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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 창세기 강해 (2000년~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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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세기 강해(112)
설교자 당회장 이재록 목사 설교본문 창11:10- 등록일자 2003.10.31
서 론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 창 11:10-26까지는 셈으로부터 시작해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 이르기까지의 계보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홍수 후 9대째에 이르러 장차 믿음의 조상이 되는 아브람이 태어나는 과정을 정통성의 입장에서 기록하고 있지요. 셈의 여러 아들들 중에 바로 아르박삿이 셈의 가문의 순수 정통성을 이어받았던 것이고 아르박삿의 아들들 중에서는 셀라가 이어받았으며 이런 식으로 순수 정통성을 이어받은 아들들을 통해 마침내 아브람이 태어났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태어남에 있어서 이처럼 홍수 후 노아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셈의 계보를 통해 그것도 순수한 혈통을 따르는 정통성이 유지되는 가운데 태어나게 하셨던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셈의 계보가 순수히 유지될 수 있도록 철저히 지키고 보존하심으로 장차 선민으로 택함받게 될 이스라엘 민족을 예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셈뿐만 아니라 함이나 야벳의 경우에도 각각 그들만의 정통성을 가진 계보가 이어졌고 그들도 장차 민족과 나라들로 발전해 갑니다. 또한 이렇게 정통성을 이어받지 못한 사람들도 나름대로 번성하며 집단을 형성해 가지요.
본문에 나오는 계보에는 들지 못했지만 이들 이 외에도 많은 아들들과 딸들이 있어서 이들은 비록 순수 혈통을 이어가지는 못했어도 인간 경작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중요한 구성요소들로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셈의 순수 혈통을 이어받고 나오게 될 선민 이스라엘 민족뿐만 아니라 장차 이스라엘 민족과의 관계 속에서 도구로 사용되어질 주변의 많은 민족들도 하나하나 형성되어 갔던 것이지요. 그런데 셈의 순수 혈통이 기록된 오늘 본문 안에는 한 가지 중요한 사건이 감추어져 있는데 과연 무엇일까요? .

본 론 /

1. 순수 혈통을 유지하지 못한 셈의 후예 가이난

당시 가문의 순수 혈통을 유지하며 정통성을 이어가는 것은 대부분 장자의 몫이었습니다. 하지만 장자가 그 몫을 감당하지 못했을 때는 다른 아들들 중에서 정통성을 이어간 경우들도 있지요. 본문과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대상 1:24-27과 눅 3:34-36에 보면 한 가지 차이점을 발견할 수가 있는데 대상 1:24-27에서는 "셈, 아르박삿, 셀라, 에벨, 벨렉, 르우, 스룩, 나홀, 데라, 아브람 곧 아브라함"이라 하여 본문과 계보가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지요.
그런데 눅 3:34-36에서는 "그 이상은 야곱이요 그 이상은 이삭이요 그 이상은 아브라함이요 그 이상은 데라요 그 이상은 나홀이요 그 이상은 스룩이요 그 이상은 르우요 그 이상은 벨렉이요 그 이상은 헤버요(에벨을 말합니다.) 그 이상은 살라요(셀라를 말합니다.) 그 이상은 가이난이요 그 이상은 아박삿이요(아르박삿을 말합니다.) 그 이상은 셈이요 그 이상은 노아요 그 이상은 레멕"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자세히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듯이 누가복음에서는 살라 즉 셀라와 아박삿 즉 아르박삿 사이에 가이난이라는 인물이 하나 더 들어가 있지요. 아마 이전에도 성경을 읽으시면서 이러한 차이점을 발견하셨던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분명 같은 내용을 기록해 놓았음에도 창세기나 역대상에는 없는 인물의 이름이 누가복음에만 들어가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경학자들도 여기에 대해 많은 연구를 했고 그 중에 많은 사람들이 누가복음의 기록이 잘못되었다는 주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즉 필사자들이 성경을 옮겨 기록하는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다는 말이지요. 또는 원래 가이난이라는 인물이 있기는 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나 그 이름이 계보에서 삭제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나라로 말하자면 족보에서 이름이 지워졌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가이난에 대한 진실은 무엇일까요? 먼저 저와 여러분은 성경의 모든 기록이 참이며 설령 성경 안에서 서로 기록의 차이가 있다 해도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신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과 누가복음의 기록에 차이가 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중에 하나이지요. 어떤 사람들의 주장처럼 성경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사람의 실수가 있었거나 성경의 내용이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차이나는 내용을 통해서 당시에 있었던 중요한 한 가지 사건에 대해 감추어 놓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인간 경작의 역사 속에서 앞으로 누군가 하나님과 밝히 교통하며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아 내릴 수 있는 사람을 통해 바로 이 부분에 숨겨진 비밀을 알려 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차이가 나는 부분에 대해서도 사람의 생각 속에서 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온전히 믿고 기도함으로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풀어 받을 수 있는 사람을 기다리셨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 중요한 사건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실제로 가이난이라는 인물은 있었습니다. 그는 셈의 정통성을 이어받아 순수 혈통을 이어나가도록 선택받은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가이난은 바로 이 역할을 제대로 감당해 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가이난은 심성이 유약(幼弱)한 사람이었으며 육신의 생각이 많은 사람이었지요. 하나님께서는 셈의 혈통을 이어받은 순수 계보가 유지되기를 원하셨고 그 계보를 통해 아브람이 태어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셈으로부터 아브람에 이어지는 계보가 순수하게 유지되도록 지키시고 보호하셨지요.
물론 이 땅에 구세주로 오실 예수님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과정 역시 하나님의 철저한 간섭과 섭리 속에 이루어집니다. 누구의 자손으로 태어나느냐가 왜 그리 중요한가?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곧 인간 경작의 역사가 우연이나 제멋대로 아무렇게나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시작되고 마무리되어진다는 사실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지요. 아담의 범죄 이후 이 세상은 원수 마귀 사단의 주관 하에 놓여 있기 때문에 원수 마귀 사단은 육의 사람들을 주관하여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세상을 이끌어가려 합니다. 이런 속에서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이루려면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받아 펼쳐 나갈 인물이 필요하지요.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의 뜻 가운데 쓰임받을 인물 하나 나오는 것이 아무렇게나 되어지는 것이 아니며 그만큼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준비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악으로 관영되어 가는 이 세상 속에서 그래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이어갈 순수 정통성을 가진 사람들이 필요하지요. 노아라는 한 인물이 있기까지 하나님께서는 그의 오랜 조상에서부터 주관해 가시고 하나님의 뜻이 이어가도록 하셨기에 홍수의 심판 속에서도 살아남아 인간 경작을 이어갈 노아가 나왔던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순수히 이어가기 위해서는 순수 혈통을 통한 정통성의 보존 또한 매우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편에서도 정통성을 중요시하시며 순수 혈통이 이어지도록 하셨던 것이지요. 이러한 사실을 잘 알았던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의 아내를 구할 때에 이방인들 가운데서 구한 것이 아니라 그의 신뢰하는 종을 고향으로 보내어 자신의 민족 가운데서 구하도록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셈의 순수 혈통을 이어받고 태어난 가이난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한 채 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지요.어차피 모두가 한 할아버지인 노아의 후손이며 노아의 세 아들들로부터 퍼져 나왔으니 자신들은 모두가 한 민족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굳이 누구의 후손이다를 따지며 순수 혈통을 이어나가는 것이 별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결국 가이난은 순수 혈통을 유지하지 못한 채 다른 형제의 후손들과 섞여서 하나로 융화되며 그만 정통성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는 당시의 상황에서 매우 큰 충격이었지요. 계보의 순수성을 이어가야 할 의무를 가진 장자로서 이처럼 정통성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모습은 그를 더 이상 순수 혈통을 이어갈 수 있는 자격에 머무르지 못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결국 가이난은 셈의 순수 혈통을 이어받은 정통 계보에서 빠지게 되고 맙니다. 그가 특별히 악하거나 커다란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정통성의 흐름에서 완전히 벗어난 인물이었기에 정통 계보에서 이름이 빠지고 말았던 것이지요. 창세기나 역대상에도 이러한 이유로 인해 그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것입니다.

2. 바벨탑 건축에 동참한 셈의 후예 벨렉

그런데 훗날 셈의 후예인 벨렉의 대(代)에 이르러 외형적으로는 비슷한 상황이 다시 재현됩니다. 그것은 셈과 함과 야벳의 후손들이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면서 연합하여 세운 바벨탑 사건이었지요. 바벨탑 건축을 주도했던 함의 후손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려 하는 속마음은 가린 채 표면적으로는 세 종족이 하나 되자라는 의미로 바벨탑 건축을 추진하는 것처럼 말했던 것입니다. 이때 셈의 후손들은 이전에 조상인 가이난이 정통성을 무시한 채 모두를 하나로 섞고자 했다가 계보에서 이름이 제외되는 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바벨탑 건축에 동참했습니다.
그러나 셈의 후예들이 세 종족이 하나 되기 위한 바벨탑 건축에 동참하게 된 것은 본질적으로 가이난이 가졌던 생각과는 달랐지요. 가이난은 혈통과 혈통을 섞어서 결국 하나의 민족을 만들어 보고자 했던 것이지만 바벨탑 건축에 동참했던 셈의 후예들은 단지 셈의 후예든 함의 후예든 야벳의 후예든 자신들은 모두가 한 조상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기념하려는 의미에서 바벨탑 건축에 동참했던 것입니다.
이미 바벨탑 사건에 대해 설명 드렸듯이 바벨탑 건축을 통해 자신들이 힘으로 주도하여 셈과 함과 야벳의 후손들을 하나로 묶으려는 의도를 가졌던 함의 후손과 달리 셈이나 야벳의 후손들은 단지 바벨탑을 통해 자신들이 모두 근본 하나의 뿌리였음을 잊지 말고 기념하자는 의도에서 바벨탑 건축에 동참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각각의 후손들이 바벨탑 건축에 어떠한 목적으로 동참했든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는 맞지 않는 것이었기에, 바벨탑 사건은 다시 한 번 인간 경작의 역사에 있어서 커다란 전기(轉機)가 됩니다.

3. 바벨탑 사건 이후 인간 수명의 단축

노아 홍수 이후에 이 세상은 육의 법칙에 따라 모든 것이 운행되어 가고 있었지만 바벨탑 사건 이후에는 더 온전히 육의 법칙에 지배받게 되고 말지요. 그러면서 질병들도 더 많이 생겨나게 되고 선천적인 장애나 약한 것들도 나타나게 됩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세상이 점점 악에 물들어 갈수록 죄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현상들이기도 하지만 바벨탑 사건을 계기로 그것이 더 심해지게 되었다는 말이지요. 이러한 변화를 가장 잘 나타내 주는 것이 바로 인간의 수명의 단축입니다.
본문을 살펴가다 보면 셈 이후에 수명이 조금씩 줄어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에벨의 대(代)까지는 수명이 사백 년을 훨씬 넘기고 있지요. 그런데 벨렉의 대(代)부터는 수명이 이백 년 대로 급속히 떨어집니다. 에벨만 해도 삼십사 세에 벨렉을 낳고 사백삼십 년을 더 살았지요. 즉 사백육십사 세를 산 것입니다. 홍수이전 세대였던 셈이 홍수 후에도 오백년을 더 살면서 총 육백 년을 살았던 것과 비교하면 수명이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그래도 상당히 오랜 세월을 살았다 말할 수 있지요. 하지만 벨렉부터는 이백 삼십구 세, 르우 역시 이백 삼십구 세, 스룩은 이백 삼십 세 등을 삽니다. 갑자기 평균 수명이 이백 년 넘게 줄어든 것이지요.
그런데 수명이 갑자기 줄어들게 된 벨렉이 어떤 사건과 관련하여 태어난 인물이었습니까? 창 10:25에 보면 "에벨은 두 아들을 낳고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 하였으니 그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요" 한 대로 벨렉은 바로 세상이 나뉘어질 때 즉 바벨탑 사건이 있던 때에 태어난 인물이지요. 이는 다시 말해 바벨탑 사건이 이 땅의 사람들의 언어가 혼잡케 됨으로 민족이 분열되고 나누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수명에도 큰 영향을 줄 만큼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 사건이었다는 말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진노를 샀다는 얘기도 되지요.
그러므로 바벨탑 사건 이후로 이 세상은 육의 법칙에 온전히 지배받게 되면서 여러 가지 질병이나 연약함이 생겨나게 되고 또한 사람들이 더욱 죄악으로 관영해지면서 인간의 수명 단축에까지 영향을 주게 되었던 것이지요. 생령이었던 아담의 범죄 이후 사람이 죄악으로 물들어 육으로 빠지면 빠질수록 사람들의 생명 역시 더 단축되어 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잃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아 간다면 그만큼 사람은 나이가 들더라도 오히려 강건해질 수가 있고 회춘하며 장수할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4.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탄생과 성장

본문 27절부터는 아브람이 태어나는 구체적인 배경이 나옵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아브람이 갈대아 우르에서 태어난 것을 알 수 있는데 우르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인 유브라데 강 하류 서안에 위치한 고대 수메르의 도시였습니다. 이곳 우르에서 태어나 성장한 아브람은 그곳에서 아내 사래를 맞이하였지만 사래는 잉태하지 못하므로 자녀가 없었지요. 그러던 중에 아브람의 아비 데라는 아브람과 손자 롯과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을 향해 가던 중 하란이라는 곳에 이르러 거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아브람은 어떤 배경에서 성장했을까요? 본문의 계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아브람이 태어났을 당시 셈을 비롯한 그의 조부들은 전부 생존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셈이나 에벨의 경우는 아브라함이 죽고 난 후에도 살아있었지요. 그러므로 아브람은 태어나 성장하는 동안 직접 홍수를 겪었던 셈을 비롯하여 여러 조상들로부터 가르침받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배웠고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대해서도 아브람은 조상들을 통해 배울 수가 있었지요. 이처럼 아브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며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키워 나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이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야 했을 때는 상황이 이전과는 좀 달라졌다는 것을 수 24:2-3 말씀을 통해 알 수가 있지요.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편에서 이끌어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온 땅을 두루 행하게 하고 그 씨를 번성케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고" 하셨으니 아브람의 아비 데라가 다른 신들을 섬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아브람이 태어났던 갈대아 우르는 물론이고 데라와 그 가족들이 가나안을 향해 가던 중에 거하였던 하란이라는 곳도 우상 숭배가 심히 성행했던 곳이었습니다. 그런 속에서도 꿋꿋이 순수 혈통을 지키며 하나님을 경외해 왔었으나 어느 순간 아브람의 아비 데라도 당시의 분위기에 빠져들고 말았지요. 바로 이러한 시점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본토 친척 아비의 집으로부터 홀로 독립케 하셨던 것입니다. 자칫 아브람마저 그곳의 분위기에 물들지 않도록 하시기 위함인 동시에 이제 아브람을 믿음의 조상으로 만드시기 위한 본격적인 연단을 시작하신 것이지요.
물론 그동안 아브람이 자라온 환경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분위기 속에서 하나님에 대해 배우고 깨달을 수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아브람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동안은 부모와 조상의 울타리 안에서 나름대로 하나님에 대해 배우고 깨달으며 연단을 받았다면 이제부터는 친히 하나님께서 간섭하시면서 아브람을 믿음의 조상으로 연단해 가시는 것입니다. 육의 아비를 떠나 넓은 세상 가운데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며 하나님의 손에 의해 훈련되어지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본격적인 연단의 시작과 함께 아브람에게 엄청난 축복의 말씀을 주십니다. 본문 창 12:2-3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가 장차 어떻게 될 것을 미리 말씀해 주신 것이며 바로 그 말씀을 이루시고자 연단하셨던 것이지요. 물론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바로 순종하였으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분량은 그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최고의 수준에 이르기 위해 앞으로 그가 겪어야 할 믿음과 순종의 연단에 비하면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말씀은 시작에 불과한 것이었지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앞으로 어떠한 믿음과 순종의 연단을 겪어 가게 되는지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결 론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약 시대는 행함이나 형식이 중요한 때였습니다. 행함이나 형식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순종이 표현되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처럼 행함과 형식 자체도 중요하지만 구약 시대라 해도 하나님께서 정말 원하신 것은 그 안에 담긴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순수 혈통을 유지하는 가운데 정통성을 잇게 하시고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신 것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을 원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사람들은 정작 중요한 마음에는 관심이 없고 온통 외적인 면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요. 자신들은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는 의식 속에서 선민인 자신들과 이방인들을 철저히 구분했고 자신들만을 구원받은 백성이라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생각으로 굳어 있던 당신의 유대인들을 향해 요 8:39에 보면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 하셨지요.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했던 믿음과 행함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형식이나 혈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마음에서 행하고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롬 2:28-29에도 보면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들으신 우리도 나는 이런 직분을 가졌는데… 나는 이렇게 오래 신앙생활 했는데… 나는 이렇게 열심히 행하고 있는데… 이처럼 말하기 이전에 나는 과연 어떤 마음으로 행하고 있으며 얼마나 마음에 할례하고 있는가를 먼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칭찬받을 수 있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1-19 오전 1:01:01 Posted
2008-04-09 오후 7:57:44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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