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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 창세기 강해 (2000년~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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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세기 강해(117)
설교자 당회장 이재록 목사 설교본문 창13:5-13 등록일자 2003.12.12
서 론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의 마음을 그릇에 비유하면 큰 그릇과 작은 그릇이 있듯이 사람의 마음도 큰 마음과 작은 마음이 있습니다. 또한 그릇마다 재질이 다른 것처럼 각 사람의 마음을 구성하는 요소도 다르고, 그릇의 깨끗함이 다른 것처럼 각 사람의 마음도 깨끗한 정도가 다르지요. 그렇다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사람을 택하시기 위해 보시는 그릇의 첫 번째 기준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릇의 깨끗함입니다.
딤후 2:20-21에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말씀하지요. 그릇의 재질도 중요하고 크기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깨끗한 그릇이 되어야 귀히 쓰이는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큰 일을 위해 그릇을 택하실 때 깨끗함과 더불어 그릇의 크기 또한 매우 중요하게 보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출애굽한 200만에 가까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갈 지도자로 세워진 모세는 그릇의 크기가 매우 큰 사람이었지요. 물론 처음부터 큰 것은 아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릇됨을 보시고 불러 연단하시어 큰 그릇으로 만들어 가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민 12:3에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말씀할 정도로 온유함이 승했던 것을 볼 수 있지요.
온유함은 그릇의 크기와 직접 관계되는 성령의 열매이므로 덕과 사랑을 겸비하여 영적인 온유함이 임했을 때에 많은 사람을 품을 수 있는 큰 그릇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이처럼 온유함이 승했던 모세이기에 200만에 이르는 백성들을 이끌고 40년이라는 광야 생활을 하는 동안 수많은 일들을 겪으면서도 백성들을 품고 인내하며 자신의 사명을 감당할 수가 있었습니다.

본 론 /

1. 큰 그릇 아브라함과 작은 그릇 롯

아브람 역시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지기 위해서는 그만큼 큰 그릇을 가져야 했지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건을 통해서도 아브람이 얼마나 큰 그릇을 가진 사람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반면에 롯은 삼촌 아브람과 비교할 때에 너무나 작은 그릇을 가진 사람임이 드러나고 있지요.
하란을 떠날 때부터 함께했던 아브람과 롯은 소유가 불어나면서 그들이 거하던 땅에 더 이상 함께 동거할 수 없는 상황이 됩니다. 많은 수의 가축이 함께 거하기에는 물도 부족하고 목초지도 부족했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아브람과 롯의 목자들이 서로 다투는 상황에까지 이르지요. 이때 아브람은 질서상 얼마든지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우선권을 포기하고 먼저 조카 롯에게 선택권을 줍니다. 본문 9절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했던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롯이 받은 축복은 아브람과 함께함으로써 얻은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육의 질서로 보아도 연소자요 조카인 롯의 입장에서는, 만일 자신의 가축의 목자와 삼촌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가 다툰 것을 알았다면 당연히 어찌해야 했겠습니까? 자신의 가축의 목자들을 엄히 단속하여 감히 삼촌의 귀에 좋지 않은 소리가 들어가지 않도록 처신을 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롯은 작은 그릇이었기에 삼촌을 먼저 생각하고 삼촌의 소유까지 생각할 만큼 마음을 넓히지 못했지요. 자기 소유에만 관심이 있었고 자신의 입장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그러했기에 삼촌 아브람이 먼저 선택권을 주자 즉시로 자기 보기에 더 좋은 기름진 땅을 택하여 떠나는 것을 볼 수가 있지요. 본문 10-11절에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롯의 입장이 되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과연 이런 상황에서 선택권이 주어졌을 때 롯과 같은 모습이었을까? 아니면 삼촌에게 양보하는 모습이었을까? 하고 말입니다. 물론 롯이 양보를 했다 해도 아브람은 또다시 롯에게 먼저 선택하도록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아브람이 몇 차례 계속해서 롯에게 먼저 선택하도록 권했다 해도 롯은 어찌해야 했겠습니까?
정녕 도리를 알고 은혜를 안다면 자신이 척박한 땅을 먼저 택해서라도 삼촌 아브람에게 좋은 땅을 돌렸어야 했겠지요. 몇 번 거절해도 아브람이 계속해서 권한다하여 내가 이 정도했으면 내 할 도리를 다 했겠지하며 얼른 자기 보기에 좋은 땅을 택한다면 이는 정녕 마음 중심에서 은혜를 안다 할 수 없고 자신의 도리를 다 했다 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단 번에 좋은 것을 택하는 사람보다야 났겠지만 정녕 삼촌 아브람에 대한 은혜를 알고 감사한다면 설령 먼저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해도 결코 자기 보기에 좋은 땅을 택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롯은 거절이나 양보 한 번 없이 자기 보기에 좋은 땅을 택하여 떠나갔으니 그릇됨이 어떠한지가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아브람의 마음은 어떠했습니까? 롯이 이처럼 자기 보기에 더 좋아 보이는 땅을 택하여 떠났다 해서 그 마음에 서운하거나 감정을 품은 것이 아니라 롯에 대해 아무런 걸림이 없었지요. 그것은 그의 마음에 평안이 가득하므로 주고 또 줄 수 있는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중심에서 상대를 섬기므로 소자에게도 자신이 누릴 권세를 내 줄 수 있었고 오히려 더 달라해도 기꺼이 줄 수 있는 관대함이 있었던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온유함과 함께 그릇의 크기를 결정하는데 직접 관련되는 관용의 마음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관용은 마음이 진리로 변화되는 만큼 임하는 넉넉하고 여유로운 마음에서 나오는 것으로서 진리가 마음에 풍성하게 임하면서 동시에 진리의 자유함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것을 다 내어 줄 수 있는 마음을 말하지요. 이러한 관용의 마음이 임하게 되면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을 이루기 원하고 덕을 세우기 힘쓰므로 결국 많은 사람을 품는 큰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2. 그릇의 크기를 결정하는 온유함과 관용의 마음

그렇다면 여러분의 마음은 아브람과 비교할 때 과연 관용의 마음이 얼마나 임해 있으신지요? 예를 들어 여러분이 열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 그것을 달라고 청하는 사람에게 과연 몇까지 내어 줄 수가 있겠습니까? 겨우 하나나 둘만 줄 분도 있겠고, 다섯 개 정도까지는 줄 분도 있을 것이며 정말 마음을 넓혀서 아홉 개까지 줄 수 있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마음 중심에서 상대가 열을 달라하면 열을 다 줄 수 있는 마음이었지요.
이제 2004년도를 맞이하며 각 조직의 머리들이 새롭게 선출되었고 교구나 선교회를 담당하는 주의 종들도 새롭게 임명되거나 자리를 바꾸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전에 머리였던 분들 중에 내년에는 잠시 사명을 놓게 된 분도 있고 수년을 담당했던 곳을 다른 분에게 내어주어야 하는 경우도 있었지요. 그렇다면 이때 여러분의 마음을 한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다고 꼭 그런 분들만 점검해 보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모두가 내가 과연 그 입장이라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하고 자신의 마음을 점검해 보십시오.
내가 전에는 사명을 열 개 가지고 있었는데 그 중에 한 개를 넘겨주게 되었을 때, 아니면 두 개를 넘겨주게 되었을 때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또는 다섯 개를 넘겨주게 되었다면, 만약 열 개를 다 넘겨주게 되었다면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하시겠는지요? 이런 각각의 상황에서 여러분의 마음이 어떠할지를 점검해 보신다면 내 마음의 그릇은 어느 정도구나 하는 것을 스스로가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어떤 사람이 맡고 있던 사명이나 자리를 다른 사람이 대신하게 되었을 때에 그 사람의 다음 행동이 어떤가를 보아도 그의 그릇됨이 분별되어지지요. 예를 들어 사명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을 때에 저 일은 더 이상 내 일이 아니니 나는 아무런 상관할 바가 아니다하며 이후로 전혀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 사람과 내가 비록 저 사명을 놓았지만 새로 맡은 분이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내가 도울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해야겠다 하는 사람과는 그 그릇의 차이가 하늘과 땅이지요. 그런데 만약 다른 사람에게 사명을 넘겨주었을 때 혹여라도 흥, 얼마나 잘하나 보자 하는 이러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비진리인가를 깨달아 이제라도 정녕히 하나님 앞에 통회자복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로 사명을 맡은 분의 입장에서는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요? 새로 사명을 맡은 분의 편에서도 자신의 마음됨과 그릇됨을 점검해 볼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새롭게 사명을 맡았을 때 이제는 내가 머리가 되었으니하는 마음에서 혹여 전에 머리되었던 분을 섬겨주지 못한다면 이 역시 자신의 그릇됨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지요. 또한 사명에 대해 선택권이 주어졌을 때 눈에 보기에 좋은 것만을 택하여 가지려 한다면 이 역시 작은 그릇됨이 드러나는 것이구요.
큰 그릇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힘을 모아 더 잘해나갈 수 있도록 전에 머리되셨던 분에 대해서도 더 섬기는 마음으로 행해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눈에 보기에 좋아 보이는 사명만을 맡으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이 맡기 꺼리는 사명이 있다면 그것을 섬기는 마음으로 먼저 선택할 수가 있어야 하지요. 바로 이러한 상황들을 맞이했을 때 여러분의 마음이 어떠할까를 점검해 보심으로 여러분 스스로가 내 마음에는 관용이 얼마나 임해있는가? 나는 얼마나 큰 그릇을 가졌는가?를 발견해 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많은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한다하는 것을 머리로는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현실에 직면하게 되면 각 사람의 그릇됨이 여실히 드러나게 되지요. 아브람과 같이 행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롯과 같이 행할 사람도 많은 것입니다. 정녕히 아브람과 같이 행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을 수밖에 없고 축복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내 것, 내 소유만을 생각하는 작은 그릇의 마음이라면 이런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도 인색할 수밖에 없고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축복받기도 힘들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 축복도 결국은 그릇의 크기만큼 주어지게 되지요.

3. 그릇의 크기와 관련된 양순의 마음

그릇의 크기와 관련된 또 한 가지 덕목으로는 양순이 있습니다. 양순이란 마음 안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선과 향으로 인해 상대를 편안하게 해주고 상대의 마음을 요동치 않게 해주며 진리로 다스려 나갈 수 있는 마음이지요.
이러한 양순의 마음이 임하게 되면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모든 것에 침착하며 베풀 수 있는 모습이 나와지는 것입니다. 또한 양순의 마음은 자족하는 마음이며 이것도 가하고 저것도 가한 마음이지요. 그렇다 해서 아무 때나 이것도 가하고 저것도 가한 것이 아니라 능히 성령으로 분별하여 나갈 길을 밝히 조명받을 수 있는 마음입니다.
고전 8:13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고백 안에 이러한 양순의 마음이 잘 담겨있지요.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고기를 먹거나 먹지 않거나 자의대로 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연약한 영혼들을 위해서 필요하다면 평생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멍에를 스스로 져야 한다 해도 상관없는 양순한 마음이었지요.
또한 그는 주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렸을 뿐 아니라 복음 전파에 유익이 된다면 주께서 허락하신 권리까지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고전 9:18-19에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했지요.
이는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권위나 권세를 주장하지 않고 상대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순간 순간 하나님 앞에서 더 좋은 것을 택하는 양순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내가 이렇게 행동하면 다른 사람에게는 어떻게 영향을 주게 될까? 이런 것까지라도 살피는 마음이지요. 여러분도 이러한 양순의 마음을 이루어 항상 상대의 입장을 먼저 생각해 주고 상대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해줌으로 많은 사람을 포용하고 품을 수 있는 큰 그릇들로 만들어 가시기를 부탁드립니다.

4. 끝까지 화평을 좇은 아브라함

큰 그릇을 가진 사람과 작은 그릇을 가진 사람과는 자신의 공(功)을 드러내고자 하느냐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돌리고자 하느냐에서도 그 차이가 나게 됩니다. 롯은 분명 삼촌 아브람과 함께함으로 인해 축복을 받은 것인데도 이를 깨닫지도 못하고 감사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아브람은 롯이 자신으로 인해 축복받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해서 서운해 하지 않았고 롯에게 그것을 드러내려 하지도 않았지요. "네가 받은 축복은 네가 나와 함께함으로 인해 받은 것이다." 하고 한마디쯤 해줄 수도 있겠으나 아브람은 그러지를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큰 그릇을 가진 사람의 모습이지요.
아브람은 자신의 공은 드러내지 않은 채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만 돌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지 않으시고 함께하지 않으셨다면 어찌 아브람이나 롯이 축복을 받았겠습니까? 그러므로 아브람은 롯이 자신의 은혜를 알아주지 않는다 해서 서운해 하거나 감정을 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모든 감사와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주 안에서 어떤 일을 이루었을 때 그것이 마치 자신이 잘해서 이룬 것처럼 말합니다. 자신의 공이 인정받기를 원하고 다른 사람이 자신을 알아주기 원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작은 그릇을 가진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처럼 작은 그릇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신이 한 일을 알아주지 않으면 그로 인해 서운해 하거나 마음이 상하게 됩니다. 반대로 자신이 져야 할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려고 하지요. 이는 결국 사람에게 보이려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사람에게 보이려 해서는 안됩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고 알아주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 6:1-2에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말씀하고 있지요.
아브람은 자신의 가축의 목자와 조카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었을 때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려 하지 않았으며 그것을 마치 자신의 책임인양 마음 아파하는 선하고 큰 그릇을 가졌습니다. 그러했기에 먼저 롯에게 손을 내밀어 화평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지요. 상대를 이해해주고 보살펴주며 화평을 좇는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롯은 자신의 잘못은 깨닫지 못한 채 결국 자기 유익을 좇아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지요. 그것도 눈에 보기에 좋은 것을 택합니다. 즉 육으로 택했음을 말해주지요. 정녕히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이때 어찌해야할지를 하나님께 여쭈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나가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욕심에 눈이 가리워지니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나갈 수가 없지요. 이처럼 자기가 앞서고 자기 욕심이 앞서게 되면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고 성령의 음성을 들려주셔도 들으려하지 않습니다. 롯도 이러했기에 육을 취해나간 것이고 이렇게 육을 좇아 나갔을 때 결과는 참으로 비참한 것을 볼 수 있지요.
앞으로 14장 이하에서 살펴보겠지만 자기 보기에 좋은 땅을 택한 롯은 그만 전쟁에 휘말려 롯 자신이 적에게 사로잡혀갔을 뿐 아니라 모든 소유까지도 빼앗기는 재앙을 만납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내린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자신의 모든 소유와 아내까지도 잃는 비참한 결과를 맞게 되지요. 반면에 롯에게 좋은 땅을 내어주고 가나안 땅에 거하게 된 아브람은 그 이후로도 형통함 속에 축복을 받아 갑니다.
아브람은 조카 롯이 포로로 잡혀 갔을 때 자신의 수하에서 길리고 연습한 자들을 데리고 나가 네 왕이 연합한 적의 군대를 파(破)하고 조카와 그의 소유까지 찾아올 만큼 힘과 부와 권세를 두루 갖추고 있었지요. 자기 유익을 좇아갔던 롯과 선을 좇았던 아브람의 결과가 이처럼 차이가 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아브람이 조카 롯에게 양보하고 선(善)을 택했을 때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과 조카 롯을 위험에서 구하는 내용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결 론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흔히 두 가지 선택의 갈림길에서 어떤 길을 택할 것인가 결정해야 하는 상황들을 종종 접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어떤 길을 택할 것인가는 결국 마음에 임한 진리에 의해 결정이 됩니다. 자신의 유익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당연히 자기 보기에 좋은 것을 택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변의 모든 사람까지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설령 자신에게 불이익이 오더라도 모든 사람과 함께 화평을 이룰 수 있는 길을 택하지요. 설령 내게 불이익이 온다 해도 상대의 유익을 먼저 생각해 주는 것이구요.
이는 사업을 할 때나 사명을 감당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보기에 좋은 길을 택하는 것과 기도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아버지의 뜻을 좇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얻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내 보기에 좋은 길이 당장에는 유익이 되는 것같다 해도 공의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결국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것이지요. 선을 심은 사람에게는 선으로 갚아주시지만 악을 심은 사람은 자기 악으로 인해 어려움에 봉착하고 마는 것입니다.
잠 4:18-19에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는 말씀처럼, 의인은 하나님께서 붙드시고 보장하시므로 만사형통의 길을 가게 되지만 악인은 어둠을 헤매며 고통을 당하면서도 왜 그런지조차 깨닫지를 못하게 되지요.

우리는 아브람과 롯의 모습을 통해 큰 그릇과 작은 그릇의 차이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큰 그릇을 가진 아브람은 범사에 선을 좇았기에 그의 길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보장하셨지만 작은 그릇을 가진 롯은 자기 유익만을 좇았기에 하나님의 지키심도 보장하심도 받을 수가 없었지요. 그러니 그릇의 크기가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과 보장을 받는 축복의 크기가 된다는 사실을 깨우칠 수 있습니다. 그릇의 크기가 클 때는 하나님께서 부어주실 축복도 많지만 그릇의 크기가 작을 때는 하나님 편에서 주고 싶으셔도 받을 만한 그릇이 준비되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아브람과 같이 넓고 큰 그릇을 만들어가시되 잠 3:6에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는 말씀처럼 범사를 하나님께 맡기고 인도받아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친히 여러분의 길을 지도해 가심으로 준비된 큰 그릇 안에 날마다 넘치는 축복으로 가득 채워 나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1-19 오전 1:01:01 Posted
2008-04-09 오후 7:57:22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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