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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 창세기 강해 (2000년~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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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세기 강해(106)
설교자 당회장 이재록 목사 설교본문 창9:14-23 등록일자 2003.08.15
서 론 /

대부분의 사람들은 약속을 할 때 말이나 서면으로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는 약속이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이 온전하지 못하고 또 마음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은 약속을 할 때 눈에 보여지는 증거로서 약속을 확증하기 원합니다. 그 사람의 마음을 담은 증표로서 약속에 대한 보장을 받기 원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새끼손가락을 거는 풍습도 생겨난 것이고 결혼할 때 서로에게 반지를 주기도 하는 것이며 때로는 약속의 증표로서 자신의 소유물 중에 귀한 것을 상대방에게 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인간들과 언약을 하시면서 눈에 보여지는 증표를 주셨지요. 창세기 9:13에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하여 무지개를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로서 주셨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서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무지개를 "내 무지개"라 표현하고 계신데 이는 무지개가 그만큼 아버지 하나님과 밀접하면서도 친근한 관계를 갖고 있음을 나타내 주지요. 무지개는 계시록 4:3에 말씀한 대로 아버지 하나님의 보좌를 두르고 있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무지개를 언약의 증거로서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언약하신 것을 잊지 않으시고 지금도 이 땅에 무지개로 역사해 주고 계시지요.

이처럼 약속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해도 반드시 지켜져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약속, 사람과의 약속, 또한 자기 자신과의 약속도 지켜야 하지요. 그럴 때 하나님과의 사이에서의 신뢰, 사람과의 사이에서의 신뢰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도 쌓여지게 됩니다. 약속한 바를 반드시 지킴으로 모든 분야에서 신뢰를 쌓으려면 그 마음을 영으로 일구어야 합니다. 변개함이나 간사함이 없는 진실한 마음이 되었을 때만이 입술로 낸 말의 약속을 온전히 지킬 수가 있기 때문이지요.
처음에는 아무리 약속을 잘 지켰다 해도 나중에 가서 그 마음이 변하게 되면 그것은 온전히 약속을 지킨 것이 아닙니다. 또한 약속을 변함없이 신실하게 지켜 나감으로 신뢰 관계를 쌓아 가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려도 신뢰 관계가 무너지는 것은 한 순간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하지요. 물론 영의 사람이라면 한번 신뢰한 마음이 변함이 없지만 신뢰 관계란 어느 한 편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간에 마음으로 쌓여지는 것이기 때문에 한 편에서 마음이 변하거나 신뢰가 깨어지면 온전한 신뢰 관계라 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여러분의 관계 역시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항상 여러분을 믿어주기 원하시지만 정작 여러분이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온전히 의뢰하지 못한다면 아버지 하나님과 여러분 사이에도 온전한 신뢰 관계가 형성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변개함이나 간사함이 없는 영의 차원에 들어와야 하나님과의 관계 역시 온전한 신뢰 관계로 들어갈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영으로 들어와도 더 깊은 신뢰 관계를 쌓기 위해 들어가야 할 차원들이 많지만 일단 영으로 들어오면 적어도 배신이나 변개함이 없기에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을 신뢰하시며 따르는 증거들로 보장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신뢰받고 인정받게 되면 따르는 증거들을 통해 당연히 사람들로부터도 신뢰받고 인정받게 되지요. 사무엘상 3:19-20에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 말로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의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 말씀한 대로 사무엘 선지자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 말로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실 만큼 하나님의 보장을 받을 수 있었기에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누구나가 사무엘을 여호와 하나님의 선지자로 알았던 것입니다.

본 론 /

1.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신 이유

노아의 홍수가 지나가고 사람들이 점점 번성해 가면서 홍수의 심판 역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점 희미해져 갔습니다. 또한 홍수 전까지 이 땅에 정착하여 살던 에덴 동산의 사람들과 그들의 후예들이 홍수의 심판으로 인해 다 멸망당하고 홍수 이후에는 에덴동산의 사람들이 이 땅에 내려오는 것도 엄격히 제한됨으로 인해 홍수 이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에덴 동산의 존재는 점차 잊혀져 갈 수밖에 없었지요. 그러자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는 육의 공간 이 외에 다른 공간이 있다는 사실조차도 느끼지 못한 채 점점 육의 공간에만 매여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14절에는 하나님께서 구름으로 땅을 덮으실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도록 역사하신 이유가 나오는데 바로 이 땅의 사람들에게 영의 공간을 깨우쳐 주시기 위함이었지요. 여기서 구름은 곧 영의 공간을, 땅은 육의 공간을 의미하며 성경에는 영의 공간과 관련된 사건에는 반드시 구름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9에는 주님께서 승천하실 때의 모습이 나오는데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하였고, 장차 주님께서 공중 재림하실 때의 모습은 마가복음 13:26에 "그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7에는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말씀하시며 휴거되는 사람들 역시 구름 속으로 끌려 올라간다는 사실을 알려주셨습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과 엘리야, 모세 선지자가 만날 때의 모습이 나오는 누가복음 9:34-35에는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저희가 무서워하더니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했지요.

이처럼 구름은 영의 공간 또는 영의 공간과 통하는 매개체를 뜻하는 것으로서 '구름으로 땅을 덮는다'는 말씀은 육의 공간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영의 공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난다'는 말씀에도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데 첫째로는, 이 땅이 육의 공간이 되어 모든 것이 육의 법칙에 따르는 것같이 보이지만 육의 법칙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공의와 사랑 가운데 관여하신다는 의미이지요. 둘째로는, 비록 육의 공간이지만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안에서는 얼마든지 영의 공간의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본문에서는 구름 속의 무지개를 말씀하셨지만 하나님께서는 구름 속이 아니라 해도 얼마든지 영적인 의미를 담은 언약의 무지개로써 펼쳐 주실 수가 있지요. 지난 시간에 증거자료로써 본교회와 관련된 수많은 무지개 자료화면을 보여 드렸는데 극히 일부에 불과하지요. 아쉽게도 장비와 인력의 부족으로 매번 무지개가 뜰 때마다 촬영하지를 못했고 지교회에서는 극히 일부만을 영상 자료로 남길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원형 무지개가 관찰된 횟수는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린 대로 본교회만 해도 지난 3년 간 일년에 평균 200회가 훨씬 넘었으며, 지교회 중에 밀양 만민교회나 무안 만민교회의 경우도 일년에 200일을 훨씬 넘는 날 동안 원형 무지개를 비롯한 갖가지 희한한 무지개들을 관찰할 수가 있었다고 하지요.
그렇다면 이러한 무지개들이 과연 10년 전, 20년 전에도 관찰되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본교회의 영적인 흐름에 맞추어서 지난 98년 5월에 처음 관찰된 이후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권능의 폭발로 나와진 2000년도에 들어서면서부터 더욱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고 지금도 날로 그 횟수가 증가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추세는 통계 자료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밀양 만민교회의 경우에는 지난 3년간의 자료가 잘 정리되어 있는데 하나님께서 무지개로 역사해 주신 것이 지난 2000년 4월 2일 주일부터라고 합니다. 그 전에도 당연히 하늘을 관찰했을 텐데 그 전까지는 보이지 않던 무지개가 그 날 이후로 2000년도에는 한 달에 10일 정도씩 나타나더니 2001년에는 한 달에 20여일씩 나타났지요. 무지개가 많이 뜨는 달에는 한 달 30일 중에 24일이나 뜬 경우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아셔야 할 것은 같은 날 서울과 밀양에서 동시에 원형 무지개를 보았다 해서 그것이 같은 무지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본교회에서 해를 바라보는 하늘과 밀양에서 해를 바라보는 하늘이 다르기 때문에 비록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원형 무지개를 관찰했다 해도 그것은 별개이지요. 이처럼 만민 제단에서는 전국의 수많은 지교회에서 동시에 무지개를 보는 경우들도 많으니 어찌 과학으로 설명하겠습니까? 세상의 어떠한 지식이나 이론으로도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하나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하시고 지키신다는 분명한 언약의 증거로서 믿어야 할 것입니다.

2.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이어지는 15-17절에 "내가 나와 너희와 및 혈기있는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혈기 있는 자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땅의 무릇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된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또 이르시되 내가 나와 땅에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운 언약의 증거가 이것이라 하셨더라" 말씀했습니다.
노아 홍수 이후 육의 공간에 살아가기 시작한 사람들은 점차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존재마저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잃어가게 되었지요.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인내하시며 인간 경작의 섭리를 이루어 가십니다. 마태복음 12:20에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말씀한 대로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한 번 계획하신 인간 경작의 계획과 섭리를 마지막 심판의 순간까지 변함없이 이루어 가시는 것이지요. 중도에 '더 이상 못 참겠다' 하시며 죄악된 이 세상을 또 다시 물로 심판하시거나 인간 경작의 계획을 바꾸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끝까지 사랑과 인내로 인도해 가십니다. 이러한 아버지 하나님의 언약을 바로 무지개를 통해 나타내 보이시며 언약의 증거로 세우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한 번 하신 언약으로 인해 아버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해서 인간들에게 기회에 기회를 주고 계시지요. 설령 범죄했었을지라도 회개하면 용서하시고 받아 주시며 지금까지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내어 하나님의 뜻을 선포케 하심으로 어찌하든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편에서는 한 번 하신 언약으로 말미암아 오늘도 참고 또 참으시며 구원의 길을 열어 주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사람 편에서는 하나님의 존재조차 잊은 채 죄악 가운데 더 깊이 물들어 가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 편에서는 오직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는데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주의 약속이 더디다 말하며 주의 날이 임박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조차도 무뎌져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언약의 기한이 다 차고 나면 주의 날이 도적같이 이를 것이며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게 되지요. 육의 공간에만 매어 사는 사람들에게는 마치 이 세상이 육의 법칙에 따라 스스로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세상의 처음과 마지막은 물론, 이 시간 진행되어 가고 있는 모든 것 하나까지도 전부 아버지 하나님의 섭리 속에 들어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의미가 14-17절 말씀 안에는 반복적으로 강조하여 담겨져 있습니다.

3. 노아의 세 아들

이어지는 18-23절에서는 노아와 그의 세 아들들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홍수 이후 이 세상은 노아의 세 아들들 즉 셈과 함과 야벳으로 인해 번성하기 시작하여 온 땅으로 퍼져 나가게 됩니다. 그 자세한 내용은 창세기 10장부터 설명하기로 하고 오늘은 노아와 그의 아들 함 사이에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노아는 홍수 이후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고 그 열매인 포도로부터 나온 포도주를 마심으로 홍수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모습이 나오게 됩니다. 모든 가족들에게 본이 되어야 할 가장 어른으로서 해서는 안 될 행동이 나왔던 것이지요. 포도주에 취하여 벌거벗은 채 장막 안에 드러누워 있었는데 마침 아들 중에 함이 아버지의 이러한 실수된 모습을 보고는 밖으로 나가서 그것을 다른 두 형제에게 고했지요. 그러자 다른 두 아들, 셈과 야벳은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매고 뒷걸음질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를 덮어 드립니다.
여기서 함과 다른 두 아들들과의 커다란 차이점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아들 함은 아비의 하체를 보고 그것을 다른 형제들에게 전하기까지 했지만 다른 두 형제는 아비의 하체를 보지도 않았고 오히려 아비의 수치를 가려 드렸지요. 잠언 17:9에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말씀했는데 아들 함은 아비의 허물을 보았고 더 나아가 그것을 전하는 악까지 행했지요. 아들 함은 전적으로 아버지인 노아로 인해 구원받은 사람 중에 하나로서 은혜를 베푼 분에게 결코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모습은 어떠하신지요? '나는 함과 같지 않습니다' 하는 분들 중에도 비록 아비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해도 혹여 믿음의 형제, 자매에 대해서는 그들의 허물을 보고자하고 전하지는 않으셨습니까? 혹여 주변에 어떤 안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 여러분의 입술이 그 사건을 전하고 있지는 않았는지요? 여러분이 아는 상대의 허물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거나 또는 어떤 사람의 허물에 대해 궁금해서 견디지 못하는 분은 없으십니까? 당연히 이런 분들은 없어야겠지만 이 시간 다시 한 번 스스로를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은 상대에 대해 악하게 생각하지도 않는 것인데 하물며 어찌 상대의 허물됨을 들추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겠습니까? 홍수 전부터 이때까지 100여 년간이나 아버지인 노아로부터 진리로 가르침 받았고 홍수의 심판을 직접 보며 체험했던 아들 함으로부터 악의 모습이 나오고 있으니 홍수 이후 근본 육의 속성이 드러나면서 장차 사람들 사이에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지를 능히 짐작하게 하는 것이지요.

결 론 /

오늘날은 디모데후서 3:1-4에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한다' 말씀한 대로 날로 죄악이 관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과 같이 외식적인 행함으로만 경건의 모양을 갖는 것이 아니라 정녕 악이 없는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경건의 능력을 힘입음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거룩하고 온전한 자녀들이 되어야 합니다. 노아의 모습을 통해 성결이라는 것은 악의 모양을 단지 마음 깊이 눌러 놓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빼내어 버리는 것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마음 속에 있는 악의 모양을 단지 교양이나 수양 등으로 가려놓은 것은 언젠가 그 악의 모양이 발동할 수 있는 환경과 조건이 되어지면 반드시 나오게 됩니다. 노아도 빛이 있던 공간 속에서는 육의 속성들이 마음 깊이 잠재되어 있었지만, 빛이 거두어진 후에는 드러나기 시작하여 스스로도 놀랄 만한 모습들이 나왔던 것입니다.
따라서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되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리심으로 악의 근본 뿌리까지도 완전히 빼내 버려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10:18에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말씀한 대로 옳다 인정함을 받을 수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1-19 오전 1:01:01 Posted
2015-04-30 오후 1:24:02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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