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예배

설교 > 창세기 강해 (2000년~2006년)

목록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다음요즘 메일보내기 바로가기복사
제목 창세기 강해(100)
설교자 당회장 이재록 목사 설교본문 창8:13-20 등록일자 2003.07.04
서 론 / 17이라는 숫자의 영적인 의미

노아의 홍수와 관련된 숫자들 중에는 영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비가 내린 기간인 40일은 영계에서 루시퍼의 반란 이후 아버지 하나님께서 마음 아파하시며 고통 당하셨던 시간을 육의 시간으로 표현한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노아의 홍수와 관련하여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숫자가 있지요. 노아의 나이 육백 세 되던 해 2월 17일에 비가 시작되었고, 7월 17일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무르지요. 홍수와 관련된 중요한 두 날짜에 모두 17이라는 숫자가 들어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17이라는 숫자에는 어떤 영적인 의미가 담겨있는 것일까요? 17은 영적으로 '아버지 하나님 편에서 행한다'는 의미가 담긴 수입니다. 즉 아버지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맞추어 아버지 편에서 친히 일을 이루신다는 의미이지요. 노아의 홍수는 아버지 하나님의 섭리 속에 때가 되어 정확하게 이루어진 사건이기에 하나님께서는 홍수가 시작된 날짜와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무르는 날짜를 정하심에 있어서 17이라는 숫자에 맞추어 역사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은 본 제단을 통해서도 나타났던 것을 보게 되지요. 바로 본 제단이 창립 17주년을 맞았던 지난 99년도를 기점으로 하여 본 제단을 친히 인도하시고 역사해 가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섭리를 우리는 더더욱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세 차례의 시험이 끝나면서 그 해를 기점으로 하여 아버지 하나님 편에서 본 제단을 통해 앞으로 어떻게 역사해 가실지가 밝히 드러나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권능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를 통해 어떤 방법으로 세계를 이루며 대성전도 이루게 될지가 속속 눈앞에 펼쳐지게 되었다는 말이지요. 이처럼 본 교회와 관련하여 17이라는 숫자를 살펴보아도 그 안에는 '아버지 하나님 편에서 친히 주관하시고 행해 나가신다'는 영적인 의미가 담겨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 하나님 편에서 어떤 일을 친히 주관하시며 행하신다고 해서 임의대로 이루어 가시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정확한 공의에 따라 질서와 법칙을 좇아 역사해 가시지요.

본 론 /

1. 공의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

그래서 노아의 홍수가 그치고 물이 감하며, 물이 완전히 걷혀서 마르기까지의 모든 일들도 육의 질서와 법칙에 따랐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순간에 물이 사라지고 땅이 말랐던 것이 아니라 육의 법칙에 따라 물이 증발하여 마르는데 필요한 바람도 있었고 충분한 시간도 걸렸던 것이지요. 홍수와 함께 빛이 거두어지면서 이 땅에는 육의 근본 속성들이 드러나게 되고 이와 함께 육의 질서와 법칙도 생겨나게 되었는데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육의 질서와 법칙을 스스로도 존중하며 따르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의 주관자로서 원하시면 무엇이나 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참 자녀를 얻기 위한 인간 경작을 이루시기 위해 이처럼 스스로도 공의 가운데 육의 질서와 법칙을 따르고 계신 것이지요.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아버지 하나님께서 육의 질서와 법칙을 무시하시고 무한하신 권세와 능력을 마음껏 나타내신다면 오늘날 하나님을 믿지 않을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자연의 법칙을 깨고 수시로 천기를 주관해 가신다거나 태초에 지구를 창조하실 때와 같은 창조의 역사를 지금도 전 세계 이곳 저곳에 나타내신다면 누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겠으며 믿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능력 앞에 두려워서라도 믿겠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육의 공간 안에서는 스스로 육의 질서와 법칙을 따르시기에 그처럼 육의 질서와 법칙에 어긋나는 일은 행하지 않으십니다.

2. 정확한 공의 가운데 역사되는 하나님의 권능

그러면 성경에 육의 질서와 법칙을 벗어나는 기사와 표적들이 여러 번 나타난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를 들어 하늘에서 불이 내린다거나 바람과 파도가 순간에 잠잠해지며 죽은 자가 살아나는 등의 일들이 나오는데 이를 통해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인정하게 되었지요. 그렇다면 이러한 일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어 사람들로 하여금 주님을 믿고 구원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육의 질서와 법칙을 어기신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공의에 어긋난 것도 아니며 육의 질서와 법칙을 어긴 것도 아니지요.
하나님의 권능은 정확한 공의 가운데 역사되는데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하늘에 불로 글씨를 새긴다거나 아무 사람들에게 직접 나타나시므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게 한다면 여기에 대해서는 원수마귀사단이 송사할 수 있습니다. "공의에 어긋난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 믿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따져들게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나 공의 가운데 합당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는 것에 대해서는 원수 마귀 사단도 송사할 수가 없지요. 그리고 이때 하나님의 권능이 육의 법칙과 질서의 한계를 넘어선다 해도 이것은 공의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육의 공간 안에서는 육의 질서와 법칙을 따르게 되지만 때로는 육의 공간 안에서도 육의 질서와 법칙과는 예외적인 일들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육의 질서와 법칙을 어긴 것이 아니라 그 순간만큼은 영의 공간에서의 질서와 법칙이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비유를 들어보지요. 오늘날 세계의 각 나라들은 서로 간에 외교관계를 맺고 상대방 국가에 외교관을 파견하게 되지요. 그런데 이러한 외교관이 거하는 대사관이나 영사관은 국내법에 적용을 받지 않습니다. 대사관과 영사관 안의 공간에 대해서는 그 나라의 영토로서 인정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우리나라의 법에 어긋나는 사람이 다른 나라 대사관이나 영사관 안으로 들어가면 우리나라의 법에 따라 임의로 들어가서 그 사람을 체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영토 안에 있으면서도 법의 적용은 그 나라의 법과 원칙에 따르게 되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비록 육의 공간 안에 있다해도 육의 질서와 법칙에 예외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권능의 역사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육의 공간 안에서도 영의 공간에서처럼 영의 질서와 법칙에 따라 육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육의 질서와 법칙에는 어긋나 보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육의 공간이 아닌 영의 공간의 법칙으로써 역사되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명하시자 순간에 바람과 파도가 잠잠해졌는데 이는 바람과 파도가 육의 법칙에 따른 것이 아니라 그 순간만큼은 영의 공간에서처럼 영의 흐름에 순종되어졌기 때문입니다.
비록 육의 공간이지만 육의 법칙과 질서에 적용받지 않는 영의 공간이 형성되면서 이러한 권능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지요. 다른 나라의 대사관이 우리나라 영토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법에 적용받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공간에 대한 좀더 자세한 내용은 이번 주의 종 교육을 통해 설명될 것입니다. 다만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려는 것은 육의 공간 안에서도 영의 공간의 적용을 받게 되면 육의 질서와 법칙을 초월하는 현상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공의에 어긋나는 것도 육의 질서와 법칙을 어기는 것도 아니지요.
그렇지만 아무나 이러한 일들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육의 공간에 있으면서도 영의 공간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나타내려면 그만한 자격 조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이러한 일이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주의 종 교육을 마친 후에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3. 노아의 온전한 순종

이처럼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스스로가 만드신 질서와 법칙이라 해도 그것을 존중하시며 그 안에서 행하는 분이시기 때문에 모든 일은 정확한 공의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아버지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육의 공간에서 영의 공간의 역사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사람 편에서의 순종이 반드시 필요하지요. 노아를 통해 새롭게 인간 경작이 시작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노아의 순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노아가 만약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에 어느 하나라도 순종하지 않았다면 홍수의 심판 이후의 새로운 인간 경작은 시작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노아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노아는 육백 일년 정월 곧 그 달 일일에 지면에 물이 걷혔다해서 당장 방주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제 나가라"고 말씀하시기까지는 여전히 방주 안에 머무르고 있었지요. 우리는 여기서 온전한 순종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일년 가까이 방주 안에서 생활하며 하루도 편히 쉬지 못한 채 짐승들을 돌보아야 했지요. 하루라도 빨리 그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 사람의 당연한 마음일 것입니다. 또한 방주라고 하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생활하다보면 당연히 넓고 시원한 바깥세상이 그리워지겠지요. 그러니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홍수가 끝나고 땅이 마르기만 하면 하루라도 빨리 밖으로 나가야지' 하는 생각을 얼마든지 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물이 걷힌 것을 확인하고도 임의로 나간 것이 아니라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렸다는 사실입니다. 노아는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살폈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여러분의 모습은 어떠하십니까? 여러분도 항상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살피며 그 뜻에 끝까지 순종해 나가시는지요? 처음에는 아무리 순종을 잘했다 해도 중도에 변개 되어지거나 마지막 순간에라도 변개 되어지면 이는 온전한 순종이 될 수 없습니다. 결과는 불순종이 되고 말지요. 예를 들어 금년에는 교회 방침이 전반기에는 기도, 전도, 심방에 주력하며 일절 교육이나 행사를 갖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6월 29일까지는 잘 해오다가 만약 6월 30일에 어떤 조직에서 행사를 가졌다면 그동안은 아무리 잘해왔다 해도 결과는 불순종이 되고 만다는 말이지요. 이것은 한 가지 예를 든 것이지만 교회 안에 보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처음 지시한 것에서 점점 변질되는 일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지적해 주면 당장에는 고쳐지는 것 같다가도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면 또다시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는 경우들이 있지요.
그리고 순종에 대해 또 한 가지 깨우쳐야 할 것은 본인 편에서는 아무리 순종한다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맞지 않으면 불순종이 되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지난 시간에 설명을 드렸지만 노아가 물이 감한 여부를 알기 위해 새를 밖으로 날려 보냈을 때 까마귀는 물이 땅에 마르기까지 왕래하였음에도 결국 노아가 원하는 답을 가져오지 못했지요. 까마귀는 열심히 바깥세상과 방주 사이를 오갔지만 정작 노아가 원하는 뜻에는 맞춰주지를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몬 1:21에 "나는 네가 순종함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나의 말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 말씀한 대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순종함을 신뢰할 수 있으며 여러분도 아버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이상을 해낼 수 있는 충성된 주의 일꾼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4.노아의 홍수로 빛이 거두어진 후의 모습

방주에서 나온 노아와 그의 가족들에게는 이제 전혀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게 됩니다. 육적인 환경이 달라진 것은 물론이고 빛이 둘려있던 때와는 많은 것이 달라졌지요. 이러한 새로운 세상에 나온 노아는 가장 먼저 아버지 하나님 앞에 정결한 짐승과 새로써 번제를 드립니다. 이 순간 노아의 마음에는 얼마나 은혜와 감사가 넘쳤겠습니까? 홍수의 심판이 있을 것을 알게 되었던 때부터 방주를 준비했던 오랜 시간들, 방주 안에서 생활하던 시간들, 그 시간들 속에 있었던 수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면서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나님, 자신들을 통해 새로운 인간경작을 펼치실 하나님께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단을 쌓았던 것이지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애통의 마음도 들었습니다. 방주에 들어갈 때만 해도 수많은 사람들로 붐비던 땅이었지만 이제 방주에서 나와보니 자신과 가족들 이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홍수의 심판이 어떤 것이었는지가 실감나는 순간이지요. 홍수 속에 절규하며 죽어갔을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스쳐지나가면서 노아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내가 그처럼 심판이 있을 것이라 외쳤을 때 그들이 내 말에 귀 기울였다면…' '내가 좀더 열심히 그들에게 전했더라면…'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에게는 결코 이러한 후회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머지않아 우리 주님께서 우리들을 데리러 오실 때에 이 땅에 남겨진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도 노아와 같은 후회와 애통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지요. 그러니 그 때가 오기 전에 우리는 땅 끝까지 이르러 아직 주의 복음을 듣지 못한 영혼들에게 열심히 성결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노아에게 밀려오는 또 한 가지 마음은 바로 적막함이었습니다. 이제 빛이 거두어진 세상 가운데 홀로 남겨진 듯한 데서 오는 적막함이었지요. 이는 아담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담이 범죄하여 둘째 하늘로부터 쫓겨나 첫째 하늘로 내려왔을 때 모든 것이 낯설고 둘째 하늘과는 빛도 전혀 다른 첫째 하늘의 삶이 얼마나 외롭고 적막했겠습니까? 그래서 늘 둘째 하늘을 동경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지요. 물론 노아의 경우는 아담처럼 범죄하여 저주를 받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빛이 거두어진 후의 이 세상은 전과는 너무나도 느낌이 달랐습니다. 이로 인해 오는 적막함과 두려움이 마음 한편에 있을 수밖에 없었지요.

이러한 노아에게는 홍수가 있기 전보다도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필요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빛이 거두어진 후였지만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노아와의 교통을 완전히 끊으신 것이 아니라 때를 좇아 은혜를 주시고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셨지요. 아담이 범죄하여 둘째 하늘로부터 쫓겨 첫째 하늘로 내려왔을 때도 수시로 아담과 교통해 주시고 아버지의 뜻을 알려주시며 인도해 가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은 육의 공간으로 나온 이후 점차 육으로 변질될 수 있는 속성들이 드러나게 되지요. 육의 공간에 나와 경작을 받기 시작하자 마음 안에 있던 여러 가지 육의 속성들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지만 홍수가 있기 전까지는 그래도 근본 육의 속성들이 드러났던 것은 아닙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방주에서 나오면서부터 근본에 내재되어 있던 육의 속성들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인간 경작이 시작된 것이지요.
그리고 당세의 의인이라 칭함 받았던 노아였지만 이처럼 근본 육의 속성들이 나오기 시작하니 예전에 발견하지 못했던 모습들이 하나하나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점차 육으로 변질되더라는 말입니다. 그가 어떻게 변질되었는지는 앞으로 창 9장에서 설명이 되어질 텐데 여기서 우리는 노아가 당세의 의인이요 그를 통해 인간경작이 새롭게 시작될 만큼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노아가 어째서 천국 서열의 높은 위치에는 오르지 못했는지 그 이유를 깨달을 수가 있지요. 빛으로 둘려 있는 상태에서 경작받던 노아의 모습은 온전해 보일 수가 있었지만 막상 빛이 거두어진 육의 공간에서 연단이 주어지니 근본 속에 있던 육의 속성들이 발견되었던 것입니다. 노아는 이러한 근본에 내재된 속성들까지는 이 땅에서 온전히 버리지 못한 채 삶을 마쳤기에 그가 감당했던 사명과 위치에 비해서 천국에서의 서열이 그리 높지 못한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인간 경작이 왜 필요하고 연단은 왜 필요한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의 아담의 모습이 그의 참모습이 아니었던 것처럼 빛이 둘러있던 동안의 노아의 모습도 그의 참모습이 아니었지요. 여전히 근본 속에는 변질될 수 있는 육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 채 단지 빛의 능력 안에서 그것이 눌려져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근본된 육의 속성을 끌어내어 변하지 않는 영으로 바꾸기 위해 바로 인간 경작이 필요한 것이고 그 과정에는 반드시 연단이 있어야 하지요.
욥도 하나님께서 왜 연단을 허락하셨습니까? 그의 근본 속에 있는 육의 모습까지 끌어내어 그를 온전히 영으로 변화시키려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욥 1:1에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했던 욥도 하나님께서 연단을 허락하시니 근본 속에 내재되어 있던 악의 모양들이 얼마나 드러나게 되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이러한 욥에게 아버지 하나님께서 연단을 허락하시지 않았다면 욥이 어찌 되었겠습니까? 스스로는 아무리 온전하다 생각해도 근본에 잠재된 악을 발견하지 못하니 결국 성결에 이를 수가 없었겠지요. 그러니 이러한 욥이 스스로를 발견하여 깨트려서 변화될 수 있도록 연단을 허락하시는 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며 인간 경작의 참된 의미라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도 온전히 성결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까지는 끊임없는 연단이 허락되는 것이지요. 물론 성결된 이후에도 연단은 있게 되는데 그것은 죄를 발견하여 버리기 위한 연단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다음 시간에는 계속해서 노아의 모습을 통해 연단이 왜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결 론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앞서 말씀드린 대로 노아는 당대의 의인이요 인간 경작의 역사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 인물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했던 사람이었고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도 충성되이 감당한 사람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천국에서 그다지 높은 서열에 이르지 못한 이유는 바로 근본 속에 내재되어 있던 악 때문이라 했습니다. 전에는 모르고 지내던 악의 모습이 새로운 인간 경작과 함께 발견되어졌지만 노아는 미처 그것을 온전히 벗어내지 못했던 것이지요.
이는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아무리 하나님 앞에 사명을 감당하고 충성된 일꾼이라 해도, 또 머리가 되어 있고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다 해도 그것으로서 천국의 위치가 정해지는 것이 아니지요. 연단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여 변화되므로 그 마음에 얼마나 주님의 마음을 이루었는가, 얼마나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리의 마음을 이루었는가에 따라 천국에서의 위치는 결정된다는 사실입니다.
주의 종 교육을 통해서 설명이 되겠지만 천국에서 24장로에 들어가시는 분들을 보면 성경 상에서 그들이 얼마나 중요한 직책을 맡았고, 얼마큼 큰 역할을 감당했느냐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지요. 비록 집사라 해도 또한 성경 상에 잠깐 기록된 사람이라 해도 그 중심과 행함이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은 사람들이지요.
이러한 사실을 깨달아 연단을 통해 신속히 자신을 발견하고 영으로 온 영으로 변화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곧 축복이며 천국에서도 영원한 영광이 되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급속한 영의 물결 속에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날마다 자신을 발견하고 주님을 본받는 지혜로운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1-19 오전 1:01:01 Posted
2015-04-30 오후 1:24:02 Updated

이전글 창세기 강해(1)
다음글 창세기 강해(155)
검색
이전 페이지 인쇄하기 글자크게 글자작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