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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 창세기 강해 (2000년~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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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세기 강해(115)
설교자 당회장 이재록 목사 설교본문 창12:10- 등록일자 2003.11.28
서 론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브람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에 대해 많은 것을 듣고 보고 배워서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보고 듣고 배운 것만으로 아브람이 온전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기 위한 본격적인 연단을 허락하셨지요.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자신의 지혜와 지식에 의존하게 만들므로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전폭적으로 의지하지 못하게 하는 육신의 생각을 깨뜨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얼마든지 아브람이 아내 사래를 빼앗기지 않도록 하실 수 있으셨지만 아브람이 자신의 생각을 동원하여 자기 방법대로 행해 나가는 것을 놔두셨지요. 기근을 피하여 애굽 땅에 이르게 된 아브람은 그곳에서 혹시라도 자신에게 닥쳐올지 모르는 생명의 위협을 면해 보고자 아내 사래에게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생각을 동원한 결과 아브람은 비록 자신의 생명은 건졌을지라도 아내를 애굽의 왕 바로에게 빼앗기고 맙니다.
지난 시간에 아브람이 하나님 앞에 드렸던 고백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아브람은 분명 하나님 앞에 "그분의 이름 앞에 모든 것이 두려워 떨며 모든 것이 그분의 발 아래 있나이다" 고백했음에도 현실의 급박한 상황에 처하게 되니 육신의 생각이 동원되고 말았던 것이지요. 잠 16:3에 보면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하셨는데, 아브람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알고 믿는다 하면서도 모든 것을 하나님께만 전폭적으로 의지하지 않았다가 결국 생각지 못했던 어려움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본 론 /

1. 애굽애서 아내를 빼앗기는 연단을 받은 아브람

아브람이 비록 육신의 생각을 동원했지만 그것이 하나님 앞에 악을 행했거나 잘못을 저지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때 만약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아무 것도 두려워말고 애굽 땅으로 가라" 하셨다면 아브람은 능히 믿음으로 갈 수 있는 사람이었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으신 채 아브람이 어떻게 하는지를 지켜보셨던 것입니다. 물론 아브람의 믿음이 더 온전했다면 설령 하나님께서 앞일에 대해 말씀해 주지 않으셔도 생각을 동원하지 않고 하나님께 의뢰했겠지만 아브람이 아직은 그러한 단계까지 이른 것이 아니었지요.
전혀 낯선 애굽 땅에 들어선 아브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지시도 받지 못했고 그런 상황에서 나름대로 자기 지혜 가운데 방법을 강구하려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것도 아니었고 진리와 반대되는 어둠으로 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 해도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작은 것 하나라도 온전해야 하기에 하나님께서는 연단을 통해 그의 부족된 것을 드러나게 하신 것이고 아브람은 이 연단을 통해 자신을 발견할 수가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자신을 한 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나는 얼마나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고 있는가 말입니다. 육신의 생각이라는 것이 결국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하고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로 나가게 하는 것이지만 그 사람에게 육이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육신의 생각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울의 경우와 같이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뜻과 전혀 반대로 행함으로 사망으로 간 경우도 있는 것이고 생각을 동원했다 해도 불순종이나 악을 행한 것이 아니라 아브람처럼 다만 잠깐의 육신의 생각을 통해 아직 자신의 온전하지 못한 부분을 발견하는 변화의 계기가 되는 경우도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날 육신의 생각으로 인해 분명 하나님의 말씀이요 뜻인 줄 알면서도 결국 불순종하는 경우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자기 유익을 좇아 육신의 생각을 동원함으로 악을 행하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은지요?
아브람은 비록 아직은 온전해지기 이전이었지만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여 악을 행한다거나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 당시의 아브람의 모습과만 비교해 보아도 자신이 얼마나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고 있는지 스스로 분별이 되어질 것입니다. 잠시 욱신의 생각을 동원하여 아내를 빼앗긴 아브람은 그로 인해 번민에 싸이게 됩니다. 목숨은 건졌지만 그 마음이 어찌 편하겠으며 아내를 생각할 때 얼마나 마음에 고통을 받았겠습니까?

이러한 상황에 이르게 되자 아브람은 결국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지요.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고 자신의 지혜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지를 철저히 깨달은 아브람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의뢰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육신의 생각을 동원했다가 그것이 잘못된 것인 줄을 깨달았음에도 계속해서 육신의 생각을 동원해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이 잘못된 것인 줄 깨달았으면 한시라도 빨리 돌이키는 사람이 지혜로운 것인데 오히려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틈타므로 결국 마음까지 내어주고 마는 경우이지요.
잠 15:24에 보면 "지혜로운 자는 위로 향한 생명 길로 말미암음으로 그 아래 있는 음부를 떠나게 되느니라" 했습니다. 이 말씀처럼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혹여 자신이 가던 길이 아랫음부로 향하던 길임을 깨달았으면 그 길을 돌이켜 위로 향한 생명 길로 가는 것이 마땅하지요. 우리가 할 수만 있다면 당연히 하나님 앞에 조그마한 실수라도 하지 않아야겠지만 온전해지기 전까지는 누구나 실수할 수도 있으며 문제는 그 다음의 태도입니다.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신속히 돌이키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채 계속해서 생각을 동원하는 사람과는 전혀 다른 결말을 얻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즉시로 자신의 부족됨을 깨달았고 모든 문제의 해결자가 되시는 하나님 앞에 나왔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이러한 아브람의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고전 10:13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는 말씀처럼 아브람에게도 감당할 만한 시험을 주셨고 그가 자신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 앞에 의뢰했을 때 피할 길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간섭하심으로 사람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해 나가셨던 것이지요.

2.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며 측복의 길로 인도하신 하나님

본문 17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뿐만 아니라 그의 자손들과 그 집에 속한 자들에게 질병이 내림으로 모두가 고통을 겪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바로는 자신과 자신의 집에 왜 이러한 재앙이 내리게 되었는지를 궁구하게 되지요. 그리고 바로 자신이 취하려 했던 여인인 사래로 인한 것임을 깨닫고 아브람을 불러 아내 사래를 돌려 주고 그 모든 소유도 보내 주었지요.
그리하여 16절에 기록된 대로 바로가 사래를 취하려고 대신 아브람을 후대하여 그에게 주었던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약대까지 모든 소유를 가지고 애굽에서 나오게 된 것입니다. 아브람이 자신의 지혜로 풀려 했을 때는 오히려 문제가 꼬이고 얽혀서 사람으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상황이었으나 하나님께서 친히 간섭하여 손을 대시니 순간에 문제가 해결되어지고 애굽에 들어갈 때보다도 더 많은 소유를 얻어 애굽에서 나올 수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시 40:1-2에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께서는 즉시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나와 전적으로 의뢰하여 간구했던 아브람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려 주신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처럼 사람의 방법과 지혜로 풀 수 없는 일들을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여 형통케 인도해 가시는 경우들이 많이 나오지요.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이 그러했고 하만의 궤계에서 동족을 구한 모르드개가 그러했으며 요셉 또한 그러했습니다. 그들이 그때 만약 사람의 지혜와 방법을 동원했다면 결코 헤어나올 수 없는 수렁과 구덩이에 빠졌겠지만 그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의 방법에 따랐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건지시고 오히려 더 존귀한 자리에 높이셨던 것이지요.

아브람도 순간 생각을 동원하여 생각지 못한 어려움에 빠졌었지만 이내 돌이켜 하나님을 의지하니 하나님께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심으로 결과적으로는 더 축복된 길로 인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연단을 통해 아브람은 비로소 "모든 것이 그분의 발 앞에 있나이다" 했던 고백이 정녕히 참이요 진실임을 깨닫게 되었지요. 그러니 이러한 연단을 통과하며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쌓아 온 아브람은 훗날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도 조금의 생각조차 동원하지 않고 오직 아멘만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람이 하루 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처럼 단계 단계 믿음의 연단을 통해 생각을 깨트리며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해 느끼고 깨달아 가면서 결국에는 온전한 믿음과 순종의 사람으로 나와질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여러분도 하루아침에 믿음이 쑥쑥 자라면 좋겠지만 믿음이란 자신이 원한다고 해서 단번에 자랄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연단을 통해 자신의 부족된 것을 깨닫고 변화되는 만큼 하나님에 대해 깨달을 수 있는 것이고 이처럼 하나님에 대해 깨달을 때라야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가 쌓여지면서 위로부터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이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과 신뢰 관계를 쌓아 갈 때 하루 아침에 신뢰 관계가 쌓여지는 것이 아니지요. 또 단지 상대에 대해 많이 안다고 해서 신뢰 관계가 쌓여지는 것도 아닙니다. 상대를 친히 겪어 보면서 그 사람의 마음과 진실함에 대해 하나하나 느끼고 깨달아 나갈 때라야 상대에 대한 신뢰도 쌓여지는 것이지요. 하나님과의 관계도 이와 같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연단을 받는 중에는 어디 한 곳 기댈 곳 없이 홀로인 것 같고 때로는 앞이 막막해 보일 때도 있지만 연단을 잘 받고 나면 그의 신앙이 이전과는 달리 훌쩍 성장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연단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연단을 통과해 나가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물론 일부러 연단을 자초할 필요야 없지만 연단이 왔을 때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려다 보면 신앙의 성장이 그만큼 더딜 수밖에 없지요. 또한 똑같은 연단을 계속해서 받는 것 역시 신앙의 성장을 더디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연단을 받았을 때 그 원인이 무엇인지 깨달아 돌이켜 변화됨으로 똑같은 연단을 다시 겪는 어리석음을 범치 않아야 하지요.

3. 두 번째 아내를 빼앗기는 유사한 사건과의 차이점

그런데 아브람의 경우는 훗날 본문에 나오는 사건과 매우 유사한 사건을 다시 한 번 겪게 됩니다. 창 20장에 나오는 사건으로서 이번에는 아브라함이 그랄에 우거할 때 그곳의 왕 아비멜렉에게 또다시 아내를 빼앗기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지요. 이때도 원인을 보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건과 같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내를 "내 누이라" 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랄 왕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취하려 했던 것이구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창 20장에서는 이미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열국의 아비라는 뜻으로 그 이름을 아브라함이라고 고쳐 주신 후였습니다. 더욱이 본격적인 연단을 막 받아 나가기 시작한 초창기 때도 아니고 이미 연단이 시작된 지 24년이 지나 온전한 믿음에 그만큼 가까이 이른 후였지요.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이전에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여 겪었던 것과 똑같은 연단을 다시 한 번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겉으로 보기에는 동일해 보이는 두 가지 사건이 영적으로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아브라함이 똑같은 실수를 두 번이나 했다고 하지만 어찌 아브라함과 같은 인물이 하나님 앞에 똑같은 실수를 두 번이나 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건은 아브람이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여 자초한 연단이라면 창 20장에 나오는 사건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 가운데 허락된 연단으로서 이 연단은 하나님께서 목적한 바가 있으셔서 아브라함을 그처럼 주관해 가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아브라함이 또다시 예전처럼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여 아내를 누이라 말함으로 아내를 빼앗기게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사건을 통해 아브라함을 널리 알리고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고자 허락하신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는 사건이었다는 말이지요.
지금 창 20장 전체의 내용을 다 살펴볼 수는 없지만 이때도 하나님께서 친히 간섭하심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셨습니다. 아비멜렉의 꿈에 친히 나타나 그가 취하려했던 여인이 누구이며 아브라함이 누구인지를 말씀해 주시지요. 창 20:7에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 줄 알지니라" 이처럼 두려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본문의 경우처럼 아브람이 하나님께 간구하여 하나님께서 간섭해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먼저 꿈을 통해 역사하신 것이지요.

그러므로 창 20장의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아브라함이 오늘 본문에서처럼 번민하거나 괴로워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 하나님께서 주관해 가고 계시다는 사실을 아브라함도 느끼고 있었기에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 채 하나님의 인도하심만을 따라갔지요. 그리고 때가 이르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순종함으로 문제를 푸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바로 창 20:17-18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생산케 하셨으니 여호와께서 이왕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연고로 아비멜렉의 집 모든 태를 닫히셨음이더라" 말씀하지요. 이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취하려 했던 연고로 그 집의 모든 태를 닫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아비멜렉에게 아브라함을 보내어 그들을 위해 기도하게 하심으로 다시 그 집의 태를 열어 주셨지요.
이는 바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아비멜렉의 집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해결사와 같은 역할을 하게 하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아브라함이 어떤 사람인가 알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된 섭리였음을 알게 해 줍니다. 집의 모든 태가 닫힘으로 고통받던 아비멜렉에게 아브라함이 가서 기도해 주었을 때 태가 열리는 치료의 역사가 나타났으니 이를 본 아비멜렉과 그 주변의 사람들에게 아브라함이 어떠한 사람으로 보였겠습니까?
더욱이 아비멜렉의 꿈에까지 하나님께서 친히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이 선지자임을 말씀하셨고 아브라함의 기도를 즉시로 응답해 주셨으니 그들에게 있어서 이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보장받는 사람이요 감히 자신들이 손대지 못할 대단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그들의 마음에 깊이 심겨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아브라함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분에 대해서도 그들은 두려워 떨 수밖에 없게 되었고 하나님의 능력 앞에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었지요.

이처럼 겉으로 보기에는 동일한 사건처럼 보이는 두 사건이 영적으로는 매우 큰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영적인 분별력 없이 본다면 같은 실수를 범한 것처럼 보이는 두 사건이지만 하나하나 과정과 결말을 살펴보면 오늘 본문의 사건과 창 20장의 사건은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보장하심과 사랑하심이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일어난 사건임을 알 수 있지요.
이러한 사실을 잘 알아서 설령 겉으로 보기에는 같은 연단처럼 보여도 그 연단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은 전혀 다를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가령 똑같은 시험이 두 사람에게 왔다 해도 어떤 경우는 범죄하여 하나님과의 막힌 담으로 인해 지킴받지 못한 경우가 있는가 하면 어떤 경우는 충분히 지켜 주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큰 믿음과 성숙된 신앙으로 성장케 하시고자 지켜 주시지 않는 경우가 있지요. 그 속사정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 편에서 어떤 일을 가지고 자기 임의대로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임을 알아야 합니다. 아내 사래를 빼앗기는 큰 연단을 하나님의 섬세하신 사랑과 인도하심 속에 형통하게 통과해 나온 아브람은 이전과는 다른 더욱 성숙한 신앙의 단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다음 시간에는 계속해서 13장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결 론 /

아브람은 이 연단을 통해 그동안 듣고 배워서 알고 있던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분의 섬세하시고 자상하신 간섭을 친히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생각을 동원했다 해서 질책하고 꾸짖으신 것이 아니라 아브람이 하나님에 대해 느끼고 깨달을 수 있도록 그의 길을 하나하나 섬세하게 인도해 가셨지요. 여러분도 이러한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사랑이 많으시고 자상하시며 섬세하게 우리를 인도해 가시는 저와 여러분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에 여러분이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여 아버지 하나님의 뜻과 반대로 행해 나갈 때에 때로는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질책하시거나 꾸짖으실 때가 있습니다. 다만 아브람의 경우는 생각을 동원하여 악을 행했다거나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것이 아니었기에 하나님께서 굳이 책망이나 질책하실 필요가 없으셨지요. 아브람 스스로가 깨달을 수 있도록만 인도해 가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한다거나 악이 발동되어졌다면 이로 인해 하나님의 책망이나 꾸중을 들었을 때 오히려 기뻐하고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히 12:7-8에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말씀한 대로 때로는 징계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정녕 아버지를 사랑하는 자녀라면 자신이 잘못하여 징계를 받을 때에 그로 인해 서운해하거나 낙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아버지의 사랑을 느껴야 하지요.
자녀가 어떤 잘못을 했을 때 그것을 보고도 그냥 놔두는 부모가 있다면 자녀 입장에서 그것이 잠깐 동안은 편하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게 되면 자신에게 무관심한 부모에 대해 부모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나 보다 내가 이렇게 나쁜 길로 가는데도 그냥 가만히 놔두시네 하며 부모의 사랑에서 더 멀어지게 되지요. 당장은 책망받고 징계받는 것이 마음에 힘들게 느껴질 수 있으나 그것이 사랑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범사에 여러분을 간섭하시며 인도해 가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심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1-19 오전 1:01:01 Posted
2008-04-09 오후 7:57:31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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