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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 창세기 강해 (2000년~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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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세기 강해(111)
설교자 당회장 이재록 목사 설교본문 창11:5-9 등록일자 2003.10.24
서 론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기 위해 친히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영의 공간에 계신 하나님께서 육의 공간인 이 땅으로 내려오신 것이지요.창 1:2 후반절에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신 말씀이 바로 당시의 상황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로도 인간 경작의 역사 가운데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에 강림하신 장면들이 성경에는 여러 차례 기록되어 있지요.
예를 들어 출 19:18에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점 연기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했습니다. 민 11:25에는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그에게 임한 신을 칠십 장로에게도 임하게 하시니 신이 임하신 때에 그들이 예언을 하다가 다시는 아니하였더라" 했지요. 창 17:22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더라" 하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대화하시기 위해 친히 이 땅에 내려오셨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5절 이하에도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에 강림하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과연 어떻게 이 땅으로 내려오신 것일까요?

본 론 /

1. 하나님의 강림 사건

전에 영의 공간과 육의 공간 사이를 오가려면 통로와 같은 곳을 통과해야 한다고 했는데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이 통로를 통해 내려오셨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굳이 이 통로를 거치실 필요 없이 얼마든지 이 땅에 내려오실 수가 있지요. 하나님께서는 시간의 흐름의 변화에 어떠한 구애도 받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어차피 육과 영의 모든 공간은 하나님께 속해 있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이처럼 영의 공간과 육의 공간을 연결하는 통로를 통해 이 땅에 강림하신 이유는 바로 스스로도 공의의 법칙을 어기지 않으시려 했던 것이지요.
이처럼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에 강림하셨을 때 당시 육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뵈올 수도, 하나님의 강림하심을 느낄 수도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육의 눈으로 뵈올 수 있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영안이 열리고 하나님과 교통하는 사람들은 영으로 들어온 깊이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하나님을 뵈올 수가 있습니다. 물론 친히 대면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뵐 수 있는 것은 아니라 해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범위 내에서 하나님을 뵙고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모세 선지자의 경우를 보면 출 33:20-23에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곁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섰으라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하셨지요. 하나님과 밝히 교통하던 모세 선지자였지만 아버지 하나님의 본체가 강림하셨을 때는 그 형상을 정면에서 직접 뵐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뒷모습만 뵐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민 12:8 전반절에는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겠거늘"이라 말씀하셨으니 "하나님과 대면한다"는 말씀의 의미를 잘 분별해야 하겠습니다. 출 33:11에도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했지만 막상 하나님의 본체가 강림하셨을 때는 모세가 직접 하나님과 대면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이는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의 아담과 동행해 주실 때나 에녹 선지자와 동행해 주실 때를 생각해 보면 됩니다. 전에 창세기 강해에서 설명 드렸듯이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의 아담과 동행해 주셨지만 그렇다 해서 하나님의 본체가 직접 에덴 동산에 내려와 함께하신 것은 아니라 했지요. 둘째 하늘과 셋째 하늘을 연결하는 통로를 통해 마치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며 함께하는 것처럼 밝히 교통할 수가 있었는데 이것을 가리켜 곧 동행해 주신 것이라 했습니다.

에녹 선지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에녹 선지자와 300년간 동행해 주셨는데 이때도 일일이 매번 이 땅에 내려오셔서 에녹 선지자와 동행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영이신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영을 분리하실 수가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본체가 직접 움직이시는 것이 아니라 분리된 영의 분체(分體)가 사역하시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성경에 동행해 주신다는 것은 직접 하나님의 본체가 내려오시는 것이 아니라 분리된 하나님의 영이 늘 함께하시면서 교통해 주시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모세 선지자도 이런 경우이지요. 하나님께서 모세와 대면하여 밝히 말씀하신다 해서 항상 본체가 친히 내려와 대화하신 것이 아니라 영으로 교통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피조물로서 아버지 하나님과 영으로 교통할 수 있는 것도 웬만한 영의 차원에 들어와서 되는 것이 아니지요. 바로 모세 선지자와 같은 분이었기에 하나님과 영으로 마치 대면하듯이 밝히 교통할 수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세 선지자라도 아버지 하나님의 본체가 오셨을 때는 상황이 달라졌던 것입니다. 아무리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고 온 집에 충성하였던 모세였지만 부활체의 몸을 입고 있는 것이 아닌 이상은 육의 몸을 입고 있다는 육의 한계로 인해 아버지 하나님의 본체를 친히 뵐 수는 없었습니다.
이는 엘리야 선지자를 보아도 알 수 있지요. 천국에서 그처럼 서열이 높은 엘리야 선지자였지만 아버지 하나님을 직접 뵈올 수는 없었습니다. 왕상 19:11-13을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 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있어 저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했지요.
아버지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 앞을 지나가셨지만 엘리야 선지자 역시 하나님을 친히 뵌 것이 아니라 다만 아버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낄 수 있었으며 목소리만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엘리야 선지자나 모세 선지자와 같이 성결되어 하나님을 닮은 사람들이었기에 그나마 하나님께서는 뒷모습을 보여 주시거나 임재하심을 느낄 수 있도록 징조로 나타내 보이신 것이지요. 그러나 육의 사람들은 육의 눈으로 하나님을 뵈올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보여 주신다 해도 그것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강림하실 때, 육의 눈으로 보여지는 증거를 함께 나타내 주지 않으시면 육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강림하셨다는 사실조차도 느낄 수가 없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 강림하실 때는 불과 연기와 산의 진동으로 역사하심으로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강림하심을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영의 사람이라면 비록 하나님께서 강림하실 때에 어떤 눈에 보이는 증표를 나타내 주지 않으셔도 영적인 기운을 통해 느낄 수가 있습니다. 더욱이 성령 시대라면 당연히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강림하심을 성령의 감동함 가운데 느낄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시지요.
그런데 본문의 배경이 되는 당시에는 하나님께서 강림하셨어도 그 장면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없었고 느낄 수 있는 사람조차도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편에서도 그들에게 눈에 보이는 징조로 역사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2. 하나님께서 친히 강림하여 언어를 혼잡케 하신 이유

이어지는 6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에 강림하셔서 언어를 혼잡케 하신 이유가 나오는데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처음 인간 경작을 시작하시면서 이미 마지막 때까지의 모든 것을 섭리해 놓으셨습니다. 그렇다 해서 미리 예정해 놓으셨다는 뜻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기에 정확한 시점에 맞추어 필요한 상황과 여건들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구세주 되시는 예수님께서 언제 태어나셔야할 지를 이미 아시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태어나셔야 할 정확한 시점에 맞추어 주변의 상황과 여건을 만들어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곳에서 태어나야할 지, 누가 예수님의 탄생을 예비하도록 해야할 지, 어떤 부모 밑에서 태어나게 해야할 지 등을 하나하나 예비하셨던 것이지요. 바벨탑 사건을 계기로 언어를 혼잡케 하셨던 것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바벨탑을 세울 것을 전혀 모르고 계시다가 그때 가서 갑자기 사람들이 바벨탑을 세우는 것을 막기 위해 언어를 혼잡케 하신 것이 아니지요. 이미 모든 것을 아시고 그때에 맞추어 언어가 혼잡케 되도록 역사하셨던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인간 경작을 위해서는 인류가 한 언어, 한 민족이 되어서는 안되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스스로의 교만함 가운데 언제쯤 바벨탑 사건을 일으키게 될지를 미리 아시고 그때에 맞추어 인류의 언어와 민족이 나뉘도록 역사하셨다는 말이지요.
따라서 "사람들이 한 족속이요, 한 언어이므로 그들의 경영하는 일을 금할 수 없다"는 말씀이 문자적으로 볼 때는 사람들이 한 족속이요 한 언어이기 때문에 바벨탑 건축도 계획할 수 있었으므로 이제 더 이상 바벨탑을 짓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언어를 혼잡케 하시겠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모든 앞일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때에 정확히 맞추어 언어와 민족을 나뉘게 하심으로 이후로 진행될 인간 경작을 위한 환경을 온전히 갖추는 계기로 삼으셨다는 사실이지요. 또 전세계에 다양한 민족과 언어를 가진 사람들을 통해 인간 경작을 이루어 가시려는 아버지 하나님의 섭리하신 뜻이 바벨탑 사건을 계기로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처음 인간 경작을 시작하시면서부터 이미 인류 역사의 마지막까지 모든 것을 아시며 계획하고 섭리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인간 경작의 모델이 되는 선민 이스라엘 민족이 필요할 것도, 그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구세주가 나시며 구세주를 통해 복음이 전 세계 민족과 나라들로 전파되어야 할 것도 이미 아시고 섭리해 놓으신 것이지요. 또한 장차 인류 역사 가운데 수많은 나라와 민족들이 나와지며 그들이 서로 어떤 관계 속에서 마지막 때까지 이르게 될지도 섭리해 놓으셨구요.
이것을 자칫 오해하면 마치 하나님 편에서 일방적으로 모든 것을 정해 놓고 이루시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정이 아니라 예지예정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인류가 어떻게 되어질 것을 이미 아시는 가운데 그것에 맞추어 섭리해 놓으셨다는 말이지요.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 위해서는 온 인류가 한 민족으로서 한 언어를 사용하는 상태로는 안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예지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바벨탑 사건이 있을 것과 그것이 어느 때에 일어날지를 이미 아시고 그때에 맞추어 언어와 민족이 나누어지도록 예지예정 가운데 역사하신 것이지요.
이것은 여러분이 예정과 예지예정의 분명한 차이점을 깨달으실 때만이 이해될 수 있는 내용인데 간단히 예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어떤 학생에게 "이번 시험에서 1등을 할 것이라" 말씀하셨다면 이것이 예정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정이라면 전혀 공부를 안 해도 당연히 1등을 해야겠지요. 그러나 이 학생이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공의에 따라 결코 시험에서 1등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 학생에게 1등을 할 것이라 말씀하셨다면 그것은 그가 앞으로 얼마나 열심히 공부할 것까지 미리 아시고 하신 말씀이기에 이 학생은 결국 열심히 공부를 해서 1등을 하게 되지요.
그렇기 때문에 예지예정에는 자유의지가 들어간다는 사실입니다. 예정이라면 이미 정해진 것이기에 자유의지 가운데 순종하지 않아도 이루어지겠지만 예지예정은 순종해 나올 것까지 아시고 정한 것이기에 반드시 자유의지 가운데 순종의 행함을 보일 때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주셨을 때 자유의지 가운데 스스로 순종하지 않으면 말씀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고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틀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3. 삼위일체 하나님이 친히 강림하심

이어지는 7절을 보면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했는데 이는 이 땅에 내려오시는 주체가 한 분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한 분이 홀로 이 일을 이루신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함께 이루셨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처음 천지를 창조하시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오실 때도 세 분이 함께하셨던 것처럼 이때도 세 분이 친히 함께 오셔서 모든 것을 살피시고 결정하셨던 것이지요.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을 이루심에 있어서 홀로 결정하고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세 분이 함께 대화하시고 결정하여 이루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시며 따로가 아닌 한 분으로서 역사해 가시지요. 만약 세 분이 각각 뜻하시는 바가 다르다면 인간 경작의 역사가 일관성 없이 진행될 수도 있었겠지만 항상 한마음 한뜻으로 일을 이루시기에 모든 것이 한 치의 오차 없이 처음 섭리하시고 계획하신 대로 이루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그냥 지나가서는 안 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오셨다는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굳이 내려오지 않으셔도 사람들이 왜 성과 대를 쌓고 있으며 그 마음에 무엇이 들어있는지까지 다 아시지요. 또 친히 내려오지 않으셔도 얼마든지 사람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친히 내려오신 것은 모든 것을 직접 다시 한 번 확인하시고 정확한 공의 가운데 일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 땅을 심판하실 때도 이미 그들의 죄악을 아셨지만 다시 한 번 사자를 보내어 확인케 하시지요. 창 18:20-21에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 하십니다. 이 땅의 상황을 직접 살피시기 위해 친히 두 천사를 대동하고 내려오신 하나님께서는 먼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장차 소돔과 고모라에 있을 심판에 대해 알려 주시지요. 그리고는 두 천사를 직접 소돔에 보내어 그곳의 상황을 살피게 하셨습니다. 두 천사를 통해 소돔의 죄악이 얼마나 관영했는지를 직접 확인하신 후에야 유황과 불로써 그곳을 심판하셨던 것이지요.
이처럼 바벨탑 사건 때에도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친히 이 땅에 내려오셔서 모든 것을 살피시고 결정하셨던 것입니다.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친히 살피시고 결정하실 만큼 바벨탑 사건이 인간 경작의 역사 가운데 큰 획을 긋는 사건으로서 의미가 크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처리하심에 있어서 얼마나 정확한 공의 가운데 이루시는지를 나타내 주지요. 시 96:10에 "열방 중에서는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못할지라 저가 만민을 공평히 판단하시리라 할지로다" 말씀한 대로 하나님께서는 조금의 치우침도 없으시며 오직 공의 가운데 공평히 행하신다는 사실입니다.

4. 언어의 혼잡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과연 사람들의 언어를 어떻게 혼잡케 하셨을까요? 또 언어가 혼잡케 된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순식간에 언어를 혼잡케 하셨습니다. 앞으로 때가 되면 설명을 드리겠지만 하나님께서 이 육의 공간 속에 영의 일을 펼치실 때에는 각각 시간의 늘어남, 시간의 줄어듦, 시간의 멈춤 중에 한 가지 경우를 통해 펼치시지요. 그런데 언어를 혼잡케 하신 것은 그 중에서 바로 시간의 멈춤으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이는 쉽게 말해 너무 빠르게 순식간에 일어났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언어가 바뀌었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했고 여전히 예전에 쓰고 있던 언어를 그대로 쓰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지요. 이런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서로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되자 전에는 우리가 서로 대화할 때에 통했는데 지금은 왜 대화가 통하지 않을까? 이상하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흩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바벨탑을 쌓는 것이 중단되었고 사람들은 언어가 통하는 사람끼리 뭉쳐 흩어지게 되었지요. 바로 8-9절에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한 대로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언어를 혼잡케 하시면서 부족이나 부락별로 언어가 갈라지게 하셨는데 이들은 하나의 집단을 이루어 나름대로의 정통성과 특수성을 유지하면서 점점 더 큰 집단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의 민족이 되고 하나의 국가를 형성해 나가게 되지요. 하나님께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다는 말씀처럼 언어가 혼잡케 되는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인류는 비로소 온 지면으로 퍼지며 다양한 민족과 국가들을 형성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처럼 흩어지면서 각자 정착할 땅을 찾아 이주하는 것이 겉으로 보기에는 자신들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원하는 곳으로 가는 것처럼 보였지요. 하지만 그 안에는 그들의 조상을 통해 각각의 종족에게 주어진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이루기 위한 섭리가 담겨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즉, 셈과 함과 야벳에게 주신 축복과 저주의 말씀에 따라 그들은 자신들이 경작받게 될 토질에 맞는 곳으로 정확하게 이동해 갔던 것이지요.
물론 종족과 종족이 서로 섞이기도 하고 함께 공존하기도 하며 또 같은 종족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무리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각각의 종족의 주류(主流)는 그들의 조상인 셈과 함과 야벳에게 주어진 아버지 노아의 말에 따라 그대로 응해 갔다는 말이지요. 그러면서 강성하고 부유한 나라와 민족이 나오기도 하고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한 나라와 민족이 나오기도 하면서 오늘날과 같이 인간 경작의 역사가 이어져 왔던 것입니다.
10절부터는 노아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셈의 후예들의 계보가 나오고 있는데 다음시간에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결 론 /

앞서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친히 강림하시면서 스스로도 공의의 법칙을 어기지 않으시려고 영의 공간과 육의 공간을 연결하는 통로를 통하셨다 했습니다. 만물의 주관자요 주인이시며 전능자이시지만 하나님께서는 가지고 계신 권세를 마음대로 쓰시는 분이 아니라 스스로가 정해 놓으신 법칙 또한 정확하게 지키신다는 사실입니다.
저도 이러한 아버지 하나님의 속성을 잘 알기에 저 자신도 교회의 법 테두리를 벗어나 본 적도 없거니와 당회장으로서 저에게 주어진 권세라 해도 그것을 임의로 행사해 본 적이 없지요. 그런데 세상에서는 어떠합니까? 권세나 명예가 주어지게 되면 그것을 이용하여 법의 테두리를 초월하는 일도 있고, 자신이 정한 규범이나 약속조차도 자기의 유익에 맞지 않으면 너무나 쉽게 변개해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는 권세가 있고 높은 지위에 있을수록 더욱 법과 질서를 잘 지켜서 다른 사람들의 본이 되어야 하지요. 나는 예외려니 생각해서도 안 되며 자신의 유익을 좇아 법과 질서를 어그러뜨리는 일도 없어야 합니다.
또한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영의 법칙뿐만 아니라 이 땅에 세워 주신 육의 법칙도 존중하시듯이 여러분도 영적인 면에서는 물론이고 육적인 면에서도 걸릴 것이 없도록 영육간에 질서와 법을 잘 지키시기 바랍니다. 물론 영적인 것이 항상 우선되어야 하되 육적으로도 결여됨이 없도록 모든 것을 두루 살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말씀을 통해 또 한 가지 깨달아야 할 것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결정하심에 있어서 공의 가운데 정확하게 판단하시듯이 여러분도 매사에 그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바벨탑을 쌓는 곳에 친히 내려오지 않으셔도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히 강림하셔서 다시 한 번 모든 것을 살피시고 결정하셨지요. 이처럼 우리도 어떤 일을 결정함에 있어서 결코 한쪽의 말만 들어서도 안 되는 것이며 필요에 따라서는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 할 때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결정을 내리는 편에서야 쉽게 내릴 수 있지만 자칫 불공평한 결정으로 인해 당사자가 당해야 하는 고통을 생각한다면 레 19:36에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추와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힌을 사용하라 나는 너희를 인도하여 애굽 땅에서 나오게 한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말씀한 대로 범사에 공평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면서도 끝까지 인내하시고 참으시며 믿음으로 바라봐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처럼 어떻게 하면 상대를 살릴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입니다. 육적인 것만 생각한다면 좌우로 치우치지 않게 공평하기만 하면 되겠지만 영적으로는 공평한 것은 물론이고 요 6:63에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는 말씀대로 항상 살리는 영을 택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저도 지금까지 교회를 치리해 오면서 언제나 공평하게 일들을 처리해 왔지만 그럼에도 결국에는 항상 살리는 쪽 어떻게든 다시 한 번 기회를 더 주는 쪽, 이렇게 영의 방법을 선택해 왔지요. 이런 저의 모습을 보면서 때로는 주변의 일꾼들이 이해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이처럼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으로 항상 영의 방법을 선택해 왔기에 지금의 주의 종들과 일꾼들이 나올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역시 사랑과 공의의 조화 속에 하나님의 일들을 이루어 가시되 무엇이 정녕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것이고 무엇이 정녕 아버지 하나님의 뜻인지를 잘 살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로만 인도받아 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1-19 오전 1:01:01 Posted
2017-01-13 오후 5:20:55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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