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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한일서 강해
설교자 당회장 이재록 목사 설교본문 요일 2:7-11 등록일자 2020.03.08
모든 계명에 담긴 하나님의 근본 마음과, 형제를 사랑하여 빛 가운데 거함으로 하나님 앞에 담대히 구하고 응답받는 삶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구약의 옛 계명이나 신약의 새 계명에 담긴 하나님의 근본 마음은 결국 사랑입니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이지요. 사도 요한도 자신이 쓰는 말씀이 새 계명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요일 2:7).
그러나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기도, 진심으로 행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의 사람들을 위해서는 행위적인 율법이 필요했지요. 그 한 예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으라는 것입니다. 처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라도 사람이 형제에게 악을 행치 않도록 하신 것이지요. 또 “상대가 악을 행했으니 나도 원수를 갚겠다.” 하는 사람들에게도 그 한계를 정확히 그어 주셨습니다.


1. 새 계명은 옛 계명에 사랑이 한 번 더 입혀진 것

예 : 이혼 증서에 관하여
구약의 율법에는 사람이 아내의 허물을 보고 내쫓으려면 이혼 증서를 내어주도록 했는데 하나님의 원래 뜻은 아예 이혼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사람들이 혼인 관계를 온전하게 지키지 못하고 정욕을 좇아 변질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때 만약 아내가 싫증이 났다며 함부로 내쫓아 버리면 여인들은 살 길이 막막하지요. 그렇다고 해서 이혼을 완전히 금한다면 여인들이 더 큰 어려움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가령, 이혼한 것도 아닌데 남편이 아내를 외면하고 전혀 돌보지 않는다면 재혼할 수도 없는데 먹고 살 길도 막막하지요. 그래서 이혼할 때 증서를 주라 하심으로 최소한의 안전장치 역할을 하게 한 것입니다. 남자가 방탕하지 않기를 원하시며 여자가 지킴 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반영된 율법이지요. 그러나 많은 사람이 율법을 오해하여 행위적인 것에만 집착함으로 하나님 뜻과 반대로 적용했습니다. 정욕대로 아내를 취하고 버리기를 반복하면서 “계명대로 증서를 써 주고 이혼했으니 정당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해 하나님의 참뜻을 정확하게 알려 주십니다.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하셨지요(마 19:8~9).
옛 계명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더 정확하게 나타낸 것이 새 계명입니다. 이제 “이혼 증서를 써 주라”고 하지 않고, “이혼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정욕을 좇는 마음을 버리고 진실하게 혼인 관계를 지키라” 명하시지요. 새 계명은 옛 계명과 전혀 다른 것이 아니고 옛 계명에 사랑이 한 번 더 입혀진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8절에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말씀했습니다.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취었다’는 것은 참 빛 되신 예수님께서 어둠의 권세를 깨뜨리셨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사신 것을 믿는 성도들은 생명을 얻고, 성령의 능력으로 빛 가운데 거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깨우쳐 주시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고 마음을 진리로 변화시킬 수도 있지요. 하나님께서 율법에 담아 주신 사랑을 깨달아 중심에서부터 순종하여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이 다시 기록하는 이 새 계명이 “저에게만 아니라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하셨지요. 즉 예수님만 하나님의 참뜻을 행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도 하나님의 참뜻을 좇아 진리를 행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구약의 율법을 행위적으로 그대로 지키지는 않습니다. 그렇다 해서 구약을 폐한 것이 아니며, 그 영적인 의미를 깨달아 지키는 것입니다. 옛 계명을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분별하여 적용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2. 옛 계명에 적용하는 여러 방식

① 안식일에 노동과 매매를 금하신 하나님의 참뜻
구약에서는 안식일에 노동이나 매매, 오락을 금하셨습니다. 신약 시대의 우리도 안식일의 의미를 깨달아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하지요. 그러나 우리는 주일이라고 해서 무조건 노동과 매매를 금하는 것은 아닙니다.
안식일에 노동과 매매를 금하신 하나님의 참뜻은 그날 하루라도 하나님 안에서 우리 영혼의 쉼을 얻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주인은 인자”라 하셨고 주 안에서 생명을 살리는 선한 일들은 가하다 하셨지요.
여러분이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올 때 교통비로 지불하는 것을 매매했다고는 하지 않지요. 선교 여행 중에 주일을 맞게 되어 숙소나 식당을 이용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유익을 위해, 혹은 세상 오락을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필요한 부분이라면 “주일을 범했다” 하지 않습니다.

② 믿음의 분량에 따라 계명을 적용해야
여러분이 상황에 따라서만 아니라 믿음의 분량에 따라서도 계명을 잘 적용해야 합니다. 가령, 초신자가 주일 낮에만 예배드리고 오후에는 가게 문을 열고 싶어 합니다. 이때 “그러면 안 된다, 주일을 온전히 지켜야 한다.” 하면 “그렇다면 차라리 교회에 안 다니겠다.” 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면 일단은 낮 예배만이라도 드리게 해야 하지요. 계명을 강요하다가 오히려 생명에서 떠나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낮 예배만이라도 드리게 하고 점점 믿음을 심어 줘서 온전한 주일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다음으로, 초신자는 주일에 밖에서 식사를 사 먹을 수 있지만 일꾼이라면 주일 전에 미리 준비해야지요. 주일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믿음인데 교회 일을 핑계 삼아 매매를 한다면 이는 계명을 범한 것입니다. 또 성령 체험도 하고 은혜도 체험한 사람이 자기 유익을 위해 주일에 영업을 한다면 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③ 군인, 경찰의 주일 근무와 주일에 국가고시가 있을 경우
군인이나 경찰이 부득이하여 주일에 근무를 서게 될 때 주일을 어겼다고 하지 않습니다. 국가에 매인 몸이기에 허용되는 것이지요. 이때도 할 수만 있다면 당직을 바꿔 온전한 주일을 지킬 수 있으면 더 좋습니다.
주일날 국가고시를 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주일에 시행되는 시험들이 있지요. 이러한 상황에서 주일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응시를 포기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이럴 때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여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려는 마음입니다. 최대한 가능한 시간에 예배를 드리고 나머지 시간들도 경건하게 보내면 됩니다.
그러나 ‘사법 시험을 준비해야 하니까 주일마다 낮 예배만 드리고 공부하러 가겠다’ 하면 이는 계명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지요.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한다면 계명을 지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기 때문에 계명이 제약으로 느껴질 수 있지요. 중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여 모든 계명을 쉽게 지켜 나가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형제를 미워하면 어둠에 거하는 것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각종 예배와 모임에 열심히 참석하고 여러 사명을 맡아 충성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시기하고 미워하여 판단하며 허물을 전합니다. 이처럼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아도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 결국 어둠에 거하는 것입니다.
미움이라는 죄성은 사단이 심어 준 것이고 분명히 어둠에 속합니다. 사랑한다면 시기할 리도 없고 교만하지도 않습니다. 상대를 사랑한다면 내가 더 가지려고 하지도 않고 자존심을 내세우지도 않지요.
남을 미워하는 사람은 어둠 속에서 눈이 먼 것이라 했습니다(요일 2:9~11). 남의 입장에서 볼 수 있는 눈이 멀어 내 입장만 생각하며 상대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어서 내 마음만 생각하지요. 상대의 유익을 구할 수 있는 눈이 멀어 내 유익만 구하는 것입니다. 범사에 선으로 생각해 주고, 이해해 주며 상대의 입장을 헤아릴 수 있으면 미워할 일이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기 전에 병으로 고생하면서 처가 식구들에게 많은 천대와 서러움을 받았습니다. 이때는 제 입장에서만 생각했기 때문에 서운함이나 감정을 품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지요.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 진리를 알게 된 후 이런 마음이 눈 녹듯이 사라졌습니다. 상대의 입장에서 보는 눈이 생긴 것입니다. ‘내가 일부러 잘못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상대의 입장에서는 서운하고 속상하니 나에게 그럴 수밖에 없었겠구나.’ 하고 선으로 이해할 수가 있었지요.
이렇게 상대의 입장에서 볼 수 있는 선한 눈을 크게 뜰 수 있기 바랍니다. 상대가 내게 악을 행한다 해도 ‘오죽하면 그랬을까? 저 사람의 자라온 환경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겠구나.’ 이렇게 이해하면 마음이 얼마나 평안합니까?
때로는 내 편에서는 선으로 대해 주는데도 상대가 계속 악으로 나올 수도 있습니다. 사실 그렇게 악을 품고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제일 힘들지요. 평안도 없고 악한 감정 가운데 갇혀 있으니 그 삶이 얼마나 불행합니까? 이런 것을 생각하면 상대가 내게 악을 행한다 해도 속상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긍휼히 여길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 10절에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다”고 했습니다.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영적으로 담대하다는 말이 됩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빛 가운데 거하면 “내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고 담대하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기도할 때도 담대하게 구할 수 있지요. 육의 자녀들도 평소에 부모님께 순종하고 화평했다면 필요한 것이 있을 때 담대히 구합니다. 반면 평소에 부모님께 잘 순종하지 않고 말썽을 많이 피웠다면 무엇을 구할 때도 눈치가 보입니다.
영적으로도 빛 가운데 거하여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자녀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므로 필요한 것을 담대히 구할 수 있습니다. 구하는 것마다 응답받고 범사에 형통함을 받지요. 이렇게 하나님 앞에 담대하여 여러분의 삶에 응답과 축복의 간증이 넘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0-03-10 오전 10:13:30 Posted
2020-03-12 오후 4:44:22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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