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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 창세기 강해 (2000년~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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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세기 강해(101)
설교자 당회장 이재록 목사 설교본문 창8:20-22 등록일자 2003.07.11
서 론 /

노아가 방주에서 나온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하나님 앞에 단을 쌓고 번제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번제의 영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주일 대예배 때 레위기 강해를 통해 설명 드렸는데 짐승을 잡아 번제로 드리는 것은 우리의 생명 자체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모든 규례를 지켜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온전히 거하며 정결하고 거룩하게 살아서 우리 모든 삶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 번제의 영적인 의미라 했습니다.
노아가 드린 번제에도 이러한 영적인 의미가 그대로 담겨있었지요. 노아는 방주에서 나와 새로운 세상에 첫발을 내디디면서 자신의 생명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제 자신의 생명은 온전히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영적인 의미를 담아서 번제를 드렸던 것입니다.
또한 모든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과 앞으로의 모든 삶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앞으로의 삶 속에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며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나가겠다는 의미도 함께 담겨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노아가 드린 번제 안에는 훗날에 자녀들의 모든 것까지도 하나님 앞에 맡긴다는 의미가 담겨있었습니다. 이처럼 노아가 드린 첫 번제 안에는 여러 가지 영적인 의미가 담겨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본 론 /

1. 홍수 이후 노아의 첫 번제와 고백

노아가 홍수 이전에 드려왔던 번제와 홍수 이후에 드린 번제와는 크게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노아 사이의 관계성이지요. 전에 노아가 하나님께 드렸던 고백을 소개해 드린 적이 있는데 그때 노아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홍수가 끝난 후부터는 하나님을 '여호와 하나님'이라 부르게 되었지요. 홍수 이후 빛이 거두어지고 이 땅이 철저히 육의 공간이 되어짐에 따라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 역시 새로운 관계로 정립된 것입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대했고 늘 교통하면서 모든 것을 세세히 아뢰며 응답받았으나 홍수 후부터는 이러한 교통이 제한되지요. 힘쓰고 애쓰며 땀 흘려 기도할 때라야 교통이 이루어졌고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을 때만 교통함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인간과 하나님과의 사이에 하나님을 오직 경외의 대상이자 섬김의 대상이요 주권자로서 대하게 되는 수직적인 관계가 형성되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노아가 홍수 이후 하나님 앞에 첫 번제를 드릴 때의 고백은 이전의 고백과는 많이 달랐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시여 우리의 모든 생명을 구원하시고 구원하심에 감사를 드리나이다.
이제 새 땅과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음이나니 이 자가 여호와 하나님께 이와 같이
머리를 숙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그 모든 창대하심에 머리를 숙이나이다.
우리의 생명을 살리시고 구원하사 새롭게 이 땅을 만들어 가시고
또한 만들어 가실 주 여호와 하나님께 이처럼 번제를 드리나이다.
우리 생명을 건지시고 우리 가족을 건지시며
이와 같이 새롭게 시작하심에 감사드리나이다"

노아는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 앞에 자신을 낮추며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전적인 구원의 은혜에 감사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아버지와 자녀로서의 관계라기보다는 주권자와 피조물로서의 관계가 느껴지고 있지요. 이러한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재정립과 함께 인간에게 나타난 큰 변화는 바로 본성 속에 내재되어 있던 육의 속성들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2. 노아 홍수 이후 드러난 근본 육의 속성들

노아가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했더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둘러 주신 빛 안에 살고 있을 때의 모습이었습니다. 노아를 의인이라 한 것도 아버지 하나님 편에서 보실 때에 노아가 온전히 의인의 자격을 갖추어서가 아니라 노아의 수준에서 의인이라는 것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말씀하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아 절대적으로 완전한 자라는 의미가 아니라 온통 죄악으로 관영된 당시의 상황 속에서 볼 때 상대적으로 완전한 자라 여겨질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당시로서는 노아만큼 하나님 앞에 합한 사람이 없었고 결국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택하여 새로운 인간 경작의 시작을 이끌어 가시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 안에 잠재된 근본 육의 속성까지 개간해 가는 본격적인 인간 경작이 시작되자 노아에게서도 홍수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악의 모양들이 하나 하나 드러나게 됩니다. 마음에 연단을 받아 영으로 일군 것은 어떤 육의 환경이 주어진다해도 다시 변하지 않지만 노아는 아직 마음 깊은 속까지 연단하는 본격적인 경작을 받아서 영으로 일군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새로운 육의 환경에 놓이게 되니 본성 속에 내재되어 있던 육의 속성이 나오더라는 말이지요. 마치 온실 안에서 기르던 화초가 온실 안에서는 잘 자라지만 온실 밖으로 내놓으면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이런 저런 문제가 나타나는 것과 같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노아 홍수 이전에 빛이 둘려있던 세상과 노아 홍수 이후 빛이 거두어진 세상과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21-2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앞으로 인간 경작이 끝나는 순간까지 다시는 노아의 홍수와 같은 심판으로써 이 땅을 저주하지는 않으시겠다는 말씀이지요. 하나님께서 이 땅을 저주하시고 물로 심판하신 이유는 바로 인간들의 악함 때문이었는데 사실 홍수 후부터는 인간의 악이 이전보다 훨씬 더해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말씀하신 것도 바로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사람들이 어떻게 되어질 것을 아시기에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려서부터 악하다" 말씀하신 이유는 빛이 거두어지면서 그만큼 사람들이 악에 물들기가 더 쉬워졌고 여기에 조상으로부터 기를 통해 전해지는 악이 쌓이면서 세월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더 악해질 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이 신속하게 악으로 치달아 가게 된다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그만큼 어렸을 때부터 악에 물들어간다는 의미이지요. 그러니 이 땅은 세월이 얼마 지나지 않아 오히려 노아의 당시보다도 더 악으로 관영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바로 이러한 사실을 당연히 알고 계시기 때문에 설령 앞으로 사람들이 노아의 당시처럼 악해진다해서 그것으로 인해 이 땅을 다시 저주하여 심판하지는 않으시겠다는 의미로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다시금 악해진다해서 하나님께서 노아의 홍수와 같은 심판을 또 다시 내리신다면 이 땅은 계속해서 심판과 새로운 인간 경작이 반복되어질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나 노아의 홍수의 심판은 인간 경작의 섭리 속에 한 번의 사건으로 계획된 것이었고 이후로 마지막 심판 때까지 노아의 심판과 같은 저주는 더 이상 없습니다. 창세 이래 모든 인류를 심판하는 최후의 심판만이 남아 있지요.
그렇다해서 사람으로 인해 이 땅이 저주받는 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 땅 전체가 저주를 받는 일은 없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 사람들의 죄악이 공의의 한계선을 넘어선 경우에는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하시지요. 예를 들어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볼 때 국가나 지역적으로 우상숭배가 심히도 중한 곳은 저주의 땅이 되어져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육적인 저주도 물론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저주로 인해 악한 영들의 소굴로 전락해 가는 것을 볼 수 있지요. 한때는 또 하나님을 사랑해서 나라가 번성하고 왕성했던 나라들이 이제는 점점 하나님을 멀리해 감으로 그와 함께 나라들도 피폐하고 악으로 물들고 어려워져 가는 것을 볼 수가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홍수라는 대심판을 통해 하나님을 떠나 죄악 가운데 거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충분히 깨우쳐 주셨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노아의 홍수가 주는 교훈을 잊은 채 급속히 악으로 물들어 갔고 오늘날과 같은 상황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홍수 후에도 때를 좇아 선지자들을 세우시고 그들을 통해 아버지의 뜻을 선포하셨지요. 중심이 선한 사람들을 택하여 선지자와 사도로 세우시고 그들을 통해 인간 경작의 마지막 순간까지 아버지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3. 중심이 선한 사람들

아담의 범죄 이후 후손들에게는 기(氣)를 통해 조상으로부터 전해지는 육의 속성들이 쌓여졌는데 노아의 홍수 이후에 더욱 급속해졌습니다. 그런데 기(氣)를 통해 사람의 본성 깊은 곳에 내재된 육의 속성은 쉽게 발견하여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발견하여 버리기 위해서는 혹독한 연단이 필요한 경우가 있지요. 예를 들어 스스로 자신에 대해 '이제 어느 정도 악의 모양을 버렸다' 생각하던 분들 중에도 아버지 하나님께서 연단을 허락하시면 자신도 알지 못하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악의 모양들이 드러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욥의 경우가 바로 그러했지요. 하나님께서 욥에게 시험을 허락하시자 그 연단을 통해 마음 깊은 곳에 잠재되어 있던 육의 속성이 엄청난 악의 모양으로까지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만약 욥에게 이러한 연단이 없었다면 욥 스스로는 결코 자신 안에 있는 근본된 육의 속성을 발견하여 버릴 수가 없었겠지요. 이처럼 연단이 당장에는 힘들고 마음의 고통도 따르지만 그 연단의 때야말로 자신의 깊은 마음 속까지 해부하여 기(氣) 속에 있는 육의 속성을 발견하고 버릴 수 있는 축복의 기회라는 사실입니다. 연단을 통해 기 속에 있는 육의 속성까지 발견하여 버리게 되면 그 후에 주어질 축복은 엄청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러한 연단이 있을 때만이 연단 속에서 나와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아직도 내 안에 이러한 악의 모양이 남아 있구나' 하고 스스로를 발견할 뿐만 아니라 그 악이 얼마나 더럽고 추한지를 마음 중심에서 느끼고 깨달을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연단을 통해 악의 모양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싫어하시는지가 정녕히 깨달아져야 그 악의 모양을 벗고 성결로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받을 수 있는 그릇이 되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본성 속의 악까지 발견하여 버릴 수 있도록 연단을 허락하시는 것이지요.

다윗 왕 역시 그러했습니다. 다윗 왕은 자신의 부하인 우리아의 아내를 취하고 그 사실을 숨기려다가 결국은 충실한 부하인 우리아를 이방인의 손에 죽게 하는 엄청난 악까지 행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만약 아버지 하나님께서 다윗 왕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는 것을 아예 처음부터 막으셨다면 다윗 왕이 그처럼 큰 악까지 행하지는 않았겠지요.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다윗 왕의 행동을 막아주지 않으셨습니다. 바로 그 사건을 통해 다윗 왕이 철저히 자신을 발견하고 변화되어 더 온전한 모습으로 나오게 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로 연단을 받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다윗 왕은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해 그의 죄악을 지적하시자 바로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돌이켰지요. 그리고 자신이 행한 악으로 인해 이후에 자신에게 찾아오게 된 모든 보응까지도 기꺼이 감사함으로 받았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보응을 피하려 하지 않았고 한 번도 불평하거나 불만을 토로한 적도 없지요.
반면에 욥의 경우는 어떠했습니까? 친구들이 찾아와 자신의 모습을 지적해주자 스스로를 발견하여 회개하고 돌이키기보다는 친구들과 변론하며 악을 발하였지요. 물론 나중에는 하나님께서 친히 욥을 깨우쳐 주시자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돌이켰지만 그러기까지는 너무 많은 말로서 악을 행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는 다윗 왕이나 욥 모두가 연단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 변화되어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이르렀지만 연단을 받는 모습은 이처럼 서로 달랐던 것이지요. 다윗은 지적을 받자 그 자리에서 회개했고, 욥은 친구들이 지적을 해도 변론만 했다가 하나님의 친히 음성을 들었을 때야 깨어졌다 이 말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연단과 자신의 악으로 인해 받게 된 보응까지도 감사함으로 받았던 다윗 왕은 지금 천국 서열의 매우 존귀한 자리에 앉았지만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했던 욥은 다윗 왕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한 중심의 차이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다윗 왕에게 욥과 같은 연단을 허락하셨다해도 다윗 왕은 결코 욥처럼 말하거나 행동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다윗 왕이나 욥 모두가 하나님께서 혹독한 연단이라도 허락하실 만한 그릇이었지만 그 중심에 있어서는 이처럼 차이가 있었던 것이지요. 이처럼 마음 밭도 좋고, 순종도 잘하며 말씀대로 지켜 행하는 사람이라 해도 그 중심이 얼마나 더 선하냐에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사랑과 인정받는 정도가 달라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노아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살펴보면 그가 천국의 높은 서열에 오른 사람들과는 그 중심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본격적인 인간 경작과 함께 노아에게서도 본성 속에 내재되어 있던 육의 속성들이 드러나게 되는데 이를 말해주는 대표적인 사건이 창세기 9장에 자신의 허물을 드러낸 아들 함을 저주하는 장면입니다. 포도주에 취하여 벌거벗고 자신의 수치를 드러내는 행동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자신의 허물을 드러낸 아들까지 저주해 버리는 악한 모습이 나오고 있지요. 그러나 만약 아브라함이나 모세 선지자가 그러한 상황이 되었다고 하면 과연 그들도 자신의 아들을 노아처럼 저주했겠습니까? 그러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중심이 얼마나 선하냐의 차이이며 그렇기 때문에 노아의 중심이 아브라함이나 모세 선지자를 따를 수는 없는 것이지요.
엘리야 선지자와 그의 제자였던 엘리사 선지자를 보아도 그 둘의 중심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엘리사 선지자는 비록 스승인 엘리야로부터 갑절의 영감을 받았고 또 성경에 보면 놀라운 표적들을 많이 행했음에도 천국에서의 그 위치가 엘리야 선지자와는 비교가 되지 않지요. 그 이유를 알 수 있는 사건이 왕하 2장에 나오고 있습니다. 벧엘로 올라가고 있던 엘리사 선지자를 향해 젊은 아이들이 몰려와서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놀려대지요. 그러자 엘리사가 이를 참지 못하고 아이들을 향해 저주하니 수풀에서 암콤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에 사십이 명을 찢습니다. 그런데 이 순간에 엘리야 선지자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과연 엘리야 선지자도 그렇게 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엘리사 선지자와 스승인 엘리야 선지자의 중심의 선(善)의 차이를 알 수 있는 것이지요. 엘리사 선지자도 큰 권능을 행하며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은 사람이었지만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데에는 바로 스승인 엘리야를 통해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은혜가 컸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중심을 보시며 그 중심이 선한 사람들을 더 기뻐하시지요. 그런데 이러한 선한 중심은 어느 정도 타고나는 경향도 있으나 정녕히 중심을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 행해 나갈 때 선한 중심으로 변화될 수가 있습니다. 물론 중심이라는 것이 변화되기는 쉽지 않기에 중심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혹독한 연단 속에서도 변함없는 마음을 가져야 하고 이러한 변함없는 마음이 쌓여지면서 중심도 변화되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지요.
이번 주의 종 교육을 통해 많은 분들이 이처럼 중심을 변화시킬 수 있는 축복의 기회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한 가지 아셔야 할 것은 내가 빨리 선한 중심으로 변화되기 위해 혹독한 연단이라도 받아야겠다 해서 연단이 허락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연단이란 하나님께서 받을 사람의 그릇을 보시고 거기에 맞게 허락하시지요. 정말 하나님께서 크게 쓰실 그릇에게는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연단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각자의 그릇과 믿음의 분량에 맞게 허락하시는 연단의 과정을 통해 정녕 아버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중심으로 변화되시기 바랍니다.

결 론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새로운 세상에서 새 삶을 시작하며 마음에 많은 다짐들을 했을 것입니다. 왜 홍수의 심판이 왔고 그 결과가 무엇이었는지를 너무나 잘 아는 그들이었기에 자신들이 앞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아가야 할지를 다짐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막상 완전히 육의 공간이 되어 버린 이 세상 속에 살아가다 보니 처음 마음먹은 대로 되어지지가 않았습니다. 근본의 악이 드러나게 되었고 그것이 이런 저런 악의 모양으로 나타나면서 사람들은 빠른 속도로 악에 물들어갔지요.
이처럼 마음 안에 있는 악이라는 것은 마음에 다짐한다고 해서 쉽게 버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진리에 비추어 자신을 철저히 발견하여서 자기를 부인하고 버려나가야 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연단이 필요한 것이며 연단을 통해서 자기 의가 깨어져 나가고 마음 속에 잠재된 세미한 악의 모양까지도 발견하여 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연단을 받아 나갈 때 꼭 필요한 것이 바로 기도이지요. 연단 중에서도 쉬지 않고 기도할 때만이 자신이 발견되어질 수 있는 것이며 발견된 악의 모양을 버릴 수 있는 힘도 주어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자신을 발견할 수 없고 발견하여도 버릴 수 있는 힘이 주어지지 않기에 연단도 그만큼 길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여러분은 말씀과 기도로 짝을 이루어 어떠한 연단이라도 신속히 통과해 내므로 정금같은 믿음을 가진 영적 장수들로 나와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크게 쓰임받는 귀한 하나님의 도구가 될 뿐만 아니라 장차 천국에서도 해와 같이 빛나는 자리에 많은 분들이 이르시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1-19 오전 1:01:01 Posted
2015-04-30 오후 1:24:02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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