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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 창세기 강해 (2000년~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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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세기 강해(110)
설교자 당회장 이재록 목사 설교본문 창11:1-9 등록일자 2003.10.03
서 론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역사학자나 인류학자를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인류의 기원은 어디로부터이며 수많은 인종과 민족은 어떻게 나누어져서 지금에 이르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해답을 창 9장, 10장을 통해 설명 드렸지요.
그런데 그에 못지않게 사람들이 매우 궁금해 하는 것 중에 하나는 바로 언어에 대한 것입니다. 즉, '오늘날 인류가 사용하고 있는 이 많은 언어의 처음 시작은 어디이며 어떻게 해서 나뉘어져 왔는가?' 하는 것이지요. 이 질문에 대해서도 성경은 분명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상상이나 전설 속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바벨탑에 대해서도 성경은 분명한 사실로서 기록하고 있지요. 그리고 왜 바벨탑에 하나님의 저주가 임했는가도 여러분들이 아셨으면 좋겠어요.
바로 오늘 본문 창 11:1-9에 이러한 의문들에 대한 해답이 잘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언어의 기원과 분열 그리고 바벨탑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 론 /

1. 언어의 기원과 분열

먼저 1절에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말씀합니다. 즉 앞으로 설명될 바벨탑 사건이 있기 전까지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의 언어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구음(口音)'이란 말 그대로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뜻하는데 여기서 구음이 하나라는 것은 쉽게 말하자면 당시 사람들의 말이 한결같이 동일했다는 뜻이지요.
또 다음으로 언어(言語)란 이처럼 입에서 나온 소리가 사람들 사이의 의사전달 수단으로서 체계를 갖추게 된 것을 말하는데 이러한 언어가 하나라는 것은 바로 언어의 형태나 내용이 같다는 뜻입니다 이 말의 뜻을 좀더 쉽게 이해하려면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을 보면 됩니다. 우리나라는 하나의 민족으로, 단일민족으로 구성된 나라로서 말의 발음이나 언어의 형태와 내용이 같은 것을 볼 수 있지요. 물론 우리나라 안에서도 지역에 따라서는 약간씩의 차이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지방만의 방언이나 사투리가 생겨나면서 나름대로의 언어적 특색을 띠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우리나라 사람끼리는 한 구음과 한 언어를 가진 민족으로서 얼마든지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을 보게 됩니다.
바로 바벨탑 사건 이전까지의 상황이 이러했지요. 온 땅의 구음과 언어가 하나였기에 당시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노아의 세 아들들 중에 누구로부터 비롯된 종족이냐에 상관없이 누구나 서로 간에 의사소통이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홍수 이후 3대, 4대라고 하는 세월이 지나면서 지역에 따라 사람들이 쓰는 언어에 약간씩의 변화는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러면 이제 여러분에게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생길 수 있습니다. '과연 당시 사람들 사이에 쓰이고 있던 한 가지 언어는 어떤 것이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가 있기 전까지는 물론이고 홍수 이후에도 바벨탑 사건을 계기로 언어가 혼잡케 되기 전까지 사람들 사이에서 쓰이고 있던 하나의 공통된 언어, 여러분은 그것이 어떤 언어였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에덴동산에서 쓰는 언어였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이 땅으로 쫓겨 내려오기 전 에덴동산에 사는 동안에 사용했던 언어이지요. 아담과 하와는 이 땅에 내려와 살게 된 후에도 에덴동산에서 사용하던 언어를 그대로 사용했던 것이고 그의 후손들 역시 자연스럽게 이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땅에 인간 경작이 시작된 이후에도 에덴동산의 사람들이 이 땅에 내려왔을 때에 큰 거부감을 갖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이처럼 서로 사용하는 언어가 같았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다른 나라에 갔을 때 그곳에 적응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것이 의사소통의 문제인데 당시 이 땅에서 쓰이던 언어가 에덴동산에서 쓰는 언어와 같았기 때문에 이 땅에 내려온 에덴동산의 사람들은 별 어려움 없이 적응할 수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했기 때문에 창 6:2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 즉 에덴동산의 남자들이 사람의 딸들 즉 이 땅의 여인들을 아내로 삼아 이 땅에 정착해 살 수도 있었던 것이고, 에덴동산의 발달된 문명과 지식도 이 땅의 사람들에게 전수될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지식이나 문명이 전수되기 위해서는 서로 간의 의사소통이 필수적인 요소인데 하나의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이 땅 사람들의 기술이나 지식으로는 이룰 수 없었던 발달된 문명들이 이 땅에 생겨날 수가 있었지요.
아담으로부터 전수된 기술이나 지식도 있었지만 여기에 에덴동산의 사람들로부터 전수받은 내용들이 더해지면서 지금의 기술이나 지식으로도 풀 수 없는 고도로 발달된 문명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이유가 바로 당시에 이 땅의 언어가 에덴동산에서 쓰는 언어였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처음에는 하나로 시작된 언어였다 해도 세월이 지나면서 처음과 똑같을 수는 없지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해져 가면서 사람들은 서로 간에 점점 더 멀리 떨어지게 되었고 그럴수록 언어 역시 조금씩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구음과 언어는 하나이지만 지역적인 특성이나 환경에 의해 나름대로의 언어적 특색이 생겨난 것이지요. 그러다가 홍수로 인해 이 땅에 여덟 사람만 남게 되었을 때는 그 순간이나마 언어가 통일되는 듯 했으나 그때는 이미 처음 아담과 하와가 이 땅에 내려왔을 때 사용하던 언어에서는 많이 변질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홍수 이후 사람들이 퍼져나가면서 언어는 또다시 조금씩 변질되기 시작했고 마침내 바벨탑 사건으로 인해 언어가 혼잡케 되어지자 처음 이 땅에서 사용되던 에덴동산의 언어는 이제 더 이상 그 흔적이 남아있지 않게 되지요. 사람들이 근본 육의 속성으로 돌아감에 따라 사용하는 언어에 있어서도 육의 속성으로 돌아가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고 그러면서 영의 세계인 에덴동산에서 사용하는 언어도 이 땅에서 소멸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바벨탑 사건 이후에는 제2 하늘의 에덴동산의 언어와 제1 하늘인 이 땅의 언어가 전혀 달라짐으로 더 이상 서로 간에 통용되지 못하게 되었지요. 이제 어느 정도 궁금증이 풀어지셨으리라 생각하는데 언어에 대해서는 7절에서 다시 한 번 설명이 되어질 것입니다.

2. 바벨탑

이어지는 2절을 보면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했습니다. 여기서 시날 평지는 바벨론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단 1:1-2에 보면 "유다 왕 여호야김이 위에 있은 지 삼 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그것을 에워쌌더니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기구 얼마를 그의 손에 붙이시매 그가 그것을 가지고 시날 땅 자기 신의 묘에 이르러 그 신의 보고에 두었더라" 하여 시날 땅이 바벨론 왕국 당시에 그 영토 안에 있었음을 말해 주지요. 지금의 이라크 영토 안에 있는 땅입니다.
그런데 창 10:10을 보면 이 시날 땅이 바로 함의 후손들의 근거지가 되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함의 후손인 니므롯)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했지요. 함의 후손들은 바로 이곳 시날 평지를 근원지로 하여 그들의 영토와 세력을 키워나갔던 것입니다. 따라서 2절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했다"는 것은 바로 함의 후손들에 대한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3절에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말씀했지요. 그렇다면 여기서 서로 말했다는 것은 누구와 누가 서로 말했다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셈과 함과 야벳의 족속이 서로 모여 대화했다는 뜻입니다. 당시에는 노아의 세 아들들로부터 퍼져 나간 후손들이 아직 본격적으로 퍼져 나간 것이 아니었기에 오늘날처럼 넓게 퍼진 상태도 아니었고 종족간에 교류도 있었지요.
그런 상황에서 시날 평지에 거하고 있던 함의 후손들은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다른 종족 즉 셈과 야벳의 후손들을 자신들이 거하는 시날 땅으로 모이게 했습니다. 니므롯이라고 하는 특출한 인물의 등장으로 인해 점점 세력이 커지고 있던 함의 후손들은 자신들의 계획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셈과 야벳의 후손들도 함께 동참하는 모임을 주관해 갔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함의 후손들은 왜 이곳 시날 땅에 다른 종족들까지 모은 것일까요? 성도 여러분, 함의 후손들은 자신들의 조상 함이 아버지인 노아로부터 저주를 받은 후 계속해서 저주받은 종족이라는 열등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더 힘과 세력을 키우려 노력했고 마침내 니므롯이라는 인물의 등장을 계기로 커다란 세력을 이루게 된 함의 후손들은 다른 종족들 앞에서 자신들의 우월성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노아로부터의 정통성을 이어오고 있는 종족이라는 것을 다른 종족들 앞에서 인정받으려 했던 것이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힘과 능력을 과시하며 자신들이 주동이 되어 이룰 수 있는 어떤 특별한 일이 필요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바벨탑의 건축이었지요. 함의 후손들은 바벨탑의 건축을 통해 다른 종족들 위에 자신들의 입지를 굳히려 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어지는 4절에서는 바벨탑 건축을 계획하게 된 의도가 잘 나타나 있지요.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 안에 담겨 있는 각각의 종족들의 숨은 속뜻은 서로 달랐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함의 자손들은 자신들의 우월성을 드러내며 자신들의 정통성을 주장해 보려는 의도로 다른 종족들까지 한 곳으로 모아 바벨탑 건축을 계획하였습니다.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라는 말 안에는 이러한 함의 후손들의 의도가 담겨 있지요. 겉으로는 '우리'라 하여 모든 족속을 포괄하는 듯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함의 후손 자신들의 명예를 높이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바벨탑 건축에는 단순히 함의 후손들이 자신들의 우월성을 나타내고 정통성을 주도해 가려는 의도만 담겨있었던 것이 아니지요. 그들의 더 깊은 마음속에는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저주받은 종족으로서 열등감 속에 살아야 했고 그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도 점점 멀어지게 된 것에 대한 일종의 반발심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마음을 직접 드러낼 수는 없기에 함의 자손들은 바벨탑 건축의 목적을 표면적으로는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라고 합니다. 마치 원래는 모두가 노아의 후손으로서 하나의 종족이었던 세 종족이 이제부터는 하나되어 흩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바벨탑을 건축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지요.
그리고 셈과 야벳의 후손들은 함의 후손들의 속마음은 모른 채 그들의 제의에 동의하여 바벨탑 건축에 동참하게 됩니다. 따라서 셈과 야벳의 후손들이 바벨탑 건축에 동참하게 된 것은 함의 후손들이 목적한 것과는 달랐다는 사실입니다. 셈과 야벳의 후손들은 하나님을 대적하고자 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었으며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했던 것도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자 했던 것이 아니지요. 다만 자신들은 모두가 한 아비로부터 내려온 하나의 민족이라는 것을 기념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나름대로 상징적인 의미를 담아 하나의 건축물을 세우려 했던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자신들이 흩어져 살고 있지만 우리는 모두 하나로부터 나와졌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는 의도에서 바벨탑 건축에 동참했다는 말이지요.
이처럼 바벨탑 건축이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상징물로 세워졌지만 실제 그 일에 동참한 사람들 모두가 하나님을 대적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니므롯을 중심으로 하는 함의 자손만이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고 셈과 야벳의 자손들은 이러한 함 자손의 속마음을 모른 채 순수한 의도에서 동참하려 했다가 그만 함의 자손들의 의해 이용당하고 말았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당시에 그들이 계획했던 바벨탑의 규모는 과연 어느 정도였을까요? 이것은 깊은 기도 중에 환상으로 보여 주시며 알려 주신 내용인데 당시에 그들이 처음 계획했던 바벨탑의 높이는 오늘날의 건물 약 15층 정도 높이였습니다. 그 모양은 피라미드와 같은 형태였으며 벽돌과 역청으로 쌓아 올린 건축물이었지요. 15층의 높이라면 오늘날 건물의 한 층을 대략 3.5미터로 잡았을 때 50미터가 좀 넘는 높이입니다. 지금 보면 별로 높은 높이가 아닐지 모르지만 당시로서는 결코 낮은 건축물이 아니었지요.
창 10:12에 말씀하고 있는 대로 이미 '레센'이라는 큰 성을 건축했던 함의 후손들은 그동안 쌓은 기술과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바벨탑 건축을 주도해 갔고 여기에는 벽돌과 역청을 사용하는 기술이 사용되었습니다. 단순히 자연에서 취한 돌을 다듬어 쌓는 수준이 아니라 벽돌을 구워 사용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진흙 대신에 역청을 사용하는 방법도 알고 있었지요. 하지만 이렇게 쌓아 올리기 시작한 바벨탑을 처음 목표했던 높이만큼 다 쌓아 올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강림하셔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시므로 공사는 중단되고 말지요. 그리고 이렇게 공사가 중단되기까지 그 시간이 아주 길었던 것도 아닙니다. 1, 2년이라는 짧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건축을 시작하여 중단되기까지의 시간이 5년을 넘은 것은 아니라 하셨지요. 바벨탑 건축이 중단되는 사건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5절부터 다음 시간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결 론 /

오늘은 이 땅에 처음 있었던 언어가 어떤 것이었으며 바벨탑을 건축하게 된 목적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통해 영적으로 크게 두 가지 면에 대해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영적으로도 통일된 하나의 언어일 때만이 서로 통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육적으로 볼 때도 사람 사이에 서로 의사소통이 되고 뭔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기 위해서는 말이 통해야 합니다. 서로 통용될 수 있는 하나의 언어가 필요하지요. 그렇지 않으면 서로 통할 수가 없습니다. 이는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여서 육의 말을 하는 사람과 영의 말을 하는 사람과는 서로 통할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도 이 진리를 알기 전에는 입에서 여러 가지 세상적인 말들이 나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진리를 알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변화되어 가다 보니 어떻게 되셨나요? 여러분 스스로도 여러분의 입술의 말이 달라지고 있음을 느끼시리라 생각합니다. 또한 이렇게 입술이 거룩하게 변화되어 가다 보면 어느덧 예전에 만나던 세상 사람들과는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게 되지요. 분명 같은 한국말을 하고 있는데도 육적인 말과 영적인 말은 서로 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대신 영적인 말을 하는 사람과는 그 대화가 너무나 즐겁고 행복하며 영의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게 되지요.
또 한 가지 예를 들면, 만약 어떤 사람이 육의 말을 할 때 여러분이 그것을 육으로 받지 않고 영으로 받게 되면 그 대화는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모여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을 보면 그것은 서로 말이 통하기 때문입니다. 육의 말은 서로 통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러분이 만약 그러한 자리에 있다고 할 때 설령 누군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말을 해도 여러분이 그것을 받아 주지 않으면 그 대화는 자연스럽게 끊어지고 맙니다. 또 여러분이 다른 사람의 허물에 대해 들었다 해도 여러분이 더 이상 그것을 말로 전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허물이 퍼지지 않게 되지요.
육적으로 볼 때도 언어가 서로 통해야 판단하고 정죄하며 수군거리는 것이 가능한데 이처럼 여러분이 육의 언어가 아닌 영의 언어만을 쓴다면 비진리가 전파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 해서 육의 말을 하는 상대를 무안하게 만들거나 찌르는 말로써 대화를 끊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정녕 여러분의 입술에서 선한 말, 아름다운 말과 같은 단 물만 내게 되면 자연히 쓴 물을 내는 입술은 다물어지게 되지요. 그럴 때 출 23:1에 "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무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라는 말씀처럼 육의 말은 그 입에 담지도 전하지도 않게 되는 것입니다. 천국의 백성으로서 항상 사랑의 말, 진리의 말, 선한 말, 거룩한 말 등과 같은 아름다운 영의 언어만을 사용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깨달아야 할 두 번째는 같은 죄라도 어떤 마음에서 했느냐에 따라 죄의 경중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함께 바벨탑 건축에 동참했지만 하나님께서 함의 후손에게 물으시는 죄의 값과 셈이나 야벳의 후손에게 물으시는 죄의 값은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지요. 함의 후손들은 이미 마음에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했던 것이고 셈과 야벳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므로 그만 불의한 일에 동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겉으로 드러난 동일한 죄의 행함에 대해서도 그 중심을 헤아려 죄의 경중을 물으신다는 사실입니다.
눅 12:47-48 전반절에도 보면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했지요.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않았다는 것은 바로 고의적으로 주인의 뜻을 어겼다는 것으로서 알지 못해서 안한 사람과는 상황이 다릅니다. 그만큼 마음에 악을 더 가지고 있는 것이며 주인의 명령에 대한 명백한 반발이지요. 함의 후손들의 상황이 바로 이러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셈이나 야벳의 후손들의 죄는 작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함의 후손들에 비해서야 작겠지만 셈이나 야벳의 후손들 역시 조금만 영적으로 깨어 있었다면 함의 후손의 꼬임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었지요. 말이 아무리 그럴듯하게 들린다 해도 영적인 분별력이 있었다고 하면 하나님 앞에 바벨탑을 쌓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태초에 영계에서 루시퍼가 반란을 일으키게 된 원인이 바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했던 교만이었던 것처럼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자"라는 말 안에는 감히 피조물로서 스스로 높여 하늘에 닿고자 하는 교만함이 담겨 있지요. 영적으로 깨어 있었다면 자신들의 이러한 생각 자체가 이미 하나님 앞에 교만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겠지만 셈과 야벳의 후손들은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원수 마귀 사단이 미혹해 올 때는 아주 그럴듯한 말로써 접근해 오지요. 이때 그러한 말들을 진리로 잘 분별하면 결코 넘어가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바로 마음에 욕심이 있기에 자기 유익에 맞는 말에는 귀가 솔깃해져서 결국 미혹에 넘어가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잘 명심하여 여러분은 영적으로도 늘 깨어 있으므로 원수 마귀 사단의 미혹에 넘어가지도 않아야 될 것이며 혹여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닌 줄 알면서 악을 행해 나가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오직 아버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셔서 항상 진리의 길로 인도받아 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1-19 오전 1:01:01 Posted
2017-03-29 오후 5:11:57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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