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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재록목사의 잠언강해- 2] 슬기롭게 하며 젊은이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본문 : 잠 1:4-5]
출처
크리스챤 신문
날짜
2010년 9월 20일 월요일
조회수: 1664
"어리석은 자로 슬기롭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주기 위한 것이니 지혜 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모략을 얻을 것이라"(잠 1:4-5)

뉴스▲ 랍비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강론한 소년 예수님 / 일러스트 김동호


1. 어리석은 자로 슬기롭게 하며

잠언을 마음에 양식 삼고 행하면 어리석은 사람도 슬기롭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리석은 사람의 유형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상대가 속이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속아 넘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속는 사람도 어리석지만 속이는 사람은 더욱 어리석습니다. 왜냐하면 상대가 속아 넘어가니 신이 나고 당장은 어떤 유익을 얻을지 몰라도 알면서 짐짓 죄를 짓는 사람은 죄사함 받을 수가 없고(히 10:26), 거짓말하는 사람은 구원받기 어렵기 때문입니다(계 21:8).

상대가 거짓말하는 것을 알면서 속아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알고 속기 때문에 지혜롭게 대처해 나갈 수가 있지만 모르고 속을 때는 함정에 빠지기 때문에 어리석은 자가 됩니다. 성령의 음성을 듣는 사람은 속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해 주시니 거짓말임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상대 마음을 알지 못한 채 자기 생각만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상대가 듣기 싫어하는데도 알지 못한 채 자신의 입장과 생각만 말하며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셋째,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알지 못하며 모든 면에서 부진하고 연약한 사람입니다.

이 외에도 교만하고 잘난 척 하는 사람 등 어리석은 행동을 나열하자면 끝이 없습니다. 성경에는 어리석은 사람이 많이 등장합니다. 롯은 삼촌 아브라함이 좋은 땅을 먼저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주자 자기 눈에 더 좋아 보이는 요단 들을 택했습니다(창 13장).

조카라면 삼촌이 먼저 선택할 수 있도록 양보하는 것이 도리인데 자신의 유익을 먼저 구했으니 선의 지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실만한 선의 지혜를 좇아가야 축복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아합 왕이 선을 좇았다면 왕후 이세벨이 악행을 저지르도록 용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불의한 삶을 살았던 아합과 이세벨의 결말은 비참한 죽음이었습니다.

유대를 다스린 빌라도 총독은 어떠했습니까? 그는 자신의 위치와 권위가 백성들에게 위협받을까 두려워 예수님이 죄가 없음을 알면서도 십자가형을 받도록 넘겨주었습니다(요 19:12, 마 27:24).

인류의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에게 사형을 선고한 책임자가 되었으니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만일 백성을 두려워하지 않고 끝까지 예수님을 지켰다면 하나님은 그가 어려움 당하지 않도록 지켜 주셨을 것입니다. 또 하늘나라에서 얼마나 빛나는 위치를 차지했겠습니까?

가롯 유다는 은 삼십에 스승을 팔아 넘겼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사례를 통해 나에게는 어떠한 어리석음이 있는지 발견하고 버려야하겠습니다.


2. 소년 예수님, 랍비들에게 강론하다

그런데 이렇게 어리석은 사람도 잠언을 양식 삼아 행하면 슬기롭게 됩니다. 슬기의 사전적 의미는 '사리를 바르게 판별하고 일을 잘 처리해 나가는 능력 곧 지혜'입니다. 지혜와 슬기가 비슷한 것처럼 보이지만 영적인 의미는 다릅니다.

어린이가 성장해 나갈 때 어른이 놀랄 만큼 기대 이상으로 발전하는 속도가 빠른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아이를 슬기롭다고 하는데 만일 이런 슬기가 선한 쪽이 아니라 악한 목적을 이루는데 사용되는 것을 영악하다고 합니다.

상대를 깨우쳐준다고 악 속에서 상대를 찌르거나 겁을 주거나 노엽게 하며 자기 의사를 전달한다면 영악한 어린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범사에 선을 좇아 자기의 본분과 도리를 행하여 의사를 충분히 전달하기도 하고 상대를 놀라게도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어린 시절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 마리아와 요셉은 유월절 절기를 지키러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절기가 끝나 사람들이 다 돌아갔지만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었지요. 요셉과 마리아는 돌아오는 길에 예수님이 동행하지 않았음을 뒤늦게 발견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찾고자 다시 예루살렘으로 갔는데 성전에서 랍비들과 대화하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고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 (눅 2:46-47)

하나님의 지혜가 함께 하니 열두 살에 불과한 예수님이 랍비들에게 강론한 것입니다. 마리아가 어찌된 일이냐고 묻자 예수님은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며 자신에 대해 분명히 알고 대답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슬기입니다. 자기 위치 속에서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고 상대가 이해할 수 있도록 말하고 있지요.

다만 부모 편에서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었습니다. 지혜로웠던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었습니다(눅 2:50-51).


3. 슬기는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

이는 성장한 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슬기란 응용할 줄도 알고 그 정답을 말할 줄도 아는 것입니다. 만일 잠언을 통해 보증을 서는 것이 어리석음을 깨우쳤다고 합시다. 그러면 친척이나 친구가 보증을 서달라고 부탁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혜롭게 거절하여 화평 속에 오해하거나 원수를 맺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슬기란 이처럼 각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이런 경우 하나님이 주신 영감 속에 성령의 음성과 인도를 받으면 실수 없이 모두 해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슬기롭게 되려면 지식을 올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지식이 없으면 지혜가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가 어리석다는 자체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슬기를 찾아볼 수가 없고 미리 예비할 수도 없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에스더는 슬기로운 여인이었습니다. 당시 메대와 바사의 법은 왕의 부름을 받지 아니하고 왕에게 가면 누구든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런데 왕이 금홀을 내밀면 죽임을 당하지 않고 만날 수 있었습니다.

에스더는 왕후였지만 왕에게 나아가지 못한 지 삼십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만의 모함으로 포로로 잡혀와 있던 유대인들이 몰살당할 위험에 처하였기에 죽음을 각오하고 왕에게 간청을 드려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에스더는 삼일 금식하고 아름답게 치장하고 왕에게 나아갔지요.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금식하며 최선을 다해 준비했던 것입니다. 만일 에스더가 어리석었다면 왕후라는 신분만 믿고 백성을 살리기 위해 다급한 대로 왕 앞에 나갔을 것입니다.

그런 행동은 왕의 심기를 불편케 할 수 있기에 왕이 금홀을 내밀지 않아 죽음을 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어떤 상황이 닥칠 때 대비책을 마련하기 위한 방법을 선택하게 되는데 지혜를 통해 방법이 나옵니다.


4. 젊은이에게는 참지식과 근신함을, 명철한 자는 모략을

잠언은 젊은 사람일수록 보석같이 중요한 말씀이 됩니다. 그렇다고 나이가 많은 분들에게 필요 없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4절에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주기 위한 것" 이라고 했는데 우리는 젊은 자에게 라고 기록한 솔로몬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가 진리를 깨우쳤을 때는 이미 시간이 흘러 말년이 되었으니 얼마나 안타까웠겠습니까?

여기서 지식은 영원히 필요한 영적인 지식을 의미합니다(신 4:6, 잠 1:7). 영적인 지식 안에는 육적인 지식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솔로몬의 잠언은 이 세상에 살면서 필요한 모든 것에 관한 참된 지식이 될 수 있는 진리입니다. 세상의 지식은 아무리 배워도 한계가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 부부 사이도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세상 지식을 아무리 많이 배웠다 해도 영육 간에 한계를 느끼며 방황하고 갈등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잠언은 한계를 뛰어넘는 차원으로 안내해 줍니다. 하나님 말씀 안에는 생명이 있기에 행복과 기쁨과 만족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잠언은 젊은 사람을 근신케 합니다. 젊을수록 순간의 감정을 이기지 못해 뒤엎어 버리거나 함부로 움직여 실수하고 인생을 낭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근신하는 사람은 절제 능력이 있어 매사를 살펴보고 신중하게 움직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정하고 행동할 때 정확하고 온전하게 이룰 수 있는 절제 능력이 있어야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지혜 있는 사람은 듣고 학식이 더하게 됩니다. 지식은 눈으로 보고 듣고, 가르침 받은 것이 느낌과 함께 뇌세포에 입력된 것이라면 학식은 배워 익힌 학문이 분야별로 마음에 심겨진 것입니다. 또 '명철한 자는 모략'을 얻게 됩니다.

길이 훤히 보이기에 모략이 임하는 것입니다. 모략은 꾀 모(謀), 간략할 략(略)자로 사전에는 남을 해치려는 속임수나 꾀라고 나옵니다. 모략에는 선한 모략과 악한 모략이 있습니다.

이사야 28장 29절에 "여호와의 모략은 기묘하며 그 지혜는 광대하다"고 하여 하나님의 능력의 일부로 모략을 포함시키고 있지요.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예수님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은가를 질문했습니다.

이들은 어찌하든 꼬투리를 잡아내어 예수님을 죄인으로 송사하고자 궤계를 쓴 것이기에 악한 모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선한 모략이 있었기 에 악한 모략을 깨뜨리셨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옳은가라며 지혜로운 답변을 하셨던 것입니다. 잠언 21장 30절 말씀처럼 지혜로도 명철로도 모략으로도 여호와를 당치 못하는 것입니다.

2010년 09월 20일 (월) 14:12:25 이재록 목사sion7000@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