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예배

설교 > 창세기 강해 (2000년~2006년)

목록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다음요즘 메일보내기 바로가기복사
제목 창세기 강해(118)
설교자 당회장 이재록 목사 설교본문 창13:10-18 등록일자 2003.12.19
서 론 /

창세기 강해를 통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과연 어떤 마음을 가졌기에 하나님의 사랑받고 보장받는 위대한 인물로 나와졌는가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아브람과 롯의 모습을 통해 큰 그릇과 작은 그릇의 차이점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아브람은 온유함과 함께 관용과 양순의 마음으로 인해 모든 것을 품을 수 있고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는 큰 그릇이었다 했지요.
내 소유, 내 입장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 주변의 모든 사람과 나로 인해 주변에 끼치게 될 영향까지도 생각하는 넓고 큰 그릇을 가진 아브람이었기에 그는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면서까지 조카 롯에게 먼저 좋은 것을 택할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조카 롯에게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는 감동적인 선(善)의 고백이 나왔던 것이지요.
여러분도 이런 상황에서 아브람과 같은 고백이 정녕 마음 중심에서 나오실 수 있겠는지요? 마 5:39-41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하신 말씀처럼 여러분도 중심에서 기쁨으로 이같이 행하시겠는지요?
여러분의 삶 속에서 나는 과연 어떠한 모습인가? 돌아보신다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올 것입니다. 여러분이 너무나 가지고 싶은 것이 있는데도 여러분은 애써 참으며 그것을 놓으려 할 때에 다른 사람이 와서 그것을 차지했다고 합시다. 이때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내가 얼마든지 먼저 취할 수 있는 것을 다른 사람이 취했다 해도 전혀 서운하거나 감정을 품지 않고 함께 기뻐해 줄 수가 있으신지요? 또 이렇게 하면 내가 손해 볼 것이 뻔한데 상대는 나에게 그것을 요구합니다. 상대가 자기편에 유리한 쪽으로 끌어가려는 것이지요. 이때 여러분은 뻔히 손해 보는 것인 줄 알면서도 상대의 유익을 먼저 구해줄 수 있으십니까?
둘 중에 하나를 먼저 택할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여러분은 주저함 없이 좋은 것을 먼저 택하겠는지요? 아니면 다른 사람의 입장까지도 생각하시겠는지요?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이러한 상황들과 선택의 순간들은 자주 찾아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때 여러분은 "나는 아브람과 같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담대히 고백하실 수가 있으십니까? 마음에는 이루지 않고 머리에 지식으로만 안다고 해서 진리로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막상 자신의 유익이 걸린 현실을 대하게 되면 마음에 있는 것이 나오기 때문에 정녕 마음이 영으로 일구어졌을 때만이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진리를 행할 수 있는 것이지요. 설령 마음은 아닌데 행함으로만 한다고 해도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받으시는 것도 아닌 것이구요.
그러므로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이구나 하고 머리로 아는 것으로 자신을 평가할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삶 속에서 실제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지 자신의 모습을 겸손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부족한 부분을 발견하고 변화되심으로 모두가 아브라함과 같이 큰 그릇들로 나와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 론 /

1. 육을 좇아 아브람을 떠난 롯의 결국

우리가 본문을 통해 또 한 가지 깨우쳐야 할 점은 무엇을 선택하든지 육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롯은 자신에게 먼저 선택권이 주어지자 육을 좇아 나갔던 것을 볼 수 있지요. 이때 롯이 만약 하나님 앞에 기도하여 인도함을 받았다면 설령 그 마음에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연단을 받겠지만 재앙만은 피할 수가 있었겠지요. 그러나 롯은 자신의 욕심대로 육을 좇아 취해 나갔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지킴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잠 5:3-6을 보면 자기 보기에 좋을 대로 육을 좇아 간 사람의 결과에 대해 나와 있지요. "대저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 입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나중은 쑥 같이 쓰고 두 날 가진 칼같이 날카로우며 그 발은 사지로 내려가며 그 걸음은 음부로 나아가나니 그는 생명의 평탄한 길을 찾지 못하며 자기 길이 든든치 못하여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느니라" 바로 롯도 당장 자기 보기에 좋은 쪽을 택한 것이 마치 꿀같이 달고 기름보다 미끄러운 음녀의 입술을 좇은 것이 되었기에 훗날 엄청난 재앙으로까지 이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선택을 할 때에 항상 영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고 기도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어떤 일을 이룰 때도 그렇고 세상에서 사업이나 일을 이룰 때도 마찬가지이지요. 그렇지 않고 육으로 선택하여 결정해 나갔을 때는 연단이 따르게 되고 고통을 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본문 10절에서 매우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롯이 선택하고자 했던 요단 들 쪽을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 같았다 했지요. 그렇다면 롯이 선택한 풍요롭고 보기 좋은 땅을 왜 애굽 땅에 비교한 것일까요? 오늘날의 애굽 즉 이집트를 생각하면 별로 대단할 것이 없어 보이는 땅인데 아브라함 당시에 애굽 땅이 얼마나 풍요로운 땅이었는지를 알 수가 있지요.
전에 창세기 강해에서 말씀드렸듯이 아담이 범죄하기 이전에 에덴 동산에 살 때도 아담은 우리가 사는 이 땅을 자주 찾곤 했는데 그때 가장 즐겨 찾던 곳이 애굽 땅이었다 했습니다. 애굽 땅은 에덴 동산에 살던 아담이 볼 때에도 이국적인 정취와 함께 아름다운 환경으로 인해 그의 마음을 끌 만큼 매력적인 땅이었지요.
바로 롯이 선택하고자 했던 땅이 당시로서는 물이 넉넉하고 기름지며 풍족한 땅이었기에 지금 그곳을 애굽 땅에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애굽 땅이 오늘날과 같이 사막화되기 전에는 얼마나 아름다운 곳이었고 더욱이 오랜 옛날에는 얼마나 물도 넉넉하며 기름진 땅이었는지를 잘 말해주는 것이지요. 애굽 땅이 예전에는 아담으로부터 가장 사랑받을 만큼 아름답고 풍요로운 땅이었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증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풍요롭고 보기 좋은 요단 들을 택하여 아브람을 떠난 롯은 마침내 소돔 땅까지 이르게 됩니다.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여 자기 보기에 좋은 것을 택해 나간 롯은 장차 닥쳐올 재앙을 깨닫지 못한 채 점점 더 깊은 고통의 수렁 속으로 빠지고 말았지요.

본문 13절에 보면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말씀할 정도로 소돔 땅은 죄로 물든 곳이었음에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하는 롯은 그런 곳을 향해 더 깊이 들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앞으로 창 18장, 19장을 보면 소돔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악을 행하고 있었는지가 잘 나오는데 유 1:7에는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시 소돔은 영적인 간음과 우상 숭배에 젖어 있었고 그 영향으로 인해 향락적이고 퇴폐적인 분위기 속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큰 악들을 행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바벨탑 사건 이후 민족과 언어가 나누어지면서 뿔뿔이 흩어지게 된 사람들은 나름대로 집단을 이루어 생활해 가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는 하나님의 선택하심 속에서 계보를 이어가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정통성을 유지하는 곳도 있었지만 반대로 하나님의 존재조차 잊고 정욕을 좇아 우상숭배와 향락에 빠져 사는 곳도 있었는데 대표적인 곳이 바로 소돔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롯은 육을 좇다 보니 이러한 소돔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지요.

반면에 아브람은 어떠했습니까? 조카 롯에 대해 끝까지 선을 행한 아브람은 롯이 그를 떠난 후에 오히려 더 큰 축복 가운데로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지요. 롯이 아브람을 떠나니 롯은 점점 더 어려움 가운데로 빠져들어 갔지만 아브람은 점점 더 큰 축복을 받아나갔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역으로 생각해 볼 때 아브람은 그 동안 롯과 함께 있음으로 인해 더 크게 받을 수 있는 축복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지요.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예를 들어 한 가정 안에 하나님 보시기에 사랑스러운 사람이 있음에도 그 가정 전체로 보면 축복받을 그릇이 되지 않기 때문에 더 큰 축복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사랑받는 사람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축복을 주시지만 가정 전체에 축복을 주실 수는 없다는 말이지요. 이런 경우 오히려 개인이 독립을 하게 되면 그 후에 하나님께서 개인적으로 더 마음껏 축복 주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는 다른 모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 합하지 않는 사람과 어떤 일을 함께 하는 경우 그로 인해 내가 받을 축복도 막히는 경우가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고후 6:14에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아브람의 경우는 비록 함께하는 롯이 하나님을 안다고는 했지만 롯에게는 하나님 앞에 합하지 못한 분야가 있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비로소 아브람에게도 더 큰 축복으로 역사해 가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롯이 보통사람보다 못한 사람은 아니었지요. 그래도 삼촌 아브람 곁에서 보고 배운 롯이었기에 벧후 2:8에 보면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말씀한 대로 나름대로 의 가운데 살고자 했던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아브람과 비교하면 너무나 부족했고 결국 육을 좇아 떠나고 말았던 것이지요.

2. 아브람에게 주신 축복

14-15절을 보면 롯과 헤어진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의 말씀이 나옵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말씀하신 것이지요. 이 말씀 안에는 이미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장차 아브람의 후손으로 나와질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어떻게 역사해 가실지가 담겨있습니다.
아브람에 이르기까지 이어오게 하신 정통 계보를 통해 선민 이스라엘이 나와지게 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모든 민족 위에 우월하게 세우심으로 그들을 통해 모든 것에 온전하시고 뛰어나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떨쳐나가시겠다는 것이지요.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세계 만방 위에 하나님을 알리며 계획하신 인간 경작의 섭리를 이루어가시겠다는 의미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대한 계획과 섭리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서 택하신 인물이 아브람이었던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그만큼 크신 사랑과 축복을 약속해 주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에게 주신 축복의 언약이 단지 아브람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장차 나오게 될 선민 이스라엘 전체에 대한 것이기에 축복의 언약은 그만큼 크고 원대했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한 번 주신 축복의 언약은 세상 끝날까지 영원한 것이기에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때에 다시 한 번 성령의 불같은 역사를 통해 복음이 이스라엘로 회귀케 하심으로 아브람에게 주신 언약을 성취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는 말씀이 단지 육에 보이는 땅을 영원히 주시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들을 향하신 구원의 섭리까지도 포함하는 영적인 의미의 약속이기에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이루시고자 선민 이스라엘을 통해 구세주가 나게 하신 것이고 다시 한 번 성령의 역사를 통해 아버지의 섭리를 나타내주고 계시다는 말이지요.

이어지는 16절에서는 좀더 구체적인 언약의 말씀이 선포됩니다.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말씀하셨는데 처음 아브람을 부르시면서 창 12:2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하신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질지를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람으로서는 땅의 티끌을 세는 것이 불가능한 일인 것과 마찬가지로 아브람의 후손도 너무 많아져서 세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일 것이라는 의미가 바로 16절 말씀에 담겨있는 것입니다. 셀 수 있을진대라 하신 것은 만약에 셀 수 있다면이라는 의미로서 결국은 세지 못한다는 것을 강조하시는 것이지요. 그러니 이 말씀 안에는 장차 아브람을 통해 얼마나 많은 후손이 나와질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후손이란 육의 계보를 좇는 후손이 아니라 믿음으로 좇아 나오게 되는 믿음의 후손들이지요. 아브람은 장차 열국의 아비요 믿음의 조상으로서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되기 때문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믿음으로 구원받은 모든 사람은 아브람의 후손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믿음으로 구원받는 사람이 나올 때마다 믿음 안에서 조상이 되는 영광을 세상 끝날까지 받게 됩니다. 이처럼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위치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자리이며 얼마나 귀한 자리인지요.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신 언약의 말씀은 결코 작은 축복이 아니며 인간 경작의 역사 속에 단 한 번 있는 전무후무한 축복의 언약입니다. 그렇다 해서 축복의 언약이 그 당시의 아브람에게 주신 약속은 아니지요. 그가 앞으로 통과해야할 연단까지도 다 통과한 후에 아버지 하나님 앞에 온전한 자로 나와졌을 때 비로소 그를 통해 이루어질 언약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능히 앞으로의 모든 연단을 통과하여 온전한 믿음의 조상으로 서게 될 것을 아셨기에 이 말씀을 주신 것이고 아브람 역시 한 번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오직 믿음으로 굳게 잡고 나갔기에 이 언약의 말씀은 한치의 오차 없이 이루어지게 되지요.
아브람이 놀라운 언약의 말씀을 받았을 때에도 하나님 앞에 단을 쌓으므로 하나님과 사이의 언약을 확증했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아브람은 단지 입술로만 하나님께 감사한 것이 아니라 이처럼 하나님 앞에 단을 쌓으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받았다는 확증으로 하나님과의 사이에 인쳤던 것이지요.

3. 아브람의 고백

그 당시 아브람이 하나님 앞에 올렸던 고백을 잠시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버지, 모든 것에 근본이 되시고 모든 것에 온전함이 되시며
모든 것에 완전이 되시고 모든 것에 주관자가 되시는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 앞에 찬양을 올리나이다.
정녕 작고 낮은 자였으되 나를 만드시고
나를 근본에 지으시며 나를 그 마음에 품으사 온전한 것으로 이루시고
나에게 많은 것을 약속하시되 그것을 신실히 지키시는
아버지 하나님 앞에 이와 같이 크게 영광을 돌리나이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였으되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택하신바 되어
이와 같이 아버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 보이시고 그 영광을 드높이시나이다.
아버지, 감사드리나이다.
내 입술로서 아버지를 찬양하며 그 칭송과 영광이 아버지 앞에 온전히 이르리니
이 아들을 통하여서 이 낮고 낮은 한 자를 통하여서
정녕 여호와 하나님의 그 뜻을 온전히 이루심이니이다"

이 고백 안에는 자신을 택하시고 온전케 다듬으셔서 하나님의 섭리를 위한 도구로서 쓰임받게 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경외 그리고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에 대한 중심에서의 신뢰가 담겨 있지요. 여러분의 삶 속에서도 날마다 이러한 찬양과 고백이 넘쳐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처럼 축복의 길로 들어서는 아브람과는 달리 육을 좇아 나간 롯이 그로 인해 겪게 되는 고통의 과정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이어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결 론 /

우리가 삶 속에서 순간 순간 아버지 하나님 앞에 감사할 조건들은 너무나 많습니다. 또한 꼭 개인에게 직접 주시지 않았다 해도 축복의 언약은 단을 통해 늘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 믿고 나가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어떤 축복의 말씀을 주셨을 때 늘 저의 말씀으로 믿고 받았지요. 막상 현실에는 보여지는 것이 하나도 없을 때도 신실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변함없는 마음으로 끝까지 행해나갔을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말씀하신 바를 이루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눈에 보여주셔야 믿겠다." 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손바닥만한 구름이라도 보여야 믿겠다." 말씀하실 분이 계신지요? 엘리야 선지자가 삼년 반의 가뭄 속에서 비를 끌어내리기 위해 기도하러 갔을 때 그는 구름이 보여서 기도하러 간 것이 아닙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중에도 믿음으로 나갔고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 손바닥만한 구름을 보내주셨지요.
아브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후손이 땅의 티끌같이 많을 것을 말씀하셨을 때에 그에게 아들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고 아들을 낳을 기약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또한 동서남북의 보이는 땅을 주신다 하신 말씀도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열매가 있었던 것이 아니지요. 아브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축복을 받아나간다고는 하지만 눈에 보이는 사방의 땅을 취해나가기에는 아직 그의 힘이 부족한 때였습니다.
이처럼 엘리야나 아브람은 현실에 아무 것도 보여지지 않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았기에 하나님께서는 결국 그들의 믿음대로 역사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히 11:1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는 말씀처럼 바라는 것이 실상으로 나타나고 보이지 않는 것들이 증거로 나타나기까지 변함없는 마음을 지켜나가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영적인 참 믿음을 소유하심으로 여러분의 삶 속에서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하신 말씀이 날마다 성취되어 나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1-19 오전 1:01:01 Posted
2008-04-09 오후 7:57:18 Updated

이전글 창세기 강해(1)
다음글 창세기 강해(155)
검색
이전 페이지 인쇄하기 글자크게 글자작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