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제목
[이재록목사의 잠언강해-14] 훈계와 명철을 얻으라 [본문: 잠언 4:1-4]
출처
크리스챤 신문
날짜
2010년 12월 31일 금요일
조회수: 2256
아들들아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명철을 얻기에 주의하라 내가 선한 도리를 너희에게 전하노니 내 법을 떠나지 말라(4: 1-2)
▲ 방탕하게 살아가는 아비가 아무리 훈계해도 듣지 않아요..../ 일러스트 김동호
훈계는 윗사람이 아래 사람에게 하는 것입니다. 훈계의 유형을 보면 자신이 행하면서 가르치는 경우와 행하지는 못하지만 경험 속에서 알게 된 것을 훈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날마다 술에 만취된 채 집에 들어와 가족에게 소리 지르며 폭력을 휘두르는 가장이 자녀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며 훈계할 때 자녀가 그 말을 청종하겠습니까? 아버지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그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먼저는 내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지 자녀가 나를 존경할만한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더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존중받지 못하는 사람의 훈계는 불 꺼진 초로 어둠을 밝히고자 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빛 가운데 살아가는 부모가 훈계할 때 자녀는 그 말을 듣고자 합니다. 무시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잠언 13:18에 "훈계를 저버리는 자에게는 궁핍과 수욕이 이르거니와 경계를 지키는 자는 존영을 얻느니라" 하였습니다. 훈계하는 목적은 명철의 길을 보이게 하기 위함입니다. 훈계를 받을 때에 앞으로 어떻게 해야겠다는 길이 보이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길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음이 악해 자기 고집 때문에 순종할 마음이 없는 사람은 훈계하여 명철의 길을 보여준다 해도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주변에서 "주일을 지키라, 온전한 십일조를 해라" 하며 권면했지만 듣지 않다가 시험과 환난을 당한 후에야 후회하는 사람이 있는데 징계받기 전에 그렇게 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마음이 선하여 순종하는 사람은 훈계를 들을 때 명철의 길이 보이므로 쉽게 순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서 사울에게 훈계했는데 사울은 돌이키려는 마음이 없었기에 명철의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뜻대로 행하니 그 길은 멸망의 길이었지요.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었기에 명철의 길이 보였습니다. 그 길을 갔더니 연단을 잘 받아 훌륭한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 안에서 훈계를 받을 때에는 이제는 돌이켜 바로 서야 되겠다는 결심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회개의 역사가 나타날 뿐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행할 것인지에 대한 명철의 길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6:23에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하였습니다. 훈계의 책망을 듣지 않는 사람은 사망의 길을 가지만 훈계를 듣는 사람은 생명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공부는 하지 않고 게임이나 오락에 빠져 있는 자녀를 보면 애가 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자녀를 앞에 놓고 "얘야, 나는 공부를 하지 못해 꿈을 이루지 못했는데 너는 나와 같은 길을 가지 말아라" 하며 훈계를 합니다. 부모 입장에서는 인생을 먼저 겪어보았기에 어떤 것인지 더 좋은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모가 방탕하게 살아가면서 훈계하면 자녀는 그 말을 듣지 않습니다. 부모가 빛 가운데 살면서 자녀에게 빛을 비춰 힘을 주어야 하는데 어둠 속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내 말이 옳고 틀림없으니 지키라고 사정하며 애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솔로몬 왕은 이렇듯 애틋한 마음으로 이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선한 도리이기 때문에 이 법을 떠나지 말라고 한 것이지요.
나도 내 아버지의 아들이었으며 너도 내 아버지에게 아들이었으며 내 어머니 보기에 유약한 외아들이었노라 아버지가 내개 가르쳐 이르기를 내 말을 네 마음에 두라 내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살리라 (4:3-4)
솔로몬은 자신의 충분한 경험을 통해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부모로부터 훈계받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부모가 되어 아들에게 훈계하는 입장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고려장에 대해 들어 보셨는지요? 옛날 우리 조상들에게는 고려장이라는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부모 나이가 70세가 되면 아들이 깊은 산에 갖다 버리는 악습이었지요. 산 중 깊은 곳에 남겨진 노인은 결국 굶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70세가 된 아비를 지게에 지고 가서 산속에 버렸다고 합니다. 아비뿐만 아니라 지게도 버리고 산을 내려가고자 했는데 동행했던 아들이 아비에게 지게를 다시 가져가자고 했습니다. 아비가 아들에게 이유가 물으니 앞으로 세월이 흐르면 자신이 아비를 그 지게에 얹어 산속에 버려야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아비는 충격 받았을 뿐 아니라 깨우침이 오는 것이 있기에 다시 노부를 지게에 지고 집에 돌아와 정성껏 효도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소문이 퍼져 임금에게까지 들어갔고 결국 이 악습이 폐지되었다고 하지요.
이렇듯 사람이 태어나면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게 마련입니다. 지금 건강하다고 해도 앞으로 어떤 질병이 틈탈지 모르는 일이요, 지금은 행복하게 살아간다 해도 언제 불행의 그림자가 덮칠지 모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9장 10절에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찌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했던 것입니다. 인생이란 나그네와 같은 행인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깨우칠 수 있을까요? 심은대로 거두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평소에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로하며 사랑으로 돌보아 주던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이 사람의 가정에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사업에 부도가 나서 재산이 다 날아갔고 충격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변에서 이 소식을 알게 된 사람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평소에 자신이 도움을 받았던지라 어찌하든 도와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일상 생활 속에 훈계 받은 대로 실천하며 선을 심으면 어떤 어려움이 와도 뜻하지 않는 도움과 응답의 손길을 체험합니다. 늙은 부모를 산 속에 버린 사람은 결국 자신도 늙으면 자손에게 버림 당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이기적인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불행이 닥쳤을 때 피할 길이 없고 고스란히 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자신이 부모에게 훈계를 받은 경험을 토대로 설명하면서 "내 말을 네 마음에 두라 내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하였습니다(4: 4).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머리에 지식으로만 담으면 순종이 나오질 않습니다. 말씀을 마음에 담아야 성령의 주관을 받으며 행함이 따르는 것입니다,
부모는 어린이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 식사 예절, 인사하는 법, 말하는 것 등 삶에 필요한 규범 등을 가르칩니다. 부모 입장에서 보면 인생살이에 꼭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배우는 아이 입장에서는 겪어본 것이 아니기에 그리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두 살된 아기에게 수저를 쥐어주고 "밥과 반찬을 흘리지 말아라, 수저는 이렇게 사용해야한다" 하며 가르쳐 주어도 아직 손에 힘이 없기에 제대로 따라하질 못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지 못해도 앞으로는 잘하게 될 것이기에 부모는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예전에 엄한 가정에서는 회초리로 자녀의 종아리를 때리며 어른의 방식대로 행동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강요를 받아들이지 못한 자녀는 반항심이 생겨 집을 나가거나 나쁜 길로 빠져 들어 가기도 했지요.
부모가 자녀를 당장 온전하게 만들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법도를 알려주실 때 백성들이 곧바로 온전히 행할 것을 요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 백성들이 차차 말씀을 깨우치는 만큼 행해나갈 수 있었으며 하나님은 그 과정을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법도를 지키면 하나님의 공의 가운데 지킴을 받기에 평안을 누리며 영생을 얻습니다. 법도를 지키지 못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기에 사단의 밥이 되어 멸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010년 12월 31일 (금) 16:51:11 이재록 목사sion7000@hanmail.net
▲ 방탕하게 살아가는 아비가 아무리 훈계해도 듣지 않아요..../ 일러스트 김동호
훈계는 윗사람이 아래 사람에게 하는 것입니다. 훈계의 유형을 보면 자신이 행하면서 가르치는 경우와 행하지는 못하지만 경험 속에서 알게 된 것을 훈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날마다 술에 만취된 채 집에 들어와 가족에게 소리 지르며 폭력을 휘두르는 가장이 자녀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며 훈계할 때 자녀가 그 말을 청종하겠습니까? 아버지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그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먼저는 내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지 자녀가 나를 존경할만한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더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존중받지 못하는 사람의 훈계는 불 꺼진 초로 어둠을 밝히고자 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빛 가운데 살아가는 부모가 훈계할 때 자녀는 그 말을 듣고자 합니다. 무시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잠언 13:18에 "훈계를 저버리는 자에게는 궁핍과 수욕이 이르거니와 경계를 지키는 자는 존영을 얻느니라" 하였습니다. 훈계하는 목적은 명철의 길을 보이게 하기 위함입니다. 훈계를 받을 때에 앞으로 어떻게 해야겠다는 길이 보이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길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음이 악해 자기 고집 때문에 순종할 마음이 없는 사람은 훈계하여 명철의 길을 보여준다 해도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주변에서 "주일을 지키라, 온전한 십일조를 해라" 하며 권면했지만 듣지 않다가 시험과 환난을 당한 후에야 후회하는 사람이 있는데 징계받기 전에 그렇게 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마음이 선하여 순종하는 사람은 훈계를 들을 때 명철의 길이 보이므로 쉽게 순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서 사울에게 훈계했는데 사울은 돌이키려는 마음이 없었기에 명철의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뜻대로 행하니 그 길은 멸망의 길이었지요.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었기에 명철의 길이 보였습니다. 그 길을 갔더니 연단을 잘 받아 훌륭한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 안에서 훈계를 받을 때에는 이제는 돌이켜 바로 서야 되겠다는 결심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회개의 역사가 나타날 뿐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행할 것인지에 대한 명철의 길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6:23에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하였습니다. 훈계의 책망을 듣지 않는 사람은 사망의 길을 가지만 훈계를 듣는 사람은 생명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공부는 하지 않고 게임이나 오락에 빠져 있는 자녀를 보면 애가 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자녀를 앞에 놓고 "얘야, 나는 공부를 하지 못해 꿈을 이루지 못했는데 너는 나와 같은 길을 가지 말아라" 하며 훈계를 합니다. 부모 입장에서는 인생을 먼저 겪어보았기에 어떤 것인지 더 좋은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부모가 방탕하게 살아가면서 훈계하면 자녀는 그 말을 듣지 않습니다. 부모가 빛 가운데 살면서 자녀에게 빛을 비춰 힘을 주어야 하는데 어둠 속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내 말이 옳고 틀림없으니 지키라고 사정하며 애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솔로몬 왕은 이렇듯 애틋한 마음으로 이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선한 도리이기 때문에 이 법을 떠나지 말라고 한 것이지요.
나도 내 아버지의 아들이었으며 너도 내 아버지에게 아들이었으며 내 어머니 보기에 유약한 외아들이었노라 아버지가 내개 가르쳐 이르기를 내 말을 네 마음에 두라 내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살리라 (4:3-4)
솔로몬은 자신의 충분한 경험을 통해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부모로부터 훈계받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부모가 되어 아들에게 훈계하는 입장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고려장에 대해 들어 보셨는지요? 옛날 우리 조상들에게는 고려장이라는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부모 나이가 70세가 되면 아들이 깊은 산에 갖다 버리는 악습이었지요. 산 중 깊은 곳에 남겨진 노인은 결국 굶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70세가 된 아비를 지게에 지고 가서 산속에 버렸다고 합니다. 아비뿐만 아니라 지게도 버리고 산을 내려가고자 했는데 동행했던 아들이 아비에게 지게를 다시 가져가자고 했습니다. 아비가 아들에게 이유가 물으니 앞으로 세월이 흐르면 자신이 아비를 그 지게에 얹어 산속에 버려야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아비는 충격 받았을 뿐 아니라 깨우침이 오는 것이 있기에 다시 노부를 지게에 지고 집에 돌아와 정성껏 효도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소문이 퍼져 임금에게까지 들어갔고 결국 이 악습이 폐지되었다고 하지요.
이렇듯 사람이 태어나면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게 마련입니다. 지금 건강하다고 해도 앞으로 어떤 질병이 틈탈지 모르는 일이요, 지금은 행복하게 살아간다 해도 언제 불행의 그림자가 덮칠지 모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9장 10절에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찌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했던 것입니다. 인생이란 나그네와 같은 행인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깨우칠 수 있을까요? 심은대로 거두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평소에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로하며 사랑으로 돌보아 주던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이 사람의 가정에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사업에 부도가 나서 재산이 다 날아갔고 충격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변에서 이 소식을 알게 된 사람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평소에 자신이 도움을 받았던지라 어찌하든 도와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일상 생활 속에 훈계 받은 대로 실천하며 선을 심으면 어떤 어려움이 와도 뜻하지 않는 도움과 응답의 손길을 체험합니다. 늙은 부모를 산 속에 버린 사람은 결국 자신도 늙으면 자손에게 버림 당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이기적인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불행이 닥쳤을 때 피할 길이 없고 고스란히 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자신이 부모에게 훈계를 받은 경험을 토대로 설명하면서 "내 말을 네 마음에 두라 내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하였습니다(4: 4).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머리에 지식으로만 담으면 순종이 나오질 않습니다. 말씀을 마음에 담아야 성령의 주관을 받으며 행함이 따르는 것입니다,
부모는 어린이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 식사 예절, 인사하는 법, 말하는 것 등 삶에 필요한 규범 등을 가르칩니다. 부모 입장에서 보면 인생살이에 꼭 필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배우는 아이 입장에서는 겪어본 것이 아니기에 그리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두 살된 아기에게 수저를 쥐어주고 "밥과 반찬을 흘리지 말아라, 수저는 이렇게 사용해야한다" 하며 가르쳐 주어도 아직 손에 힘이 없기에 제대로 따라하질 못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지 못해도 앞으로는 잘하게 될 것이기에 부모는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예전에 엄한 가정에서는 회초리로 자녀의 종아리를 때리며 어른의 방식대로 행동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강요를 받아들이지 못한 자녀는 반항심이 생겨 집을 나가거나 나쁜 길로 빠져 들어 가기도 했지요.
부모가 자녀를 당장 온전하게 만들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법도를 알려주실 때 백성들이 곧바로 온전히 행할 것을 요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 백성들이 차차 말씀을 깨우치는 만큼 행해나갈 수 있었으며 하나님은 그 과정을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법도를 지키면 하나님의 공의 가운데 지킴을 받기에 평안을 누리며 영생을 얻습니다. 법도를 지키지 못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기에 사단의 밥이 되어 멸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010년 12월 31일 (금) 16:51:11 이재록 목사sion7000@hanmail.net