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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령의 음성 주관 인도(17)
설교자 당회장 이재록 목사 설교본문 롬 8:12-16 등록일자 2010.12.26
성령의 음성을 밝히 듣는 데 있어서 마지막 열쇠는 바로 ‘순종하려는 마음’입니다. 신명기 10장 13절에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행복을 위해 말씀하시는 성령의 음성에 얼마나 순종하고 계십니까?


1. 성령의 음성을 밝히 들으려면 육체의 소욕을 벗어 버려야

성령께서 아무리 음성을 들려주셔도 육신의 생각이 강한만큼 들을 수가 없습니다. 결국 자기 생각을 좇아가게 되는데 이는 더 엄밀히 말하면 원수 마귀 사단의 주관대로 좇아가는 것이지요. 그런데 진리의 말씀을 듣고 읽고 배우다 보면 성령의 음성과 육신의 생각이 어느 정도 분별됩니다. 진리를 좇게 하는 쪽이 성령의 음성이지요. 마음에서 비진리를 벗어 버리는 만큼 육신의 생각도 점점 줄어들고 그런 만큼 성령의 음성도 더 밝히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성도들이 그 음성을 분별하고도 성령의 음성대로 순종을 못하지요. 이는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기 싫어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성령의 소욕을 좇고 싶은 마음보다 육체의 소욕을 좇고 싶은 마음이 더 크기 때문이지요. 갈라디아서 5장 17절에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말씀한 대로 육신의 생각과 더불어 육체의 소욕 또한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지 못하게 합니다.

‘육체의 소욕’은 쉽게 말하면 ‘육체가 하고 싶어 하는 바’입니다. 여기서 ‘육체’는 단순히 사람의 몸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지요. ‘육체’는 영적으로 ‘비진리의 속성이 구체적인 행함으로 드러난 것’을 총칭합니다. 따라서 ‘육체의 소욕’은 ‘마음의 비진리를 구체적인 행함으로 드러내려 하는 속성’이라고 할 수 있지요. 육체의 소욕은 성령의 소욕을 거스릅니다.

예를 들어 성령은 원수도 사랑하라 하십니다. 그런데 ‘미움’이라는 육체의 소욕이 강하면 막상 미운 사람을 볼 때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기가 싫어집니다. 상대를 고운 눈으로 보고 싶지가 않습니다. 뾰족한 눈으로 퉁명스럽게 말하고 싶고 상대를 콕콕 찌르는 말을 한바탕 쏟아내면 속이 후련할 것 같습니다. 다른 예를 들어 성령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어느 날 다니엘 철야에 갈 시간이 다 되었는데 오늘은 TV도 보고 좀 쉬다가 일찍 자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이처럼 육을 좇기 원하는 마음이 바로 육체의 소욕입니다.

2. 육체의 소욕을 좇지 않으려면 성령의 소욕을 좇아야

갈라디아서 5장 16절에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말씀합니다. 성령의 음성을 듣거나 어떤 것을 주관 받을 때마다 그대로 행하면 되지요. 이렇게 성령의 소욕을 좇아 계속 행해 나가면 육체의 소욕이 점점 약해지다가 결국 없어집니다. 마음에서 육체의 소욕의 근원인 ‘비진리’가 점점 사라지기 때문이지요. 혹시 “순종이 잘 안 됩니다. 어렵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계신지요? 물론 처음에는 성령의 소욕만 좇는 것이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두 마음이 싸우기 때문입니다. 즉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맞서 싸우지요. 이 싸움은 주로 믿음의 2단계에서 가장 격렬합니다.

믿음의 1단계에서는 싸울 일이 별로 없습니다. 대부분 믿음의 1단계에서는 세상에 살 때처럼 육체의 소욕을 좇아 행하지요. 아직 진리를 잘 모르기도 하거니와 말씀에 온전히 순종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실하게 못 느끼기 때문입니다. 물론 좋은 중심을 가진 사람은 주님을 영접하자마자 말씀을 듣는 대로 열심히 순종하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가 많지는 않지요. 대부분의 성도님들은 믿음의 2단계에 접어들면서부터 말씀대로 살기 위해 힘쓰기 시작합니다. 이제 말씀을 들어서 천국과 지옥에 대해, 심판에 대해 알았기 때문에 말씀에 순종하려고 노력하지요. 그런데 구습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성령의 소욕만을 좇는 것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물론 성령 충만을 잃지 않는다면 믿음의 2단계도 쉽게 통과할 수 있지요.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령 충만함을 계속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의 싸움을 거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2단계 중에서도 싸움이 가장 격렬한 시점은 자기 안에 진리와 비진리의 비율이 반반일 때입니다.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이 가장 팽팽하게 맞서기 때문이지요. 로마서 7장에 보면 이런 상태가 아주 생생하게 묘사되어 나옵니다. 선을 행하기 원하는 마음과 악을 행하기 원하는 마음이 서로 싸우고 있으면 참으로 곤고하지요. 그럴지라도 이 고비를 반드시 잘 이겨야 합니다. 잘 승리하고 믿음의 3단계에만 들어가도 성령의 소욕을 좇는 것이 한결 쉬워집니다. 믿음의 3단계 초입에는 잠시 두 마음이 맞설 때도 있지만 이내 돌이켜 성령의 소욕을 좇지요.

그런데 많은 분들이 믿음의 2단계에서 지쳐 버립니다. 사람에 따라서 싸움이 1, 2년도 가고 심하게는 5년, 10년, 그 이상도 갑니다. 싸움이 지속되면서 계속 마음이 곤고하니 신앙생활이 힘들게만 느껴집니다. 악을 벗어 나가는 것이 신앙생활임을 알면서도 충만함을 잃어버리니 악을 더 쌓아갑니다. 전에 버렸던 세상 것을 다시 취하기도 하지요. 성령의 음성을 거듭 거듭 무시하고 육을 취하다가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짓기도 합니다. 그 결과 성령의 역사가 점점 희미해집니다. 진리의 말씀을 수년 간 들어왔는데도 막상 현실 속에서는 말씀이 떠오르지 않지요. 온유하라는 말씀을 들어서 알지만 조금만 마음이 불편해도 혈기를 냅니다.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진리인 줄 알지만 내가 손해 보는 상황을 만나면 참을 수가 없습니다. 원수도 사랑하라는 말씀을 배웠지만 막상 자신을 힘들게 하는 사람을 대하면 미워하고 악으로 갚게 되지요. 이렇게 세상 사람과 다름없이 살다가 결국 성령의 역사가 끊어지는 지경에 이릅니다. 이처럼 육체의 소욕과 싸우는 것이 힘들다고 해서 육을 취하면 싸움이 길어질 뿐입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은 육체의 소욕을 북돋아 주는 원군이기 때문이지요.

기나긴 코스를 달리는 마라톤 경주에도 끝이 있고 캄캄하고 긴 터널에도 끝이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을 벗는 여정에도 끝은 있지요. 그 시기는 여러분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쉼 없이 달리면 싸움이 빨리 끝나는데, 중간에 멈춰 있거나 뒤로 가고 있으면 그 싸움이 길고 지루하게 느껴지지요.

싸움을 끝내고 믿음의 4단계 이상 곧 영으로 온 영으로 들어오면 육체의 소욕을 좇기가 오히려 더 어렵습니다. 성령의 소욕을 좇는 것이 더 쉽고 행복하지요. 여러분도 성령의 소욕만을 좇아 신속하게 마음의 싸움을 마치고 영으로 들어오시기를 부탁드립니다.

3. 육체의 소욕과의 싸움을 빨리 끝내기 위해 명심할 점들

첫째는, 성령의 음성을 들려주실 때 바로 바로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자. 다음에 순종하면 되지’ 하고 성령의 음성을 무시해 나가면 점점 성령의 음성이 희미해지다가 결국 끊어져 버립니다. 거듭 불순종하는 만큼 하나님과의 사이에 담이 쌓이기도 하지요. 반면에 듣는 대로 순종하면 머지않아 성령의 인도를 밝히 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음성을 밝히 듣기까지는 수년 씩 걸리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굳게 결단하고 이렇게 행해 보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기도를 쉬지 않아야 합니다. 기도는 마치 자동차에 주유를 하듯 영혼에 영적인 에너지를 불어 넣는 힘입니다. 기도를 쉬면 성령 충만함을 입을 수 없으므로 눌렸던 육체의 소욕이 다시 힘을 얻지요. 그러므로 늘 불같이 기도해서 성령 충만함을 입어야 합니다.

셋째로, 육에 대한 느낌을 부지런히 바꿔 나가야 합니다. 육의 사람이 육체의 소욕을 좇는 것은 그것이 더 좋게, 더 편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말씀대로 사는 것은 어렵게 느끼지요. 이는 잘못된 느낌입니다. 원수 마귀 사단에게 속고 있는 것이지요. 실상은 성령의 소욕을 좇는 쪽이 더 편하고 행복합니다.

그런데 왜 육의 사람은 비진리를 좇는 것이 더 좋다고 느낍니까? 구습이 몸에 배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영접하고 죄 사함 받기 전에 우리는 세상 풍속을 좇아 살았습니다. 에베소서 2장 2~3절에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한 대로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았지요. 성령이 원하시는 바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원하는 바를 행했지요. 이 구습이 몸에 배어 있는 한 육체의 소욕을 좇는 것이 편하게 느껴집니다.

또 육체의 소욕을 좇으면 잠시나마 즐거움을 얻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기도하는 대신 오락과 쉼을 취하면 그때만큼은 즐겁고 편합니다. 그러나 이는 순간에 불과하지요. 그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곤고합니다. 즐거움은 이내 사라지고 허무함만 남지요. 그러니 기도를 쉬는 것은 즐겁고, 기도하는 것이 어렵다. 이런 느낌을 가졌던 사람도 그 느낌을 바꿔야 합니다. ‘기도 쉬고 오락을 취하면 곤고하고, 피곤을 이기고 충만히 기도를 하면 행복하고 뿌듯하다’ 이렇게 생각과 느낌을 함께 바꿔 나가야 하지요.

또 화가 난다고 혈기를 내면 그 당시에는 속이 후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늘 화내고 다투며 살아야 하니 얼마나 불행합니까? 반대로 성령의 소욕을 좇아 상대를 이해하고 참으면 평안하고 행복합니다. 범사에 이처럼 진리를 좇아 나갈 때 성령 안에서 희락을 누릴 수 있지요. 갈라디아서 5장 18절에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했습니다.

구약 시대에 율법을 어긴 사람에게는 징계나 죽음이 따랐습니다. 오늘날도 육체의 소욕을 좇아 살며 하나님 말씀을 어기는 사람은 ‘이러다가 지옥 가지는 않을까? 재앙을 만나지는 않을까?’ 하고 늘 염려가 됩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 말씀은 구속이요 무서운 채찍같이 느껴지지요.

반면에 육체의 소욕을 다 벗어 버리고 성령의 소욕을 좇아 사는 사람은 늘 자유와 평안을 누리며 삽니다. 율법에 구속받을 일이 없지요. 성령 충만하니 참된 기쁨과 평안, 천국 소망이 넘칩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늘 찬양이 솟아나고 공의의 법대로 항상 하나님께 지킴 받고 축복받으며 살아갑니다. 재앙이나 사고를 만날 일도 없고 외로움이나 근심, 걱정, 두려움 같은 어둠이 틈탈 수도 없지요. 성령께서 늘 함께 동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의 음성을 밝히 듣는 비결은 사실 간단합니다. 마음의 비진리를 다 벗어 버리고 성결한 마음을 이루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닮은 성결한 자녀가 되면 자연히 하나님과 밝히 교통하게 됩니다. 마음과 뜻이 하나가 되기 때문이지요. 무엇을 마음에 품든지, 무슨 말을 하든지, 혹은 무엇을 행하든지 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할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성령과 밝히 교통하며 마지막 때에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크신 뜻을 마음껏 펼치는 존귀한 자녀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0-12-27 오후 7:56:47 Posted
2011-03-27 오후 6:31:22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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