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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 창세기 강해 (2000년~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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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세기 강해(122)
설교자 당회장 이재록 목사 설교본문 창15:1-11 등록일자 2004.01.30
서 론 /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우리 안에는 성령님께서 내주(內住)하시게 됩니다. 이러한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갖가지 영적인 은사를 받기도 하고 체험들을 하게 되는데 성령의 음성을 듣기도 하고, 방언의 은사를 체험하기도 하며, 환상을 보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은사와 체험들은 모든 사람에게 일률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따라 조금씩의 차이가 있을 수 있는데 분명한 것은 영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더 많은 영적인 체험들을 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영의 공간 안에 들어왔기 때문에 영의 공간 안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을 체험해 갈 수가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영적인 체험들 중에 쉽지 않은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으며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 경우들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것이 흔하게 일어난 일이 아니었고 아무나 체험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지요. 그만큼 하나님 앞에 합당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을 수 있었고 그 중에서도 극히 소수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뵈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고 대화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흔히 나오는데 그 중에는 친히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도 있겠지만 주님이나 성령의 음성 또는 천사의 음성을 아버지 하나님의 음성으로 잘못 생각하는 경우들도 많이 있지요. 또한 사단의 역사를 받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 가운데 영적인 체험들을 해 나가는 것은 중요하지만 반드시 영적으로 앞서 있고 먼저 그 길을 체험해 나간 사람이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본 론 /

1. 이상과 환상의 차이

본문을 보면 아브람은 이상 중에 하나님과 교통을 하는 것이 나오는데 여러분 중에 어떤 것이 환상이고 어떤 것이 이상인지 구분할 수 있는 분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체험하는 것은 환상 쪽에 가까운 것이 많지만 어떤 경우는 아브람처럼 이상을 보고도 환상으로 아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상과 환상의 차이는 어떤 것일까요?
먼저 두 가지 현상은 모두 하나님께서 육의 공간 속에 영의 공간의 문을 여심으로 순간 영의 공간으로 들어가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영의 눈과 영의 귀를 열어 보고 듣게 하시는 체험적인 현상들은 둘 다 비슷하지요. 하지만 이상과 환상은 영의 공간을 얼마나 넓게 혹은 좁게 활용하여 펼쳐 주시느냐 하는 차이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상은 환상에 비해 상대적으로 영의 공간을 좁게 활용하여 나타내 주시기 때문에 이상을 통해 역사하실 때는 많은 것을 보여주시거나 느끼게 하시기보다는 음성을 통한 대화 형식으로 역사하십니다. 육의 공간 안에 영의 공간이 펼쳐지면서 빛으로 둘려지고 그 속에서 음성이 들리는 것이지요.
본문에 아브람이 체험한 것도 육의 공간 안에 영의 공간의 문이 열리면서 아브람이 순간 영의 공간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아브람이 빛으로 둘려진 상태에서 빛 가운데서 들려오는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그 음성이 분명 하나님의 음성이었지만 이때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하셨거나 아브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뵌 것은 아니며 하나님께서는 빛 가운데 머금고 계신 소리로써 아브람에게 역사하신 경우이지요.
그리고 이때 빛으로 둘려있는 모습이나 빛 속에서 들려오는 음성은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보거나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직 자신만이 보고 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이상을 보고 있을 때 주변의 다른 사람이 볼 때는 마치 기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느낌은 받게 됩니다. 사도 바울도 주님을 다메섹에서 영접하며 음성을 들을 때도 주변 사람들이 이렇게 느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환상은 이상에 비해 활용되는 영의 공간이 더 넓다 할 수가 있습니다. 육의 공간 속에 영의 공간의 문을 여시는 것은 이상으로 역사하는 경우와 동일하지만 환상의 경우는 어떤 것을 친히 보고 만진 듯 친히 그곳에 가서 경험한 듯이 역사해 주시지요. 영의 공간을 열어 여러 형태와 여러 각도에서 볼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계시록을 쓴 사도 요한과 같은 경우는 영안이 열려 환상으로 보고 많이 기록하게 되지요. 그래서 환상은 마치 영화의 필름을 보듯이 보여지기도 하고 자신이 직접 그 속에 들어와 있는 듯 보여지기도 하지요. 그런데 같은 환상이라도 어떤 사람은 단지 장면만을 보는 경우가 있고 어떤 사람은 장면과 함께 그에 대한 해석까지도 영감으로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한 같은 장면의 환상이라도 차원이 다른 것이지요. 예를 들어 어린아이에게 어떤 영화를 보여 주면 어린아이는 내용은 잘 모르지만 어떤 장면을 보았는지는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 반면에 어른이 보았다면 장면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용까지도 파악할 수가 있기 때문에 어떤 장면은 어떤 내용이었는지도 설명할 수가 있지요. 이처럼 같은 환상을 보아도 영적인 수준에 따라 차이가 있다는 말입니다. 아직 신앙이 어린아이의 단계임에도 성령이 충만할 때는 은혜 가운데 영안이 열리고 환상을 보는 분들도 있는데 자칫 생각이 동원되어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것을 잘못 해석할 수가 있음을 알아야 하지요.
그러므로 환상을 보아도 그것이 온전해지려면 마음에 할례하여 육신의 생각이 전혀 없고 오직 성령의 음성과 주관을 밝히 받음으로 영감을 통해 해석이 함께 오는 차원에 이르러야 합니다. 그리고 환상은 펼쳐 주시는 영의 공간의 폭이 넓기 때문에 어느 방향이나 각도에서 보여 주시느냐에 따라 같은 장면을 보고도 보는 사람마다 내용이 약간씩 다를 수가 있지요. 영안이 열려 같은 장면을 본 사람들이 전체적인 맥락은 정확히 일치하면서도 세부적인 면에 있어서는 약간씩의 차이가 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한 사람이 본 것을 다른 사람은 못 본 경우가 있고 다른 사람이 본 것을 또 다른 사람은 못 본 경우가 있지요.
예를 들어 작은 화면으로 어떤 것을 볼 때는 그 내용이 한눈에 다 들어오지만 아주 큰 화면으로 어떤 것을 볼 때는 시선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같은 내용이라도 사람마다 본 내용이 조금씩 차이가 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이때도 영적인 수준에 따라 보는 내용에 차이가 날 수 있지요. 영적인 수준이 낮은 차원에서 보는 사람은 부분적인 것만 볼 수 있지만 영적인 수준이 높은 차원에서 보는 사람은 전체적인 것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상과 환상이 영적으로 보면 비슷한 면도 있으나 영의 공간을 활용하는 면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상은 영의 공간을 좁게 활용한다 해서 이상을 보는 것보다 환상을 보는 것이 더 영적으로 차원이 깊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상으로 역사하시느냐 아니면 환상으로 역사하시느냐는 각각 그때의 상황과 주시고자 하는 내용에 따라 다르지요. 본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이상을 통해 역사하시는 경우에는 좀더 개인적으로 친밀하게 다가와 주시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도 전에 간증을 드렸듯이 주의 종으로 부름을 받은 후 하나님의 뜻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자 했을 때 하나님께서 친히 음성으로 말씀해 주신 적이 있지요. 하늘 문이 환히 열리고 환한 빛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왔는데 제가 그때 체험했던 현상은 이상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때도 제가 보고 듣는 것을 제 옆에 있던 기도원 원장은 보고 들을 수가 없었지요. 물론 영적인 분위기는 기도원 원장도 느꼈지만 그 체험은 저와 아버지 하나님과의 사이에 있었던 개인적이면서도 친밀한 체험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이상은 환상보다 더 개인적이면서 친밀한 체험일 뿐만 아니라 더 깊은 영의 차원을 체험하는 통로가 되기도 합니다. 그것은 이상에는 대부분 대화적인 교통이 함께 따르기 때문이지요. 환상이 어떤 장면을 보여 주시며 영감으로 설명해 주시는 것이라 한다면 이상은 어떤 장면을 보여 주시며 영의 귀를 열어 음성으로 함께 설명해 주시는 경우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장래에 되어질 일이나 깊은 영적인 비밀을 알려 주실 때는 이상을 통해 역사하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단 7:1-2에 보면 "바벨론 왕 벨사살 원년에 다니엘이 그 침상에서 꿈을 꾸며 뇌 속으로 이상을 받고 그 꿈을 기록하며 그 일의 대략을 진술하니라 다니엘이 진술하여 가로되 내가 밤에 이상을 보았는데 하늘의 네 바람이 큰 바다로 몰려 불더니" 하였지요. 이는 장차 마지막 때에 되어질 일에 대해 다니엘이 이상 중에 계시를 받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내용만 보면 마치 다니엘이 환상을 보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러한 체험을 이상이라 말씀하시는 것은 아브라함처럼 이상에서 볼 수 있는 대화 형식의 교통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지요.
단 7:15-16에 보면 "나 다니엘이 중심에 근심하며 내 뇌 속에 이상이 나로 번민케 한지라 내가 그 곁에 모신 자 중 하나에게 나아가서 이 모든 일의 진상을 물으매 그가 내게 고하여 그 일의 해석을 알게 하여 가로되"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앞일에 대한 내용을 보여 주시는 차원이 아니라 천사를 통해 해석까지 알려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보내심을 입은 천사가 바로 천사장 가브리엘이었습니다.
단 9:21에 보면 "곧 내가 말하여 기도할 때에 이전 이상 중에 본 그 사람 가브리엘이 빨리 날아서 저녁 제사를 드릴 때 즈음에 내게 이르더니" 하여 앞서 하나님께서 앞일에 대해 계시해 주실 때 이상 중에 본 것이 가브리엘이었음을 말해 주지요. 이처럼 이상 중에 계시를 받아 기록한 다니엘서와 함께 역시 앞일에 대한 예언서인 에스겔서를 보아도 겔 1:1에 "제 삼십년 사월 오일에 내가 그발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더니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을 내게 보이시니" 하여 에스겔서의 내용 역시 이상을 통해 받은 것임을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영안을 열어 영의 깊은 비밀과 앞일에 대해 밝히 보여 주셨을 뿐만 아니라 겔 1:28 후반절에 "내가 보고 곧 엎드리어 그 말씀하시는 자의 음성을 들으니라" 하여 이후에 이어지는 내용은 에스겔이 음성을 통해 계시받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지요.
이처럼 이상에는 환상과는 구별되는 요소가 있으며 그 내용이 환상을 통해 체험할 수 있는 것이라 해도 그 안에 이상에서만 체험할 수 있는 요소가 있다면 하나님 편에서는 그것을 이상이라 표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상과 환상이 가지는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해서는 분별을 하시되 하나님께서 가장 알맞은 방법을 통해 역사해 주신다는 사실을 깨우쳐야 하겠습니다.
본제단은 개척 이래 지금까지 환상과 이상, 계시와 대언, 예언 등 갖가지 영적인 은사와 체험들을 통해 저와 성도님들에게 늘 역사해 주셨지요. 저에게 직접 역사해 주신 것은 지금까지 한 번도 틀려본 적이 없지만 우리 성도님들에게 역사되는 경우를 보면 아직 영적으로 온전하지 못한 만큼 때로는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이 들어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늘 상호 점검하고 보완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같은 내용에 대해 여러 사람에게 동시에 역사하셔서 제 편에서 그분들을 분별할 수 있도록 역사해 오셨습니다.
아무리 밝히 본다고 하는 사람이라 해도 마음에 할례가 되어 있지 않으면 그것은 온전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 편에서는 성도님들이 영으로 분별할 수 있도록 늘 단에서 말씀을 통해 깨우쳐 드렸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들이 있어서 여러 가지 부작용을 일으키기도 했지요. 이러한 것이 무서워서 영의 세계를 쉬쉬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저는 성도님들이 영의 세계를 체험하며 나아갈 수 있도록 영의 세계의 문을 열어놓았습니다. 그 결과 이제는 수많은 검증 과정을 통해 인정받을 수 있는 분들이 드러나서 곳곳에 쓰임받을 수 있게 되었지요.여기서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은 무엇보다 마음의 할례가 함께 따라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럴 때 교만이나 이생의 자랑도 없는 것이고, 육신의 생각이나 느낌이 들어가지도 않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가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나라를 위해서만 아름답게 사용될 수가 있는 것이지요. 그래야 주님 오실 때까지 계속해서 쓰임받으며 큰 상급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귀한 은사를 주셨을 때는 오직 하나님께서 드러내어 사용하시게 해야 합니다. 자기 스스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러한 은사를 주셨다.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질서 가운데 반드시 목자에게도 함께 역사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중에 아무리 영적인 체험이 많고 깊다 해도 그것이 목자를 통해 연결되어질 때만이 영적인 질서를 좇는 것이며 질서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될 수 있지요. 본 제단은 영의 세계가 무한히 열려 있는 제단이니만큼 여러분들이 이러한 사실을 잘 명심하셔서 영적인 질서의 혼란이 없도록 항상 질서를 좇아 나오시기를 부탁드립니다.

2. 축복의 언약

아브람의 이상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후 지금까지 오직 믿음과 순종으로 행해 나왔습니다. 잠시 자신의 생각을 동원한 적도 있었지만 이내 돌이켜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더욱 온전히 순종하는 모습이 되었지요.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처럼 순종하는 사람에게 늘 방패와 산성이 되시며 놀라운 축복으로 함께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에게 축복 주기 원하시고 지켜 주기 원하시는 분이지만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시기에 정확한 공의 가운데 역사하실 수밖에 없지요. 그렇기 때문에 어떤 축복을 주실 때는 먼저 축복받을 그릇을 만들게 하십니다. 아브람은 이러한 축복받을 그릇을 넉넉히 준비해 나갔기에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 번 축복의 언약을 해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축복받을 그릇을 만드는 것은 의외로 아주 간단하고 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렵고 복잡한 것을 요구하시며 그것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영적인 믿음이 있고 또한 진정 순종할 마음이 있다면 얼마든지 행할 수 있는 것을 요구하시지요. 물론 믿음의 분량에 따라 점차 요구해 가시는 수준도 높아지지만 믿음의 분량에 맞게 높여 가십니다.
예를 들어, 본교회 성도님들 중에 온전한 주일 성수와 온전한 십의 일조만 하는 분이라면 일 년 내내 결코 재앙이나 사고를 만나지 않습니다. 특별히 어떤 육체의 일을 행한다거나 이런 죄를 짓기 전에는 사고 만나지 않게 지켜 주십니다. 혹여 자신의 실수로 어떤 사고가 난다 해도 몸은 전혀 상하지 않도록 지켜 주시지요. 하나님의 자녀로서 가장 기본인 주일 성수와 십일조만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방패가 되어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분이라면 가령 믿음의 3단계 이상이 되는 분이라면 이처럼 온전한 주일 성수와 십일조만으로 자신의 할 바를 다했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믿음의 1, 2단계에 있는 분들은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하면 하나님께서는 축복도 함께 주시지만 믿음의 3단계 이상이라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 안에 온전히 살며 순종해 나가느냐에 따라 축복이 달라집니다.물론 믿음의 1, 2단계에서도 믿음과 순종에 따라 축복이 달라지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진정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사랑과 그에 따르는 순종의 행함이지요. 그러니 여러분이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믿고 순종해 나간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여러분의 방패와 큰 상급이 되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람은 연단의 과정을 거치면서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며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그릇을 만들어갔기에 이러한 축복의 말씀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어지는 2-3절에 보면 이상 중에 하나님과 교통하고 있던 아브람은 갑자기 하나님께 상속자에 대한 말씀을 아룁니다.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 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 했는데 아브람이 얼마나 정확하게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받아 마음에 주관받고 있는지가 나타나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전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겠다"는 언약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람이 혹시 이 언약의 말씀을 잊었거나 또는 마음에 온전히 믿지 못하여서 지금 자신의 집에 있던 종인 다메섹 엘리에셀을 상속자라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람은 한 번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결코 의심하거나 잊지 않았지요. 그럼에도 아브람이 하나님께 이처럼 여쭈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금 자신에게 왜 나타나셔서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말씀하고 계신지를 그 마음에 주관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나타나신 것이 자신의 후사에 관해 약속해 주시기 위한 것임을 알았지요. 약속의 때가 되었음을 주관받았기에 상속자에 대한 말을 먼저 꺼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가지 비유를 들면, 아버지가 아들에게 새 차를 사 주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서 아버지의 마음에 이제 내가 새 차를 사 줘야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게 되었지요. 그래서 아들에게 그 말을 막 하려던 참인데 자녀도 이러한 아버지의 마음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저는 이 차를 계속 타도 상관없어요."하고 말합니다. 아들은 새 차를 사 주겠다는 아버지의 말씀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아들이 이렇게 말함으로 인해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아니다 그 차를 계속 탈 것이 아니라 이제 곧 내가 새 차를 사 주마" 하는 말을 들을 수가 있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정확하게 마음에 주관받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확실한 언약의 말을 받아낼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아브람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상속자에 대한 말을 먼저 꺼냄으로써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후사에 대한 확실한 언약의 말씀을 받아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4-5절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는 확실한 언약의 말씀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아브람이 하나님과 마음이 서로 통하며 아브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정확히 마음에 주관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둘만의 대화였던 것이지요.
이러한 언약의 말씀을 받은 아브람이 이제 하나님 앞에 어떻게 행했는지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이어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결 론 /

부모와 자녀 간에 서로 마음이 통하고 느낄 수 있다면 서로 간에 오해될 것이 없습니다. 자녀는 부모가 원하는 바를 알아서 행할 것이고 부모도 자녀가 원하는 바를 이루어 주지요. 상대가 왜 이러한 말을 하는지를 느끼기 때문에 거기에 맞는 답을 해 줄 수가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관계가 아버지 하나님과 여러분 사이에도 이루어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빌 2:5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하신 말씀처럼 여러분의 마음 안에 주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이신 주님의 마음을 여러분 안에 품을 때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과도 하나를 이룰 수 있습니다. 아브람은 이러한 연단 과정을 통해 자신을 철저히 버리고 오직 주님의 마음, 아버지의 마음을 품어 갔기에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밝히 주관받을 수 있었고 아버지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해 놀라운 축복의 말씀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2004년도에는 신속히 영의 마음을 일구셔서 영의 공간에 거하심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도 주관받을 수 있고 성령님과도 더 밝히 교통할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친히 여러분의 방패요 상급이 되어주심으로 늘 범사에 형통한 길로만 인도받아 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1-19 오전 1:01:01 Posted
2008-04-09 오후 7:45:29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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