● 의와 진리로 새롭게 변화된 마음
묵은 포도주 ● ● 자기 생각과 구습을 고집하는 마음
새 부대 ● ● 구약의 율법적인 생활방식
낡은 부대 ● ● 주님이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한‘신약’
2. 우리의 마음을 새 가죽 부대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기.
● 알고 넘어갑시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예수님’
예수님은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다.
여기서 물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뜻하며, 포도주는 죄인을 구원한 예수님의 보혈을 의미한다.
따라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켜 사람들에게 마시게 한 것은 곧 예수님께서 때가 되면 십자가에 달려 보혈을 흘리실 것을 나타내며 이를 믿는 사람은 죄 용서를 받고 구원에 이를 것을 뜻한다.
교육목표 : 새해를 맞아 새 포도주와 새 부대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깨달아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주님의 마음을 닮게 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내용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말씀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뜻을 모른 채 단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는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새해를 맞아 이 말씀의 영적인 의미를 살펴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물론, 마음의 할례를 통해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새 포도주’와 ‘묵은 포도주’의 영적 의미
누가복음 5장 3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말씀하십니다. 낡고 오래된 가죽은 신축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새 포도주를 넣으면 이산화탄소가 발생하여 결국 터지고 맙니다. 하지만 새 부대는 신축성이 좋기 때문에 그럴 염려가 없지요.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무엇을 깨우쳐 주고자 하신 것일까요? 그 의미를 알기 위해 먼저, 새 포도주와 묵은 포도주가 무엇을 뜻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을 포도나무에 비유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절에 예수님은 “내가 참 포도나무요”라고 말씀하시지요. 예수님이 포도나무라면 그 열매는 예수님이 이 땅에 사역하시면서 맺은 모든 열매라 할 수 있습니다. 즉 기사와 표적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나타내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신 모든 일들이 곧 포도나무의 열매들이지요. 또한 포도즙은 포도 열매를 짜낸 액으로, 영적으로는 예수님의 보혈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많은 열매를 내시고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보혈을 흘려 주심으로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위해 생명을 주시는 사랑으로 구약의 율법을 완성하셨지요. 따라서 주님께서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것이 신약이며, ‘새 포도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묵은 포도주’란 구약의 율법적인 삶의 방식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시기 전, 율법에 매인 삶의 방식이지요. 히브리서 10장 1절에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했습니다. 그래서 신약은 본체요,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라고 합니다.
2. 새 포도주와 묵은 포도주의 차이
구약 시대에는 사람이 죄를 사함 받으려면 짐승을 잡아 그 피로 행위적인 제사를 드렸습니다. 레위기 17장 11절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구약의 율법적인 삶의 방식이 바로 묵은 포도주를 마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보배로운 피를 흘려 주신 신약 시대에는 우리가 그 보혈의 공로를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즉 새 포도주를 마심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면 구약의 묵은 포도주와 신약의 새 포도주의 차이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9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었으니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하리라” 말씀하십니다. 이때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 이혼을 허락하지 않으셨냐고 반문하지요. 이에 예수님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결혼한 남녀가 변함없이 사랑하며 행복하게 사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런데도 율법에 이혼을 규정하신 것은 인간의 변질되고 악한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아내가 음행한 사실을 남편이 알고 도저히 용서가 안 되고 괴로운 상황이라고 합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함께 삶으로 인해 더 불행해져서는 안 되겠기에 모세의 율법에는 이혼해도 가하다고 규정해 놓았지요.
따라서 묵은 포도주는 하나님의 근본 뜻인 사랑보다는 율법적인 틀에 매인 삶의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일 남편이 아내의 허물을 용서하고 사랑으로 감싸 안았다면 새 포도주를 마신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한 주님을 닮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3. 묵은 포도주를 좋아하는 사람들
누가복음 5장 39절에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세상에서 포도주는 오래될수록 가치가 높습니다. 수십 년, 수백 년 묵을수록 비싸고 등급이 높은 상품으로 인정받지요. 세상에서 묵은 포도주를 귀히 여기는 것처럼 구약의 율법을 신약의 새 법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예수님 당시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이들은 모세의 율법 외에도 다른 규칙까지 만들어 지켰습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율법에다 부수적인 규칙들을 만들어 지켰지요. 즉 안식일에는 음식을 만들 불도 피워서도 안 되고, 몇 킬로미터 이상은 여행하면 안 되며, 무거운 물건을 운반해도 안 된다는 등 여러 규례를 만들었습니다.
본래 하나님의 뜻은 뒤로하고 자신들이 안식일에 대해 만든 규정들을 지키며 안식일을 잘 지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새 법이 옛 율법의 틀에 맞지 않는다고 배척했습니다. 마치 묵은 포도주에 길든 사람들이 새 포도주를 싫어하는 것처럼, 자기적인 율법의 틀에 얽매인 이들은 예수님의 새 교훈을 싫어했습니다.
이런 율법주의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말씀합니다(마 23:23). 아무리 구약의 율법을 좇아 제사를 드리고 십일조를 하며 기도와 금식을 드린다 해도 마음의 할례를 하지 않고 죄를 짓는다면 하나님께서 외면하십니다. 드러나는 행위만 옳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거룩하게 변화되어야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있는 새 부대가 될 수 있습니다.
4. 낡은 부대를 새 부대로 만들려면
에베소서 4장 22~24절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말씀합니다. 세상 것을 취하고 남을 판단 정죄하며 미워하는 등 여전히 변화되지 않는 마음은 낡은 부대라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의와 욕심, 잘못된 지식과 틀 등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은 모든 것을 버리고 심령을 새롭게 해야 하지요. 그럴 때라야 우리 마음이 새 부대가 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하고 말씀을 들어도 변화되지 않으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묵은 포도주를 고집하지요. 하나님 뜻이 아닌 육신의 생각 속에 틀을 만들고 사랑보다는 율법에 매여 판단 정죄합니다. 낡은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으면 부대가 터져서 포도주가 쏟아져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생각과 구습을 고집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결국 멸망의 길로 가고 말지요.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모든 죄악을 신속히 벗고 새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아야 합니다. 진리와 선으로 마음을 변화시켜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새해에는 말씀과 기도로 부지런히 자신의 마음을 변화시켜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말씀하신 대로 거룩한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서로 맞는 것끼리 연결해 보세요.
새 포도주 ● ● 의와 진리로 새롭게 변화된 마음
묵은 포도주 ● ● 자기 생각과 구습을 고집하는 마음
새 부대 ● ● 구약의 율법적인 생활방식
낡은 부대 ● ● 주님이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한‘신약’
2. 우리의 마음을 새 가죽 부대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금주 과제
『지난주 설교 요약, 구역공과』 읽기.
● 알고 넘어갑시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예수님’
예수님은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다.
여기서 물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뜻하며, 포도주는 죄인을 구원한 예수님의 보혈을 의미한다.
따라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켜 사람들에게 마시게 한 것은 곧 예수님께서 때가 되면 십자가에 달려 보혈을 흘리실 것을 나타내며 이를 믿는 사람은 죄 용서를 받고 구원에 이를 것을 뜻한다.
2020-12-25
제52과주님은 누구의 구주이신가
마태복음 2:1~12
읽을말씀 : 마태복음 2:1~12 | 외울말씀 : 누가복음 2:14 | 참고 말씀: 마태복음 1:21
교육목표 :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께 드린 세 가지 예물인 황금, 유향, 몰약에 담긴 영적 의미를 알아본다.
성탄절은 온 인류의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심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해 멸망으로 갈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고자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온 인류에게는 큰 축복입니다.
1. 구유에 누이신 예수님
지금부터 약 2천여 년 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크신 섭리 가운데 구세주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하늘 영광을 버리고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신 대로,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성령으로 잉태되어 태어나셨지요.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이신데도 호화로운 곳에서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초라한 짐승의 우리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로 인해 거룩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정욕대로 살아가는 짐승과 다름없게 된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함이었지요(전 3:18).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실 때 흙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빚으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하며, 만물의 영장으로서 살아가도록 축복하셨습니다. 그런데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사람의 주인인 영이 죽어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게 되었지요. 죄를 범한 아담의 후손은 점점 죄로 물들어 갔고 결국 짐승과 다름없이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사람의 본분을 벗어나서 짐승만도 못한 사람들을 대속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몸으로 짐승의 우리에서 태어나셨고, 이들의 참된 양식이 되기 위해 짐승의 먹이를 담는 그릇인 구유에 누이셨던 것입니다(눅 2:7).
또한 예수님께서 가난하게 태어나신 것은 인류의 가난을 대신 담당하시기 위함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죄를 범하여 저주를 받음으로 그의 후손인 모든 사람도 가난과 고통 속에 살아가게 되었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요한 자로서 우리를 부요케 하시고자 가난한 길을 가신 것입니다(고후 8:9).
2. 예수님의 탄생을 계시받은 사람들
동방박사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동방에서부터 별을 따라 베들레헴까지 왔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선민은 아니었지만 메시아가 오실 것을 믿고 기다리며 선한 양심을 좇아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아기 예수님께 찾아가 경배하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마 2:11).
육적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은 왕궁도, 호화로운 저택도 아니고 짐승들이 사는 마구간입니다. 그러나 영안이 열려 보면 그곳에는 영광의 빛이 가득하고 하늘의 선지자들과 수많은 천군 천사들이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님을 육으로 본 것이 아니라 영으로 보고 느꼈기에 영의 행함으로 나왔던 것입니다.
또한 누가복음 2장을 보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시므온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는데,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알아보고 영광 돌렸지요. 안나 선지자는 과부 된 지 84년 동안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하더니 아기 예수님을 구세주로 알아보았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육신의 생각 속에서 구세주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영으로 깨어 있어 성령의 지시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밤에 밖에서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신 것을 알려 줍니다. 양 치는 목자들은 당시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계층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었으나 마음이 겸손했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아기 예수님께 경배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성경을 많이 알고 가르치는 바리새인, 율법학자, 서기관들이 있었지만 정작 이들은 구세주로 오시는 예수님의 탄생을 계시받지 못했습니다.
3. 세 가지 예물에 담긴 영적 의미
동방박사들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 온 인류를 대표하여 이 땅에서 가장 귀히 여기는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습니다. 동방박사들이 드린 이 세 가지 예물에는 어떠한 영적 의미가 있을까요?
1) 마음을 의미하는 황금
황금은 이 땅에서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보석 중의 하나로 부귀와 재물을 상징합니다. 또한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라는 말씀처럼 우리의 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마 6:21).
따라서 황금을 예물로 드린다는 것은 곧 마음을 드린다는 의미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드리는 것을 뜻합니다. 기본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생명 그 이상을 드릴 때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지요. 이처럼 우리가 가진 전부를 드리는 일, 할 수 없는 중에도 하나님을 먼저 섬기는 마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우며 황금을 예물로 드리는 마음입니다.
예수님께 황금을 드린 것을 기뻐하신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황금보석으로 지어진 아름다운 천국을 선물로 주십니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구원받아 마음에 천국이 임하고 장차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도록 축복하신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향기를 의미하는 유향
유향은 향기로운 냄새를 풍기며 악취를 제거해 줍니다. 영적으로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상징하지요.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고 착한 행실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는 모습이 바로 주님 앞에 유향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근본 마음이 깨끗하고 아름답게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유향을 예물로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더럽고 냄새나는 모든 죄악의 문제를 대속하시고 성결에 이르도록 인도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15장 11절에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했습니다. 이는 얼마나 사람의 마음이 더럽고 악취가 나는지 말씀하지요. 하나님께서는 우리 행함은 물론 중심을 감찰하시며 무엇보다 마음의 향기를 흠향하십니다.
따라서 유향을 예물로 드림과 같이 마음의 할례를 이루어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사람은 이미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드릴 수 있는 중심이요, 생명이라도 아까워하지 않을 중심입니다. 이런 사람은 영혼이 잘되는 축복을 받아 범사가 형통하며 영육 간에 강건한 축복도 받습니다(요삼 1:2).
3) 변함없는 믿음을 의미하는 몰약
몰약은 변함없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부패를 막아 주는 방부제 역할을 하는 몰약을 예물로 드린다는 것은 영적으로 썩지 아니할 것을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변함없이 생명까지도 주님께 바칠 수 있는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한번 주님을 만나 자신의 생애를 주님을 위해 살기로 다짐했다면 은혜받은 순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두고 변함없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변함없는 마음이 되려면 무엇보다 먼저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야 합니다. 악의 모양이 남아 있으면 자신의 유익을 좇아 변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먼저 나의 전부를 드릴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하되 마음의 할례를 통해 그 속의 비진리를 모두 벗어 버리고 진리로 채워 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더불어 어떤 상황에서도 변치 않는 마음으로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드린다면 이것이 곧 주님께 드리는 최고의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몰약을 예물로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심으로 죽은 영이 살아나 영원히 썩지 아니할 영체의 몸으로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값진 선물을 받은 우리는 성탄절을 맞이하여 아버지 하나님과 주님께 우리의 마음인 황금과, 그리스도의 향기인 유향과, 변함없는 믿음인 몰약을 선물로 드림으로 뜨거운 사랑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은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보석 중의 하나로 부귀와 재물을 상징하며 영적으로는 우리의 ( )을 의미한다.
2. ( )은 향기로운 냄새를 풍기며 악취를 제거해 준다. 영적으로는 ( )를 상징한다.
3. ( )은 부패를 막아주는 방부제 역할을 하며, ( )을 의미한다. 몰약을 예물로 드린다는 것은 영적으로 썩지 아니할 것을 드린다는 것이다.
● 금주 과제
한 해를 돌아보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베들레헴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이다.
베들레헴은 풍요로움을 의미하는 곳으로 다윗왕의 출생지이기도 하다(삼상 16:1, 눅 2:4).
미가 5장 2절을 보면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고 예언되어 있다.
교육목표 :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께 드린 세 가지 예물인 황금, 유향, 몰약에 담긴 영적 의미를 알아본다.
성탄절은 온 인류의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심에 감사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해 멸망으로 갈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고자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온 인류에게는 큰 축복입니다.
1. 구유에 누이신 예수님
지금부터 약 2천여 년 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크신 섭리 가운데 구세주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하늘 영광을 버리고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신 대로,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성령으로 잉태되어 태어나셨지요.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이신데도 호화로운 곳에서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초라한 짐승의 우리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로 인해 거룩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정욕대로 살아가는 짐승과 다름없게 된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함이었지요(전 3:18).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실 때 흙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빚으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하며, 만물의 영장으로서 살아가도록 축복하셨습니다. 그런데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사람의 주인인 영이 죽어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게 되었지요. 죄를 범한 아담의 후손은 점점 죄로 물들어 갔고 결국 짐승과 다름없이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사람의 본분을 벗어나서 짐승만도 못한 사람들을 대속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몸으로 짐승의 우리에서 태어나셨고, 이들의 참된 양식이 되기 위해 짐승의 먹이를 담는 그릇인 구유에 누이셨던 것입니다(눅 2:7).
또한 예수님께서 가난하게 태어나신 것은 인류의 가난을 대신 담당하시기 위함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죄를 범하여 저주를 받음으로 그의 후손인 모든 사람도 가난과 고통 속에 살아가게 되었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요한 자로서 우리를 부요케 하시고자 가난한 길을 가신 것입니다(고후 8:9).
2. 예수님의 탄생을 계시받은 사람들
동방박사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동방에서부터 별을 따라 베들레헴까지 왔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선민은 아니었지만 메시아가 오실 것을 믿고 기다리며 선한 양심을 좇아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아기 예수님께 찾아가 경배하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마 2:11).
육적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은 왕궁도, 호화로운 저택도 아니고 짐승들이 사는 마구간입니다. 그러나 영안이 열려 보면 그곳에는 영광의 빛이 가득하고 하늘의 선지자들과 수많은 천군 천사들이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님을 육으로 본 것이 아니라 영으로 보고 느꼈기에 영의 행함으로 나왔던 것입니다.
또한 누가복음 2장을 보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시므온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는데,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알아보고 영광 돌렸지요. 안나 선지자는 과부 된 지 84년 동안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하더니 아기 예수님을 구세주로 알아보았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육신의 생각 속에서 구세주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영으로 깨어 있어 성령의 지시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밤에 밖에서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신 것을 알려 줍니다. 양 치는 목자들은 당시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계층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었으나 마음이 겸손했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아기 예수님께 경배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성경을 많이 알고 가르치는 바리새인, 율법학자, 서기관들이 있었지만 정작 이들은 구세주로 오시는 예수님의 탄생을 계시받지 못했습니다.
3. 세 가지 예물에 담긴 영적 의미
동방박사들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 온 인류를 대표하여 이 땅에서 가장 귀히 여기는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습니다. 동방박사들이 드린 이 세 가지 예물에는 어떠한 영적 의미가 있을까요?
1) 마음을 의미하는 황금
황금은 이 땅에서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보석 중의 하나로 부귀와 재물을 상징합니다. 또한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라는 말씀처럼 우리의 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마 6:21).
따라서 황금을 예물로 드린다는 것은 곧 마음을 드린다는 의미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드리는 것을 뜻합니다. 기본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생명 그 이상을 드릴 때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지요. 이처럼 우리가 가진 전부를 드리는 일, 할 수 없는 중에도 하나님을 먼저 섬기는 마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우며 황금을 예물로 드리는 마음입니다.
예수님께 황금을 드린 것을 기뻐하신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황금보석으로 지어진 아름다운 천국을 선물로 주십니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구원받아 마음에 천국이 임하고 장차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도록 축복하신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향기를 의미하는 유향
유향은 향기로운 냄새를 풍기며 악취를 제거해 줍니다. 영적으로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상징하지요.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고 착한 행실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는 모습이 바로 주님 앞에 유향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근본 마음이 깨끗하고 아름답게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유향을 예물로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더럽고 냄새나는 모든 죄악의 문제를 대속하시고 성결에 이르도록 인도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15장 11절에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했습니다. 이는 얼마나 사람의 마음이 더럽고 악취가 나는지 말씀하지요. 하나님께서는 우리 행함은 물론 중심을 감찰하시며 무엇보다 마음의 향기를 흠향하십니다.
따라서 유향을 예물로 드림과 같이 마음의 할례를 이루어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사람은 이미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드릴 수 있는 중심이요, 생명이라도 아까워하지 않을 중심입니다. 이런 사람은 영혼이 잘되는 축복을 받아 범사가 형통하며 영육 간에 강건한 축복도 받습니다(요삼 1:2).
3) 변함없는 믿음을 의미하는 몰약
몰약은 변함없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부패를 막아 주는 방부제 역할을 하는 몰약을 예물로 드린다는 것은 영적으로 썩지 아니할 것을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변함없이 생명까지도 주님께 바칠 수 있는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한번 주님을 만나 자신의 생애를 주님을 위해 살기로 다짐했다면 은혜받은 순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두고 변함없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변함없는 마음이 되려면 무엇보다 먼저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야 합니다. 악의 모양이 남아 있으면 자신의 유익을 좇아 변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먼저 나의 전부를 드릴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하되 마음의 할례를 통해 그 속의 비진리를 모두 벗어 버리고 진리로 채워 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더불어 어떤 상황에서도 변치 않는 마음으로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드린다면 이것이 곧 주님께 드리는 최고의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몰약을 예물로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심으로 죽은 영이 살아나 영원히 썩지 아니할 영체의 몸으로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값진 선물을 받은 우리는 성탄절을 맞이하여 아버지 하나님과 주님께 우리의 마음인 황금과, 그리스도의 향기인 유향과, 변함없는 믿음인 몰약을 선물로 드림으로 뜨거운 사랑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 )은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보석 중의 하나로 부귀와 재물을 상징하며 영적으로는 우리의 ( )을 의미한다.
2. ( )은 향기로운 냄새를 풍기며 악취를 제거해 준다. 영적으로는 ( )를 상징한다.
3. ( )은 부패를 막아주는 방부제 역할을 하며, ( )을 의미한다. 몰약을 예물로 드린다는 것은 영적으로 썩지 아니할 것을 드린다는 것이다.
● 금주 과제
한 해를 돌아보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기.
● 알고 넘어갑시다!
베들레헴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이다.
베들레헴은 풍요로움을 의미하는 곳으로 다윗왕의 출생지이기도 하다(삼상 16:1, 눅 2:4).
미가 5장 2절을 보면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고 예언되어 있다.
2020-12-18
제51과준비된 자
디모데후서 2:20~21
읽을말씀 : 디모데후서 2:20~21 | 외울말씀 : 디모데후서 2:21 | 참고 말씀: 에베소서 6:12, 고린도전서 4:20
교육목표 : 말씀과 기도로 그릇을 잘 준비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귀히 쓰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디모데후서 2장 20절에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했습니다. 이처럼 그릇의 종류도 많고 크기도 다양한 데 주인은 어떤 것을 골라 쓰겠습니까?
일단 용도에 맞아야 하고 주인의 손에 잘 맞는 그릇이면 좋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주인의 손에 맞고 용도에 맞아도 깨끗하지 않으면 쓸 수가 없습니다.
이런 조건들은 영적으로도 동일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준비된 그릇이 되어 하나님 나라에 귀히 쓰임 받을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준비된 그릇이란?
영적으로 용도에 맞는 그릇이 된다는 것은 각 분야에서 쓰임 받기 합당한 자질을 갖춰야 한다는 말입니다. 주의 종이면 주의 종, 교사면 교사, 찬양 사역자면 찬양 사역자의 자질을 갖춰야 합니다. 기술직이라면, 더 나은 기술들을 쌓아가며 하나님의 나라에 잘 적용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물론 어떤 사명이든지 가장 기본적으로는 영적인 자질을 먼저 갖춰야 합니다. 곧 말씀을 무장하고 기도를 쌓아야 하지요.
다음으로, 주인의 손에 맞는다는 것은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리 달란트가 뛰어나고 능력이 있어도 순종하지 않으면 쓰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동으로 가는 것인데 자기 뜻대로 서쪽으로 간다면 하나님의 일이 이뤄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준비된 그릇의 가장 중요한 자격은 깨끗한 그릇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깨끗한 그릇이란, 마음의 악을 버리고 성결된 사람을 말합니다. 물론 기왕이면 많이 담아지는 큰 그릇이 좋고, 귀한 금그릇이 좋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귀하고 큰 그릇이라도 씻지 않아 더럽다면 쓸 수가 없습니다. 성결되어 깨끗한 그릇이 되는 만큼 사명 감당할 능력도 더 받을 수 있고, 순종도 더 온전히 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6장 12절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하였고, 고린도전서 4장 20절에는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의 능력과 지혜로 ㅇㅣ루는 것이 아닙니다. 원수 마귀 사단과의 영적인 전쟁이므로 영적인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힘과 능력은 죄를 버리고 성결된 만큼 임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성결되어 영적인 힘이 있는 일꾼들을 항상 찾으십니다.
2. 성결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지만 더딘 이유
성결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연히 이뤄야 할 본분입니다. 특히 직분을 맡은 일꾼이라면 성결에 대한 사모함이 더욱 간절하지요. 그런데 사람마다 나름대로 기도하고 금식하며 노력한다 했는데 더디 이루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구체적이고 지속적으로 노력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막연하게 성결되고 싶을 뿐, 낱낱이 자신을 해부하여 죄를 버리는 작업은 하지 않은 것입니다. “성결되게 해 주세요, 죄 버리게 해 주세요, 선한 마음을 주세요.” 하면서 막연하게 기도한다면 변화가 늦습니다. 어떤 죄가 있고 어떤 악한 마음이 있는지 조목조목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습관적으로 입술로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찢으며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내 안에 육의 속성이 있다는 것이 너무나 싫게 여겨져야 합니다. 그리고 다음번에는 비슷한 상황이 와도 절대로 같은 잘못을 하지 않기 위해 늘 근신하고 절제해야 합니다. 이렇게 계속해서 하나하나 버려 나가면 한 달, 두 달 지날수록 모습이 달라집니다. 어떤 경우는 구체적으로 발견한 것에서 그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발견해서 버리기로 했으면 끝을 보아야 하는데, 버리는 작업을 어느 정도 하다가 맙니다.
어떤 계기로 모르고 있던 자신의 비진리를 발견한 것도 큰 은혜입니다. 더 나아가 왜 그런 비진리가 자기 안에 심어졌는지 성령께서 과거를 떠올려 주시며 깨닫게 하실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영적인 깨우침이 올 때나 또 그것을 회개할 때는 성령이 충만해집니다. 마치 그 순간에 다 버리고 변화된 것 같지요.
그러나 한 번 회개했다고 버려진 것은 아닙니다. 잡초를 제거할 때 뿌리를 남겨두면 금방 다시 자랍니다. 죄성도 발견하여 한 번 회개한다고 해서 그것으로 다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근본의 죄성까지 뽑아야 하지요. 다 뽑아냈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자신을 점검하며 기도해 나가야 합니다. 발견되는 것이 너무 많다면 그중에 큰 뿌리부터 먼저 뽑아야 합니다. 큰 뿌리가 뽑힐 때 많은 잔뿌리도 함께 뽑혀나가지요. 자기 안에 가장 크고 버리기 어려운 것 몇 가지만 집중적으로 버리면 됩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쉽게 버려나갈 수 있습니다.
이처럼 구체적이고 지속적인 노력이 없으면 점차 신앙이 정체되기 쉽습니다. 늘 준비하려고만 할 뿐, 막상 준비된 자로서 세워질 수 없습니다.
둘째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는 자신에게 어떤 비진리가 있는지 잘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비진리의 마음을 진리로 포장하여 스스로도 속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기의 의와 틀을 깨지 못하므로 자신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자기가 잘한 것만 생각하고 잘못한 것은 덮고 넘어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 일꾼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뜨거운 열정으로 어떤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고 화평을 깨는 일이 생겼지요. 내 고집과 자기주장이 상대에게 부딪힐 원인을 제공한 것입니다. 이럴 때도 자기 틀과 의가 있으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그랬으니까, 내가 화평을 깨려고 한 것이 아니니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화평을 깨지 않으려는 마음이라면, 자기가 더 옳다고 해도 상대의 마음에 맞춰 줍니다. 때론 자신이 손해를 본다 해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한다 해도 상대가 말하는 것을 들어주지요. 더구나 윗사람이 지시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죄를 지으라는 명령이라면 순종할 수 없습니다. “비진리가 아니고 죄가 아니라면” 먼저 상대의 입장을 배려해 주라는 것입니다.
내가 더 옳기 때문에 상대를 무시하는 것은 결국 “화평을 깨도 좋다”는 마음입니다. 또한 내가 너무나 이것이 하고 싶기 때문에 윗사람이 “그러지 말라” 해도 여전히 자기 원하는 대로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히려 윗사람이 자신을 힘들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도 화평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화평을 떠나서 기본적인 질서조차 지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은 여전히 변명만 합니다. “내가 화평을 깨려고 한 것이 아니다”, “나는 정말 화평하고 싶지만 상대에게 맞춰 줄 수는 없다” 합니다.
이는 진실한 태도가 아닙니다. 물론 머리로는 화평을 원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마음은 “내가 원하는 대로 하기 위해서는 화평을 깨도 할 수 없다”라는 마음입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말과 혀로만 원하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나는 화평하려고 했다”고 스스로를 좋게만 생각하므로 신속하게 성결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6장 8절에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 성결된 사람을 찾고 찾으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은혜를 사모하고, 불같은 기도를 통해 발견된 모든 비진리의 뿌리까지 뽑아냄으로 하나님 나라에 귀히 쓰임 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준비된 그릇이란 어떤 그릇을 의미할까요?
1. ( )에 맞는 그릇이다. 이는 각 분야에서 쓰임 받기 ( )을 갖춘 사람을 말한다
2. 주인의 손에 맞는 그릇 곧 ( )하는 그릇이다.
3. 준비된 그릇의 가장 중요한 자격은 ( ) 그릇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 금주 과제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감사의 향 올리기.
● 알고 넘어갑시다!
그릇의 크기와 재질
그릇의 재질은 사람의 중심과 연관되며, 그릇의 크기는 진리에 속한 것을 얼마나 많이 담을 수 있는지와 상관이 있다. 그릇의 크기에 따라 얼마나 더 큰 일을 감당할 수 있는지가 정해진다.
그릇은 타고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본인의 노력으로 변화될 수 있다.
태어날 때부터 그릇의 재질이 좋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일구는 것이 더 수월하므로 믿음의 성장이 빠르다.
그러나 타고난 그릇이 작거나 재질이 좋지 않다 해도 노력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다. 성결을 이루어 곧 깨끗한 그릇이 되어 주인에게 쓰임 받을 수 있고, 또 마음 씀을 넓히고 그릇을 키워 더 큰 일들을 감당해 갈 수 있다. 하나님 말씀을 양식 삼아 비진리를 버리고 진리로 채우는 만큼 그릇의 재질도 바뀔 수 있다.
교육목표 : 말씀과 기도로 그릇을 잘 준비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귀히 쓰임 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디모데후서 2장 20절에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했습니다. 이처럼 그릇의 종류도 많고 크기도 다양한 데 주인은 어떤 것을 골라 쓰겠습니까?
일단 용도에 맞아야 하고 주인의 손에 잘 맞는 그릇이면 좋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주인의 손에 맞고 용도에 맞아도 깨끗하지 않으면 쓸 수가 없습니다.
이런 조건들은 영적으로도 동일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준비된 그릇이 되어 하나님 나라에 귀히 쓰임 받을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준비된 그릇이란?
영적으로 용도에 맞는 그릇이 된다는 것은 각 분야에서 쓰임 받기 합당한 자질을 갖춰야 한다는 말입니다. 주의 종이면 주의 종, 교사면 교사, 찬양 사역자면 찬양 사역자의 자질을 갖춰야 합니다. 기술직이라면, 더 나은 기술들을 쌓아가며 하나님의 나라에 잘 적용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물론 어떤 사명이든지 가장 기본적으로는 영적인 자질을 먼저 갖춰야 합니다. 곧 말씀을 무장하고 기도를 쌓아야 하지요.
다음으로, 주인의 손에 맞는다는 것은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리 달란트가 뛰어나고 능력이 있어도 순종하지 않으면 쓰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동으로 가는 것인데 자기 뜻대로 서쪽으로 간다면 하나님의 일이 이뤄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준비된 그릇의 가장 중요한 자격은 깨끗한 그릇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깨끗한 그릇이란, 마음의 악을 버리고 성결된 사람을 말합니다. 물론 기왕이면 많이 담아지는 큰 그릇이 좋고, 귀한 금그릇이 좋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귀하고 큰 그릇이라도 씻지 않아 더럽다면 쓸 수가 없습니다. 성결되어 깨끗한 그릇이 되는 만큼 사명 감당할 능력도 더 받을 수 있고, 순종도 더 온전히 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6장 12절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하였고, 고린도전서 4장 20절에는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의 능력과 지혜로 ㅇㅣ루는 것이 아닙니다. 원수 마귀 사단과의 영적인 전쟁이므로 영적인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힘과 능력은 죄를 버리고 성결된 만큼 임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성결되어 영적인 힘이 있는 일꾼들을 항상 찾으십니다.
2. 성결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지만 더딘 이유
성결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연히 이뤄야 할 본분입니다. 특히 직분을 맡은 일꾼이라면 성결에 대한 사모함이 더욱 간절하지요. 그런데 사람마다 나름대로 기도하고 금식하며 노력한다 했는데 더디 이루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구체적이고 지속적으로 노력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막연하게 성결되고 싶을 뿐, 낱낱이 자신을 해부하여 죄를 버리는 작업은 하지 않은 것입니다. “성결되게 해 주세요, 죄 버리게 해 주세요, 선한 마음을 주세요.” 하면서 막연하게 기도한다면 변화가 늦습니다. 어떤 죄가 있고 어떤 악한 마음이 있는지 조목조목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습관적으로 입술로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찢으며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내 안에 육의 속성이 있다는 것이 너무나 싫게 여겨져야 합니다. 그리고 다음번에는 비슷한 상황이 와도 절대로 같은 잘못을 하지 않기 위해 늘 근신하고 절제해야 합니다. 이렇게 계속해서 하나하나 버려 나가면 한 달, 두 달 지날수록 모습이 달라집니다. 어떤 경우는 구체적으로 발견한 것에서 그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발견해서 버리기로 했으면 끝을 보아야 하는데, 버리는 작업을 어느 정도 하다가 맙니다.
어떤 계기로 모르고 있던 자신의 비진리를 발견한 것도 큰 은혜입니다. 더 나아가 왜 그런 비진리가 자기 안에 심어졌는지 성령께서 과거를 떠올려 주시며 깨닫게 하실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영적인 깨우침이 올 때나 또 그것을 회개할 때는 성령이 충만해집니다. 마치 그 순간에 다 버리고 변화된 것 같지요.
그러나 한 번 회개했다고 버려진 것은 아닙니다. 잡초를 제거할 때 뿌리를 남겨두면 금방 다시 자랍니다. 죄성도 발견하여 한 번 회개한다고 해서 그것으로 다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근본의 죄성까지 뽑아야 하지요. 다 뽑아냈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자신을 점검하며 기도해 나가야 합니다. 발견되는 것이 너무 많다면 그중에 큰 뿌리부터 먼저 뽑아야 합니다. 큰 뿌리가 뽑힐 때 많은 잔뿌리도 함께 뽑혀나가지요. 자기 안에 가장 크고 버리기 어려운 것 몇 가지만 집중적으로 버리면 됩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쉽게 버려나갈 수 있습니다.
이처럼 구체적이고 지속적인 노력이 없으면 점차 신앙이 정체되기 쉽습니다. 늘 준비하려고만 할 뿐, 막상 준비된 자로서 세워질 수 없습니다.
둘째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는 자신에게 어떤 비진리가 있는지 잘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비진리의 마음을 진리로 포장하여 스스로도 속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기의 의와 틀을 깨지 못하므로 자신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자기가 잘한 것만 생각하고 잘못한 것은 덮고 넘어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 일꾼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뜨거운 열정으로 어떤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고 화평을 깨는 일이 생겼지요. 내 고집과 자기주장이 상대에게 부딪힐 원인을 제공한 것입니다. 이럴 때도 자기 틀과 의가 있으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그랬으니까, 내가 화평을 깨려고 한 것이 아니니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화평을 깨지 않으려는 마음이라면, 자기가 더 옳다고 해도 상대의 마음에 맞춰 줍니다. 때론 자신이 손해를 본다 해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한다 해도 상대가 말하는 것을 들어주지요. 더구나 윗사람이 지시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죄를 지으라는 명령이라면 순종할 수 없습니다. “비진리가 아니고 죄가 아니라면” 먼저 상대의 입장을 배려해 주라는 것입니다.
내가 더 옳기 때문에 상대를 무시하는 것은 결국 “화평을 깨도 좋다”는 마음입니다. 또한 내가 너무나 이것이 하고 싶기 때문에 윗사람이 “그러지 말라” 해도 여전히 자기 원하는 대로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히려 윗사람이 자신을 힘들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도 화평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화평을 떠나서 기본적인 질서조차 지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은 여전히 변명만 합니다. “내가 화평을 깨려고 한 것이 아니다”, “나는 정말 화평하고 싶지만 상대에게 맞춰 줄 수는 없다” 합니다.
이는 진실한 태도가 아닙니다. 물론 머리로는 화평을 원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마음은 “내가 원하는 대로 하기 위해서는 화평을 깨도 할 수 없다”라는 마음입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말과 혀로만 원하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나는 화평하려고 했다”고 스스로를 좋게만 생각하므로 신속하게 성결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6장 8절에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 성결된 사람을 찾고 찾으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은혜를 사모하고, 불같은 기도를 통해 발견된 모든 비진리의 뿌리까지 뽑아냄으로 하나님 나라에 귀히 쓰임 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준비된 그릇이란 어떤 그릇을 의미할까요?
1. ( )에 맞는 그릇이다. 이는 각 분야에서 쓰임 받기 ( )을 갖춘 사람을 말한다
2. 주인의 손에 맞는 그릇 곧 ( )하는 그릇이다.
3. 준비된 그릇의 가장 중요한 자격은 ( ) 그릇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 금주 과제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감사의 향 올리기.
● 알고 넘어갑시다!
그릇의 크기와 재질
그릇의 재질은 사람의 중심과 연관되며, 그릇의 크기는 진리에 속한 것을 얼마나 많이 담을 수 있는지와 상관이 있다. 그릇의 크기에 따라 얼마나 더 큰 일을 감당할 수 있는지가 정해진다.
그릇은 타고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본인의 노력으로 변화될 수 있다.
태어날 때부터 그릇의 재질이 좋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일구는 것이 더 수월하므로 믿음의 성장이 빠르다.
그러나 타고난 그릇이 작거나 재질이 좋지 않다 해도 노력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다. 성결을 이루어 곧 깨끗한 그릇이 되어 주인에게 쓰임 받을 수 있고, 또 마음 씀을 넓히고 그릇을 키워 더 큰 일들을 감당해 갈 수 있다. 하나님 말씀을 양식 삼아 비진리를 버리고 진리로 채우는 만큼 그릇의 재질도 바뀔 수 있다.
2020-12-11
제50과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누가복음 18:1~8
읽을말씀 : 누가복음 18:1~8 | 외울말씀 : 누가복음 18:1 | 참고 말씀: 마태복음 7:7~8, 갈라디아서 6:9
교육목표 :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끝까지 인내하며 낙망치 않고 기도하여 응답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하나님 자녀라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도는 어떠한 것인지 배우고 그 요령을 좇아 응답의 열매를 딸 때까지 인내하며 간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사람은 기도의 중요성을 알고 습관을 좇아 항상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 쉬는 죄를 범치 않으며 응답이 더뎌도 낙망치 않고 더욱 뜨겁게 간구합니다. 우리가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
어떤 도시에 불의한 재판관이 있었는데 한 과부가 찾아와 원한을 풀어 달라 하였습니다. 이 재판관은 뇌물을 바랐지만 과부는 너무 가난하여 그것을 준비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과부가 자주 찾아가 간청하였더니 얼마 동안 들어주지 않던 재판관이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과부가 결코 포기하지 않고 찾아와 간청할 것을 생각하니 의롭지 못한 재판관일지라도 과부의 소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응답의 비결을 깨닫게 하고자 이 비유를 들고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눅 18:7) 말씀하셨습니다. 즉 불의한 재판관도 과부의 청원을 들어주는데 사랑의 하나님께서 어찌 그 자녀들이 부르짖는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더욱이 어떤 문제에 응답받고자 작정하여 금식하고 철야하며 부르짖어 기도한다면 어찌 신속히 응답하시지 않겠습니까.
시편 50편 15절에는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했습니다. 우리 기도에 응답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리도록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많은 사람이 기도해도 응답이 없다고 할까요? 하나님은 분명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 7:7~8) 하셨으니 기도에 응답이 없을 리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과 막힌 죄의 담이 있거나, 기도 양이 부족해서, 또는 아직 때가 아니므로 응답이 오지 않은 것뿐입니다. 우리가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하는 까닭은 인내하며 믿음으로 기도할 때에 성령이 하나님과 막힌 죄의 담을 헐도록 회개의 은혜를 주어 응답받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기도의 양이 차서 받을 만한 때가 되었을 때에 응답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면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낙망치 말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2. 항상 기도해야 하는 이유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성령의 도움을 받을 수 없고 충만함도 잃게 되니 하나님과의 교통이 점점 끊어져 결국 성령이 소멸될 수 있습니다. 마치 자주 대하는 사람과는 대화가 잘 통하고 마음이 잘 맞는 것처럼, 항상 기도로 하나님과 교통할 때 하나님 뜻을 깨우쳐 그 뜻대로 살게 되니 구원에 이르고 영생을 얻습니다. 또한 기도할 때 원수 마귀 사단을 대적하여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어둠의 세력, 곧 악의 영들에게 대한 것이기 때문에 항상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엡 6:12). 그럴 때 하나님 능력과 권세에 힘입어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뜻을 좇아 항상 기도함으로써 기도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빈 들이나 산, 어디에 계시든지 기도했고 새벽이나 밤중, 어느 때든지 기도하셨습니다. 믿음의 선진들도 항상 기도하여 하나님 뜻대로 행했습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도로 너희를 가르칠 것인즉”(삼상 12:23) 하고 격려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며 명령이므로 기도 쉬는 것은 죄라는 것입니다. 기도를 쉬면 육신의 생각이 틈타고 하나님 뜻을 좇지 못하므로 어려운 문제가 닥치거나 형통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시험에 들거나 하나님을 원망하고 심지어 하나님을 멀리하는 요인이 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 말씀하고, 베드로전서 5장 8~9절에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제가 생겼을 때만 기도하지 말고 습관을 좇아 항상 기도함으로써 범사에 형통함을 입어야 하겠습니다.
3.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라디아서 6장 9절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했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니 항상 기도하되 낙심치 않으면 때가 이르러 거둡니다. 만약 농부가 씨앗을 심고 조급해하며 땅을 파헤친다거나, 싹이 났어도 정성껏 가꾸며 기다리지 않는다면 열매를 거둘 수 없을 것입니다.
기도 역시 응답받기까지 정성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다니엘 선지자는 조국의 장래를 이상 중에 보고 세 이레, 즉 21일 동안 슬퍼하며 기도하자 하나님께서는 첫날 듣고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공중 권세 잡은 악한 영이 응답을 가져오는 천사를 방해하였으므로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다니엘에게 올 수 있었고 그는 천사가 깨닫게 해 주므로 그때서야 하나님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단 10:12~14).
다니엘은 이상을 보고 근심하여 힘이 없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여 마침내 응답받았습니다. 이같이 믿음으로 인내하며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도울 자를 보내 응답받을 수 있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다니엘에게 응답을 가져온 천사도 “미가엘이 와서 나를 도와주므로 이제 내가 말일에 네 백성의 당할 일을 네게 깨닫게 하러 왔노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문제를 놓고 기도하십니까? 다니엘처럼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도를 하시는지요? 그는 자기가 본 이상을 깨달으려고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케 하여 좋은 떡을 먹지 않고 고기와 포도주를 입에 넣지 않으며 기름을 바르지 않고 기도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 겸비한 자세로 작정하여 기도하니 하나님은 첫날부터 듣고 응답하신 것입니다(단 10:1~12). 하나님께서 다니엘의 기도를 듣고 첫날에 응답하셨으나 그에게 응답이 오기까지는 21일이 걸렸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어떤 문제가 있을 때 하루 이틀 기도해 보고 응답이 없다며 쉽게 낙심합니다. 그것은 그만큼 믿음이 적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 기도를 듣고 분명히 응답하시는 분임을 믿고 인내하며 기도하는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에 따라 주시며 우리를 위하여 추수 기한을 정하는 분이십니다(렘 5:24). 그러므로 마가복음 11장 24절에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하신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히 11:1). 만약 응답이 없다고 낙망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므로 응답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참으로 믿음이 있다면 현실을 보지 않고 항상 기도하며 결코 낙망치 않을 것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게 하며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께서 분명히 기도에 응답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 5장 7~8절에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하신 대로 전능하신 하나님께 믿음과 인내로써 간구하여 항상 응답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우리가 항상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1. 기도하지 않으면 ( )의 도우심을 받을 수 없다.
2. 기도로 하나님과 교통할 때 ( )을 깨우쳐 그 뜻대로 살 수 있다.
3. 기도할 때 ( )을 대적하여 이길 수 있다.
4. ( ) 않고 기도하면 때가 이르러 반드시 응답을 받는다.
● 금주 과제
책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129~139페이지까지 읽기.
● 알고 넘어갑시다!
인내와 강청하는 기도로 응답받은 사람들
① 야곱 -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하던 야곱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창 32:26) 하며 간절하게 기도하니 하나님께서는 축복을 허락하셨다.
② 수로보니게 여인 - 귀신 들린 딸을 둔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며 소리 질러 간구했는데 예수님은 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그녀가 또다시 절하며 간청해도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하며 응답하시지 않았다.
그래도 이 여인이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마 15:27) 하며 강청하니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그 믿음을 칭찬하며 응답을 주셨다.
교육목표 :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끝까지 인내하며 낙망치 않고 기도하여 응답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하나님 자녀라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도는 어떠한 것인지 배우고 그 요령을 좇아 응답의 열매를 딸 때까지 인내하며 간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사람은 기도의 중요성을 알고 습관을 좇아 항상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 쉬는 죄를 범치 않으며 응답이 더뎌도 낙망치 않고 더욱 뜨겁게 간구합니다. 우리가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
어떤 도시에 불의한 재판관이 있었는데 한 과부가 찾아와 원한을 풀어 달라 하였습니다. 이 재판관은 뇌물을 바랐지만 과부는 너무 가난하여 그것을 준비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과부가 자주 찾아가 간청하였더니 얼마 동안 들어주지 않던 재판관이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과부가 결코 포기하지 않고 찾아와 간청할 것을 생각하니 의롭지 못한 재판관일지라도 과부의 소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응답의 비결을 깨닫게 하고자 이 비유를 들고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눅 18:7) 말씀하셨습니다. 즉 불의한 재판관도 과부의 청원을 들어주는데 사랑의 하나님께서 어찌 그 자녀들이 부르짖는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더욱이 어떤 문제에 응답받고자 작정하여 금식하고 철야하며 부르짖어 기도한다면 어찌 신속히 응답하시지 않겠습니까.
시편 50편 15절에는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했습니다. 우리 기도에 응답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리도록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많은 사람이 기도해도 응답이 없다고 할까요? 하나님은 분명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 7:7~8) 하셨으니 기도에 응답이 없을 리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과 막힌 죄의 담이 있거나, 기도 양이 부족해서, 또는 아직 때가 아니므로 응답이 오지 않은 것뿐입니다. 우리가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하는 까닭은 인내하며 믿음으로 기도할 때에 성령이 하나님과 막힌 죄의 담을 헐도록 회개의 은혜를 주어 응답받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기도의 양이 차서 받을 만한 때가 되었을 때에 응답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면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낙망치 말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2. 항상 기도해야 하는 이유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성령의 도움을 받을 수 없고 충만함도 잃게 되니 하나님과의 교통이 점점 끊어져 결국 성령이 소멸될 수 있습니다. 마치 자주 대하는 사람과는 대화가 잘 통하고 마음이 잘 맞는 것처럼, 항상 기도로 하나님과 교통할 때 하나님 뜻을 깨우쳐 그 뜻대로 살게 되니 구원에 이르고 영생을 얻습니다. 또한 기도할 때 원수 마귀 사단을 대적하여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어둠의 세력, 곧 악의 영들에게 대한 것이기 때문에 항상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엡 6:12). 그럴 때 하나님 능력과 권세에 힘입어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뜻을 좇아 항상 기도함으로써 기도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빈 들이나 산, 어디에 계시든지 기도했고 새벽이나 밤중, 어느 때든지 기도하셨습니다. 믿음의 선진들도 항상 기도하여 하나님 뜻대로 행했습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도로 너희를 가르칠 것인즉”(삼상 12:23) 하고 격려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며 명령이므로 기도 쉬는 것은 죄라는 것입니다. 기도를 쉬면 육신의 생각이 틈타고 하나님 뜻을 좇지 못하므로 어려운 문제가 닥치거나 형통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시험에 들거나 하나님을 원망하고 심지어 하나님을 멀리하는 요인이 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 말씀하고, 베드로전서 5장 8~9절에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제가 생겼을 때만 기도하지 말고 습관을 좇아 항상 기도함으로써 범사에 형통함을 입어야 하겠습니다.
3.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라디아서 6장 9절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했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니 항상 기도하되 낙심치 않으면 때가 이르러 거둡니다. 만약 농부가 씨앗을 심고 조급해하며 땅을 파헤친다거나, 싹이 났어도 정성껏 가꾸며 기다리지 않는다면 열매를 거둘 수 없을 것입니다.
기도 역시 응답받기까지 정성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다니엘 선지자는 조국의 장래를 이상 중에 보고 세 이레, 즉 21일 동안 슬퍼하며 기도하자 하나님께서는 첫날 듣고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공중 권세 잡은 악한 영이 응답을 가져오는 천사를 방해하였으므로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다니엘에게 올 수 있었고 그는 천사가 깨닫게 해 주므로 그때서야 하나님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단 10:12~14).
다니엘은 이상을 보고 근심하여 힘이 없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여 마침내 응답받았습니다. 이같이 믿음으로 인내하며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도울 자를 보내 응답받을 수 있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다니엘에게 응답을 가져온 천사도 “미가엘이 와서 나를 도와주므로 이제 내가 말일에 네 백성의 당할 일을 네게 깨닫게 하러 왔노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문제를 놓고 기도하십니까? 다니엘처럼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도를 하시는지요? 그는 자기가 본 이상을 깨달으려고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케 하여 좋은 떡을 먹지 않고 고기와 포도주를 입에 넣지 않으며 기름을 바르지 않고 기도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 겸비한 자세로 작정하여 기도하니 하나님은 첫날부터 듣고 응답하신 것입니다(단 10:1~12). 하나님께서 다니엘의 기도를 듣고 첫날에 응답하셨으나 그에게 응답이 오기까지는 21일이 걸렸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어떤 문제가 있을 때 하루 이틀 기도해 보고 응답이 없다며 쉽게 낙심합니다. 그것은 그만큼 믿음이 적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 기도를 듣고 분명히 응답하시는 분임을 믿고 인내하며 기도하는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에 따라 주시며 우리를 위하여 추수 기한을 정하는 분이십니다(렘 5:24). 그러므로 마가복음 11장 24절에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하신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히 11:1). 만약 응답이 없다고 낙망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므로 응답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참으로 믿음이 있다면 현실을 보지 않고 항상 기도하며 결코 낙망치 않을 것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게 하며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께서 분명히 기도에 응답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 5장 7~8절에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하신 대로 전능하신 하나님께 믿음과 인내로써 간구하여 항상 응답받으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우리가 항상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1. 기도하지 않으면 ( )의 도우심을 받을 수 없다.
2. 기도로 하나님과 교통할 때 ( )을 깨우쳐 그 뜻대로 살 수 있다.
3. 기도할 때 ( )을 대적하여 이길 수 있다.
4. ( ) 않고 기도하면 때가 이르러 반드시 응답을 받는다.
● 금주 과제
책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129~139페이지까지 읽기.
● 알고 넘어갑시다!
인내와 강청하는 기도로 응답받은 사람들
① 야곱 -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하던 야곱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창 32:26) 하며 간절하게 기도하니 하나님께서는 축복을 허락하셨다.
② 수로보니게 여인 - 귀신 들린 딸을 둔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며 소리 질러 간구했는데 예수님은 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그녀가 또다시 절하며 간청해도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하며 응답하시지 않았다.
그래도 이 여인이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마 15:27) 하며 강청하니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그 믿음을 칭찬하며 응답을 주셨다.
2020-12-04
제49과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기도 (2)
이사야 58:6~9
읽을말씀 : 이사야 58:6~9 | 외울말씀 : 이사야 58:6 | 참고 말씀: 이사야 58:3~5
교육목표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과 올바른 보호식을 함으로 마음의 소원에 신속히 응답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지난 시간에 이어 하나님께서 과연 어떤 금식기도를 기뻐하시는지와, 올바른 보호식에 관해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을 하려면
다섯째, 하나님과의 담을 헐어야 합니다.
만약 집안에 귀신 들린 사람이 있다면 온 가족이 사랑으로 하나 되어 금식한 후에 능력자를 청하여 예배드리고 물리치면 즉시 귀신이 나갑니다. 그런데 이때에도 먼저 가족이 우상을 섬긴 것이나 사랑으로 하나 되지 못한 것 등 하나님 앞에 담이 되었던 것을 철저히 돌이킨 뒤에 한마음으로 금식해야 합니다.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금식을 할 때에도 질병에 걸리기까지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은 이유를 알아서 회개하고 금식에 들어가야 합니다.
이 외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도 먼저 하나님과 막힌 죄의 담을 헐고 금식해야 합니다. 어떤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담이 된 것이 있다면 먼저 그 문제를 해결하여 죄의 담을 헐어야 합니다. 그런 뒤에 기도하고 금식할 때라야 응답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버리기 위해 기도할 때에도 자신의 악함을 철저히 통회자복하면서 어떻게든 진리로 변화하려는 행함이 따라야 합니다. 예를 들어, 형제와 걸려 불편함과 미움을 이기지 못하면서 금식을 한다면 이런 것은 회개 금식도 될 수 없습니다. 회개 금식은 자신의 목숨을 드려서라도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는 겸비한 행함인데 마음에 악을 품고 한다는 자체가 이미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따라서 먼저 자신의 악함을 철저히 회개하고 온전히 마음의 악을 벗어 버리기 위해 기도해야 위로부터 은혜와 능력이 임하여 마음에서부터 미움이나 감정을 버릴 수 있습니다.
여섯째, 불같은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금식을 하니 힘들어서 기도를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금식하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금식하면서 올려드리는 간절한 기도의 향입니다. 즉 곡기를 끊고 생명을 다해 드리는 중심의 기도 향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금식하는 동안에는 할 수 있으면 말씀과 기도에 몰두해야 하며 평소보다 더 많이, 더 불같이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더구나 장기 금식을 할 때에는 금식에 들어가기 전에도 충분히 기도를 쌓아 준비할 뿐만 아니라 금식 중에는 하루에 적어도 다섯 시간 이상 부르짖어 불같이 기도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이라면 장기간 곡기를 끊을 때 몸이 상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금식할 때에는 기도를 통해 강건함과 능력을 받습니다. 이때 기도의 내용은 육적인 제목이나 개인적인 소원이 위주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선적으로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 또한 교회와 목자를 위해 기도해야 하지요.
일곱째,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며 근신해야 합니다.
이사야 58장 3~5절에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찾아 얻으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의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 목소리로 상달케 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어찌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그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 머리를 갈대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말씀하셨습니다.
금식을 한다면서 오락을 즐기거나 사람들과 다투고 싸우며 해를 가한다면 하나님이 무엇이라 하시겠습니까.
세상일에 관심을 가지고 말을 주고받다 보면 무익한 말이나 악한 말이 나오고 농담도 나옵니다. 금식 중에 주변 사람과 다투어 마음이 상하고 혈기를 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이 될 수 없습니다. 금식은 하나님 앞에 생명을 걸고 하는 것이며, 전폭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여 그 은혜를 구하는 지극히 겸비한 행함입니다. 그런 만큼 마음과 뜻과 힘, 정성 다해 하나님 뜻 가운데 행하며 정녕 하나님께서 감동하실 금식을 드려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단기 금식을 할 때에는 일상적인 집안 일이나 직장 일을 병행합니다. 온 집에 충성해야 하니 그렇게 하지만 장기 금식일 때에는 그럴 수 없습니다. 장기 금식하는 동안에는 몸에 무리가 되는 일을 해서는 안 되며, 세상 것을 접하지 않고 온전히 기도와 말씀에 전력하며 근신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근신하고 절제하면서 금식할 뿐 아니라 첫날부터 마치는 날까지 마음에 요동 없이 오직 진리 안에 서서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바라고 믿어야 합니다. 주린 자에게 식물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입히며 또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않는 금식, 곧 형제에게 선을 행하는 가운데 드리는 금식이라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십니다(사 58:7).
여덟째, 금식이 끝난 후 보호식까지 잘 마쳐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금식을 하면 몸이 상하지 않도록 하나님이 붙들어 주십니다. 그러나 아무리 믿음으로 금식한다 해도 사람이 할 수 있는 도리는 해야 합니다. 금식을 하고 그 날짜만큼 보호식을 할 때 온전한 금식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절제의 능력이 생길 뿐 아니라 몸에 무리가 가지 않고 더욱 강건하며 영이 맑아집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건강하여 소화가 잘되니 굳이 보호식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보호식을 온전히 할 때 하나님께서는 위가 연약한 사람이라도 튼튼하게 하고 사소한 질병도 그 기간에 치료해 주십니다. 아무리 금식을 잘했어도 보호식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그만큼 기가 빠지거나 부작용이 생길 수 있습니다.
보호식 중에는 몸을 무리하게 움직이거나 힘든 일을 피해야 합니다. 혹 금식한 뒤에 시험이 찾아올 수도 있으므로 금식할 때 미리 기도로 준비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금식을 기뻐 받으셨을 때에는 보호식도 잘할 수 있도록 주관하십니다. 먹어서는 안 되는 음식은 먹지 않도록, 한꺼번에 너무 많이 먹어서 탈이 나는 일이 없도록 절제력을 주십니다. 이렇게 절제하여 아름답게 드리는 보호식까지도 온전한 금식에 포함됩니다.
2. 올바른 보호식을 하려면
보호식을 할 때 과식하면 얼굴이 붓고 위에 부담이 되므로 각별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보통 하루에 세 번 식사를 하지만 미음이나 죽으로 보호식을 할 때에는 한 컵 정도의 적은 양으로 네 번에 나누어 먹는 것이 좋습니다. 육류, 계란, 빵, 음료수, 기름기가 많은 음식, 매운 것, 짠 것, 단 것, 신 것 등 자극적인 음식이나 화학조미료, 향신료는 피하고 가급적 채식을 하는 것이 좋지요.
3일 금식을 한 뒤에는 처음부터 묽은 죽을 먹어도 되지만 장기 금식을 한 후에는 위장이 아기와 같은 상태이기 때문에 더 주의해야 합니다. 이틀 정도는 거의 물처럼 묽은 미음을 하루에 네 차례 정도 마셔야 하며, 과일은 사과 한쪽 정도 즙을 내서 마시되 하루 네 차례 정도로 그쳐야 합니다. 그리고 3∼4일이 지나면서부터는 미음을 조금씩 진하게 끓여 마시고, 점점 쌀가루나 익은 호박을 넣은 묽은 죽이나 콩나물 죽 등으로 이어 가며 양도 조금씩 늘려 갑니다.
반찬은 육류는 피하고 화학조미료를 넣지 말아야 하며, 굳이 고기를 먹고 싶다면 생선류를 조금 먹되 간은 싱겁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고춧잎이나 들깻잎, 무 잎, 배춧잎과 같은 야채에 멸치를 넣어 끓인 것이 좋고, 특히 들깨를 갈아 껍질을 벗겨 내고 쌀죽에 섞어 끓여 먹으면 기가 빨리 회복되고 건강해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절제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보호식을 하면 붓지도 않고 피부색도 뽀얗게 살아나며 체중도 신속하게 회복됩니다. 이처럼 금식에 이어 보호식까지 잘 마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온전한 금식이 되어 신속한 응답을 체험합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하나님과의 ( )을 헐어야 한다.
2. 불같은 ( )가 있어야 한다.
3.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며 ( )해야 한다.
4. 금식이 끝난 후 ( )까지 잘 마쳐야 한다.
● 금주 과제
책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129~139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치기.
● 알고 넘어갑시다!
금식 기도와 보호식
① 금식 기도란, 음식물을 먹지 않으며 기도하는 것,
즉 자신의 생명을 걸고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하는 것을 말한다.
② 보호식이란, 금식 이후에 일반식을 하기 전까지 음식을 절제하여
섭취하는 식사를 말한다.
금식 기도의 종류
①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기 위한 금식
② 어떤 질병이나 문제가 있어서 이를 해결받기 위한 금식
③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금식
④ 죄악을 신속하게 벗어버리기 위한 금식
⑤ 능력 받아 영광 돌리기 위한 금식
⑥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금식
교육목표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과 올바른 보호식을 함으로 마음의 소원에 신속히 응답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지난 시간에 이어 하나님께서 과연 어떤 금식기도를 기뻐하시는지와, 올바른 보호식에 관해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을 하려면
다섯째, 하나님과의 담을 헐어야 합니다.
만약 집안에 귀신 들린 사람이 있다면 온 가족이 사랑으로 하나 되어 금식한 후에 능력자를 청하여 예배드리고 물리치면 즉시 귀신이 나갑니다. 그런데 이때에도 먼저 가족이 우상을 섬긴 것이나 사랑으로 하나 되지 못한 것 등 하나님 앞에 담이 되었던 것을 철저히 돌이킨 뒤에 한마음으로 금식해야 합니다.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금식을 할 때에도 질병에 걸리기까지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지 않은 이유를 알아서 회개하고 금식에 들어가야 합니다.
이 외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도 먼저 하나님과 막힌 죄의 담을 헐고 금식해야 합니다. 어떤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담이 된 것이 있다면 먼저 그 문제를 해결하여 죄의 담을 헐어야 합니다. 그런 뒤에 기도하고 금식할 때라야 응답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버리기 위해 기도할 때에도 자신의 악함을 철저히 통회자복하면서 어떻게든 진리로 변화하려는 행함이 따라야 합니다. 예를 들어, 형제와 걸려 불편함과 미움을 이기지 못하면서 금식을 한다면 이런 것은 회개 금식도 될 수 없습니다. 회개 금식은 자신의 목숨을 드려서라도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는 겸비한 행함인데 마음에 악을 품고 한다는 자체가 이미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따라서 먼저 자신의 악함을 철저히 회개하고 온전히 마음의 악을 벗어 버리기 위해 기도해야 위로부터 은혜와 능력이 임하여 마음에서부터 미움이나 감정을 버릴 수 있습니다.
여섯째, 불같은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금식을 하니 힘들어서 기도를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금식하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금식하면서 올려드리는 간절한 기도의 향입니다. 즉 곡기를 끊고 생명을 다해 드리는 중심의 기도 향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금식하는 동안에는 할 수 있으면 말씀과 기도에 몰두해야 하며 평소보다 더 많이, 더 불같이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더구나 장기 금식을 할 때에는 금식에 들어가기 전에도 충분히 기도를 쌓아 준비할 뿐만 아니라 금식 중에는 하루에 적어도 다섯 시간 이상 부르짖어 불같이 기도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이라면 장기간 곡기를 끊을 때 몸이 상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금식할 때에는 기도를 통해 강건함과 능력을 받습니다. 이때 기도의 내용은 육적인 제목이나 개인적인 소원이 위주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선적으로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 또한 교회와 목자를 위해 기도해야 하지요.
일곱째,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며 근신해야 합니다.
이사야 58장 3~5절에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찾아 얻으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의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 목소리로 상달케 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어찌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그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 머리를 갈대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말씀하셨습니다.
금식을 한다면서 오락을 즐기거나 사람들과 다투고 싸우며 해를 가한다면 하나님이 무엇이라 하시겠습니까.
세상일에 관심을 가지고 말을 주고받다 보면 무익한 말이나 악한 말이 나오고 농담도 나옵니다. 금식 중에 주변 사람과 다투어 마음이 상하고 혈기를 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이 될 수 없습니다. 금식은 하나님 앞에 생명을 걸고 하는 것이며, 전폭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여 그 은혜를 구하는 지극히 겸비한 행함입니다. 그런 만큼 마음과 뜻과 힘, 정성 다해 하나님 뜻 가운데 행하며 정녕 하나님께서 감동하실 금식을 드려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단기 금식을 할 때에는 일상적인 집안 일이나 직장 일을 병행합니다. 온 집에 충성해야 하니 그렇게 하지만 장기 금식일 때에는 그럴 수 없습니다. 장기 금식하는 동안에는 몸에 무리가 되는 일을 해서는 안 되며, 세상 것을 접하지 않고 온전히 기도와 말씀에 전력하며 근신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근신하고 절제하면서 금식할 뿐 아니라 첫날부터 마치는 날까지 마음에 요동 없이 오직 진리 안에 서서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바라고 믿어야 합니다. 주린 자에게 식물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입히며 또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않는 금식, 곧 형제에게 선을 행하는 가운데 드리는 금식이라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십니다(사 58:7).
여덟째, 금식이 끝난 후 보호식까지 잘 마쳐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금식을 하면 몸이 상하지 않도록 하나님이 붙들어 주십니다. 그러나 아무리 믿음으로 금식한다 해도 사람이 할 수 있는 도리는 해야 합니다. 금식을 하고 그 날짜만큼 보호식을 할 때 온전한 금식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절제의 능력이 생길 뿐 아니라 몸에 무리가 가지 않고 더욱 강건하며 영이 맑아집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건강하여 소화가 잘되니 굳이 보호식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보호식을 온전히 할 때 하나님께서는 위가 연약한 사람이라도 튼튼하게 하고 사소한 질병도 그 기간에 치료해 주십니다. 아무리 금식을 잘했어도 보호식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그만큼 기가 빠지거나 부작용이 생길 수 있습니다.
보호식 중에는 몸을 무리하게 움직이거나 힘든 일을 피해야 합니다. 혹 금식한 뒤에 시험이 찾아올 수도 있으므로 금식할 때 미리 기도로 준비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금식을 기뻐 받으셨을 때에는 보호식도 잘할 수 있도록 주관하십니다. 먹어서는 안 되는 음식은 먹지 않도록, 한꺼번에 너무 많이 먹어서 탈이 나는 일이 없도록 절제력을 주십니다. 이렇게 절제하여 아름답게 드리는 보호식까지도 온전한 금식에 포함됩니다.
2. 올바른 보호식을 하려면
보호식을 할 때 과식하면 얼굴이 붓고 위에 부담이 되므로 각별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보통 하루에 세 번 식사를 하지만 미음이나 죽으로 보호식을 할 때에는 한 컵 정도의 적은 양으로 네 번에 나누어 먹는 것이 좋습니다. 육류, 계란, 빵, 음료수, 기름기가 많은 음식, 매운 것, 짠 것, 단 것, 신 것 등 자극적인 음식이나 화학조미료, 향신료는 피하고 가급적 채식을 하는 것이 좋지요.
3일 금식을 한 뒤에는 처음부터 묽은 죽을 먹어도 되지만 장기 금식을 한 후에는 위장이 아기와 같은 상태이기 때문에 더 주의해야 합니다. 이틀 정도는 거의 물처럼 묽은 미음을 하루에 네 차례 정도 마셔야 하며, 과일은 사과 한쪽 정도 즙을 내서 마시되 하루 네 차례 정도로 그쳐야 합니다. 그리고 3∼4일이 지나면서부터는 미음을 조금씩 진하게 끓여 마시고, 점점 쌀가루나 익은 호박을 넣은 묽은 죽이나 콩나물 죽 등으로 이어 가며 양도 조금씩 늘려 갑니다.
반찬은 육류는 피하고 화학조미료를 넣지 말아야 하며, 굳이 고기를 먹고 싶다면 생선류를 조금 먹되 간은 싱겁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고춧잎이나 들깻잎, 무 잎, 배춧잎과 같은 야채에 멸치를 넣어 끓인 것이 좋고, 특히 들깨를 갈아 껍질을 벗겨 내고 쌀죽에 섞어 끓여 먹으면 기가 빨리 회복되고 건강해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절제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보호식을 하면 붓지도 않고 피부색도 뽀얗게 살아나며 체중도 신속하게 회복됩니다. 이처럼 금식에 이어 보호식까지 잘 마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온전한 금식이 되어 신속한 응답을 체험합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하나님과의 ( )을 헐어야 한다.
2. 불같은 ( )가 있어야 한다.
3.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며 ( )해야 한다.
4. 금식이 끝난 후 ( )까지 잘 마쳐야 한다.
● 금주 과제
책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129~139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치기.
● 알고 넘어갑시다!
금식 기도와 보호식
① 금식 기도란, 음식물을 먹지 않으며 기도하는 것,
즉 자신의 생명을 걸고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하는 것을 말한다.
② 보호식이란, 금식 이후에 일반식을 하기 전까지 음식을 절제하여
섭취하는 식사를 말한다.
금식 기도의 종류
① 마음의 소원을 응답받기 위한 금식
② 어떤 질병이나 문제가 있어서 이를 해결받기 위한 금식
③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금식
④ 죄악을 신속하게 벗어버리기 위한 금식
⑤ 능력 받아 영광 돌리기 위한 금식
⑥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금식
2020-11-27
제48과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기도 (1)
이사야 58:6~9
읽을말씀 : 이사야 58:6~9 | 외울말씀 : 이사야 58:6 | 참고 말씀: 야고보서 4:2~3, 고린도전서 14:1
교육목표 : 금식의 위력을 깨달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금식기도를 함으로 마음의 소원에 응답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우리가 간절한 소원이 있을 때 작정하여 기도하거나 철야기도를 하고, 금식하며 간절히 하나님께 매달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조건 금식한다 해서 응답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을 해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 앞에 금식을 하고도 응답이 없고 여전히 문제가 있다면 분명히 이유가 있습니다. 내 편에서는 금식을 했다고 하지만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과연 어떤 금식기도를 기뻐하시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금식기도의 위력
성경을 보면 금식기도의 위력은 참으로 대단함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40일 금식은 십자가 고난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시는 길을 예비하였고, 모세의 40일 금식은 십계명을 받아 내리는 열매를 맺었습니다. 에스더는 3일간의 금식기도를 통해 민족 전체가 멸망할 위기에서 벗어나게 했고 오히려 대적을 멸함으로써 하나님께 크게 영광 돌렸습니다. 그 밖에도 죄를 범하여 멸망할 위기에서 금식을 통해 용서받기도 하는 등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인 만큼 그냥 기도하는 것보다 더 신속하게 응답을 이끌어낼 수 있지요.
하나님께서 “구하라 주실 것이요” 약속하셨는데 곡기를 끊으면서까지 간절히 구하는 자녀의 기도에 어찌 응답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따라서 질병 치료를 위해 금식했다면 반드시 치료의 응답이 와야 하고, 시험 환난 때문에 금식했다면 그것이 물러가야 합니다. 축복이나 권능을 놓고 금식했다면 축복이 임하고 권능을 나타낼 수 있어야 하지요.
2.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을 하려면
첫째, 금식하는 기간이 목적에 맞아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40일, 21일, 3일 금식 등이 나오는데 그에 합당한 금식의 제목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40일 금식은 하나님의 큰 뜻을 이루기 위해 하는 것이며, 개인의 유익이나 사업터를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경우, 구세주로서 큰 사명을 이루기 위해 40일 금식을 하셨습니다. 또한 모세가 한 금식은 하나님 백성을 위해 십계명을 받아 내리는 큰 사명을 위한 것이었지요.
에스더의 경우, 자기 민족이 멸절될 위기에 처했으니 장기 금식을 해야 될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민족과 더불어 단 3일을 금식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응답받을 문제가 있을 때에도 그저 불같이 기도하는 것만으로 족한 경우가 있고, 3일만 금식하거나 길어야 7일 정도면 족함을 알아야 합니다.
회개하기 위해 금식을 할 때에도 분별을 잘해야 합니다. 회개하여 돌이키면 족한 경우가 있고 금식을 해서라도 자신을 복종시켜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만일 기도를 쉬었다 해서 10일이나 21일을 회개 금식 한다면 합당치 않습니다. 앞으로 쉬지 않고 기도하면 되지 장기 금식을 할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육체의 일을 행한 경우라면 먼저 철저히 통회자복을 한 뒤에 회개 금식을 해야 합니다(갈 5:19~21). 하나님과의 사이에 죄로 인한 담이 가로막고 있으면 기도를 해도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마음에 여전히 죄를 품고 금식하는 것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3일을 금식해도 회개하여 완전히 돌이켰다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십니다. 그러나 21일 금식을 해도 돌이키려는 마음 없이 금식만 했다면 받지 않으십니다.
둘째, 금식하는 시기도 중요합니다.
특히 장기 금식은 반드시 성령이 주관하시는 때를 좇아서 해야 합니다. 주의 종이나 하나님 나라를 위해 큰일을 이루고자 권능을 사모하는 사람 중에는 장기 금식을 하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욕심에 따라 구하거나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이라면 아무리 40일, 그 이상을 드린다 해도 권능을 끌어내릴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1절을 보면 은사를 구할 때에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가운데서 구해야 함을 말씀합니다. 하물며 권능을 받으려면 합당한 그릇을 준비한 다음에 구해야 합니다. 마음에 악이 없도록 성결한 다음에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때를 좇아서 장기 금식을 해야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직 깨끗한 그릇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단순히 뜨거움과 열심으로 금식을 작정한 것이라면 공의의 법칙에 맞지 않으므로 응답을 주실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마음에 사모함이 있다 해도 먼저 자신을 돌아보아 그릇을 준비하는 기도와 금식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릇이 준비되었을 때에 성령께서 주관하시는 대로 순종하여 금식하면 응답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셋째, 장기 금식을 할 때에는 반드시 질서를 좇아야 합니다.
장기 금식은 생명을 걸고 하는 것이니 목적과 기간, 그리고 시기가 과연 하나님 앞에 합당한지 점검해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를 받아서 정한 것이라면 목자도 동일한 주관을 받을 것이니 기꺼이 금식을 위해 기도해 줄 것이며, 그럴 때 성령의 감동 감화 충만함 속에서 하나님이 보장하시는 금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목자와 상담해야 하고 또한 교회 측에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장기 금식 기간에는 말씀과 기도에 몰두해야 하므로 자신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양 떼를 관리하는 하나님의 종이 교회 측에 상의도 없이 임의로 장기 금식을 결정해 버린다면 이치에 맞지 않은 일이지요.
우리가 하나님 일을 한다 해도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육의 질서를 좇아 행해야 합니다. 몸도 쉬어야 할 때에는 쉬고 과식이나 폭식 등을 삼가야 하듯이 금식도 절제 없이 무리하게 할 때에는 몸을 상하게 하므로 지혜롭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장기 금식의 경우, 마음에 주관이 왔다 해도 먼저 건강을 잘 관리하여 충분히 준비된 상황에서, 또 영적으로도 기도를 잘 쌓은 기반 위에서 금식에 들어가야 합니다.
금식은 육의 생명의 근원이 되는 곡기를 끊는 것이기 때문에 생명을 걸고 한다는 의미가 있으며, 더구나 장기 금식은 실제로 생명을 걸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만큼 반드시 성령의 주관 가운데 해야 하며, 또 성령의 주관을 받았다 해도 신중히, 하나님 앞에 준비된 자세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렇게 영육 간에 합당한 질서를 좇아서 드릴 때라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온전한 금식이 됩니다.
넷째, 진리에 합당한 목적으로 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4장 2~3절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했으니, 비진리의 마음으로 금식한다면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물질의 축복을 구할 때에도 믿음이 아니라 욕심으로 구하는 것이라면 아무리 금식해도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물질의 축복 분야도 심은 대로 거두는 법칙에 따라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심을 때에 응답받는 것입니다. 또 크게 심는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먼저 영적 축복을 주기 원하므로 때를 기다리시지요.
영적으로 여러 은사를 구한다 해도 먼저 마음에 깨끗한 그릇을 준비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구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영안이 열리기 위해 기도할 때에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영의 세계를 사모하며 마음을 정결케 하고 기도해야지, 마음의 할례는 하지 않으면서 욕심으로 구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능력을 받기 위해 금식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의 할례를 하면서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한 중심으로 불같이 기도하며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할 때에는 오히려 해를 입는 경우가 있습니다. 금식으로 인해 몸이 상하기도 하고 오히려 금식 후에 교만해져서 사단의 역사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금식기도 할 때에는 먼저 자신의 욕심으로 구하는 것은 아닌지, 하나님 앞에 합당한 제목으로 금식하며 바른 마음으로 구하는 것인지를 잘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다음 시간에 이어서 살펴보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금식하는 기간이 ( )에 맞아야 한다.
2. 금식하는 ( )도 중요하다.
3. 장기 금식을 할 때에는 반드시 ( )를 좇아야 한다.
4. 금식 기도는 ( )에 합당한 목적으로 해야 한다.
● 금주 과제
책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117~125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치기.
● 알고 넘어갑시다!
‘에스더의 금식 기도’
바사 제국의 왕후였던 에스더는 하만이 유다 민족을 멸절시키려 하는 위기 앞에서 잠잠히 있으면 평안할 수 있음에도, 살아도 죽어도 자기 민족과 함께하리라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3일을 금식하고 담대히 왕에게 나아갔다(에 5장).
당시 바사 제국의 법에 따르면, 누구든지 왕이 부르기 전에 그 앞에 나아가면 죽음을 면치 못하는 상황이었다. 다만 왕이 그를 위해 금홀을 내밀면 살 수 있었다.
에스더가 하나님의 백성을 살리기 위해 생명을 걸고 금식기도를 하니, 하나님께서 왕의 마음을 움직여 주셨다.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유다 민족을 멸절의 위기에서 구하시고 원수들을 심판하시는 대반전의 역사가 일어났다.
교육목표 : 금식의 위력을 깨달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금식기도를 함으로 마음의 소원에 응답받는 성도가 되게 한다.
우리가 간절한 소원이 있을 때 작정하여 기도하거나 철야기도를 하고, 금식하며 간절히 하나님께 매달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조건 금식한다 해서 응답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을 해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 앞에 금식을 하고도 응답이 없고 여전히 문제가 있다면 분명히 이유가 있습니다. 내 편에서는 금식을 했다고 하지만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과연 어떤 금식기도를 기뻐하시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금식기도의 위력
성경을 보면 금식기도의 위력은 참으로 대단함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40일 금식은 십자가 고난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시는 길을 예비하였고, 모세의 40일 금식은 십계명을 받아 내리는 열매를 맺었습니다. 에스더는 3일간의 금식기도를 통해 민족 전체가 멸망할 위기에서 벗어나게 했고 오히려 대적을 멸함으로써 하나님께 크게 영광 돌렸습니다. 그 밖에도 죄를 범하여 멸망할 위기에서 금식을 통해 용서받기도 하는 등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인 만큼 그냥 기도하는 것보다 더 신속하게 응답을 이끌어낼 수 있지요.
하나님께서 “구하라 주실 것이요” 약속하셨는데 곡기를 끊으면서까지 간절히 구하는 자녀의 기도에 어찌 응답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따라서 질병 치료를 위해 금식했다면 반드시 치료의 응답이 와야 하고, 시험 환난 때문에 금식했다면 그것이 물러가야 합니다. 축복이나 권능을 놓고 금식했다면 축복이 임하고 권능을 나타낼 수 있어야 하지요.
2.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을 하려면
첫째, 금식하는 기간이 목적에 맞아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40일, 21일, 3일 금식 등이 나오는데 그에 합당한 금식의 제목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40일 금식은 하나님의 큰 뜻을 이루기 위해 하는 것이며, 개인의 유익이나 사업터를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경우, 구세주로서 큰 사명을 이루기 위해 40일 금식을 하셨습니다. 또한 모세가 한 금식은 하나님 백성을 위해 십계명을 받아 내리는 큰 사명을 위한 것이었지요.
에스더의 경우, 자기 민족이 멸절될 위기에 처했으니 장기 금식을 해야 될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민족과 더불어 단 3일을 금식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응답받을 문제가 있을 때에도 그저 불같이 기도하는 것만으로 족한 경우가 있고, 3일만 금식하거나 길어야 7일 정도면 족함을 알아야 합니다.
회개하기 위해 금식을 할 때에도 분별을 잘해야 합니다. 회개하여 돌이키면 족한 경우가 있고 금식을 해서라도 자신을 복종시켜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만일 기도를 쉬었다 해서 10일이나 21일을 회개 금식 한다면 합당치 않습니다. 앞으로 쉬지 않고 기도하면 되지 장기 금식을 할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육체의 일을 행한 경우라면 먼저 철저히 통회자복을 한 뒤에 회개 금식을 해야 합니다(갈 5:19~21). 하나님과의 사이에 죄로 인한 담이 가로막고 있으면 기도를 해도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마음에 여전히 죄를 품고 금식하는 것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3일을 금식해도 회개하여 완전히 돌이켰다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십니다. 그러나 21일 금식을 해도 돌이키려는 마음 없이 금식만 했다면 받지 않으십니다.
둘째, 금식하는 시기도 중요합니다.
특히 장기 금식은 반드시 성령이 주관하시는 때를 좇아서 해야 합니다. 주의 종이나 하나님 나라를 위해 큰일을 이루고자 권능을 사모하는 사람 중에는 장기 금식을 하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욕심에 따라 구하거나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이라면 아무리 40일, 그 이상을 드린다 해도 권능을 끌어내릴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1절을 보면 은사를 구할 때에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가운데서 구해야 함을 말씀합니다. 하물며 권능을 받으려면 합당한 그릇을 준비한 다음에 구해야 합니다. 마음에 악이 없도록 성결한 다음에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때를 좇아서 장기 금식을 해야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직 깨끗한 그릇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단순히 뜨거움과 열심으로 금식을 작정한 것이라면 공의의 법칙에 맞지 않으므로 응답을 주실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마음에 사모함이 있다 해도 먼저 자신을 돌아보아 그릇을 준비하는 기도와 금식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릇이 준비되었을 때에 성령께서 주관하시는 대로 순종하여 금식하면 응답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셋째, 장기 금식을 할 때에는 반드시 질서를 좇아야 합니다.
장기 금식은 생명을 걸고 하는 것이니 목적과 기간, 그리고 시기가 과연 하나님 앞에 합당한지 점검해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를 받아서 정한 것이라면 목자도 동일한 주관을 받을 것이니 기꺼이 금식을 위해 기도해 줄 것이며, 그럴 때 성령의 감동 감화 충만함 속에서 하나님이 보장하시는 금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목자와 상담해야 하고 또한 교회 측에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장기 금식 기간에는 말씀과 기도에 몰두해야 하므로 자신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양 떼를 관리하는 하나님의 종이 교회 측에 상의도 없이 임의로 장기 금식을 결정해 버린다면 이치에 맞지 않은 일이지요.
우리가 하나님 일을 한다 해도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육의 질서를 좇아 행해야 합니다. 몸도 쉬어야 할 때에는 쉬고 과식이나 폭식 등을 삼가야 하듯이 금식도 절제 없이 무리하게 할 때에는 몸을 상하게 하므로 지혜롭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장기 금식의 경우, 마음에 주관이 왔다 해도 먼저 건강을 잘 관리하여 충분히 준비된 상황에서, 또 영적으로도 기도를 잘 쌓은 기반 위에서 금식에 들어가야 합니다.
금식은 육의 생명의 근원이 되는 곡기를 끊는 것이기 때문에 생명을 걸고 한다는 의미가 있으며, 더구나 장기 금식은 실제로 생명을 걸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만큼 반드시 성령의 주관 가운데 해야 하며, 또 성령의 주관을 받았다 해도 신중히, 하나님 앞에 준비된 자세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렇게 영육 간에 합당한 질서를 좇아서 드릴 때라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온전한 금식이 됩니다.
넷째, 진리에 합당한 목적으로 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4장 2~3절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했으니, 비진리의 마음으로 금식한다면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물질의 축복을 구할 때에도 믿음이 아니라 욕심으로 구하는 것이라면 아무리 금식해도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물질의 축복 분야도 심은 대로 거두는 법칙에 따라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심을 때에 응답받는 것입니다. 또 크게 심는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먼저 영적 축복을 주기 원하므로 때를 기다리시지요.
영적으로 여러 은사를 구한다 해도 먼저 마음에 깨끗한 그릇을 준비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구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영안이 열리기 위해 기도할 때에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영의 세계를 사모하며 마음을 정결케 하고 기도해야지, 마음의 할례는 하지 않으면서 욕심으로 구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능력을 받기 위해 금식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의 할례를 하면서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한 중심으로 불같이 기도하며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할 때에는 오히려 해를 입는 경우가 있습니다. 금식으로 인해 몸이 상하기도 하고 오히려 금식 후에 교만해져서 사단의 역사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금식기도 할 때에는 먼저 자신의 욕심으로 구하는 것은 아닌지, 하나님 앞에 합당한 제목으로 금식하며 바른 마음으로 구하는 것인지를 잘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다음 시간에 이어서 살펴보겠습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금식하는 기간이 ( )에 맞아야 한다.
2. 금식하는 ( )도 중요하다.
3. 장기 금식을 할 때에는 반드시 ( )를 좇아야 한다.
4. 금식 기도는 ( )에 합당한 목적으로 해야 한다.
● 금주 과제
책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117~125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치기.
● 알고 넘어갑시다!
‘에스더의 금식 기도’
바사 제국의 왕후였던 에스더는 하만이 유다 민족을 멸절시키려 하는 위기 앞에서 잠잠히 있으면 평안할 수 있음에도, 살아도 죽어도 자기 민족과 함께하리라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3일을 금식하고 담대히 왕에게 나아갔다(에 5장).
당시 바사 제국의 법에 따르면, 누구든지 왕이 부르기 전에 그 앞에 나아가면 죽음을 면치 못하는 상황이었다. 다만 왕이 그를 위해 금홀을 내밀면 살 수 있었다.
에스더가 하나님의 백성을 살리기 위해 생명을 걸고 금식기도를 하니, 하나님께서 왕의 마음을 움직여 주셨다.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유다 민족을 멸절의 위기에서 구하시고 원수들을 심판하시는 대반전의 역사가 일어났다.
2020-11-20
제47과합심기도의 위력
마태복음 18:19~20
읽을말씀 : 마태복음 18:19~20 | 외울말씀 : 마태복음 18:19 | 참고 말씀: 사도행전 12:5
교육목표 : 성령과 한마음이 되어 기도함으로 합심기도의 위력을 체험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가 되게 한다.
1. 합심기도의 영적 의미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 18:19)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두 사람’이란 꼭 두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영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 각 사람이 기도할 때에 성령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뜻이지요(유 1:20).
그렇다면 성령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분이며 하나님과 동일한 마음과 뜻을 가지셨습니다. 또한 우리가 진리를 행하면 기뻐하며 죄 가운데 행하면 애통해하시는 등 독립적인 인성을 가지셨지요. 이러한 성령께서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마음 안에 계십니다. 성령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과 성령의 마음이 하나 되어, 곧 두 마음이 합하여 기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합심기도를 드릴 때라야 주님이 우리 기도에 함께하시며 신속히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능력의 기도를 하려면 성령의 마음을 알아서 성령이 원하시는 기도를 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이 영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영으로 변화되는 만큼, 곧 세상에서 입력된 비진리와 죄악이 없어진 만큼 성령께서 우리를 밝히 주관하고 음성을 들려 줌으로써 그 뜻을 알게 하십니다. 이렇게 성령의 음성을 듣고 주관을 받아 순종해 나갈 때 성령의 감동 감화 충만함을 입으며 우리 마음과 성령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기도할 때에는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거나 욕심을 따라 구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주시는 소원에 따라, 또 하나님 방법대로 이룰 수 있도록 진리로 기도하지요. 이렇게 기도할 때에 이것이 영적 의미의 합심기도이며, 그 기도의 위력과 역사하는 힘이 큰 것입니다.
2. 합심기도 방법
하나님께서 합심기도를 기뻐하고 속히 응답하며 크게 역사하시는 까닭은 한마음이 되어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성령과 내가 한마음이 되어 기도한다면 엘리야처럼 불의 응답을 받으며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마음껏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합하여 기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두 사람 이상이 모여 어떤 일을 계획하고 의논할 때에 마음이 하나 되지 못하고 의견이 분분하다면 그 일은 이미 시작부터 잘못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혼자든 둘이든 또는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할 때에 성령과 마음이 하나 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응답받는 데 중요한 관건입니다.
그러니 합심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성령의 감동과 충만을 받아 기도해야 합니다(엡 6:18). 성령은 하나님의 마음을 지녔으므로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며(고전 2:10) 하나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는 분입니다(롬 8:27). 그러므로 성령께서 마음을 주관하는 대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고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하였거나 꾸준한 기도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은 합심하여 기도하는 것이 힘들고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한 시간을 기도하고자 해도 억지로 생각을 짜내며 힘들어하고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생각 속에서 임의대로 하는 기도는 생각의 기도, 혼의 기도입니다. 이러한 기도를 하면 성령의 충만함도 없고, 쉽게 잡념이 틈타거나 피곤해져 졸음이 밀려옵니다. 그래서 오랜 시간 기도할 수 없고, 중언부언하며 기도 후에는 자신이 무슨 기도를 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기도에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수 없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어도 여전히 혼의 기도를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다고 불평하거나 낙망하는 까닭은 혼의 기도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를 외면한다는 것은 아니며, 듣고 계시지만 응답하실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성령의 감동함을 받지 못하니 기도할 필요가 없는 것일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생각의 기도라도 열심히 부르짖을 때 기도 문이 열리고, 능력을 받아 영의 기도를 하게 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아예 기도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혼의 기도라도 하나님이 듣고 계시며, 때가 되어 기도 문이 열리면 성령과 연합하여 성령의 감동으로 기도하게 되고 예전에 쌓아놓은 것까지 모두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 20절에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말씀합니다. 성령을 받은 무리가 합심하여 기도할 때에 주님은 각 사람의 마음을 주관하여 성령으로 하나 되게 하고 한마음으로 연합하도록 인도하여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기도가 되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여러 사람이 함께 기도하여도 한마음 한뜻이 되어 사랑으로 기도할 수 있지요.
그러나 각 사람이 마음을 모으지 않는다면 목표를 정해 놓고 한다 해도 중심을 다한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 사람이 함께 기도할 때에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지 않는다면 사회자는 찬송을 충만히 부르게 하고 회개케 하여 성령으로 하나 되도록 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하나 되어 기도하면 성령이 충만하고 마음에 기쁨이 임하며 응답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옵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영으로 기도하면 조금도 피곤치 않고 졸음이나 잡념도 틈타지 못하며 믿음과 기쁨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기도가 주님이 함께하시며,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기도입니다.
3. 합심기도의 위력
헤롯(헤롯 아그립바 1세)의 기독교 박해로 열두 사도 중 가장 먼저 야고보가 칼에 목을 베이고 베드로는 옥에 갇혔을 때의 일입니다.
사도행전 12장 5절에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도들이 베드로를 위해 합심하여 간절히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베드로를 구출하셨습니다.
헤롯이 베드로를 잡아내려 하던 전날 밤 베드로는 두 군사 틈에서 쇠사슬에 매여 잠들었고 파수꾼들은 문 밖에서 옥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베드로를 얽어 맨 쇠사슬이 벗겨지고 굳게 잠긴 쇠문이 저절로 열려 옥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행 12:1~10).
베드로가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집에 이를 때까지 그곳에서는 여러 사람이 모여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놀라운 이 기적의 역사는 합심기도의 위력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옥에 갇힌 사도 베드로를 위해 교회가 한 일은 합심하여 간절히 기도한 것뿐이었습니다.
이처럼 교회에 어려움이 있을 때, 성도들에게 아픔이 있을 때에 사람의 생각을 동원하거나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줄 믿고 마음 모아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합심기도를 기쁘게 받고 응답하십니다. 더욱이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하여 합심으로 기도할 때에 얼마나 기쁘게 받으시겠습니까.
물론 기도하는 사람의 수만 많다고 해서 합심기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 같은 성령의 주관을 받으며 동일한 목적을 갖고 열심으로 기도에 동참해야 합니다. 한자리에 모여 있어도 중언부언하고 잡념과 졸음 속에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수 없지요. 합심기도란 말 그대로 마음을 모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모으기 위한 구심점은 바로 성령이며, 모든 사람이 성령의 주관에 따라 하나 되어 기도할 때라야 참된 합심기도가 됩니다.
여러 사람이 마음을 합하여 성령 충만함으로써 영의 기도를 하면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체험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받고 마음껏 하나님 나라를 확장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여 기도하는 곳에 힘써 함께하여 합심기도의 위력을 체험하며 기도의 능력을 받아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하는 귀한 일꾼이 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성령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과 ( )의 마음이 하나 되어, 곧 두 마음이 합하여 기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2. 성령을 받은 무리가 합심하여 기도할 때에 ( )은 각 사람의 마음을 주관하여 ( )으로 하나 되게 하고 한마음으로 연합하도록 인도하여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기도가 되도록 하신다.
● 금주 과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책자 105~125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치기.
● 알고 넘어갑시다!
‘합심기도의 위력’
주님께서 승천하신 후 제자들을 비롯하여 120명이 합심하여 기도에 힘썼는데, 오순절날 모두가 성령을 받고 불같은 성령의 역사를 받아 각 나라 말로 방언을 하였다(행 2:1~4).
또한 이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세례를 받은 제자의 수가 삼천 명이나 되었으며(행 2:41) 사도들을 통해 갖가지 기사와 표적이 나타나 믿는 자의 수가 점점 더해졌고 성도들 삶이 변화되었다(행 2:43~47).
이같이 합심기도를 통해 말씀을 전하는 능력이 임하고, 눈먼 사람이나 걷지 못하는 사람을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고 갖가지 질병을 치료하며, 귀신을 내쫓음으로써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릴 수 있다.
교육목표 : 성령과 한마음이 되어 기도함으로 합심기도의 위력을 체험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가 되게 한다.
1. 합심기도의 영적 의미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 18:19)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두 사람’이란 꼭 두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영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 각 사람이 기도할 때에 성령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뜻이지요(유 1:20).
그렇다면 성령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분이며 하나님과 동일한 마음과 뜻을 가지셨습니다. 또한 우리가 진리를 행하면 기뻐하며 죄 가운데 행하면 애통해하시는 등 독립적인 인성을 가지셨지요. 이러한 성령께서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마음 안에 계십니다. 성령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과 성령의 마음이 하나 되어, 곧 두 마음이 합하여 기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합심기도를 드릴 때라야 주님이 우리 기도에 함께하시며 신속히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능력의 기도를 하려면 성령의 마음을 알아서 성령이 원하시는 기도를 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이 영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영으로 변화되는 만큼, 곧 세상에서 입력된 비진리와 죄악이 없어진 만큼 성령께서 우리를 밝히 주관하고 음성을 들려 줌으로써 그 뜻을 알게 하십니다. 이렇게 성령의 음성을 듣고 주관을 받아 순종해 나갈 때 성령의 감동 감화 충만함을 입으며 우리 마음과 성령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기도할 때에는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거나 욕심을 따라 구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주시는 소원에 따라, 또 하나님 방법대로 이룰 수 있도록 진리로 기도하지요. 이렇게 기도할 때에 이것이 영적 의미의 합심기도이며, 그 기도의 위력과 역사하는 힘이 큰 것입니다.
2. 합심기도 방법
하나님께서 합심기도를 기뻐하고 속히 응답하며 크게 역사하시는 까닭은 한마음이 되어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성령과 내가 한마음이 되어 기도한다면 엘리야처럼 불의 응답을 받으며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마음껏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합하여 기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두 사람 이상이 모여 어떤 일을 계획하고 의논할 때에 마음이 하나 되지 못하고 의견이 분분하다면 그 일은 이미 시작부터 잘못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혼자든 둘이든 또는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할 때에 성령과 마음이 하나 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응답받는 데 중요한 관건입니다.
그러니 합심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성령의 감동과 충만을 받아 기도해야 합니다(엡 6:18). 성령은 하나님의 마음을 지녔으므로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며(고전 2:10) 하나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는 분입니다(롬 8:27). 그러므로 성령께서 마음을 주관하는 대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고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하였거나 꾸준한 기도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은 합심하여 기도하는 것이 힘들고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한 시간을 기도하고자 해도 억지로 생각을 짜내며 힘들어하고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생각 속에서 임의대로 하는 기도는 생각의 기도, 혼의 기도입니다. 이러한 기도를 하면 성령의 충만함도 없고, 쉽게 잡념이 틈타거나 피곤해져 졸음이 밀려옵니다. 그래서 오랜 시간 기도할 수 없고, 중언부언하며 기도 후에는 자신이 무슨 기도를 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기도에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수 없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어도 여전히 혼의 기도를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다고 불평하거나 낙망하는 까닭은 혼의 기도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를 외면한다는 것은 아니며, 듣고 계시지만 응답하실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성령의 감동함을 받지 못하니 기도할 필요가 없는 것일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생각의 기도라도 열심히 부르짖을 때 기도 문이 열리고, 능력을 받아 영의 기도를 하게 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아예 기도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혼의 기도라도 하나님이 듣고 계시며, 때가 되어 기도 문이 열리면 성령과 연합하여 성령의 감동으로 기도하게 되고 예전에 쌓아놓은 것까지 모두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 20절에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말씀합니다. 성령을 받은 무리가 합심하여 기도할 때에 주님은 각 사람의 마음을 주관하여 성령으로 하나 되게 하고 한마음으로 연합하도록 인도하여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기도가 되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여러 사람이 함께 기도하여도 한마음 한뜻이 되어 사랑으로 기도할 수 있지요.
그러나 각 사람이 마음을 모으지 않는다면 목표를 정해 놓고 한다 해도 중심을 다한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 사람이 함께 기도할 때에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지 않는다면 사회자는 찬송을 충만히 부르게 하고 회개케 하여 성령으로 하나 되도록 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하나 되어 기도하면 성령이 충만하고 마음에 기쁨이 임하며 응답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옵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영으로 기도하면 조금도 피곤치 않고 졸음이나 잡념도 틈타지 못하며 믿음과 기쁨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기도가 주님이 함께하시며,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기도입니다.
3. 합심기도의 위력
헤롯(헤롯 아그립바 1세)의 기독교 박해로 열두 사도 중 가장 먼저 야고보가 칼에 목을 베이고 베드로는 옥에 갇혔을 때의 일입니다.
사도행전 12장 5절에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도들이 베드로를 위해 합심하여 간절히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베드로를 구출하셨습니다.
헤롯이 베드로를 잡아내려 하던 전날 밤 베드로는 두 군사 틈에서 쇠사슬에 매여 잠들었고 파수꾼들은 문 밖에서 옥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베드로를 얽어 맨 쇠사슬이 벗겨지고 굳게 잠긴 쇠문이 저절로 열려 옥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행 12:1~10).
베드로가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집에 이를 때까지 그곳에서는 여러 사람이 모여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놀라운 이 기적의 역사는 합심기도의 위력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옥에 갇힌 사도 베드로를 위해 교회가 한 일은 합심하여 간절히 기도한 것뿐이었습니다.
이처럼 교회에 어려움이 있을 때, 성도들에게 아픔이 있을 때에 사람의 생각을 동원하거나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줄 믿고 마음 모아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합심기도를 기쁘게 받고 응답하십니다. 더욱이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하여 합심으로 기도할 때에 얼마나 기쁘게 받으시겠습니까.
물론 기도하는 사람의 수만 많다고 해서 합심기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 같은 성령의 주관을 받으며 동일한 목적을 갖고 열심으로 기도에 동참해야 합니다. 한자리에 모여 있어도 중언부언하고 잡념과 졸음 속에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수 없지요. 합심기도란 말 그대로 마음을 모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모으기 위한 구심점은 바로 성령이며, 모든 사람이 성령의 주관에 따라 하나 되어 기도할 때라야 참된 합심기도가 됩니다.
여러 사람이 마음을 합하여 성령 충만함으로써 영의 기도를 하면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체험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받고 마음껏 하나님 나라를 확장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여 기도하는 곳에 힘써 함께하여 합심기도의 위력을 체험하며 기도의 능력을 받아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하는 귀한 일꾼이 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성령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과 ( )의 마음이 하나 되어, 곧 두 마음이 합하여 기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2. 성령을 받은 무리가 합심하여 기도할 때에 ( )은 각 사람의 마음을 주관하여 ( )으로 하나 되게 하고 한마음으로 연합하도록 인도하여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기도가 되도록 하신다.
● 금주 과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책자 105~125페이지까지 읽고 밑줄 치기.
● 알고 넘어갑시다!
‘합심기도의 위력’
주님께서 승천하신 후 제자들을 비롯하여 120명이 합심하여 기도에 힘썼는데, 오순절날 모두가 성령을 받고 불같은 성령의 역사를 받아 각 나라 말로 방언을 하였다(행 2:1~4).
또한 이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세례를 받은 제자의 수가 삼천 명이나 되었으며(행 2:41) 사도들을 통해 갖가지 기사와 표적이 나타나 믿는 자의 수가 점점 더해졌고 성도들 삶이 변화되었다(행 2:43~47).
이같이 합심기도를 통해 말씀을 전하는 능력이 임하고, 눈먼 사람이나 걷지 못하는 사람을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고 갖가지 질병을 치료하며, 귀신을 내쫓음으로써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릴 수 있다.
2020-11-13
제46과하나님께 감사
출애굽기 23:16
읽을말씀 : 출애굽기 23:16 | 외울말씀 : 시편 17:8 | 참고 말씀: 레위기 23:42
교육목표 :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알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감사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알곡 성도가 되게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광야생활을 마치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풍성한 소산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요? 우리도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주님을 만나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으며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수 있다면 얼마나 감동스럽고 하나님께도 큰 기쁨이 될까요?
1. 추수감사절의 유래
추수의 계절을 맞아 영육 간에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리는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살펴보겠습니다.
추수감사절은 이스라엘의 절기 중 수장절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23장 16절에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年終 그해 마지막)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말씀하지요.
수장절은 원래 곡식을 자라게 하시고 추수하도록 도우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수확한 곡식을 저장한 후 추수감사제를 드림으로 한 해의 농사를 종결하였지요. 성경에는 수장절을 초막절 혹은 장막절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레위기 23장 34절에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 월 십오 일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칠 일 동안 지킬 것이라”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장절이 되면 초막을 짓고 그곳에서 7일간 지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40년 광야생활을 하면서 초막을 짓고 산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입니다.
레위기 23장 43절에는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말씀했지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면 풍성한 수확을 거두어 감동적인 추수감사제를 드리면서, 애굽에서 나와 광야생활했던 고난의 때를 잊지 말고 기념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수장절은 출애굽하여 40년 광야생활 동안 하나님께서 보호하심과, 모든 추수를 완료한 것에 대한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절기입니다.
2. 청교도들의 신앙과 추수감사절
오늘날 세계적인 강국인 미국의 개척 역사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청교도들의 눈물과 감사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위험을 무릅쓰고 신대륙을 향해 떠났습니다. 험난한 항해 끝에 마침내 미국 동부 플리머스 해안에 상륙했습니다. 도착한 그곳은 혹독하게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추위와 식량 부족으로 영양실조와 전염병에 걸려 수십 명이 목숨을 잃는 아픔을 겪기도 했지요. 더구나 가지고 온 보리와 밀은 신대륙의 기후 조건과 맞지 않아 농사도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극심한 추위와 배고픔, 원주민들의 위협과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해 왔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여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 결과 원주민인 인디언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지요. 인디언 추장 사모세트는 몇 가지 씨앗을 주면서 재배 기술까지 알려 주었습니다. 그의 도움으로 옥수수, 호박, 감자 등 햇곡식을 추수할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청교도들은 귀한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감자, 옥수수, 호박으로 만든 팬케이크를 굽고 칠면조 고기를 요리했지요. 인디언들을 초대해 함께 먹으며 신대륙에서 첫 추수감사절을 지냈습니다.
이렇게 추수감사절을 지낸 청교도들은 절망적인 환경에서도 결코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그럴수록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였고, 나아가 교회와 학교를 세웠습니다. 청교도들은 믿음이 있었기에 고통을 기쁨으로,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나감으로 마침내는 강대국 미국을 건설하였습니다.
3. 추수감사절을 맞아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크신 섭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성령을 선물로 받고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성도들은 추수감사절을 맞아 무엇에 감사해야 할까요?
먼저, 이 세상의 수많은 질병, 사고, 재앙으로부터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불꽃 같은 눈동자로 지키시며 보호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질병이 있는데 그중에는 의학으로 완치할 수 없는 불치, 난치병이 수두룩합니다. 신종, 변종 질병도 끊임없이 출현하고 있지요. 정신적인 병, 마음의 병도 심각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자살로 이어지는 우울증을 앓고 알코올, 마약의 노예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부와 명예, 권세도 있고, 겉보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도 자살하기도 하지요.
이 외에도 우리가 모르는 병, 의학으로 밝힐 수 없는 병도 수없이 많습니다. 이처럼 질병 많은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늘 지켜 주셨습니다.
여 성도 한 분은 ‘양수과소증’으로 도저히 살릴 길 없었던 태아를 기도를 받고 무사히 출산했습니다. 양수가 거의 없는 태반 속에서 그 연약한 생명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살아남았지요. 또 한 분은 급성 맹장염이 복막염으로 진전되어 위급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병원에 누워서 수술을 기다리던 중 통회자복을 한 후 기도를 받았는데 수술을 받지 않고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간절히 찾으면 만나 주십니다. 질병뿐만 아니라 각종 재앙과 사고로부터도 능히 지켜 주실 수 있습니다.
날이 갈수록 지구는 대지진과 가뭄과 산불, 태풍, 폭우, 폭설 등 자연재해 소식이 끊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위험천만한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능히 지켜 주실 수 있지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께서는 누구나 지켜 주십니다. 혹 하나님 말씀 안에 거하지 못해서 질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해도 철저히 돌이키고 믿음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의지하면 해결됩니다.
다음으로, 추수감사절을 맞아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영원한 천국 소망을 주시되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 성에 대한 소망이 온전해지도록 은혜와 감동을 주십니다.
전 세계 수많은 성도들이 『천국』 책자를 읽고 “이 책이 제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천국을 막연하게만 생각했는데 이제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천국 소망이 더해지니 신앙생활이 행복해졌습니다.”라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의 한결같은 소원은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 성에 가는 것이지요. 이제는 “저도 새 예루살렘 성에 갈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분이 참으로 많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4절에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말씀한 대로 자신의 힘으로는 갈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새 예루살렘 성까지 이끄실 것이라는 확신이 생긴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천국을 만드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시며 마지막 때에 성령의 역사 속에 하나님의 참 자녀로 양육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찬양이 있습니다.
“진주문 지나 새 예루살렘 들어와 보니 지난 일들 내 눈앞에 스쳐 지나가네” 이 찬양의 주인공은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 이런 은혜를 주신 아버지 하나님께 모든 감사와 영광을 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많은 축복과 은혜를 부어 주셨습니다. 알곡처럼 우리의 영혼이 잘되게 하시고 이 험한 세상 속에서도 지켜 주시며 의의 길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추수감사절을 맞아 좋으신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더욱 사랑함으로 새 예루살렘 성의 주인공이 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수장절을 지키라고 명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2. 우리가 어떻게 하면 질병, 사고, 재앙을 만나지 않고 지킴 받으며 살 수 있을까요?
● 금주 과제
추수감사절을 맞아 늘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시며 축복해 주신 하나님께 마음 다해 감사드리는 한 주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 알고 넘어갑시다!
‘새 예루살렘 성의 열두 진주문’
새 예루살렘 성의 성곽에는 동서남북에 각각 세 개씩 열두 개의 문이 있다. 문마다 큰 천사가 지키고 있어 성의 위엄과 권세를 한눈에 느낄 수 있다.
가까이에서 보면 한참을 올려다볼 정도로 큰 아치형의 문 전체가 하나의 영롱한 진주로 되어 있다. 양쪽으로 문이 열리며 황금보석 손잡이가 달려 있으나 굳이 손으로 열지 않아도 저절로 열린다.
열두 진주문을 통과하려면 정금과 같은 믿음을 가져야 한다.
조개가 진주를 만들어 내기까지 고통을 인내한 것처럼 믿음의 연단을 잘 통과하여 승리했을 때 들어갈 수 있다.
교육목표 :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알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감사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알곡 성도가 되게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광야생활을 마치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풍성한 소산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요? 우리도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주님을 만나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을 받으며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수 있다면 얼마나 감동스럽고 하나님께도 큰 기쁨이 될까요?
1. 추수감사절의 유래
추수의 계절을 맞아 영육 간에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리는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살펴보겠습니다.
추수감사절은 이스라엘의 절기 중 수장절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23장 16절에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年終 그해 마지막)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말씀하지요.
수장절은 원래 곡식을 자라게 하시고 추수하도록 도우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수확한 곡식을 저장한 후 추수감사제를 드림으로 한 해의 농사를 종결하였지요. 성경에는 수장절을 초막절 혹은 장막절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레위기 23장 34절에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 월 십오 일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칠 일 동안 지킬 것이라”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장절이 되면 초막을 짓고 그곳에서 7일간 지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40년 광야생활을 하면서 초막을 짓고 산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입니다.
레위기 23장 43절에는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말씀했지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면 풍성한 수확을 거두어 감동적인 추수감사제를 드리면서, 애굽에서 나와 광야생활했던 고난의 때를 잊지 말고 기념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수장절은 출애굽하여 40년 광야생활 동안 하나님께서 보호하심과, 모든 추수를 완료한 것에 대한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절기입니다.
2. 청교도들의 신앙과 추수감사절
오늘날 세계적인 강국인 미국의 개척 역사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청교도들의 눈물과 감사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위험을 무릅쓰고 신대륙을 향해 떠났습니다. 험난한 항해 끝에 마침내 미국 동부 플리머스 해안에 상륙했습니다. 도착한 그곳은 혹독하게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추위와 식량 부족으로 영양실조와 전염병에 걸려 수십 명이 목숨을 잃는 아픔을 겪기도 했지요. 더구나 가지고 온 보리와 밀은 신대륙의 기후 조건과 맞지 않아 농사도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극심한 추위와 배고픔, 원주민들의 위협과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해 왔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여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 결과 원주민인 인디언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지요. 인디언 추장 사모세트는 몇 가지 씨앗을 주면서 재배 기술까지 알려 주었습니다. 그의 도움으로 옥수수, 호박, 감자 등 햇곡식을 추수할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청교도들은 귀한 열매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감자, 옥수수, 호박으로 만든 팬케이크를 굽고 칠면조 고기를 요리했지요. 인디언들을 초대해 함께 먹으며 신대륙에서 첫 추수감사절을 지냈습니다.
이렇게 추수감사절을 지낸 청교도들은 절망적인 환경에서도 결코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그럴수록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였고, 나아가 교회와 학교를 세웠습니다. 청교도들은 믿음이 있었기에 고통을 기쁨으로,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나감으로 마침내는 강대국 미국을 건설하였습니다.
3. 추수감사절을 맞아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크신 섭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성령을 선물로 받고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성도들은 추수감사절을 맞아 무엇에 감사해야 할까요?
먼저, 이 세상의 수많은 질병, 사고, 재앙으로부터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불꽃 같은 눈동자로 지키시며 보호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질병이 있는데 그중에는 의학으로 완치할 수 없는 불치, 난치병이 수두룩합니다. 신종, 변종 질병도 끊임없이 출현하고 있지요. 정신적인 병, 마음의 병도 심각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자살로 이어지는 우울증을 앓고 알코올, 마약의 노예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부와 명예, 권세도 있고, 겉보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도 자살하기도 하지요.
이 외에도 우리가 모르는 병, 의학으로 밝힐 수 없는 병도 수없이 많습니다. 이처럼 질병 많은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늘 지켜 주셨습니다.
여 성도 한 분은 ‘양수과소증’으로 도저히 살릴 길 없었던 태아를 기도를 받고 무사히 출산했습니다. 양수가 거의 없는 태반 속에서 그 연약한 생명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살아남았지요. 또 한 분은 급성 맹장염이 복막염으로 진전되어 위급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병원에 누워서 수술을 기다리던 중 통회자복을 한 후 기도를 받았는데 수술을 받지 않고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간절히 찾으면 만나 주십니다. 질병뿐만 아니라 각종 재앙과 사고로부터도 능히 지켜 주실 수 있습니다.
날이 갈수록 지구는 대지진과 가뭄과 산불, 태풍, 폭우, 폭설 등 자연재해 소식이 끊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위험천만한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능히 지켜 주실 수 있지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께서는 누구나 지켜 주십니다. 혹 하나님 말씀 안에 거하지 못해서 질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해도 철저히 돌이키고 믿음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의지하면 해결됩니다.
다음으로, 추수감사절을 맞아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영원한 천국 소망을 주시되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 성에 대한 소망이 온전해지도록 은혜와 감동을 주십니다.
전 세계 수많은 성도들이 『천국』 책자를 읽고 “이 책이 제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천국을 막연하게만 생각했는데 이제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천국 소망이 더해지니 신앙생활이 행복해졌습니다.”라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의 한결같은 소원은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 성에 가는 것이지요. 이제는 “저도 새 예루살렘 성에 갈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분이 참으로 많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4절에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말씀한 대로 자신의 힘으로는 갈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새 예루살렘 성까지 이끄실 것이라는 확신이 생긴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천국을 만드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시며 마지막 때에 성령의 역사 속에 하나님의 참 자녀로 양육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찬양이 있습니다.
“진주문 지나 새 예루살렘 들어와 보니 지난 일들 내 눈앞에 스쳐 지나가네” 이 찬양의 주인공은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 이런 은혜를 주신 아버지 하나님께 모든 감사와 영광을 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많은 축복과 은혜를 부어 주셨습니다. 알곡처럼 우리의 영혼이 잘되게 하시고 이 험한 세상 속에서도 지켜 주시며 의의 길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추수감사절을 맞아 좋으신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더욱 사랑함으로 새 예루살렘 성의 주인공이 되시기 바랍니다.
● 평가 및 적용하기
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수장절을 지키라고 명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2. 우리가 어떻게 하면 질병, 사고, 재앙을 만나지 않고 지킴 받으며 살 수 있을까요?
● 금주 과제
추수감사절을 맞아 늘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시며 축복해 주신 하나님께 마음 다해 감사드리는 한 주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 알고 넘어갑시다!
‘새 예루살렘 성의 열두 진주문’
새 예루살렘 성의 성곽에는 동서남북에 각각 세 개씩 열두 개의 문이 있다. 문마다 큰 천사가 지키고 있어 성의 위엄과 권세를 한눈에 느낄 수 있다.
가까이에서 보면 한참을 올려다볼 정도로 큰 아치형의 문 전체가 하나의 영롱한 진주로 되어 있다. 양쪽으로 문이 열리며 황금보석 손잡이가 달려 있으나 굳이 손으로 열지 않아도 저절로 열린다.
열두 진주문을 통과하려면 정금과 같은 믿음을 가져야 한다.
조개가 진주를 만들어 내기까지 고통을 인내한 것처럼 믿음의 연단을 잘 통과하여 승리했을 때 들어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