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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 창세기 강해 (2000년~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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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세기 강해(104)
설교자 당회장 이재록 목사 설교본문 창9:3-7 등록일자 2003.08.01
서 론 /

이번 주부터 본격적인 수련회가 시작되었는데 여러분도 직접 영의 공간을 한번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함께 할 때는 여러분이 저에게 "하늘에 기사(奇事) 좀 보여주세요" 하고 청해 오면 지금까지 항상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 보여드렸습니다. 그런데 금년에는 제가 함께 하지 못하니 그러한 역사들을 볼 수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저와 동일한 영의 공간을 타게 되면 제가 꼭 육으로 함께 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지요. 여러분이 영의 공간으로 들어와 저와 함께 영의 흐름을 타기만 하면 마치 제가 함께 있는 것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역사들을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야 저와 영의 공간을 함께 탈 수 있는가 하는 방법이겠지요. 여러분이 그 방법만 제대로 알아서 필요한 요소들을 잘 조합하기만 하면 여러분의 수련회 장소에서 얼마든지 영의 공간의 일들 즉 기사와 표적이 나타날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충만하게 수련회를 준비했고 또 나름대로 열심을 내었다해도 목자와 함께 영의 공간 속에서 영의 흐름을 타지 않고서는 영의 일들이 일어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마음에 영의 공간을 함께 탈 수 있는 준비가 먼저 되어져야 합니다. 이번 수련회를 통해 여러분이 목자와 얼마나 마음으로 하나 되어 있고 또 영의 흐름을 함께 타고 있는지 점검해 볼 수 있습니다. 모쪼록 많은 분들이 영의 공간을 느낄 수 있으며 영의 세계를 친히 체험해 나가시므로 급속한 영의 흐름에 동참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 론 /

1.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

3절에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 채소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노아의 홍수 이후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동물까지도 먹을 수 있도록 허락하시는 장면이지요.
그런데 이처럼 동물을 먹도록 허락된 것이 사실은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라 했습니다. 첫사람 아담에게는 과일만 허락되다가 범죄 이후에 저주받아 이 땅에 쫓겨오면서 채소류와 같은 식물이 허락되었고 마침내는 동물까지 먹도록 허락이 되었는데 이는 결국 사람이 그만큼 악해졌기 때문이지요. 사람이 육으로 변질되어 갈수록 사람은 몸을 유지하기 위해 그만큼 더 많은 육의 것을 취해나가야 하므로 점점 더 강한 육의 음식이 필요해졌던 것입니다.
이처럼 동물을 먹도록 허락하신 것을 저주라고 하는 것에는 더 깊은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때부터 살생이 시작되었다는 것이지요. 홍수 이전까지는 번제를 위한 것 외에는 임의로 어떤 짐승을 죽인다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으나 이때부터는 사람이 먹기 위해 동물을 죽이는 것뿐만 아니라 짐승들 사이에도 약육강식의 법칙에 따라 서로 죽이고 죽는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더 악해지자 양식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자기 악 가운데 짐승을 죽이는 일까지 생겨나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재미나 오락삼아 짐승을 사냥해서 죽이는 것도 결국은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악해졌는지를 나타내주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점차 악해지면서 생겨난 또 한 가지 현상은 사람들이 처음 허락된 정결한 짐승 이외에도 자기 보기에 좋을 대로 짐승을 취하여 먹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점차 하나님께서 금하신 부정한 짐승까지 먹게 되었고 하나님을 떠난 이방인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더 심해져만 갔지요. 더구나 동물을 피채 먹지 말라 하신 명령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지켜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2. 고기를 피채 먹지 말라

4절에는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것이니라" 말씀하셨는데 여기에는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레 17:14에 "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어느 육체의 피든지 먹지 말라 하였나니 모든 육체의 생명은 그 피인즉 무릇 피를 먹는 자는 끊쳐지리라" 말씀하신 대로 피는 곧 생명과 일체이기 때문이지요.
하나님께서 첫사람 아담을 흙으로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실 때도 몸에 피가 돌고 순환하기 시작하면서 사람은 비로소 살아있는 생령이 되었습니다. 짐승 역시 피는 곧 생명이며 피가 있으므로 생명이 유지되는데 하나님께서도 어쩔 수없이 인간에게 고기를 먹도록 허락은 하셨지만 그것이 생명을 취하는 권세까지 인간에게 허락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고기는 먹되 피채로는 먹지 못하게 하심으로 피 곧 생명을 주관하는 권세는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주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때 그것이 곧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권세와 창조주로서의 권위를 인정해 드리는 것입니다.
결국 "피채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으로 하여금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권세와 위엄을 침범해서는 안 된다는 경계선(線)과 같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누가 만물의 창조주이시고 이와 같이 은혜를 베푸시는 이가 누구인지를 사람으로 하여금 분명히 기억하게 하신 것입니다. 노아 홍수 이후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빛으로 둘러주시고 친히 간섭하시던 때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 되고 말았기 때문에 이렇게 넘지 말아야할 선(線)을 그어주심으로 사람들이 이를 의식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존재를 의식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셨다는 말입니다.비록 이 땅의 모든 것이 이제는 육의 법칙 안에서 근본 육의 속성에 따라 돌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지만 모든 것의 근본은 아버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모든 것의 주관자는 하나님 한 분이심을 분명히 알려주시는 방법이 되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이렇게 정해주신 선(線)을 사람들이 어길 시에는 그것이 곧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도전이 되므로 거기에는 반드시 보응이 따랐고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육의 공간과 영의 공간이 철저히 나누어지게 된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육의 공간에 있다 해도 하나님과 상관이 있다고 인정되지만 순종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지요.
요 15:7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이 곧 영의 공간에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머무는 사람에게 주신 축복의 말씀이지요. 여러분이 비록 몸은 이 육의 공간에 있다 해도 여러분이 주님 안에,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거하면 이것이 곧 주님과 함께 영의 공간에 머무는 길이 됩니다. 그리고 이때는 주님과 여러분이 영의 공간 안에서 하나로 통해 있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마음에 품는 것조차도 곧 주님께 전달이 되어지지요. 주님의 응답도 바로 바로 올 수가 있는 것이구요.
반면에 여러분이 믿는다 하면서도 주님 안에 거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거하지 않으면 주님과 여러분은 전혀 별개의 공간에 거하게 됩니다. 주님은 영의 공간에 계시는데 여러분은 여전히 육의 공간에 거하게 되지요. 그리고 영의 공간과 육의 공간은 서로 통할 수가 없기 때문에 결국 주님과 여러분이 교통할 수가 없고 여러분의 마음의 소원에 주님께서 응답해 주실 수도 없는 것입니다. 바로 노아의 홍수 이후부터는 완전히 육의 공간이 되어버린 이 세상 가운데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만이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육체의 사람과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고 싶으셔도 함께 하실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물과 기름이 섞일 수 없듯이 육의 공간에 있는 사람과 영의 공간에 계신 하나님과는 통할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3. 내가 반드시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노아 홍수 이후 하나님께서 산 동물을 식물로 허락해 주셨을 때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그 양심에서 피채 먹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롬 2:14-15에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말씀하신 대로 양심이 선한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이 없어도 그의 양심이 스스로 율법의 행위를 나타낼 수 있는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이 점점 악해지게 되니 하나님께서 "피채 먹지 말라" 명하셨음에도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어기게 되었고 처음 정해주신 정결한 짐승의 범위를 넘어서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라는 한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면서 구체적인 율법의 틀을 제정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틀을 벗어났을 때에는 반드시 보응을 받도록 율법을 정하셨으므로 5-6절에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피를 흘린다는 말씀은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정한 선(線)을 넘는다는 의미입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이지요. 피채 먹지 말라 하셨는데 피채 먹는다거나 양식을 위한 것이 아닌 목적으로 살생하는 것 또한 사람과 사람간에 서로 해치거나 죽이는 것 등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선을 넘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행동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을 때는 거기에 대한 보응이 따르게 되는데 짐승에게 행한 것은 짐승으로, 사람에게 행한 것은 사람으로 보응을 받게 하셨습니다.
여기에는 곧 행한 대로 갚아주신다는 하나님의 공의가 담겨있지요. 그런데 행한 대로 갚아주신다는 공의의 법칙에 대한 보다 세밀하고 구체적인 규정들이 바로 출애굽기에 기록된 율례를 통해 선포됩니다. 율례란 십계명에 대한 구체적인 적용 규례로서 출 21:12-14에는 "사람을 쳐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나 만일 사람이 계획함이 아니라 나 하나님이 사람을 그 손에 붙임이면 내가 위하여 한 곳을 정하리니 그 사람이 그리로 도망할 것이며 사람이 그 이웃을 짐짓 모살하였으면 너는 그를 내 단에서라도 잡아내려 죽일지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을 살해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생명을 임의로 빼앗는 죄이기 때문에 그 결과는 반드시 죽음으로 갚아야 했지요. 다만 실수로 인한 살인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긍휼 가운데 자신의 생명을 보존할 수 있도록 예외적인 규정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곧 이스라엘 성읍들 중에 특별히 도피를 위한 성읍들을 따로 구분하고 실수로 살인한 것이 인정되는 사람은 도피성 안에 거함으로써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살인에 대해서는 사형이라고 하는 엄격한 대가를 치르게 하셔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을 죽이므로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행위를 예방하신다는 사실과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살인의 행위만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살인하는 사람의 마음을 더 중요하게 보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이지요. 사람이 온전해지기 전까지는 늘 실수가 나올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똑같은 비진리의 모습 속에서도 각 사람의 마음을 살피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정말 악한 마음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진리를 알지 못해 실수로 그랬는지 또는 진리대로 행하려고 했지만 마음에 의도한 것과는 다르게 나온 것인지 등을 살피시지요. 그래서 똑같은 비진리의 모습에 대해서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보응은 다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율법을 주신 목적 자체가 사람을 힘들게 하고 벌주기 위함이 아니요 진리 안에 살게 하기 위함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는 각 사람의 형편과 마음 중심까지도 살피시는 가운데 정확하게 적용되지요.

4.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구약시대의 율법을 보면 사랑의 하나님과는 좀 어울리지 않는 듯한 내용들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 출 21:23-25에 보면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했지요. 이를 "동해(同害) 보복법"이라고도 하는데 쉽게 설명하자면 사람이 어떤 해를 입게 되었을 때 거기에 대한 동일한 해로서 상대에게 갚는다는 뜻입니다. 이는 사람이 악을 행하면 보응을 받아야 한다는 공의의 법칙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법에 담긴 더 깊은 하나님의 마음은 바로 사랑임을 알아야 하지요. "눈은 눈으로"라는 내용만 보면 마치 악을 악으로 갚는 것 같지만 실상 여러분이 세상 사람들을 한번 보십시오. 남이 나에게 해를 하나 주었으면 그것을 두 개, 세 개, 그 이상으로 갚고자 하며 악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눈을 눈으로만 갚는 것이 아니라 더 큰 것으로 보복하려는 마음들이지요. 그러니 이러한 악의 세대 가운데서 눈은 눈으로 갚으라는 말씀은 오히려 받은 해(害) 이상으로 보복하는 것을 금지케 하려는 의미가 담겨 있다는 사실입니다.
보복을 최대한 억제하고 복수의 남용을 막는 효과가 있는 것이지요. 더욱이 성령 시대가 아닌 구약 시대에는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 수 없기에 자칫 보복의 악순환으로 치달을 수가 있지만, 동해 보복법이라는 율법의 틀 안에 묶어 주심으로 그나마 더 이상의 악을 막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왜 이런 무서운 법을 사람들에게 주셨는가'를 생각하기 이전에 '왜 하나님께서 이런 법까지 만들어주실 수밖에 없으셨는가?'를 생각해 본다면 악으로 관영한 세상 가운데서도 어찌하든 영혼을 보호하시고 지키시려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가 있지요. 이러한 사랑을 느낀다면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거나 스쳐 지나가지 못합니다. 작은 것 하나를 경히 여기면 나중에는 큰 죄를 짓고도 깨닫지 못할 수가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히 12:5에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권면하시는 것입니다.

6. 땅에 편만하여 번성하라

7절에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편만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말씀합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을 경작하시는 목적은 참 자녀를 얻으시기 위한 것인데 인간 경작을 시작하신 이후 인간의 악으로 인해 마음 아파하시며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실' 정도였지만 홍수 이후 새롭게 시작된 인간 경작을 보시면서 다시 한번 참 자녀를 얻기 위한 기대와 소망을 갖게 되십니다. 다시금 인간이 이 땅에 생육하고 번성해 가면 인간들이 결국 악으로 치닫게 되고 그러시면 또 마음 아파하실 것을 아시면서도 그 중에 나와질 참 자녀를 기대하시기에 또 한 번 인간에게 "땅에 편만하라" 하시며 복을 주고 계신 것입니다.
농부가 한 해의 수확이 부진하다고 해서 다음 해에 농사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시 희망과 포부를 가지고 농사를 짓는 것처럼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새로운 인간 경작을 통해 기쁨과 영광이 되기를 바라시는 마음으로 인간들에게 축복의 말씀을 주고 계신 것이지요. 그리고 사람들은 이 말씀에 순종하여 빠른 속도로 전세계를 향해 퍼져나갑니다. 사람과 짐승들이 어떻게 해서 전세계로 퍼져나갈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이미 지난 시간에 자세히 설명을 드렸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무지개를 두시고 이를 통해 인간들과 맺으신 언약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결 론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피는 곧 생명일 뿐만 아니라 피 안에는 각각의 성질과 속성까지도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피가 다르고 짐승의 피가 다르며 어떤 피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각각의 속성과 성질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피는 각 사람의 성질이나 속성까지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지만 세상의 이론이 다 맞는 것도 아니고 맞는다 해도 어디까지나 육의 법칙에 해당합니다. 만약 부모가 성질이 급하고 혈기가 많다면 자녀 역시 성질이 급하고 혈기가 많을 확률이 대단히 높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자녀라 해도 그가 진리 안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으면 육의 법칙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나는 부모로부터 이런 기를 타고 태어났으니 어쩔 수 없어' '나는 원래 성질이나 속성이 이래' 하면서 스스로에 대해 단정지어 버리는 사람은 자신을 여전히 육의 공간 안에 묶어 두는 사람입니다. 육의 공간 안에 자신을 묶어 두니 육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가 없지요. 하지만 육의 공간을 벗어나 영의 공간으로 들어오면 육의 법칙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더 이상 육의 공간이 아닌 영의 공간에 속한 사람이다'하고 말로만 고백한다해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육의 공간을 벗어나 영의 공간에 속하기 위해서는 이전에 육의 공간에서 가지고 있던 육에 속한 모든 것을 벗어 버려야 하지요.
이러한 과정에는 죄를 피흘리기까지 싸워 버려야 하는 아픔도 있고 자신을 철저히 부인해 나가는 인고의 세월도 있지만 모든 과정을 통과하면 피 속에 담긴 성질과 속성까지도 초월하는 영의 차원에 들어올 수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부모로부터 어떤 기를 타고났는가? 피 속에 어떤 성질과 속성이 담겨있는가? 이런 것들이 상관이 없습니다. 고후 5:17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말씀하신 대로 더 이상 육의 공간이나 법칙에 매여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한 참 자녀들로 나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1-19 오전 1:01:01 Posted
2015-04-30 오후 1:24:02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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